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승지를 가다 - 봉화군 춘양의 태백산 사고지와 구곡
약 65Km
2009년 2월 27,28일, 3월 18일
혼자서
산행지도
서울 청량리에서 중앙선 안동행 열차를 타고 영주에 내려 영동선 열차로 갈아타고 춘양으로 들어가는오지산간중 오지이다, 춘양으로 들어가는 기차선로를 보면 엿같이 휘어 돌아
안동에서 북쪽으로 낙동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간 태백산이 있고 운곡천의 발원지인 저 높은
딸랑 나 혼자만이 춘양역에 내려 개인택시 아저씨를 앞세워 방전마을을 지나 기차와 소로리 런 내가 나를 앞세워 논둑길을 지나 묘가 여럿 있는 사잇길를 가로질러 산릉으로 오른다,
다닌 길로 무심코 갈 수 있고 느릿한 능선으로 이어져 주변환경이 잘 보이지 않아 독도에 주의하며 진행해야 505봉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505봉
505봉에는 묘2기가 소나무로 둘러쌓여 너른한 능선을 지키고 있었다, 별 어려움없이 3키로 쯤 진행하다 화장산가는 갈림길에서 742.3봉을 만나게 된다, 아무런 표시가 없어 무심히
다, 가야할 형제봉이 나란히 민둥산으로 벌거벗어 가까이 있고 그 너머 왕두산과 그 뒤 사람이 다닌지 언제였는지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미한 길을 한동안 걸어야 했다,
맨손으로 가다가 복분자나무 가시에 손을 할키고 싸리나무가 자꾸 눈을 찔러 두내약수터에 서 기다리고 계실 산친구들을 생각하니 마음만 성급해진다,
형제봉의 고사목
형제봉의 춘양목이 몇 년전 불에 타 벌거숭이 산이 되어 있었다, 저 아래 동네 소로리 주민이 논에 소각을 하다 불이 이 산으로 번져 몇 백년 된 소나무가 타버렸다고 한다, 이 곳에서 나는 춘양목은 이름이 높다, 겉껍질이 붉은 빛이 돌아 적송이라고 부르는 육송이란다, 벌레가 먹지 않고 썩지 않았으며 대패질을 해 높 으면 윤기가 자르르 돌았고 한옥을 짓는데 으뜸가는 목재로 쳤으며 안동과 서울 일대의 높으신 양반들은 춘 양목으로 집을 지었다고 했다,
지도상 형제봉△833.7봉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형제봉 최고봉은 902봉이라는 사실도 이 곳에 서서야 알 수 있었다,
왕두산 정상 삼각점
왕두산에서 내려간 산밑 미곡동은 미찌골로 돌고개에서 동쪽으로 이조단종대왕 폐위시에 순
미곡동옆 한두골도 적시장군대좌의 명당이 여기에 있지나 않을까하여 사방에 묘지가 산재하
저 아래 있는 각화사가 마치 어머니 품속처럼 아늑하고 평화로움을 준다고 불교계에서도 아주 유명한 길지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하였으니 전국의 수좌들이 모여 공부하는 도량으로 이름나 있을 만 한 조선시대 때의 태백산 사고의 수호사찰이었다,
사고지를 찾아 가는 길에는 안내판도 없고 확실한 길도 없는 미로를 찾아 나섰다, 조선시대 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하여 명종 1년(1546년)애 태백산 사고가 창건되어 많은 실록을 보관하고 있었으나 일제시대 그 일 부가 일본인들로 하여금 일본으로 유출되었고 그 나머지는 해방 후 서울대 규장각으로 옮겨 놓았다고 춘양면 지는 기록하고 있었다,
