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할 점을 짚어주는 것이 진정한 독자의 역할이라면 한예찬님은 이야기 그대로 진정한 독자라 하실 수 있겠지요.
정성들여 써주신 글에 우선 감사말씀을 드립니다.
여하튼 한예찬님께서 제시해주신 토론문제인 당 고종과 측천무후의 문제를 일단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내용에 대해서 궁금한 점은 측천무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데 2차, 3차 고-당 전쟁의 주도적 역할은 고종보다는 측천무후가 하지 않았을까요?
태자 시절부터의 고종 이 치에 대한 평가와 훗날 측천무후의 행적으로 보아서는 고종은 줏대 없는 허수아비 왕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
以太宗之明,昧於知子,廢立之際,不能自決,卒用昏童.
"태종은 영명하였으나 아들을 잘 알지 못했다. 폐립을 할 때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마침내 혼동(昏童: 반편이, 바보)을 태자로 책봉했다."
/新校本新唐書/本紀/卷三 本紀第三/高宗皇帝李治/贊曰 - 79 -
흔히들 사서에 나오는 당 고종의 평에서 '혼동'이라는 평가 때문에 당 고종이 서진의 혜제와 같은 백치로 생각하시기 쉬우실 것입니다만...
저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반드시 그런 것 같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대체적인 경향으로 볼 때 측천무후가 당 고종에 비해 큰 정치력을 발휘한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분야'에 따라서는 당 고종 나름의 영역도 적지 않게 있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함입니다.
일단 모자란대로 당 고종이 측천무후에게 일방적으로 놀아나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시합니다(주로 임 대희 교수님의 논문과 중국계 미국학자였던 고(故) 레이 황 박사의 저서 에 의거한 자료입니다.).
우선 제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는 현존 사료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난 형태로 당 고종이 장기간 허수아비 황제 노릇을 했다는 증거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帝自顯慶已後,多苦風疾,百司表奏,皆委天后詳決.["황제는 현경 이후에 풍질로 많은 고통을 받았다. (그리하여) 여러 관청에서 올라오는 표문과 주문은 모두 천후에게 위임하여 결정하였다."]
/新校本舊唐書/本紀/卷六 本紀第六/則天皇后武曌/弘道元年以前 - 115 -
이른바 이 공식기록에 언급된 '수렴첨정'은 서기 650년부터 660년까지 1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그밖에는 이렇다하게 당 고종이 측천무후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거나 허수아비 노릇을 했다는 증거는 그다지 없습니다.
아무리 황제의 page 팔리는 부분은 숨긴다는 역사서의 방침이 있다 하더라도 점검할 필요는 충분할 듯싶습니다.
《삼국사기》기록을 살펴봅니다.
[고구려 보장왕] 20년(661) 봄 정월에 당(唐)이 하남·하북·회남의 67주의 군사를 모집하여 4만 4천여 명을 얻어서 평양·누방 군영으로 나아가고, 또 홍려경(鴻卿)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회흘(回紇) 등 여러 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임아상(任雅相)을 패강도 행군총관으로, 계필하력을 요동도 행군총관으로, 소정방을 평양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소사업 및 여러 오랑캐 군사와 함께 무릇 35군이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일제히 전진하게 하였다.
황제가 스스로 대군을 거느리려 하였으나 울주(蔚州) 자사 이군구(李君球)가 건의하였다.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 어찌 중국의 모든 힘을 기울일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고구려가 망한다면 반드시 군사를 내어 지켜야 할 터인데, 적게 내면 위엄이 떨쳐지지 않고, 많이 내면 사람들이 불안해 할 터이니, 이것은 천하 백성들이 옮겨다니며 수자리 사는 일로 피로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정벌하는 것이 정벌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멸망시키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또한' '마침' 무후도 간하였으므로 황제는 '그제야' 그만두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제10(권22) 보장왕 하(寶臧王 下)
같은 내용이 《신당서》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蔚州刺史李君球建言:「高麗小醜,何至傾中國事之?有如高麗既滅,必發兵以守,少發則威不振,多發人不
- 6196 -
安,是天下疲於轉戍.臣謂征之未如勿征,滅之未如勿滅.」亦會武后苦邀,帝乃止.
/新校本新唐書/列傳/卷二百二十 列傳第一百四十五 東夷/高麗 - 6195 -
서기 661년에 있었던 이 이야기는 말 그대로의 허수아비 황제라면 있을 수도 없는 행동일 것입니다.
더구나 숙지할 일 하나는 측천무후는 국내 정치는 중요시했어도 대외 원정이나 대외 관계는 당 태종과 달리 소극적 대처로 일관했다는 점입니다.
대내 정치를 대외 관계보다 중요시한 증거 중 하나는 고당전쟁 이후 북아시아의 돌궐과 싸우는데 꼭 필요했던 나라의 인재인 배 행검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건입니다.
그것도 - 상당부분 후세의 과장된 평가이기는 하지만 - 배 행검이 죽느냐 사느냐에 따라서 돌궐 제2제국의 부활이냐 아니냐가 결정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은 순간에서 말입니다.
실제로 배 행검의 죽음 이후 당 고종도 683년에 사망하여 측천무후를 실력과 명분에서 견제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퇴장하게 됩니다.
