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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 이 시집
시詩, 나르키소스의 사랑 고백들
- 기혁, 『다음 창문에 가장 알맞은 말을 고르시오』(2022, 리메로북스)
김효은(시인, 문학평론가)
1. 프롤로그 : 고백 하나
시는 세상에서 가장 얄궂은 애인이다. 그는 늘 매혹하고 도망가고 매혹하고 도망가고 매혹하고 도망가기를 반복한다. 지겨워질 법도 한 이 오랜 밀당과 연애를 진심으로 즐긴다. 그는 술래잡기나 숨바꼭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숨은그림찾기, 혹은 ‘나 잡아봐라’와 같은 놀이에 능숙하고 결말이 불확실한 게임과 실종과 대기의 불연속적 상황들을 즐긴다. 시상詩想을 몰고 오던 애인이 중간에 오리무중 꼭꼭 숨어 버리거나 증발해 버리면, 남은 애인은 종종 속수무책이 된다. 그렇게 꼭꼭 숨거나 멀어졌다가도 어느샌가 나타나 눈웃음치며 해맑게 다가오는 그에게 우리는 화를 낼 수도 없다. 그는 태양의 미소를 지니고 쑥 다가와 심장을 마구 휘젓는다. 온몸과 영혼을 휘감고는 전신을 불꽃으로 순식간에 뒤덮어버린다. 시는, 문학은, 그에 대한 원망은 가능해도, 결코 미워할 수만은 없는 난해한 장르의 애인이다. 시는 그렇게 시인들에게는 불완전한 타자이면서 종신형의 애인인 것이다. 세상에 그를 찾는 이들은 의외로 많다. 그는 매력적이고 여전히 인기가 많다. 그는 늘 안개 속에 가면인 듯 반쯤 정체를 숨기고 있으며, 늘 어딘가를 떠돌기에 분주하며, 좀체 전모를 잘 보여주지 않는다. 신비주의는 그가 즐겨 쓰는 가면이다. 그는 때로, 자주 인색하게 군다. 애걸복걸하는 애인에게 한 단어, 한 문장씩만을 허락해 주곤 하는데, 어떤 날, 어떤 순간에는 미친 듯이 공수를 쏟아내 일필휘지一筆揮之의 명작을 단숨에 후한 선물로 한아름 안겨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내 다른 신비와 미스터리로 온몸을 휘감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꼭꼭 숨어 버리기 마련이다. 그를 둘러싼 언어의 외투와 그의 연인을 향한 의심과 질투의 외투 또한 매우 두텁고도 견실하다. 이에 가끔은 소통이 불가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막막하고 답답하기 짝이 없는, 그는 미지와 미궁 속에 숨겨진 애인이다. 게다가 그는 심각한 나르시시즘과 의심병, 구속병까지 지병으로 갖추고 있다. 그는 24시간, 1분 1초를 오직 자기()만을 생각하고 그에게만 종속되길, 그에게만 집중하길 원한다. 그는 때론 지독하고도 인정머리 없는 사채업자이며, 애정 결핍 환자인 것이다. 그런 그를 쫓아다니는 구애자에게 삶 전체를 요구하기도 한다. 불행과 행복, 과거, 현재, 미래까지 모조리 저당 잡히길 요구하는, 시는 악덕 사채업자인 것이다. 그 혹독한 애인에게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막 문학의 길에 들어선 추종자들에게는 특히나 불행 포기 각서에 지장을 찍을 것을 종용한다. 