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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기도회 간증 요약[세 번째로 가장 좋은 결정(시편116:12-14)]-스티브 모리슨 장로(11월 10일)
반갑습니다. 정말 부족한 저를 이 시간 불러주셔서 다니엘기도회에서 하나님 은혜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와 또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그리고 다니엘기도회에 너무나도 많은 분들이 기도로 또 수고로 이렇게 많이 해 오셨는데, 준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 가족과 제가 하는 일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미국 캘리포니아 LA 부근의 놀워크라는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입양인이다 보니 영어가 더 편하고, 한국말을 할 때 어떤 때는 좀 막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저는 미국의 플러턴에 있는 ‘은혜한인교회’라고 한기홍 목사님께서 담임하시는 교회에서 섬기고 있습니다. 14살에 미국으로 입양을 갔습니다. 우선 제 간증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과 함께 제 가정과 사역을 소개하는 PPT 차트를 몇 장 보겠습니다.
- 첫 번째는 가족 소개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온 아내가 있구요, 5명의 자녀 헬렌(26살), 벤자민(26살), 조셉(26), 케이(24), 제인(18)이 있습니다. 헬렌은 저희가 낳았고, 벤자민은 14살에 입양을 했고, 조셉은 3살 때 입양을 했습니다. 그리고 케이는 저희가 낳았고, 제이는 저희가 낳았는데, 저희도 모르게 생겨서 ‘읍스 베이비(아차 베이비)’라고 별명을 지었습니다. 정말 행복한 대가족이죠? 그런데 교통 정리할 때 되게 힘들어요. 특히 애들이 어렸을 때 학교 갈 때면 아내의 목소리가 엄청 커졌습니다.^^
- 제 직업은 미우주항공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년 전에 퇴직을 했습니다. GPSⅢ 인공위성 프로젝트팀에서 일을 했는데, 네이게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었습니다. 사역은 한국입양홍보회(www.mpak.org)를 설립하였고, 홀트아동복지회 이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 다음 사진은 저의 아버지, 어머니이십니다. 정말 두분에 대해 이야기하면 너무나 가슴이 뿌듯하고 정말 감동의 전율이 올라옵니다. 너무나도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2006년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2년 전에 96세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이 사진은 우리 부모님이 50년 결혼 기념 때 찍은 사진입니다. 다음 사진은 저희 가족이에요. 왼쪽은 어머니의 90세 생신 사진으로, 축하해 주기 위해서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온 가족이 모였어요. 우리 가족하고 심지어 장인, 장모님까지 모시고 갔어요. 너무나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오른쪽에 보면 큰 누나, 둘째 누나가 있고, 어머니가 옆에 계시고, 제 옆의 하얀 머리 백인은 한국에서 저보다 2년 빨리 입양 간 제임스입니다. 고아원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제 동생 마크가 있습니다. 제 동생들이 저보다 더 늙어 보이죠? 제가 이런 말을 했다고 말하지 마세요.^^ 우리 동생들, 너무 착합니다.
-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가겠습니다. 제가 20년을 미우주항공연구소에서 연구 개발하면서, 이 인공위성을 만들어낸 팀에 들어가 인류에게 내비게이션 서비스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 저한테는 정말 보람있는 직업이었습니다. 다음은 sbs 방송에서 다큐로 만들 때 나온 몇 가지 사진이 있습니다.
- 다음 슬라이드입니다. 제 사역을 좀 소개해 드린다면, 한국입양홍보회 엠펙(MPAK)이라고 하는데, 99년도에 미국에서 설립되고, 한국에 뿌리 내리게 되었습니다. 한국 국내 입양 활성화 운동을 하고, 미주 한인들을 위한 입양 장려 운동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 가정이 필요한 수많은 아이들의 대변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보육시설 아동들에게 1대1 교육멘토/과외공부 사역을 금년에 시작했습니다.
□ 저는 강원도 묵호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사람입니다.
- 2022년 5월 강원도 묵호역 굴다리에 베이비박스 이종락 목사님과 같이 갔습니다. 보여드린 사진에서 화살표가 있는 다리 밑이 제가 살던 자리였습니다. 1년 후에 제가 제 딸 둘을 데리고 그 장소에 갔을 때의 사진입니다. 딸들이 그 자리를 보는 순간 너무 감동받아서 저렇게 아버지를 껴안고 눈물을 흘리는 그런 모습입니다.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려운 방문이었습니다. 다음 사진은 제가 정말 사랑하고 존경하는 해리 홀트 할아버지, 볼타 여사입니다. 두 분은 일산복지타운 묘소에 계십니다.
- 강원도의 자연적인 모습은 정말로 아름다운 이미지로 저한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 가정은 자연적인 아름다운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희 가정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저, 그리고 남동생 하나가 있었습니다. 제 나이가 약 5살 정도였고, 제 동생은 아마도 3살 반 정도 되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천사와 같이 아름답고 인자하신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늘 안아주시고 미소를 보여주시면서 저희들을 많이 사랑해 주시는 그 모습을 기억합니다.그 반면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늘 술에 취해 붉은 얼굴로 집에 들어와 어머니를 때리고 학대했고, 심지어 저와 동생도 학대하는 매우 무서운 아버지였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집에 들어오시더니 술에 취한 상태로 저하고 동생이 보는 앞에서 저희 어머니를 엄청 많이 때렸습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소리도 내지 않으시고 그냥 아무 말 없이 얻어만 맞는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저와 동생은 매우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견디기 힘들어서 아버지가 잠깐 눈을 돌리는 순간에 집을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아버지께 붙잡혀 더 심한 폭력을 당했습니다. 여러 번 더 맞으시던 어머니는 다시 기회를 잡아 빠르게 뛰쳐나갔습니다. 아버지도 따라 나갔지만 결국 어머니를 붙잡지 못하고 집으로 다시 들어왔습니다. 저와 동생은 너무나도 긴장한 가운데 ‘혹시 우리도 때리지 않을까?’ 이런 두려움이 있었는데, 다행히 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더 하시고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 곁을 영영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나 어린 저였지만, 어머니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며, 집을 나간 어머니에 대한 오해와 원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은 아주 가득했습니다.
