미국 권력서열 3위에 해당하는 낸시 폘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한국 방문을 마치고 어제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서는 차관이 마중 나와 영접했고, 기시다 총리와는 조찬도 함께하며 동맹을 과시했다. 그 반면 펠로시 의장이 도착한 평택 미군기지 공항에는 한국 측 파트너 측인 국회는 물론, 정부에서조차 아무도 영접을 나오지 않았다. 한국의 이런 모습은 동맹국 하원의장에 대한 명백한 의전 결례이자 홀대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전 세계가 펠로시의 동선에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외교적 결례였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에 앞서, 펠로시 의장의 방한을 앞두고 정치권에서는 낯뜨거운 찬,반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여당에서는 대통령이 만나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야당은 만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마치 공수가 뒤바뀐 형국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동맹국의 하원의장 방문을 두고 벌이는 한국 정치판의 참담한 민낯을 전 세계에 보여주는 부끄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문제가 논란이 되자 대통령실은 윤석열 대통령이 펠로시 의장을 만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첫째, 펠로시 의장의 방한 기간 중 윤 대통령은 휴가 중이었고 휴가 중임을 펠로시에게 사전 설명하여 동의를 받았다는 점, 둘째, 윤 대통령은 이미 바이든 대통령과의 회담 등을 통해 친미 안보 경제 동맹의 확실한 의지표명 등을 통해 문재인 정권의 친북 노선과 대중 굴종 노선을 배척하고 친미 노선을 표방하였으므로 윤 대통령이 펠로시를 만나지 않는다고 하여 미국에서 전혀 오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셋째, 바이든 미 대통령을 비롯한 미 행정부와 조야에서도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펠로시의 대만 방문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데도 대만 방문을 강행했다는 점, 넷째, 대만은 반도체 분야에서 우리와 경쟁 관계에 있으므로 현재 중국과 대만의 관계가 최악의 상태인 점을 고려하여 중국이 대만 제품 대신 우리의 제품을 사도록 하기 위해선 중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이유가 없다는 점 등의 늬앙스로 설명했지만, 어딘가 어색한 해명으로 들렸다.
또한 낸시 펠로시가 비록 82세의 노회한 정치인이기는 해도 미국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는 11월에는 435명의 하원 의원을 뽑는 중간선거가 있다, 이 선거를 통해 민주당이 승리해도 펠로시는 의장직에서 물러난다고 이미 밝혔고 패배하면 자동으로 하원의장에서 물러나게 되어 있다. 어쩌면 이번 동북아시아 순회방문은 그의 정치 역정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펠로시의 정치적 영향력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그만큼 미국 민주당에 미치는 그의 정치적 역량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실이 미국 정치권과의 각종 정책조율 과정에서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를 각종 리스크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심모원려가 있었다면 아무리 대통령이 휴가 중이라고 해도 우리나라의 미래 국익을 위해 잠시라도 만나 환담하는 것이 전화로 40분간 통화하는 것보다는 모양새가 훨씬 좋았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대선 과정과 취임 이후 줄곧 굳건한 한미동맹을 강조해온 윤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미국과 서방세계에 알리는 홍보수단이 되었을 것이고 한미동맹의 강화를 꾸준하게 주장해 온 국민도 그의 의지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 졌을 것이다.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면 이런 해석도 가능해진다. 미 행정부와 정치권에서 펠로시의 대만 방문을 겉으로는 말리는 척했으나 어쩌면 속으로는 은근히 대만을 방문하여 홍콩, 신장 위구르, 티베트 등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일당독재와 인권 문제를 거론해 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미 행정부와 정치권 일부에서 외관상 만류했다고 하여 우리 정부가 지레짐작하여 그에 발을 맞춰야 한다는 논리가 있었다면 그 논리는 타당하지도 않았거니와 오히려 대통령실 외교, 안보라인의 무능만 노출한 모양새가 되었다는 점에서 곱씹어 볼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대통령실도 깊은 고민 끝에 전화통화로 결정했을 것이다, 홍보수석은 국익을 총체적으로 고려해 결정했다고 했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준 갈팡질팡, 우왕좌왕했던 난맥상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직접 만나는 대면 환담과 전화 대담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평소에 한미동맹을 강조하고 자유와 인권, 자유 민주주의의 가치를 외친 정부가 펠로시 의장을 홀대하는 것을 지켜본 미국 행정부와 정치권에서 과연 선의로 해석할지도 의문이라는 점에서 중대한 실책일 가능성도 결코 배제할 수 없는 일이다.
대통령에게도 휴가는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휴가는 일반 국민과 다르므로 업무의 연속선 상에 있는 긴장된 휴가이어야 한다. 국가에 중대한 사태가 발생하면 휴가 중이라도 언제든 긴급 결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도 휴가 중이라는 이유로 연극을 감상하고 있으면 안 되듯이 말이다. 간과한 것이 또 있다. 대통령이 펠로시를 안 만났다고 해서 중국이 문재인 정권 때 있었던 사드 3불을 없었던 일로 해줄 리도 없고, 한국에 대한 보복을 철회해 줄 리도 없다는 점을 깊게 고찰했다면 차라리 펠로시를 당당하게 맞이하여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보여주는 것이 실보다 득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펠로시 의장을 직접 만났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첫댓글 대통령이라는 위치가 참으로 힘든 자리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할 수있는 자리가 대통령인 것같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자리가 대통령 자리이기도 하지요. 얽히고 설킨 각계층의 이해관계를 조율할 자리이다보니 고도의 통찰력과 혜안이 절대 필요한 자리이기도 하고요. 조선시대 왕들의 사초를 보면 어렵기는 그때와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특히 현대 국가에서는 대통령 혼자 만기친람 할 수 없는 시대인만큼 용인술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봐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