당신은 그 어떤 불행도 시적 소재로 전환할 수 있다는 조항에 동의합니까? 소중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준비를 하는, 칼을 뽑은 아브라함처럼 애인의 요구 앞에서는 진심을 담아 죽는 시늉이라도 할 것을 맹세합니까? 애인님, 기일을 더 주세요. 마감을 조금만 더 연장해주세요. 이자를 낮춰주세요. 상환 기간을 미뤄 주세요. 등등 매달리듯 사정을 해봐야 애인은 오래 기다려 주지는 않는다. 구차한 변명과 넋두리 앞에서 애인은 이미 다른 애인의 구애에 이끌려 저 멀리 당신 곁을 이미 한창 떠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공부와 일이 밀려서, 돌봄과 육아와 살림에 지쳐서, 사업과 행상을 해야 해서, 취업과 승진을 해야 해서, 군대를 다녀와야 해서, 박사 논문을 써야 해서, 빚을 갚아야 해서, 알바와 간병을 해야 해서, 운동과 치료를 해야 해서, “제가 요즘 도저히 시를 쓸 여유가 없어요”, 따위의 변명들, 일상과 생계를 위해 기다려 달라는 말이나 부탁, 지극히 사적인 사정 따위에 시는 이를 귓등으로도 안 들어 준다. 시는 오로지 자기밖에 모른다. 시는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갑’의 연애만을 한다. 갑의 애인 앞에 한없이 나약해진 이 세상의 모든 ‘을’들은 순종과 복종과 헌신만을 바쳐도 시 한 줄을 얻을까 말까 한 것이다. 이 아슬아슬하고도 조마조마한 불공정한 연애가 바로 시와의 연애인 셈이다. 그럼에도 모든 시인들은 그런 그를 사랑하고 갈구하고 추앙한다. 그가 오기만을 24시간 지나 48시간, 한 계절 내내 간절히 기다리던 순간들은 그래도 얼마나 괴로우면서도 행복한가. 불행의 순간에도 이 모든 불행이 시가 되기를 얼마나 앙망했던가. 그가 마침내 왔을 때, 한 편의 시로 다가온 순간 모든 불행과 불안과 조바심과 초조함과 슬픔과 서글픔, 서운함과 설움과 배고픔과 피로함과 피폐함은 한꺼번에 다 보상되고야 만다. 시는 그렇게 마약과도 같은, 치명적인 애인이다. 그는 어쩌면 빠져나갈 수 없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다. 이제 와 고백을 하자면, 나 역시 그런 그의 절절한 광신도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에게 소속된 그가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권태로운 애인이다.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그를 몹시 사랑한다. 그러나 일상의 전부를 그에게 내어주지는 못했기에, 이 지독한 연애에 성공하지 못한, 그다지 뛰어난 결과물이 없는 일종의 짝사랑주의에 머물렀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시는 쓰는 것도 행복하지만 읽는 것과 분석하고 해설하는 것, 누리고 향유하는 것만도 행복이기에 나는 더러 평론과 논문이라는 다른 애인을, 시 몰래 만나러 가곤 한다. 다른 애인과의 이토록 불온하고도 짜릿한 외출과 외도, 다른 장르의 연애를 이따금 동시에 혹은 따로 즐긴다.
2.