나는 사고지를 보물찾듯 찾아 보는 것보다 내가 사고지를 짓는다는 마음으로 찾아 나서면 각화산 어느 골짜기절벽에 보관할까 하는 심정으로 찾아 보았다, 첫째로 전쟁이나 왜적의 침입이 있을 때 가장 안전한 곳이어야 했으며 두 번째 양지바른 언덕에 동풍이 잘 되는 곳이어야 했으며 세 번째 골짜기가 시작되는 물이 샘처럼 흘러내리는 곳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고지에서 바라다 보이는 전망이 최고였다면 더할 나위없이금상첨하였을 것이다,
옛모습
어떤 스님은 사고지가 각화사 계곡을 타고 올라가 9부 능선쯤에 있다고 했으며 춘양면에 사시는 강만기氏가 귀뜸해 주는 곳만으로 정확한 위치를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각화산 오르는 산릉을 타고 오르다 찾아 낸 사 고지는 생각했던 곳보다 많이 넓어 있었으며 지난 해 홍수로 인하여 절벽에서 타고 내린 물로 축대도 많이 허물어져 있었다,
사고지를 설명한 안내판, 흔적만 남아있는 주춧돌, 뒤뜰 돌담장 울타리, 흩어져 있는 기와편들, 조그마한 물 웅덩이와 바가지, 주위 바위에 새겨져 있는 다녀간 흔적들, 사고지반에 살아 있는건 너른 잔디밭으로 양지바 른 언덕아래 차지하고 있었다, 춘양면이 내려다 보이고 저멀리 알수없는 희미한 산들이 펼쳐져 하루 왼종 일 앉아 있어도 좋을 듯한 아늑한 그 곳은 각화산 아래 고도 1,000미터 깊은 산속이었다, 사고지로 이유가 얼마나 정당했으면 이곳을 택했을까 ..
십승지 산행이 끝나면 난 조선왕조 실록 사고지 오대산 적상산 마니산 묘향산도 찾아 나서야겠다,
각화산 정상
산릉에 오르니 흰눈이 많이 쌓였다, 헬기장에 각화산 삼각점이 눈에 쌓여 살며시 눈을 제치고 사진 한 장 찍어 기록으로 남기고 각화산 최고봉인 1,198봉에 오르니 나무 위에 올려 놓은 각화산을 알리 는 보도블록에 고도를 잘못 기록하여 올려 놓았다, 도면상 1,176.7봉에 적혀져 있는 각화산도 잘못 표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구룡산이고 보이고
각화산 지나면서 백두대간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가야할 구룡산과 신선봉, 문수봉이 먼 산길의 거리 만큼이나 높아 보이고 아무도 가지 않는 눈 길에 찍히는 내 발자욱을 뒤돌아 보면 누군가 언제 이 길의 이정표가 될 내 동반자를 그려 보면서 중봉, △1,172.2봉, 1,242봉이 북사면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걸 어 갈 수 있었다,
백두대간 차돌배기는 태백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구룡산으로 내려가는 재로 골짜기를 따라 석문동 으로 갈 수 있다, 석문동은 천연의 요새지로 전쟁시 피난을 하던 곳으로 정감록의 전국 십승지 중한 곳이라 전했으며 가상적인 이상촌으로서 평화롭게 살아 갈 수 있다고 자개동이라 부르기도 했단다,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을 때 단종 복위를 도모하던 신하들이 석문동 계곡을 지나 백두대간을 넘어 영월 청령포에 단종을 알현하러 다니던 유서깊은 골이라 세인들의 눈을 피하여 다니던 길로 험준 하기 이를데 없다고 오지중 첩첩산중였던 것이다, 계곡 입구에 지금은 서울 사람들이 들어와 명당자리 라 하여 정착하였다 하니 도심에 사는 사람들이 더 살기 좋은 명당길지를 좋아하는것 같았다,