- 얼마 후 아버지께서 어떤 법을 어기셨는지 경찰서에 붙잡혀 가서 감옥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저하고 동생이 경찰서에 갔지만 아버지를 만날 수가 없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은 아버지께서 간신히 만든 움막집으로 어른이 일어설 수도 없는 흙과 지푸라기로 만든 텐트 같은 원룸이었는데, 그곳에서 저와 동생은 부모님 없이 몇 개월 동안 같이 살았습니다. 거리를 헤매며 먹을 것을 줍거나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는 먹거리를 조금씩 찾았고, 거리를 다니면서 떨어진 동전을 주어서 빵과 과자, 이런 것들을 사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희는 그때 당시 정말로 홈리스(Homeless) 아이들이었습니다. 나이 다섯 살에 3살 반 동생까지 책임져야 하는 저 자신이었고, 매일마다 음식을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고 숙제였습니다. 그렇지만 매일매일 무엇이라도 먹을 수 있었고, 또한 여러 착한 분들이 동정심으로 저희들에게 음식을 나눠준 적도 있습니다. 특히 강원도 묵호역 굴다리 밑에서 삶은 개고기를 파시는 한 아주머니가 계셨어요. 그 아주머니는 너무나도 배고프고 가난했던 우리가 지나갈 때 우리를 동정하며 착한 마음으로 몇 번씩 개고기를 주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여러 음식 중에서 개고기를 제일 좋아합니다.
-하루는 그 아주머니께서 제 동생에게 새 옷을 입히시는 걸 보고, 제가 왜인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주머니가 동생을 직접 데려가서 키우려고 새 옷을 입히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안 데려가세요?” 했더니 “너는 한 쪽 다리가 불편해서 못 데려간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실망했지만, 한편으로는 동생이 배고프지 않고, 더 이상 떨지 않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습니다. 저를 떠나는 동생을 바라보며 매우 부러웠고, 정말 어린 제 마음이지만 동생을 꼭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을 훗날 제가 성장하면서 많이 후회했습니다. 동생과 헤어지고 저는 어느 신사분을 통해서 강원도의 고아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몇 개월 있다가 홀트 일산복지타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곳에서 8년을 살았습니다. 그 때 인상깊게 만난 분이 바로 해리 홀트 할아버지셨습니다. 좀 나이 드신 분들은 이분이 어떤 분이신지 좀 기억하실 것입니다.
□ 해리 홀트 할아버지를 통해 수만 명의 아이들이 가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홀트 할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미국 오레건주에서 갑부로 사시다가 6.25 동란 후 수많은 고아들의 어려움을 전해 듣고, 가진 재산을 팔아 한국으로 와서 고아원을 세우고, 입양을 통해 가정을 찾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만난 해리 홀트 할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제가 자라면서 홀트 할아버지의 삶을 많이 생각하게 됐는데, ‘그분이야말로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분이 저와 수많은 고아들을 위해서 땀 흘리시며 수고하시고, 목숨이 끝날 때까지 희생하셨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른이 되어 깨닫게 된 사실은 할아버지의 삶이 바로 참된 크리스찬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 6.25 전쟁이 끝난 후, 할아버지께서는 8명의 고아들을 입양하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오고 계실 때, 도쿄 한 호텔에서 잠을 설치며 고민에 빠지게 됐습니다. 선한 마음으로 시작한 할아버지의 그 행동에 갑자기 두려움과 의심이 닥쳐왔습니다. 그는 갑작스럽게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벌써 여섯 자녀를 낳고 다 잘 키웠는데, 게다가 나는 농부 신세에다 또 고졸 출신밖에 안 되는데, 내가 뭘 하려고 이런 일을 하는가?’ 하면서 정말 갑자기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뒹굴었다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신 할아버지께서 침대에서 일어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하나님, 내일이면 제가 8명의 한국 고아들을 입양하려고 한국으로 들어가는데, 왜 제 마음이 이렇게 떨리는지요? 주님, 하나님께서 정말 저와 함께하시는 일입니까? 제 마음이 매우 불안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일이라면 제게 확답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하고 다시 자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고민과 걱정에 쌓인 할아버지는 ‘혹시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을까?’ 하면서 어두운 호텔 방에서 성경을 잡고 불을 켰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 불을 켜는 순간 성경 말씀을 잡았는데, 그 엄지손가락이 어디를 포인트하고 있었냐 하면 이사야 43장 5절 말씀이었습니다. 그 성경 구절을 보신 할아버지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고, 심장마비로 쓰러질 뻔했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정말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가?’ 이런 질문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했을 때, 5절 말씀에 이렇게 써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할아버지는 계속 읽어내려갔습니다. 7절에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엄청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홀트 할아버지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정말로 큰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신 할아버지는 너무나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아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시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고 합니다. 물론 이사야 선지자님께서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모일 것인가 하는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홀트 할아버지는 가장 필요할 때, 뚜렷한 말씀으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은혜에 기적을 경험하고, 그 후로 단 한 번도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홀트 할아버지께 기도 응답을 해 주신 하나님 은혜 덕분에 수만 명의 아이들이 가정을 갖게 됐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저입니다.