고백 둘 : 기혁, 『다음 창문에 가장 알맞은 말을 고르시오』(2022, 리메로북스)
기혁의 새 시집을 읽는다. 그는 시집을 선보일 때마다, 언어에 대한 다양한 고민과 시도, 시적 스타일의 변화와 모험을 감행함으로써 독자에게 신선한 재미와 감동, 충격을 안겨준다. 적어도 그는 독자를 기만하거나 실망시키지 않는 성실하고 재능있는 우리 시대의 유능한 젊은 시인인 것이다. 시인이 제기한 “다음 창문에 가장 알맞은 말을 고르시오”라는 질문 앞에,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난해하고 아리송한 문제를 풀기 위해, 독자들은 먼저 숨을 고르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창문은 빈칸이지만 한편으로는 무언가로 늘 가득 차 있다. 창문은 적어도 창문을 바라보는 대상에게 애매한 용도의 사물이자, 일종의 경계성으로 이루어진 교차공간이다. 우리가 창문을 빈칸이라고 지칭할 수 있으려면 그만큼의 여백을 만들기 위해 머릿속으로 풍경을 지우거나 유리창마저 깨부수어서 비워 둬야 한다. 원고지의 빈칸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든 원고지는 빈칸이지만, 빈칸은 절대적 빈칸은 아니기도 하다. 띄어쓰기 된 칸만을 그렇다면 빈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원고지의 빈칸을 우리는 과연 비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빈칸은 더러 여운과 여백, 상상력과 호흡으로 가득 차기도 한다. 자, 이제 이러한 창문과 원고지의 비어 있는 곳을, 완성되지 않은 곳을 시의 틀이라고 상상하자. 하나의 테두리가 새하얀 공백과 여백을 껴안고 있다고 상상하자. 그 안에 그려지거나 채색될 상상과 몽상, 대화와 독백, 집념과 사색을 축출하고 선별하여, “알맞은 말”들을 골라 보자. 당신은 이제, 무정형의 비어 있는 말풍선에 “알맞은” 대사를 채워 넣어야 한다. 이 시집에는 다른 세계와 접속된, 마법의 창문이 달려 있다. 당신은 당신의 창문을 당신의 취향대로 직접 디자인 하고 커스터마이징 하면서 당신의 시를 완성하고, 걸맞은 감상을 하면 된다. “가장 알맞은 말”에 대한 정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빈칸의 전생이 창문이라면
창틀마다 매달린 글자의 앳된 얼굴이
허공에 주먹 감자를 날렸을 테지
집구석에 애미애비도 없니? 행인들이 소리치면
정오의 콧노래가 흐르는 문장 뒤편에서
보호자도 공중도덕도 없는
털북숭이 괴물이 다가왔을 테지
빈칸에 알맞은 말을 믿는 착한 아이라면
스스로 깨지는 유리창과
커튼을 드리워도 보이는 진실을
들어봤을 테지
창틀에 걸린 색연필 동그라미가
올가미로 변하는 함정에 놀라
털북숭이의 털을 붙든 적도 많았을 테지
저물녘이면 모아둔 털 뭉치가 노을이 되어
포근하게 흘러가는 걸 보았을 테지
불을 켠 창문 안쪽보다
쓰이지 않은 낱말들이 별빛처럼 반짝이는 날이면
수학자도 시인도 밤새도록
빈칸을 뒤쫓는 개꿈을 꾸었을 테지
창틀의 크기만큼만 소외가 사라져도
평화가 낙서를 하러 어슬렁거렸을 텐데 꿈속 개들도
창을 낸 장벽의 수만큼
갈 수 없는 구석이 많았을 테지
창문 위로 새벽 햇살이 풍경을 드리울 때
고독은 온 세상에 입김이 서리는
장난을 치고 싶었을 테지
누군가의 마지막 입김 위로
그가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쓰고 또 쓰면서
장난감 총을 든 글자 삼총사가
이유 없이 슬픔의 새를 날려 보낼 참이지
- 「다음 창문에 가장 알맞은 말을 고르시오」 전문
“빈칸의 전생이 창문이라면”으로 시작되는 위의 텍스트는 하나의 겹그림을 연상시킨다. 그림 속에 그림이 들어있는, 사진 속에 사진이 들어 있는 그러한 이중의 풍경이 동화책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원고지의 빈칸 혹은 괄호와도 같은 “창틀마다”에는 “글자의 앳된 얼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그 뒤편에는 “털북숭이 괴물이 다가와” 으르렁거리는 동화 속 풍경. 