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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8:21-35
“그것은 저를 두 번 죽이는 일이예요.”라고 절규하는 개그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두 번 죽이는 일이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여 아파하는 피해자에게 아픔을 준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한 여인이 있습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세 자녀를 두었습니다. 남편은 직업상 장기 출장을 자주 가야했습니다. 그래서 세 자녀를 거의 혼자 힘으로 키웠습니다. 어려움은 이루 다 말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자녀들이 독립하여 집을 떠나자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고 싶었는데, 그 꿈은 일순간 사라져 버렸습니다. 시동생 부부가 교통사고를 당해, 여덟 살, 열 살, 열두 살, 어린 자녀 셋을 남기고 죽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린 세 조카를 떠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또 다시 질풍노도의 세월 9년이 지났습니다. 두 조카도 독립하고 막내 조카만이 남았습니다. 이제 몇 년만 지나면 다시 자기 인생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습니다. 남편이 비서와 바람이 나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바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남편이 이혼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우여와 곡절 끝에 남편은 그 비서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녀의 아픔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새로 결혼한 남편은 언제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전처에 대한 죄책감이었습니다. 어느 날 전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의 내용은 자신을 용서하고, 한술 더 떠서 자신의 행복을 축하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기가 막혔습니다.
이 연속극 같은 이야기는 루이스 스머즈가 쓴 “용서의 기술”이라는 책에 기록된 제인과 랄프 이야기입니다.
엄청난 마음의 상처와 억울함에 고통당하는 제인에게 랄프를 용서하고 축복해주라고 말할 때에, 제인을 두 번 죽이는 일일 것입니다.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고, 그 상처는 고통을 주고, 고통은 증오를 낳고, 그래서 저 사람도 나만큼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축복이라니, 가당치도 않는 말입니다. 그래서 용서가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면 단연코 “용서”일 것입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 가운데도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상대방에 대하여 증오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용서의 문제는 단순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큰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제 36년 동안 엄청난 핍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흔 번 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사백 구십 번을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끝도 없이,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마음이 옹졸해서 용서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 억울함이나 상처를 예수님은 모르셔서 그렇게 요구하는 것일까요?
성경에는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분명히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에도 있습니다.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여 주옵시고.”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을 용서해 준 것 같이, 하나님께서도 내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과연, 전 남편을 용서하지 못하고, 축복하지 않는 제인을 심판하실까요? 오히려 고생만 죽도록 하고 버림받은 불쌍한 제인을 위로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일흔 번 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용서의 반대말은 복수입니다. 증오심과 복수는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증오는 두 개의 무덤을 만든다.”는 중국 속담이 있습니다. 상처를 받아 한 번 죽고, 증오로 인하여 두 번 죽는다는 말입니다. 증오심을 품은 내 자신이 가장 먼저, 가장 철저히 부서져 버립니다.
증오심과 복수는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를 ‘고통의 엘리베이터’에 태웁니다. 두 사람이 모두 파괴될 때까지 그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릴 수 없습니다. 학창시절 가장 잔인한 벌은 두 사람을 마주보게 하고 한 대씩 때리라는 것입니다. 서로 때리다 보면 더 세게 때리게 됩니다. 그와 같이 이 고통의 엘리베이터는 멈추지 않고 자꾸 높이 올라만 가고 급기야는 추락하여 두 사람 모두를 파괴시켜 버립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눈에는 눈”이라는 슬로건으로 인생을 산다면, 머지않아 세상 사람들 모두는 눈이 멀 것입니다.” 이 고통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유일한 길은 ‘용서’ 외에는 없습니다.
자녀가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밤낮으로 그 일만 생각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시름시름 병이 들어갑니다. 나는 그 자녀에게 간청할 것입니다. “힘들더라도 그 사람을 용서하고 그 일을 잊어버려라 제발.”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말은, 용서하지 않았으니까 하나님께서 벌을 내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증오심에 갇혀 있는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빛 가운데로 나오지 아니하고 어두움에 갇혀있는 그 상태입니다.
일흔 번 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증오로 죽어가는 나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빛으로 나오라는 간곡한 당부의 말씀입니다.
용서인 것 같지만 용서가 아닌 것들이 있습니다.
용서와 망각은 다른 것입니다. 단순히 비난하지 않는 것은 용서와 다른 것입니다. 갈등을 덮어두는 것도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묵인하는 것도 용서와는 다른 것입니다. 일명 이러한 ‘가짜 용서’는 나를 여전히 어두움에 묶어 놓습니다. 마치 암 덩어리를 그대로 놔둔 채로 눈에 보이는 바깥만 치료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읽은 비유의 말씀은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가르쳐줍니다.