-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최근에 입양을 통해 불만이 많은 소수의 성인 입양인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 채 홀트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홀트의 정신은 한결같이 한 아이에게 가정을 주려는 목적이었지만, 모든 입양인들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불만이 많은 자녀들이 부모를 비판하는 것처럼, 입양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입양인으로서 말씀을 드리지만, 대부분의 해외 입양인들은 자신의 삶에 만족을 누리고 미국과 유럽에서 조용히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아이들이 입양에 대해서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소수의 입양인들이 삶에 불만족을 느끼며 목소리를 내고 있고, 여론에는 그들의 목소리가 모든 입양인들을 대표하는 것처럼 나와, 정말 해외 입양에 대한 안 좋은 편견을 수년 동안 심어 왔습니다. 그래서 아쉽게도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해외 입양에 대해 인식이 좋지 않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해 보셨는지요? 제게 모든 권력이 있다면 첫째로 최대한 아동들이 원가정에서 자랄 수 있도록 미혼모들을 지원해 주고, 또 국내 입양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두 번째 방법입니다. 세 번째 방법은 첫 번째 두 번째가 안 되면 해외 입양이라도 보내서 가정에서 자라게끔 해야 됩니다. 저는 이것을 계속 믿고 있습니다. 국내든 해외든 아동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가정입니다. 엄마, 아빠입니다. 해리 홀트 할아버지께서는 모든 어린이는 가정을 가질 권리가 있다라는 명언을 남기시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랑을 행동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한 아동에게 가정을 만들어주려고 수고하시는 모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 한 아이가 일반 가정에서 태어나 사회에 나가서 성공하는 만큼 우리 입양인들도 성공합니다. 그 반면에 실패하는 만큼 우리 입양인들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입양에 대한 여러 사역을 하지만 입양인들이 시민권을 취득하는 운동에도 참여해서 많은 입양인들이 시민권을 취득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입양인들이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았어도 미국에서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범죄만 저지르지 않으면 추방이 되지 않습니다. 추방된 입양인들은 다 범죄의 기록이 있어서 한국으로 추방된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약 10명의 입양인들이 추방되어 살고 있습니다. 제가 9살 때 홀트 고아원에서 한 전도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어린 나이라 믿음의 뿌리가 깊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제 삶 속에 존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제 삶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한 가지가 기억납니다. 그것은 제가 도벽을 끊게 됐습니다. 홀트고아원에서 자라면서 가장 그리웠던 사람은 어머니, 아버지보다 바로 제 밑에 동생이었어요. 홀트 동산 언덕에 앉아서 동생을 생각할 때 너무나도 보고 싶었고, 너무나도 후회되고 너무나도 그리웠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동생과 함께 있을 때 정말로 욕심 많은 형이었어요. 누가 빵이나 먹을 거를 주면 제가 4분의 3분을 떼어 먹고, 4분의 1만 동생한테 줍니다. 동생이 불평을 하면 제가 꿀밤을 때렸던 아주 못된 형이었어요. 그렇게 살던 저 자신이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동생이 아직도 많이 그립습니다. 동생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도 적지 않게 남아 있습니다. 제가 이제 바라는 것은 제 동생이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잘 섬기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교회를 잘 섬기고 언젠가 천국에서 다시 만나는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또 나중에 알게 된 소식이지만, 제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참 가슴 아팠습니다.
□ 저는 하나님께 올려드린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습니다.
- 저는 고아원에서 8년을 살다가 14살 때 미국으로 입양 갔습니다. 이미 친자녀가 1남 2녀나 있던 제 부모님은 한국에서 한 혼혈 아이를 저와 같은 고아원에서 입양하셨고, 2년 후 저를 입양하셔서 제가 다섯 번째 자녀가 됐습니다. 1969년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어느 밤에 믿음이 좋으신 아버지, 어머니께서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요.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에 감사함을 많이 느끼며 ‘이번 크리스마스 때 우리 부부가 하나님께 어떠한 선물을 드릴까요?’라며 질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도를 통해 매우 큰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그 선물은 바로 다른 한 아이를 입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자녀가 넷이나 있었지만, 가정이 필요한 한 명의 아이를 입양하고자 하는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다섯 번째 아이가 바로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저, 스티브 모리슨입니다.