무섭지만 흥미롭고, 두렵지만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 모험들. “빈칸에 알맞은 말을 믿는 착한 아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포근하게 흘러가는”, “털 뭉치”로 이루어진 “노을”의 물음표들을 두려움 없이 바라봤을 한 소년의 눈망울. “쓰이지 않은 낱말들이 별빛처럼 반짝이는 날이면”, “수학자도 시인도 밤새도록”, “빈칸을 뒤쫓는 개꿈을 꾸었을” 그러한 풍경 속에서, 무모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누군가는 그 사랑을 잃어버린 후에야 뒤늦게 창문에 입김을 불어 그 위에 손가락으로 눌러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되새기곤 한다. 희미한 자국들처럼, 남아 있는 흔적들을 뒤적여 우리는 “알맞은 말”로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되새긴다. 그렇게 이번 생의 퍼즐을 맞추어 나가면 될까. “장난감 총을 든 글자 삼총사”들이 ‘끼이익’하고 로봇처럼 창문 속에서 불쑥 일어나서, 당신의 심장을 과녁 삼아,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 세 글자를 장전해 총알을 쏘아댈 때, 당신은 그 이름 석 자의 포탄을 심장으로 받아, 고독에 균열을 내며 쓰러질 용의가 있는가. 아마도 무료하고도 고독한 암막으로 드리워진 창문의 안쪽에는 감옥과도 같은 전생이 펼쳐져 있고, 하고 싶은 말들로 수군거리고 일렁이고, 그 많은 “슬픔의 새들”이 창의 안쪽에 갇혀 아우성칠, 이 진풍경들을 시인은 투시하듯이 바라본다. 시인은 담담하게 한 폭의 그림 속에, 한 편의 시 속에 두 겹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이번에는, 전생에 어쩌면 “사랑을 모르고 있”던 “물고기”였을지도 모를 그러나 현생의 글자들의 유영을 한번 따라가 보도록 하자.
물고기들은 사랑을 모르고 있으므로
촘촘한 이별의 은유로도 연민
가득한 비문으로도
그물을 만들 수 없었다
하구를 지나
까마득한 적도의 바다 한복판에서 문득
하다만 말들이
지느러미를 붙들 때
비로소 글씨와 함께 번져버린 한여름과
그 풍경 위로 떨어진 몇 방울
눈물을 기억한다 고백은
물고기를 모신 자들의 눈꺼풀 같은 것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면
별빛의 고요에도 비린내가 난다
회귀하는 문장을 본 적이 있는가
망망대해의 어둠 속에서 보았던 폐허가
시냇가까지 따라온다
쓴다는 본능을 좇던 물결에 얼굴을 디밀고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상처들과
구겨진 삶의 필름을 어루만진다
사랑을 모르는 자의 표정으로
거울 속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다
- 「나르키소스와 물고기」 부분
시인은 “사랑을 모르고 있”는 “물고기”들은 “사랑을 모르고 있으므로” 자유로울 수 있노라고 말한다. “촘촘한 이별의 은유” 또는 “연민/가득한 비문으로도” 그들은 사랑 자체를 알기 이전에는 “그물을 만들 수 없”고 그물에 걸릴 일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는 순간, 감정의 그물들은 더욱 촘촘하게 서로를 옥죄게 좁혀올 수도, 그리하여 서로를 숨 막히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은 선악과를 먹게 되는 것보다 때로는 더 치명적일 수 있다. 하물며, 나르키소스에게 그 사랑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 된다. 당신을 향한 언어, “글씨와 함께 번져버린 한여름”, 그 모든 “고백”들은 나에게 반향反響 되어 돌아오기 마련이다. “회귀하는 문장”들은 연어들의 헤엄처럼, 자기 자신의 근원을 향해 돌진하고, 비수가 된 그 모든 전언들은, 나르키소스의 심장에 와서 박힌다. 사랑의 심해, 그 깊은 소용돌이 혹은 “망망대해의 어둠 속에서 보았던 폐허”까지 모조리 이끌고서, 기억들은, 문장들은 그렇게 나르키소스의 목을 끌어안고, 물속으로, 거울 속으로 침잠한다. “쓴다는 본능” 결국 창작을 향한 이 모든 욕동들 또한 “사랑을 모르는 자의 표정으로” 세상에 가득한 “거울 속 죽음”들을 “애도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리라.