묘 1기가 신선봉을 차지하고 있는 봉우리를 지나 곰넘이재 골짜기에 있는 참새골은 동리정에서 석문 동보더 더 깊숙한 골짜기로 석문바위를 지나 진조동 또한 골이 깊고 숲이 우거져 여름에는 행락객들이 찾아 온다고 했지만 지난 해 홍수로 인해 계곡이 많이 유실돼 큰 피해를 복구해야 들어 갈 수 있는 길이 었다. 작년 이 계곡에는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을 앗아간 지난 여름 할퀴고간 상처가 있는 걸 보면 풍수지리도 천재지변을 피해갈 수 없는가 보다,
구룡산 정상
백두대간 함백산과 태백산이 저 멀리서 파도처럼 한 눈에 들어왔다, 내가 걸었던 지난 몇 년전 이곳에 섰던 그 때의 기억이 가물거리는 산은 그대로인데 내 기억속에 구룡산은 아홉마리 룡보다 더 많이 흰 눈이 내린 구룡산의 하늘을 날 것만 같았다, 구룡산 운해가 백두대간 제 40경이라는 것조차 찾아 볼 수 없는 맑은 겨울산은 언제 깨어나려는지 구룡산에서 흘러 내려가는 저 아래 금당골의 봄은 왔는가 궁금했다,
구룡산 북쪽으로 강원도 영월군 백운산과 정암산이 있는 구래리와 직동리 일대, 선달산아래 의풍, 소백산의 금계, 예천의 금당, 동쪽으로 삼척시 대이리까지 이곳은 정감록의 십승지로 제일 많이 밀집돼 있는 외부와의 교류가 차단되었을 것만 같았다,
전국 60여 곳 중 경상북도와 강원도가 낳은 명당은 이 일대가 가장 많은 길지로 전란이 났을 때 종적을 감출 만하다고 쓰고 있었다,
시루봉 넘어 문수산
구룡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넓고 좋다, 깊고 높은 산에서 내려오는 이 길은 넉넉한 인심을 쓰는 것처럼 맘놓고 걸어도 좋은 산 길처럼 춘양면이 저 멀리서 보이기도 했다, 시루봉이 춘양면을 가리고 있어 한참을 그 곳에 눈을 두고 걸었더니 임도를 따라 올라오는 참새골도 희미하게 들어온다, 고도를 뚝뚝 떨어트리며 내려왔던 구룡산이 흰 눈으로 덮혀 항이동 계곡의 깊은 골까지도 누군가에게 이야기 들려줄 것 같이 소곤 거렸다.
국사편찬위원회 근대자료 지도에 보면 옥돌봉이 옥석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3년 전 내가 이 봉우리에 올랐을땐정상석이 없었는데 이제 왠만한 봉우리 마다 거의 정상석을 세워 산을 오르는 산님들의 애정이 담긴 듯하다,
정상에 하얀 바위가 예천까지 빛난다 하여 예천봉으로 내려오는 설이 있는걸 보면 바위의 빛이 얼마나 빛났으 면 그 멀리 예천까지 비쳤을까 싶었고 저 아래 있는 서벽이란 마을도 이곳에서 유래된 지명이라 했다,
옥돌봉에서 분기되어 용두산~박달산~조은산~ 보문산~나부산을 마지막으로 예천 회룡포에서 맥을 다하는 문수지맥을 따라 최고봉 문수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주실령으로 내려오는 데 벌써 깜깜하여 어두운 길을 조심조심 내려왔다, 밤길을 걸어 본지 오래되어 이제 산 중의 밤이 어색한지 지루하게 주실령까지 올 수 있었다, 두내약수로 터벅터벅 걸어 오면서 택시 아저씨가 오길 얼마나 내려왔는지 서벽리 깊은 골은 벌써 잠들어 있었다,
옥돌봉에서 분기되어 용두산~박달산~조은산~ 보문산~나부산을 마지막으로 예천 회룡포에서 맥을 다하는 문수지맥 을 따라 최고봉 문수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주실령으로 내려오는 데 벌써 깜깜하여 어두운 길을 조심조심 내려 왔다, 밤 길을 걸어 본지 오래되어 이제 산 중의 밤이 어색한지 지루하게 주실령까지 올 수 있었다,