- 홀트에서 두 달에 한 번, 아이들의 사진이 실린 잡지를 여러 가족들과 후원자들에게 보냅니다. 수십 명의 고아들 사진과 짧은 정보가 실려 있습니다. 그 아이들 사이에 제 사진이 실려 있었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입양에 대한 마음은 합심해서 결정했지만, 어떤 아이를 선택해야 하는지에 갈등이 있었고 서로 의견이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저의 사진을 보시자마자 다른 아이들 사진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 사진에만 눈이 찍혀 있어서 어머니한테 그 아이를 아버지께서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저에 대한 정보를 보고, 이미 13살이나 된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안 돼요, 이 아이는 너무 나이가 많아요.” 하면서 다른 아이를 지적하면서, “이 아이는 어때요? 9살이에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제 사진을 지적하면서 ‘바로 이 아이’라고 다시 말씀하셨고, 어머니는 다른 아이를 보고 “이 아이는 어때요? 10살밖에 안 돼요.” 그러나 아버지는 제 사진을 다시 지적하면서 “바로 이 아이야. 나는 결정했어.” 하셨답니다. 어머니는 걱정이 쌓이기 시작했어요. “그럼 이 아이는요? 11살이네요.” 하지만 아버지는 제 사진을 계속 보고 있으시면서 마음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야.” 대단하죠? 아버지가 설득되지 않자 어머니는 근심이 쌓인 상태로 2년 전에 같은 고아원에서 입양된 제임스에게 다가가서 물어봤어요. “네 아빠는 계속 이 아이를 원하는데, 너는 이 아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이렇게 물으니 동생 제임스가 딱 두 단어로 대답을 했습니다. “Get him!” 그를 데려오라는 뜻입니다. 정말 감사하게도 같은 고아원에서 살았던 제임스가 저를 계속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할 수 없이 포기하셨어요. 제가 미국에 도착할 때는 14살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늘 양보하는 아주 신사적인 남편인데, 이상하게 그날 저녁 때는 확고하게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그날 저녁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마음에 ‘바로 이 아이가 너의 아들이다.’라는 확신을 심어주셨다고 믿습니다. 먼 태평양 건너 한 아버지로부터 그날 저녁에 제가 선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저를 아들로 삼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그 선물인 제가 오늘 여러분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며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저희 부모님은 정말 오늘의 제가 되는 것을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너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전혀 꿈도 못 꿨다.” 아버지는 제가 커가면서 가정에 물의를 일으킬지, 그들에게 상처와 낙심을 가져다 줄지, 그런 것에 대한 계산을 하지 않으시고, 정말로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한 아이에게 가정을 주고, 부모가 되어주는 그 사랑을 제게 주셨고, 그렇게 했을 때 결국 하나님께 선물을 드리는 일이 되었습니다.
- 이제 가을이 지나가고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가 다가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이번 크리스마스 때 하나님께 어떤 선물을 드리시길 원하십니까? 여러분께서 가지고 계시는 탤런트와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최고의 선물을 드리시는 크리스마스가 되길 바랍니다. 제 부모님같이 여러분도 입양을 통해서 하나님께 선물을 드리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입양은 해야 할 사람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또 입양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라고 저는 봅니다.
□ 미국 가정의 자녀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 70년도 5월 28일, 미국에 처음 들어갔을 때를 기억합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을 때 공항에서 제 옷을 갈아입혀야 하는 규칙이 있었어요. 저는 한국을 떠나면서 새 옷과 새 구두를 누가 선물해 주어서, 그것을 신고 아주 깨끗한 옷을 입고 미국으로 갔는데, 그 공항에 어떤 법이 있는지 모르지만 제가 입고 있던 옷과 신발을 모두 포기해야 됐습니다. 공항에 도착했는데, 제 옷을 벗고 모리슨 가정에서 보내 온 운동화와 청바지와 속옷을 갈아입게 되었습니다. 정말 황당한 일은 모리슨 가정에서 보내준 청바지는 구멍이 여기저기 뚫려 있었어요. 여러분, 70년도에요. 그때는 구멍난 청바지가 유행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운동화를 신는데, 그 운동화도 아주 낡아 빠진 운동화에 구멍이 여기저기 뚫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 수 없이 구멍난 옷과 신발을 신고, 새로 입고 온 옷과 구두를 포기해야 해서, 매우 안타깝고 속상했습니다. 아마도 그때 당시에는 여러 가지 ‘이’와 기타 질병이 미국으로 유입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한 사전 조치였을 거라고 저는 봅니다. 물론 지금은 그런 규칙이 없어진 지 오래됐습니다.
- 저는 그 유명하고 아름다운 샌프란시스코가 제가 살게 되는 도시인 줄 알고 너무나 좋았는데, 마중 나오신 저희 아버지는 유타주에 있는 솔트 레이크 시티라고 하는 도시에 살고 있다고 하시면서 저를 데리고 비행기를 갈아타고 유타주로 데려갔습니다. 도착해 주차장에 있는 아버지 차로 가게 되는데, 여러 색깔과 모형들의 차들이 따뜻한 태양 아래 반짝이면서 서 있는데 아버지께서 제일 낡은 차로 가시더니 문을 열고 타라고 하셨습니다. 타기 전에 겉모양을 보니 차 옆쪽에 녹이 슬어 있었습니다. 그곳이 아주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라 소금을 많이 뿌리는데, 그 소금으로 인해서 수많은 차들이 녹을 많이 달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차를 타고 안쪽을 보니, 안에는 의자와 차 지붕의 여러 군데가 뜯어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70년도 였는데 56년도 쉐보레 차를 몰고 다니셨습니다.- 미국으로 가면 모든 것이 새 것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구멍 난 옷을 입고, 구멍 난 신발을 신고, 공항에서 매우 낡은 차를 타게 되었을 때, 그때 제가 미국으로 제대로 들어간 건지 의심이 시작됐습니다. 아버지는 정부 기관을 위해서 연구하시는 생물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전혀 가난한 분이 아니었거든요. 먼 훗날 깨달은 사실이지만, 아버지가 돈이 없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매우 검소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제가 처음 보게 된 아버지의 인품이었습니다.