한 신하가 임금으로부터 금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금 일만 달란트의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 아셔야 합니다. 금 일 달란트는 순금 34 킬로그램입니다. 하루 품값인 한 데나리온의 6000배에 해당되는 금액, 즉 20년 동안의 품값입니다. 그러니까 금 일만 달란트는 20만년 동안의 품삯입니다. 오늘의 금액으로 환산하면 5조 원 정도의 금액입니다.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입니다. 그 엄청난 금액을 탕감해주었습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에 생겼습니다.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동료였습니다. 그 사람은 그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백 일치의 품삯입니다. 대략 오백만 원 정도입니다. 그에게 말합니다. “왜 그 돈을 안 갚는거야.” 그러자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합니다. “좀 참아주게 곧 갚을게.” 그러나 냉정하게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친구를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같은 신하들이 그 사실을 알고 너무나 민망스러워 임금에게 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임금님이 노발대발하여 그 신하를 소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네 빚을 다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그리고는 그에게 그 빚을 모두 갚도록 옥졸을 붙여버렸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의 초점은 하나님의 심판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큰 손해를 봐도 하나님의 은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입니다. 5조 원에 비하면 500만원은 그야말로 껌값 입니다. 껌은 씹어도 그만 안 씹어도 그만입니다. 그런데 껌에 연연하다가 이 땅에서도 지옥과 같은 삶을 살다가 죽어서도 지옥에 가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를 듣고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5조 원이라뇨? 하나님으로부터 500만 원조차 받은 적이 없는데요!”
내가 가진 생명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숨 쉬고 있는 공기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땅을 딛고 서있습니다. 무중력 상태에서 사는 우주인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바로 중력입니다. 이 중력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절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가톨릭 신부이자 하버드대학 교수였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요 유명 강사였습니다. 어느 날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신지체아들의 공동체 데이브레이크로 들어갑니다. 그 과정을 ‘탕자의 귀환’이라는 책에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그런 결단을 하게 만든 수 모스텔러라는 70대 할머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 할머니도 데이브레이크에서 정신지체자들을 돌보며 사는 분입니다. 수 할머니가 헨리 나우웬 신부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평생 친구를 찾더군요. 서로 낯을 일힌 두부터 줄곧 지켜봤는데, 당신은 사랑에 목마른 눈치가 역력했습니다. 일이라고 하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죄다 관심을 보였습니다. 사방팔방 관심과 인정, 지지를 구걸했습니다. 이제 자신만의 진짜 소명을 추구할 때가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으며 집으로 돌아온 탕자 아들을 용서하며 반가이 맞아주는 아버지가 되라는 것입니다. 데이브레이크 식구들은 물론 주변 사람들 대다수는 당신에게 좋은 친구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주는 아버지, ‘참다운 동정의 권위자’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헨리 나우웬 교수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신지체아 공동체로 들어가 그들을 돌보다가 심장마비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라 생각하므로 빼앗겼을 때 억울하고 화가 납니다.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진정으로 인정하는 사람만이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루이스 스머즈는 그의 책 ‘용서의 기술’에서 용서하는 일곱 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천천히 용서하십시오. 용서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상처에 비례하여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평생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자리에서라도 용서하십시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십시오.
둘째는 상대방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십시오. 그 사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면 용서의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셋째, 혼란을 감수하면서 용서하십시오. 용서에 능숙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용서를 향하여 가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넷째, 분노의 감정이 있더라도 용서하십시오. 용서한 후에도 분노의 감정이 얼마든지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앙심, 복수심을 버리십시오. 내가 복수하러 나섰다간 끝내는 내가 파멸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복수해주십니다. 복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섯째, 한 번에 조금씩 용서하십시오. 조금 씩, 조금 씩 구체적으로 용서할 때라야 용서를 가장 훌륭하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 오로지 자유롭게 용서하십시오. 강요에 의해서, 위협에 의해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 때문에 하는 것은 가짜 용서입니다. 응어리는 더욱 커질 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생각하며, “이제는 내가 용서하리라.”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용서하십시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내가 지은 그 어떤 죄도 용서하신다는 믿음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인종 차별로 악명이 높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면서 “진리와 화해 위원회”가 설치되었습니다. 자신의 과거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면 사면을 시켰습니다. 반 드 브렉이라는 백인 경찰관은 과거에 저질렀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자신과 동료들이 18세의 흑인 소년을 총으로 살해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하여 그 시신을 불에 태운 일, 8년 후 소년의 아버지를 아내가 보는 앞에서 장작더미에서 태워 죽인 일을 고백하였습니다. 그 끔찍한 일을 차례로 당한 흑인 노부인에게 판사가 물었습니다. “반 드 브렉 씨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노부인이 말했습니다. “남편의 장례를 치룰 수 있도록, 반 드 브렉 씨가 그 장소로 가서 남편의 재를 모아줬으면 해요.” 그 경찰관은 고개를 숙인 채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노부인은 추가 사항을 덧붙였습니다. “반 드 브렉 씨는 제 가족들을 모두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에게 줄 사랑이 아직 많습니다. 한 달에 두 번, 그가 우리 집에 와서 하루 동안 시간을 보내기를 원합니다. 제가 엄마 노릇을 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리고 나는 반 드 브렉 씨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과 나도 그를 용서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나는 내가 정말 용서했다는 걸 알 수 있도록 그를 안아 주고 싶습니다.”
노부인이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누군가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반 드 브렉은 그 찬양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 상황을 감당치 못하고 졸도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뜩이나 어렵고 힘든 세상입니다. 눈을 부릅뜨고 빼앗으려고 달려드는 세상입니다. 교회 안에서라도 서로 용서하며 서로 사랑하며 천국의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강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 평강과 기쁨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 고통을 감내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2010.01.20 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