최소한도 655-683년 사이에 내부 정치나 행정은 몰라도 외교나 전쟁 혹은 굵직한 행사에는 당 고종이 전권을 행사한 것은 분명하고 배 행검은 시종일관 측천무후를 견제했던 것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레이 황 박사님의 견해를 적습니다.
"지금 볼 때 고종이 앓았던 병은 고혈압으로, 이로 인해 여러 해 동안 시력장애를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측천에게 의지하여 서신을 판단하고, 그녀로 하여금 수렴첨정을 하게 했다.
황제는 측천을 보좌 뒤에 두고, 신하들을 불러서 발하는 것을 듣고 말하게 했는데, 이 수렴첨정은 서기 650년부터 660년까지 10년간 지속되었다.
이것 말고는 현존 사료에서 고종이 장기간 허수아비 황제 노릇을 했다는 증거를 찾아낼 수 없다." 《赫遜河畔談中國歷史》pp.250 -251.
영휘 6년(655)년 힘겹게 황후가 된 측천무후 황후가 되자마자 정치적인 주도권을 장악한 것처럼 묘사되는 것은 분명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측천무후의 존재에 대하여 무시해서는 아니되지만 당 고종과 그의 관료들을 주목할 필요도 충분히 있습니다.
임 대희 교수님의 <당 고종 통치전기의 정치와 인물>이라는 논문에 의하면 669년 즉 고구려 멸망(668)을 전후하여 허 경종이 유 인궤에게 현격하게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끝내는 실각까지 하게 됩니다.
그 전에 이미 이러한 조짐이 있었는데 백제 부흥전쟁이 한창이던 때, 즉 이 의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온존하였을 때 허 경종은 유인궤로 하여금 백제에서 귀국하도록 조치하였으나 유 인궤는 그러한 지시를 받고도 다른 핑계를 대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인덕 2년(665) 8월에 태산에서 행해질 봉선준비가 한창인 때 신라 등의 사신을 이끌고 귀국했습니다.
이것은 이 의부의 세력이 한풀 꺾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때 쯤이면 이 의부 허 경종의 입장과 측천무후의 정치적 입장이 온전히 일치하지는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겠지만 그렇다해도 이것은 당 고종이 허수아비 황제는 아니었다는 점을 반증해주는 한 사례라고 할 것입니다.
당 고종이 허수아비 황제가 아니었다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당 고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외숙인 장손 무기의 아버지 장손 성의 묘에 대한 회복이 이루어졌다는 점에 있습니다.
장손 무기가 측천무후 일파에 의해 역모죄로 죽음을 당했을 때 장손 성의 묘도 훼손되었는데 이것을 회복한 것입니다.
허 경종의 퇴진 이후 서 제담이라는 사람의 상소에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제헌공(장손 성)은 바로 폐하의 외조부이시니, 비록 자손에 범죄가 있더라도 어찌 조상에게까지 연좌시켜서야 되겠사옵니까? 지금 주충효공(무 사확)의 묘는 수리를 하고, 제헌공의 묘는 없애버렸는데, 폐하가 해내에 효성스러움을 현장하는 기풍을 내보여주셔야 하는데 어찌 이를 살피지 않으십니까?"
장손 무기는 측천무후 최대의 정적인데 이러한 장손 무기에 대해 간접적으로나마 명예 회복을 해주었던 것은 당 고종이 측천무후와 구별되는 다른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최소한도 완전한 의미의 허수아비 황제는 아니었다는 반증이 될 것입니다.
물론 당 고종 '혼자'만으로는 측천무후와 맞설 수는 없었겠지만 당 고종에게는 유 인궤나 배 행검 같은 무장들이 최소한도 당 고종 사망 이전인 682년까지만큼은 버티고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더구나 측천무후가 대외 원정 등에 지극히 소극적이었던 증거 중 하나는 배 행검의 죽음 이후 돌궐 제2제국이나 거란 관계에서 언제나 수세로만 일관했다는 점입니다.(당 태종 때 최고조였고 당 고종 시기에도 고당전쟁 때까지는 군사팽창이 만만치 않았던 점을 감안한다면 측천무후의 정책이 적절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한니발 회원님께서 어찌 저를 아시는지요? 네 제가 바로 그 김 준수가 맞습니다만... 제 글을 재미나게 읽어주셨었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회원님의 말씀 저에게는 과분함인줄 알면서도 감사드립니다. 힘 닿는대로 열심히 쓰겠습니다. 그리고 한예찬님께도 좋은 논의 주제에 대해 다시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첫댓글 한 때 역사스페셜에서 활동 하셨던 분 맞져? 님이 쓰신 글 잼나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여... 앞으로도 수고 마니 해주세여...... ^^
김준수님. 친절하게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네요. 제가 보기엔 대단히 준수하신 운영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
한니발 회원님께서 어찌 저를 아시는지요? 네 제가 바로 그 김 준수가 맞습니다만... 제 글을 재미나게 읽어주셨었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회원님의 말씀 저에게는 과분함인줄 알면서도 감사드립니다. 힘 닿는대로 열심히 쓰겠습니다. 그리고 한예찬님께도 좋은 논의 주제에 대해 다시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