- 차를 타고 집에 도착했을 때 가족 모두가 나와서 저를 환영해 주었습니다. 홀트 고아원을 떠나 2년 만에 반갑게 만난 동생 제임스도 저하고 혈연관계는 전혀 없지만, 저를 따뜻하게 반겨주었습니다. 부엌을 지나가면서 제가 선반에 있는 이상하게 생긴 음식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으니까 어머니께서 본인이 직접 만드신 김치라고 하셨는데, 그 김치는 굉장히 이상해 보였습니다. 빨갛게 생긴 색은 하나도 없고 그냥 하얀색 양배추가 잔뜩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니 전혀 김치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백인이신 어머니께서는 몇 개월 전 샌프란시스코 한국 음식점을 처음 찾아가서 김치를 맛보셨다고 합니다. 그 기억으로 저를 편안하게 해 주신다고 그 김치를 만드신 것입니다. - 제가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잠을 자고 일어났습니다. 어머니께서 저를 식탁으로 인도해 주시면서 볶음밥을 먹고 또 김치를 맛보라고 하셨습니다. 볶음밥은 우리가 흔히 아는 중화 요리에 나오는 정말 맛있고 고소한 그런 볶음밥이 아니라 스페니시 라이스라는 매우 맛이 어색한 그런 밥을 먹게 되었는데, 정말 맛이 없었어요. 그리고 김치 병의 뚜껑을 열었을 때 제 코에 진하게 찌르는 그 이상한 향기,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이상한 식초 냄새가 제 코를 찔렀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그 고약한 냄새의 식초는 사이더 비니거(Cider vinegar)였습니다. 냄새가 아주 고약합니다. 생전 처음으로 김치를 한 번 맛보시고 만드신 그 김치의 맛은 과연 어땠을까요? 배추를 사용해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시고 양배추를 사용하고, 또한 소금에 절여야 하는 것도 모르시고 그냥 썰어서 넣고요. 마늘을 넣어야 하는 것도 모르시고 양파를 잔뜩 썰어서 넣었습니다. 그리고 김치가 신맛이었다는 그 기억으로 그 식초를 잔뜩 뿌린 것입니다. 김치가 매웠다는 그 기억으로 고춧가루를 넣어야 되는 걸 모르고, 후춧가루를 잔뜩 뿌려서 만든 김치입니다. 그러니 어떤 맛이었을까요? 제가 오늘 여러분께 레시피를 알려드렸으니까 한번 집에 가셔서 만들어 보세요. 저희 어머니의 이것을 보면 저희 어머니의 성격이 조금이라도 짐작이 가시죠? 굉장히 모험적인 분이셨어요. 미국의 개척 정신이 여기서 나오는 건지?^^ 정말 이것은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스파게티를 처음 맛보시고 집에 가서 만들어보겠다는 마음하고 똑같아요. 파스타 대신에 국수를 넣고 그리고 토마도 소스 대신에 고추장을 넣어서 만드는 그런 거하고 똑같습니다. 아무튼 뉴욕에서 제가 첫째 날은 구멍난 옷과 신발, 낡은 차를 타는 경험, 그리고 그 이상한 김치를 맛보는 경험으로 하루가 마무리되었는데, 절대로 제가 잊을 수 없는 첫날이었습니다.
- 그러나 새로운 가정에서 자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육적으로,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체험하며 자라게 되었는데, 정말 제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제 삶은 매우 만족스러웠고 또 행복했습니다. 제가 그동안 집에 가든, 학교에 가든, 교회에 가든, 친구들하고 놀든, 가는 곳마다 영어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3개월 만에 영어로 거의 다 대화할 수 있을 정도로 빨리 영어를 배웠습니다. 제가 똑똑하거나 머리가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여러분들도 그 입장에 있었으면 똑같이 잘 배웠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 유타주는 몰몬교로 유명한 곳이지만, 저희 가족은 남침례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몰몬교 이웃들과는 아주 잘 지냈습니다. 모리슨 가정의 따뜻한 사랑으로 저는 한국에서 하기 싫은 공부도 열심히 하게 되었고, 꿈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못했던 과목이 뭔지 아세요? 수학이었어요. 정말 그때 당시에는 수학이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아마 기초가 없이 그냥 배워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그 힘든 언어로 미국에서 공부를 하는데, 그 방정식과 공식들이 머리에 쏙쏙 어찌나 잘 들어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부모님의 사랑이 많아서 그런지, 또 가정에 대한 안정감, 저에 대한 안정감을 가져서 뭔가 막혔던 것이 뚫렸는지 정말 수학이 그때부터 제일 재미있는 과목이 되었고, 제일 잘하는 과목이 되었습니다. 정말 한 아이에게 가정이 생기고, 변화를 주는 것이 이렇게도 좋고 소중한 것인지 몰랐습니다.