두내약수터에 산림휴양지로 잘 정돈되어지는 언덕배기 육각형정자에 회원분들이 반가이 맞아 주신다,
그 날 저녁 연분홍치마 휘날리는~ "봄날은 간다"란춤가락을 치며 밤새는줄 몰랐다, 연분홍치마가 홀山에 교가라는 것과 얼큰한 동태찌게 맛은 이른아침 부시시 눈을 뜬 날 멋 훗날까지 삶의 냄새가 될 것이다,
전국에서 모여든 회원들이 활활 타오르는 모닷불 옆에 둘어 모였다, 곳곳의 주류, 먹을꺼리와 회원의 장단소리가 산덩이를 울리며 긴 밤을 지새웠다, 한 해를 소원하며 박달령에서 회원들이 마련한 정성과 각자의 물품을 제단에 놓고 시산제를 올렸다,
걸었던 백두대간 박달령은 벌써 내 기억속에 있었는데,,,
춘양면사무소에 근무하시는 분 덕분에밤 길을 편히 열어준 주실령의 캄캄한 곳까지 데려다 주시고 가셨다, 4시 40분 문수산으로 오르는 밤 길은 오르막을 1키로쯤 올랐을까 이정표가 반겨주며 문수산 오르는 첫 예배령에는 오래된 소나무에 붙어있는 이정표에서 한 숨 돌리니 여명이 밝아 온다,
산림청에서 옥석산과 문수산 저 아래에는 5,000ha 면적에 2,560억원을 들여 기후변화식물원, 생태조합 R&D센터, 백두대간 복원식물원, 지하식물 저장소, 백두대간 생태 박물관, 전문테마전시원 등을 국립 백두대간 고산수목원을 조성하고
한반도의 중추인 백두대간 생태계의 보존 및 교육, 신가치 창출및 생물자원 연구기반 확충으로 생명과학 산업의 국가경쟁력 제고등의 목적으로 계획하고 있는 봉화 춘양면의 거대한 새모델 제시가 2,013년이면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새로운 춘양면을 기대해 보기도 했다,
문수산 정상엔 유별히 통신시설물이 이곳 저곳에 설치되어 있고 헬기장과 1등삼각형이라기 믿겨지지 않을 것 같은 삼각형이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걸어왔던 산들의 구비마다 펼쳐 보이는 산봉우리와 산릉아래 석벽리가 아주 작은 장남감처럼 눈에들어오고 펼쳐진 여러 갈래의 하늘금들은 저마다 모양새를 만들며 구름바다에서 살며시 비집고 나왔다, 밤 길 2시간 30분을 올라온 숨가쁜 호흡에 보상이라도 하는 듯 했다,
위험구간
문수산에서 1시간쯤 내려왔다, 위험구간으로 바위와 나무가 절벽에 붙어 내려 갈 길에 달달 거렸다, 발 디딜 공간과 손잡을 안전한 로프가 설치되어 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먼저 지나 간 이들도 아마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 기부재를 다 와서야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니 소름이 끼쳤다,
산으로 둘러싸인 화방넘어 춘양면
문수산 아래 자리잡고 사는 장붓골, 갈밭너나 사진으로 담은 화방은 실제로 전쟁때에 피난민이 모여와 살던 피난터였다고 한다, 또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에 명당터가 있다고 했다,
앞에서 보왔던 지리산 운봉이나 속리산 우복동천,소백산 금계촌, 계룡산 공주 유구, 가야산 만수동의 지리를 둘러 보면서 그래도 지도에 있는대로 볼 수 있던 곳이지만, 이곳은 산릉에서도 거리가 너무 멀고 희미하게 들어와 춘양의 넓은 들판과 개천을 한 눈에 볼 수 없었다.
