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간 금요일 강론>(2024. 9. 20. 금)(루카 8,1-3)
복음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3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몰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잘 아십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1-3).”
1) 복음서 저자가 여자들의 명단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열두 사도만큼이나 중요한 증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낸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행적을 직접 보았던
사람들이고, 그것을 증언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 있었던 여자들의
명단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들던 이들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마태 27,55-56).”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그분을 따르며 시중들던 여자들이었다.
그 밖에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마르 15,40-41).”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요한 19,25).”
<모든 명단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고,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알린 ‘부활의 첫 증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지만(마르 14,50), 여자들은 달아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켰고, 시신을 무덤에 모시는 것을 지켜보았고,
사도들이 숨어 있는 동안에도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고,
천사에게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고, 그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마태 28,1-8).
그 여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복음서 저자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 여자들의 이름을
따로 특별히 기록해 놓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증언’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신앙을 증언하는 ‘증인들’도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2) 그런데 명단이 똑같지 않고 조금씩 다릅니다.
우리는 그 차이를 보통 ‘전승의 차이’ 라고 말하는데,
‘전승의 차이’는 사실 ‘기억의 차이’입니다.
예수님 승천 뒤에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사람마다 기억에 차이가 생겼을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복음서를 기록할 때, 다른 자료 없이
사람들의 기억에만 의존해서 명단을 작성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름이 기록되지 않고 ‘다른 여자들’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복음서를 기록하던 당시의 신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시중을 들던 여자들이 많았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이름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들이 어쩔 수
없이 ‘다른 여자들’이라고 기록하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여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은 아닙니다.
유명하지 않아서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고 해도, 주님께서는
그들이 한 일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인간들은 기억하지 못해도, 주님께서는 모두 다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데리고 가는 것은,
양들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수가 몇 십억 명이라고 해도,
주님께서는 그 신앙인들을 모두 다 알고 계시고,
신앙인들이 한 일을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나를’ 알고 계시고,
‘내가 한 일’을 다 기억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3) 우리 교회에는 ‘무명 순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름이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순교자들인데, 우리가
그분들의 이름을 모르고, 그분들의 삶을 모른다고 해도,
신앙을 증언하기 위해서 순교한 일의 가치와 의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이 전해지든지 전해지지 않든지 간에
모든 순교자는 다 위대합니다.
사실 인간 세상에서나 ‘무명 순교자’일 뿐이지,
하느님 나라에서는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고, 예수님께서
알고 계시니, 그곳에서는 결코 무명 순교자가 아닙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무슨 특별한 업적을 남긴 것도 없고,
이름을 남기지도 않은 대부분의 평범한 신앙인들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특별한 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인간 세상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생명의 책’에 이름을 적기 위한 생활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몰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잘 알고 계신다는
믿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고, 큰 힘이 됩니다.
[출처]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