- 저는 미국으로 갈 때 몇 가지 물건들을 가지고 갔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쓰던 일기 책이 있었어요. 그걸 챙기고, 어느 누님께서 꼭 읽으라고 주신 성경책을 제가 넣었습니다. 고무신 두 짝, 윷놀이 한 세트, 그리고 친구들과 가장 즐겨 놀던 화투를 챙겨서 가져갔습니다. 화투 잘 쳤어요. 그때 중학교 2학년이었지만 저는 매일 밤마다 미국 가서 성경 한 장을 읽고 또 일기를 쓰고 잠자리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다섯 남매가 가졌던 매우 소중한 추억이 있는데, 저희 다섯은 거실에 앉아서 여러가지 보드 게임을 많이 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게임 중에 하나는 ‘모노플레이’입니다. 한국에도 나와 있다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 게임을 통해서 네 남매의 부동산을 싹쓸이 한 적이 기억납니다.여러 보드게임을 하다가 하루는 제게 아주 이상한 아이디어가 생겼어요. ‘얘네들한테 화투를 가르치면 어떨까?’ 그래서 저는 누나 둘과 남동생 둘을 거실에 동그랗게 앉게 하고 한국에서 가져온 카드 게임을 가르쳐주겠다고 하면서 미니화투를 가르쳤습니다. 그림을 보며 번호를 가르쳤습니다. 이거는 1번이야, 이거는 2번이야. 그리고 12번까지 가르쳐줬습니다. 그리고 이 파란색 줄무늬 3개가 있으면 청단이라고 해. 30점! 빨간 줄무늬 3개는 홍단이라고 해. 이것도 30점! 또 한문으로 되어 있는 이건 광이라는 거야. 20점! 이거는 조심해 똥이야, 똥! 이렇게 해서 정말 2시간 동안 가르쳐 주었더니, 남매들이 너무나 잘 배워요. 그리고 저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화투를 많이쳤습니다. 저는 학교에 다니면서 저녁 식사 후 공부에 열중했어요. 제가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둘째 누나가 와서 노크를 해요. 스티브야, 우리 화투 치자. 그러면 제가 책을 덮고 또 나가서 몇 시간 동안 화투를 치던 기억이 납니다. 거실에 앉아서 미니화투로 너무나 즐겁게 노는 것을 보고 저한테 또 엉뚱한 생각이 하나 들었는데, ‘나이롱뽕’을 가르쳐줄까? 그런데 그 단계까지는 안 갔습니다.^^ 아무튼 그런 추억이 저한테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백인 4명과 동양인 하나가 동그랗게 앉아서 화투를 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디 가서 보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 아버지는 저의 롤모델이었습니다.
- 제 아버지는 저에게 너무나도 큰 롤모델이셨습니다. 저에게 이론적으로 가르쳐 주시는 것보다 행동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바로 제 아버지로부터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선은 교회를 통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말씀의 설교가 아닌 행동의 설교로 보여주며 살아가셨습니다. 저희 자녀들 앞에서 어머니를 매우 사랑하시는 모습을 매일 보여주셨으며, 저희 오남매를 동등하게 사랑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아침에 직장으로 출근하기 전에 집을 나가시면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꼭 껴안아주시고 뽀뽀를 해줘요. 오늘 하루 잘 지내라고 합니다. 그리고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시면 어머니를 먼저 찾으시고, 또 꼭 껴안아주시면서 뽀뽀해 주세요. 또 오늘 잘 지냈냐고 물으십니다. 아버지는 정말 사랑이 많으시고 천사 같은 아버지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경험했던 원가정의 아버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 제가 입양아여서 차별하거나 다르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 친구들이 학교에서 우리 가정에 놀러 오면 나중에 저한테 와서 속삭입니다. ‘너네 엄마 아빠가 너를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본 아버지의 성실한 삶은 제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삶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솔직하셨고, 남을 이용하거나 세금을 떼먹지 않았어요. 굉장히 양심적으로 사신 분이에요. 그리고 매우 겸손하셨습니다. 특히 아버지께서 우리 자녀들 앞에서 어머니를 다정하게 해주시는 모습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날이 갈수록 그것들이 제 가슴에 너무나도 와닿고, 저에게는 그 동안 없었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를 올바르게 잡아주는 큰 롤 모델이 되셨습니다. 15살이 되었을 때쯤 저한테 꿈이 생겼습니다. 큰 꿈이었죠. ‘나도 이 다음에 커서 꼭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리고 엄마 같이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자녀도 낳고, 또 입양도 해야겠다.’ 그런 결심을 한 결과, 오래 전에 그 꿈들이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너는 내 인생에서 한 세 번째로 가장 좋은 결정이었다.”
- 제가 대학 졸업 후 새로운 직장에 입사해야 되는데, 일부러 한 달을 연장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심장마비로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성공적으로 하시고, 집에 가서 회복을 하시는데, 제가 도움을 주려고, 직장 가는 것을 한 달 미룬 것입니다. 그 한 달의 시간 동안 아버지와 아들 간의 긴밀한 대화, 그때 다른 남매는 시집도 가고, 또 학교도 가고, 또 다른 주에 가서 직장을 갖고, 저하고 어머니하고 아버지 셋만 있었습니다. 그 한 달, 그 기간이 저한테는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모릅니다. 정말 재미있는 대화도 많이 나누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어떻게 꼬셨는지, 두 분이 매우 즐거워하면서 저한테 그 스토리를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프러포즈 하신 그 방법을 제가 잘 배워서 저도 그 방법으로 아내에게 프러포즈를 해서 결혼에 성공했습니다.^^
- 저는 아버지의 회복을 위해 팔을 붙잡고 동네 한 바퀴를 천천히 걸으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정말 긴밀한 대화를 많이 했습니다. 소파에 앉아서 TV도 같이 보면서 여러 대화를 나누었죠. 하루는 아버지께서 저한테 와서 말씀하시기를 “스티브야, 우리는 너를 도와주려고 입양했다. 너에게 부모가 없고 가정이 없었기에, 그냥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입양했는데, 이렇게 긴 세월을 함께 살다 보니, 오히려 우리가 너를 통해 훨씬 더 많은 축복을 받았구나. 고맙다!” 하시는 겁니다. 우리 아버지, 대단하시죠?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제가 무척이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저를 다시 부르시더니 제가 LA쪽으로 나가서 일을 하기 전인데, 저한테 평생 잊지 못할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제 간증 제목이 무엇이죠? 네, ‘세 번째로 가장 좋은 결정’이죠? 아버지가 저를 부르시더니, “스티브, 나는 오랜 인생을 살면서 중요한 몇 가지 결정을 정말로 잘 내린 것들이 있다. 그중에 제일 좋은 결정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네 엄마와 결혼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세 번째로 제일 좋은 결정은 너를 우리 아들로 삼은 것이었다.” 제가 그 말씀을 듣고서 얼마나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날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오남매를 동등하게 사랑해 주셨어요. 그런데 그 말씀을 통해서 저를 얼마나 사랑해 주시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 말씀을 통해서 아버지의 삶의 순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삶의 순서가 제 삶의 순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우선으로 하고, 제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들을 사랑하는 삶의 순서, 이것을 제가 지키면서 아버지의 흉내를 조금이라도 내는 듯합니다. 