형제봉이나 구룡산 정상에서 그 모습을 담으려 했지만 아쉬움만 남았었는데 이곳에서야 춘양면의 들녘이라도 사진으로 한 장 남길 수 있어 다행이었다,
봉성면쪽
삼각점이 있는 992봉에 문수지맥을 다녀 가신 선배님의 팻말이 나무에 달려 있고 헬기장도 있다, 이곳에서 5키로쯤 더 진행하면 멀리서도 가름할 수 있을 정도로 구분되는 문수지맥을 남쪽으로 보내고 십승지 산행은 동진해야 하는 솔당재였다, 660봉에 왔을 때 묘 2기가 있고 학산리 내려가는 길도 있어 이 곳부터는 신경쓰며 진행해야 했다,
버섯 재배하시는 분들의 발 길이 잦고 갈림 길도 많고 묘도 많아 춘양으로 내려 설 때까지 이 곳 산이 날 좀더 붙잡아 두고 싶은 걸까, 산행에 도움주시고 두툼한 서류봉투에 담아주신 귀중한 춘양면의 자료는 먼 훗날 내가 좋은 일에 쓰였으면 는 바람으로 이곳에 담지 않았다,
억지로 철로를 놓은 일제는 춘양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조선시대는 실록을 보관한 오지의 춘양이 십승지로써 어떤 의미를 띄고 있을까? 우리집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은 가장 안쪽의 비밀스러운 장소에 넣어 둔다.
그러면 조선시대의 실록을 어디에 보관을 해야 할까 고민을 했을 것이다. 오지중의 오지인 춘양이 적겨지였을 것이다. 지금도 기차나 버스로 가도 3시간이상 걸리는 곳이며 첩첩산중이다. 그 당시에는 말을 타고 걸어서 가면 몇 일이 걸리까? 한양에서 춘양의 거리는 400리 정도 된다.
이렇게 먼 곳 까지 사고지로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장소가 십승지의 하나인 이곳이다. 난 십승지의 의미를 다시 음미하면서 역사만큼이나 깊고 많은 춘양에서 걸었던 산 길은 이제 내려가면 내게 큰 원동력이 될 것이다,
경암(敬菴) 이한응(李漢膺; 1778-1864)의 춘양구곡(春陽九曲)을 찾아 나섰다, 춘양면 의양리 앞 서동천과 운곡천이 합수되어 낙동강으로 흘러 가는 물줄기를 따라 차도로 내려 가면서 이미 콘크리트로 개발해 놓은 물가를 보면서 구곡을 쉽게 찾을 수 없을꺼라 생각했다,
산언덕 아래 구불구불 휘돌아 나아가기도 하고 벼랑에 부딪치며 수많은 세월을 거슬러 왔을 저 물길은 옛날 어르신들이 신선놀음하며 구곡을 지은 싯귀를 쳐다보며 200여 전 자연 그대 로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나라면 그 때 어쨌을까,
적연
一曲笛淵可以船 (일곡이라 적연은 배를 띄울 수 있으니)
옥천(玉川),
2곡
풍대(風臺),
三曲風臺架若船 (삼곡이라 풍대의 가약선)
연지(硯池),
四曲硯池印石巖 (사곡이라 연지에 석암이 비치니)
4곡
五曲滄崖高且深 (오곡이라 창애가 높고 깊으니)
쌍계(雙溪),
6곡옆 연주정
서담(書潭),
7곡
한정(寒亭),
8곡 옆 한수정
도연이다.?
9곡
춘양구곡의 시를 춘양에 사시는 청량산맥님이 해석해 주신 글을 토대로 흔적을 찾아 보았으나 확실한 답은 얻을 수 없었다, 이미 춘양면에서 시멘트로 개발한 곳과 장마로 휩쓸려간 계곡을 단장하여 도시화된 운곡천에 9곡을 내가 본 생각으로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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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요물의 산행일기 원문보기 글쓴이: 요물
첫댓글 나으리 이젠 요물도 잡아서 카메라에 담는 실력을 갖추었으니 주역을 통달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