3. 고백 셋, 사랑 혹은 사냥, 게임의 시간
바다에 숨어있던 파도가 고독을 알아차렸네
사랑인 척 웅크렸던 설렘이 발자국만 남기고 떠나버렸네
파라솔 그늘 아래 술래를 잊은 낮잠이 모래를 터네
꿈속에서 만난 인연도 슬픔인 척 기다리다 바람에 흩날리네
멀리멀리 바닷가 건너 소녀의 눈 속으로 티끌처럼 들어갔네
감긴 눈꺼풀 안에서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네
실눈을 뜰 때마다 거센 풍랑이 몰아쳤네
아프고 시린 일상 속으로 더듬더듬 손을 뻗었네
술래만 남은 가슴께 물이 차오르고 있었네 아무도 모르게
난파선 같은 한 사람 밀려와 그 손 잡아주었네
- 「술래잡기」 전문
우리가 사랑을 기다릴 때, 시인이 시를 기다릴 때, 그것은 때로는 게임인 동시에 사냥의 시간을 전제로 하기도 한다. 사랑은 기약이 없고, 모색과 탐색, 잠복과 기다림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시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를 찾아 나서는 시인은 영원한 술래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시인은 시를, 애인은 애인을 포기할 수 없어서,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그러나 기다림이 한정 없이 길어지면 그는 불행해진다. “술래만 남은 가슴께에 물이 차오르고” 그는 곧 깊은 고독과 슬픔 속에 빠져 익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파선 같은 한 사람”이라도 혹은 시가 시인에게 파도처럼 밀려와, “그 손 잡아주”기만 한다면, 그는 살 수 있다. “사랑인 척 웅크렸던 설렘”이 사랑이 아니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설렘”과 “슬픔”, 모든 “티끌”들, 상처 하나까지도 결국에는 모조리 사랑의 산물들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세계보다 넓은 공간을 적을 수 있단 말인가’
최초의 메모가 쓰인 다음부터
모든 사건은 명백해진다
조물주의 주머니 속
온갖 잡동사니들과 뒹굴던 순간에도
메모의 예감은 지구의 출생에 앞서 숨을 곳을 찾는다
자연의 섭리를 오해라고 부르는 자들과
우리 내부에서 신의 흔적을 찾으려는 자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호기심을 윤활유 삼는 학자들에게
꼬깃꼬깃한 메모는 여전히 능수능란하다
잉크가 번지 세탁조에서조차
향정신성의약품처럼 미래를 수줍게 만든다
보상이 없어도 완벽한 게임
해독 불가능한 글씨라면 정말 그렇다
- 「보물찾기 게임」 부분
밀려가고 밀려오고, 현존과 부재가 반복되는, 이 술래잡기와 숨기 놀이 혹은 사냥게임은, 어쩌면 바다와 파도가 일삼는 유구한 사랑의 서사일지 모른다. 파도 속에는 “티끌”들도 조개껍질도 모래알도 쓸려가고 쓸려 오지만 더러 그 안에는 영롱한 보석이 순간순간 떠밀려오기도 한다고. 이러한 바다의 연애를 “보물찾기 놀이”라고 명명해도 될까. 시인에게 시는 그 어느 보석보다 값진 보물일 테니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망망대해 어딘가, “아직 적지 않은 메모”가 유리병 속에 담겨 표류하고 있을 것이다. 유리병을 찾는다면, 지워진 메시지는 당신이 채워 완성하면 된다. “보상이 없어도 완벽한 게임”, “해독 불가능한 글씨”로 쓰인 애인의 편지를 받아 읽고 판독하는 일은 흥미롭지만, 결코 쉽지는 않은 일이다. 어쩌면 “신의 흔적을 찾으려는 자들”의 무모하면서도 종결 없는, 출구 없는 탈출 게임일지도 모른다. 저기, 멀리서 너울성 파도가 밀려온다. 해변에서 시를, 애인을, 신을, 기다리거나 찾아야 하는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