이론적으로 보이는 사랑이 아닌 삶 자체를 통해 보여주신 아버지의 사랑으로 제가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 입양 부모님의 사랑으로 낳아주신 부모님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 제가 한국에서는 수학을 못하다가 미국에 가서는 잘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공대로 가게 됐는데, 우주공학에 늘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퍼드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우주 항공과를 공부하고, 졸업 후 인공위성 사업에 들어가 연구원으로 일을 오랫동안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저에게 하나님께서 매우 아름다운 아내를 허락해 주시고, 자녀 셋을 낳고 둘을 입양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주님 안에서 행복한 가정이 되었고, 교회를 섬기며 주님의 축복을 많이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 저는 2021년도 3월달에 42년간의 우주산업 직업을 마무리하고 은퇴했습니다. 은퇴하기 전 20년간 GPSⅢ 위성을 연구 개발하는 프로젝트에 들어가 인류에게 필요한 내비게이션 서비스를 제공해 줄 수 있는 한 멤버로서 대단한 보람을 느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에 늘 매일매일 감사하고 있습니다. 시편 116편 12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오직 매일매일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욱 빚진 자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저는 고아원에서 자랄 때와 그리고 심지어 입양을 통해 행복한 삶을 살면서도 저를 낳아주신 생부에 대한 증오심이 많았습니다. 바로 그분 때문에 우리 가정이 깨졌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만난 아버지, 어머니, 그들의 사랑으로 제가 가지고 있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그 후로 생부에 대한 불쌍함과 긍휼의 마음을 갖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 생부를 용서하는 마음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그 용서함을 통해 자유를 얻게 되었고, 신앙적 성숙함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 입양 어린이들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으로 입양 홍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 저는 축복된 생활 속에 매일매일 살고 있었지만, 저에게는 항상 마음 한 구석에 한국의 부모 없이 고아원에서 자라야 하는 아이들에 대한 부담감이 많았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큰 도전을 주셨습니다. ‘네가 입양을 통해서 그렇게 많은 축복을 받게 되었다면, 너는 그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겠느냐?’ 이런 큰 도전적인 질문을 주셨을 때, 제가 이루어야 할 미션을 주님께서 알려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한 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국 국내에 입양 홍보하는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부정적인 입양 문화를 바로세워서 더 많은 아동들이 가정에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비밀 입양 대신, 공개 입양을 주장하면서, 입양에 대한 사실을 숨기지 말고 떳떳하게 이웃에게 알리며, 다른 가족들도 입양을 통해서 정말 수많은 아이들이 가정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그 운동을 24년 전에 시작했고, 아직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미국에 있는 한인 가정들도 한국에서 많이 입양을 하게 되었고, 지금 한국에는 28개 지부가 있고, 또 미국에도 6개 지부가 생겼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동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감사해하십니다.
- 저는 공포에 시달렸던 아버지의 학대와 가난함으로 매우 힘들었던 시절, 고아 신분으로 거리를 헤매며 추위에 떨면서 배고팠던 삶을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간 홀트 고아원, 그곳에서 만난 해리 홀트 할아버지의 따뜻한 사랑, 8년 동안 그 고아원 생활을 통해 늘 가정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살았던 저 자신입니다. 그리고 좋은 부모님을 만나 입양의 축복을 통해 그들의 사랑과 헌신으로 제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며, 과거의 일에 대한 자유함을 얻어 제 행복까지 용서해 주며 사랑하게 되는 마음을 갖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비록 어린 나이 9살 때 고아원에서 예수님을 정말로 어린아이의 순수한 믿음으로 영접했지만, 그 믿음은 저희 부모님의 삶과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설교를 통해서 더 급격하게 성장해 나갔습니다.
- 여러분에게 이렇게 선포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동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감사해 하십니다. 제가 이 말씀을 선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직접 이것을 제 부모님으로부터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열심히 일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갔고 또 교회도 섬기고 여러 활동도 했지만, 그런 가운데 제 아버지가 저를 위해서 대학교 학비를 대주시려고 은행에다 대출을 받아 학비를 냈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공부를 했어요. 저는 그 때 너무 큰 충격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너무 감사했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 미안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은행 대출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 하셨고, 그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학생이야. 돈 걱정하지 마라. 공부만 열심히 해. 아르바이트도 생각하지 말아라. 공부에 열중해.” 저는 아버지의 희생을 전혀 모르고 아버지께서 하신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열심히 공부해서 우주항공과의 언노스사이드 멤버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을 알게 된 저는 너무나도 감격하였습니다. 부모님께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 끝에, 저희 부모님께 동남아 여행을 보내드려야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모든 항공비와 호텔비 또 추가 비용을 들여 제가 그분들을 보냈습니다. 여기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어요. 어머니의 여동생이 그러니까 저희 이모님이 남편과 함께 대만에서 30년 이상 선교사역을 해왔습니다. 그 이모님이 제 어머니한테 계속 졸랐습니다. “언니, 한 번 놀러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은 재정적인 여유도 없었고, 또 시간적 여유도 없어서, 가고 싶었는데도 못 갔습니다. 그 기회를 제가 만들어 주게 된 것입니다. 부모님이 매우 감사한 마음으로 대만을 방문하셨고, 한 달간 그 가정에서 행복한 만남을 가지셨고, 그곳에 계시는 동안 저는 부모님을 또 다른 관광지도 방문하게 해드렸습니다. 방콕, 싱가포르 그리고 홍콩을 보내드리며, 다시 대만으로 가셔서 한 달 더 계시다가 미국으로 오셨습니다.
- 여행을 다녀오신 부모님이 저에게 얼마나 많은 감사를 표하는지, 만나는 사람들마다 바로 이 아들이 우리를 동남아 구경시켜 주었다고, 너무나 자랑하는 것입니다. 제가 감사하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여러 번 들었을 때, 저는 새로운 깨달음을 경험했습니다. 감사는 내가 부모님께 더 해야 마땅한데, 이런 배려를 한 번 해드렸다고 이렇게 감사해 하실 수 있을까? 그때 제 마음에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감사의 선물이나 행동을 통해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에 더욱 감사하는 분이 아니실까?’ 생각했니다. 우리가 마땅히 감사한 마음을 더 가져야 하는데,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천국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가 선한 일을 좀 했다고, 우리에게 더욱 감사하시는 하나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성도 여러분, 조금 있으면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가 다가옵니다. 여러분께서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을 느끼신다면 그 감사함을 행동으로 옮기세요. 교회를 위해서든 가족을 위해서든, 선교사님과 목사님을 위해서든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든 필요한 곳에 찾아가십시오. 보육원을 좀 찾아가서 아이들을 방문해 주시고, 그 아이들을 보살펴 주세요. 또 입양기관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여러분이 그렇게 하시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께 더욱 감사해하실 것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동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감사하신다. 이 말을 꼭 기억하시기 바라면서 정말 감사의 생활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 저희 부모님께서 저에게 가지셨던 마음처럼,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의 행동에 감동을 받으시고 더 감사해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시편 116편 12-14절 말씀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여러분 이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감사할 이유를 찾으세요. 저희 부모님께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그날 밤에 ‘이번 크리스마스 때 하나님께 어떤 선물을 드릴까?’ 한 것처럼, 여러분의 삶 속에서 최고의 선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하며 제 간증을 마치겠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 결어 및 기도
1) 장로님의 간증을 들을면서 우리는 세 가지를 마음에 정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장로님의 인생 가운데 베풀어주신 측량할 수 없는 그 하나님 은혜의 풍성함, 또 우리의 삶에 있어야 될 가장 우선순위 세 가지, 그리고 감사의 소중함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기도할 제목은 우리 장로님의 인생이 이렇게 이 땅에서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정말 외면당하고 고아로 살아왔지만, 우리 장로님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케 해 주신 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자신을 버린 친부모를 용서할 수가 있고, 감사하는 자로서 인생을 살게 되었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함께 노래하고 싶습니다.
2)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이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살아간다는 것 이것처럼 큰 축복이 어디 있을까요? 우리 장로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셨던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또 다시 이렇게 입양하는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잖아요?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는 분이 계시지 않았다고 한다면 평생을 분노와 복수심과 미움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삶의 모습으로 깨닫게 해주신 그 입양 부모님이 계셨고, 홀트 할아버지의 모습이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제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보여줄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되지 않을까요? 이 밤에 우리가 붙들고 기도해야 될 제목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 느끼게 하고, 보여줄 수 있는 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과연 나는 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아니 보여주고 느끼고 경험하게 하고 있나요? 아니면 내 자녀들에게 분노와 미움을 심어주고 있는 그러한 부모의 모습은 아닌지요? 하나님, 이제 나도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이해할 수 없는 우리 마음에 부음받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깊은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게 도와주셔서, 그 사랑으로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고, 내 자녀들이 나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하시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셔서, 그들 안에 미움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사라지고, 분노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자들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우리 다 같이 주여 한 번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
3)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금번 다니엘기도회 기간에 우리의 어떤 기도 제목이 응답받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길 원합니다.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독생자를 내어주신 아버지의 그 사랑,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죽어주신 그 십자가의 그 사랑, 그 어떤 것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경험하게 도와주십시오. 성령님이 역사해 주셔서 그 하나님의 사랑이 각 사람에게 파도처럼 밀려오게 도와주셔서 그 사랑 앞에 우리가 굴복당하기를 원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파도처럼 밀려와서 우리의 단단한 마음들이 녹아지게 도와주시고, 우리 안에 묶였던 것들이 풀어지게 도와주시고,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 안의 두려움이 사라지게 도와주십시오. 우리 안의 분노와 미움, 용서치 못하는 우리 마음의 쓴뿌리와 상처들이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녹아지게 도와주시옵소서. 내 자녀들이 부모 된 우리를 통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이런 거구나.’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된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지금 우리 자녀들의 마음 속에 있는 분노와 미움의 마음, 과거의 인생 속에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미움의 쓴뿌리와 상처들을 다 녹아내리게 도와주시고, 치유되게 도와주시고, 자유감을 얻게 도와주시고, 가정의 분위기가 달라지게 도와주시고, 가정이 작은 천국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 안에 부담감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용서하게 도와주시고, 이후에 우리의 삶이 이전보다 더 감사가 풍성한 삶이 되게 도와주시고,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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