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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제 글 읽고 답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이번에도 내심 미나모토노님 글을 기대하고 있었거덩요.
그래서 시간이 좀 늦었지만 모자라나마 제 생각을 좀 적고자 합니다.
제 글이 읽기에 흥미가 생긴다는 말 칭찬으로 들어도 될까요? ㅋㅋ
공부를 그렇게 하면 안 되지만 저도 흥미있고 관심이 가는 부분은 공부를 하지만 아닌 부분은 전혀 문외한이라서 말이죠. 암튼 사족 빼고 답글 시작하겠습니다.
1. 句茶國과 차의 관련성에 대한 문제점
구다국와 차와의 관련성은 님이 저번에도 말씀하신 부분이죠.
님 말씀대로 국명에 나온 다(茶)를 차와 연결시킨 것을 지난번 제주도 오'설록 박물관에 갔다가 우연히 알고 흥미가 생겨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구다국과 차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님의 말씀을 공감합니다. 구다국이 차와 연관이 있는지를 국명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알 필요성이 있겠죠. 하지만 이것은 조금 주객이 전도된 방법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단, 제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구다국의 국명에서부터였습니다. 하지만 전 제 생각을 말할때 거꾸로 어떠해서 그런 국명을 얻었을까에 고심해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구다국 국명을 고찰하기보다는 어떻게 그런 국명이 생겼는지 전제조건 유추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식물학쪽 자료를 구해보고 식물고고학하는 후배에게 자료를 부탁한 겁니다. 만약 장백산, 아니 백두산 근방의 식물 유체 관련된 자료가 확보되고, 그것과 중국 본토 자료와의 연관성이 분석되거나 아니면 오늘날까지 그 지역에서 차 재배가 이뤄지고 있는지, 민족지학적인 접근을 시도해서 그것이 어느정도 확인된다면 과거 신고고학이 했던 것처럼 가설 제시-검증이라는 연역적 방법을 통해서 차 재배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뤄졌고, 또 그럴만한 여건도 충분히 있지 않을까, 라는 결론 도출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때 가서 이런 자료들을 토대로 구다국 국명이 생겨난 것도 이런 환경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 중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겁니다.
그러므로 님이 조언해주신 첫번째 국명에 대한 부분은 제가 자료를 더 찾아서 분석한 뒤에 고찰해볼 부분이라고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선행된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나중에 제가 이 구다국이라는 국명에 대해서 고찰이 불가능해진다면 결론으로 구다국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막연히 고대로부터 '백두산 근방에 터를 잡고 존재했던 정치체나 그 지역 주민들은 차를 재배했을 가능성이 높다'라는 식으로 끝맺음을 해도 무방할테니까요. 즉, 구다국은 제 흥미의 시발점이 되었지만 제 공부의 전부도, 무조건적인 귀결을 강요하는 결론도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님 말씀처럼 독점적인 차 생산지로서의 여건도 같이 살펴볼 생각입니다. 지금까지의 제 심증으로는(물론 역사복원은 심증으로 하면 절대 안 되지만) 백두산 근방을 제외한 타지역에서 차 재배가 이뤄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발해 멸망 직후, 동단국 시절만 되도 남당의 20여종 차가 동단국 시장에서 거래되었을 뿐 정작 동단국 자체적으로 생산된 차는 없었습니다. 이는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인력과 기술 계승의 문제인 듯 싶습니다. 그래서 차 재배에 일정기간 단절성이 확인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수확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아직 자료가 그 정도까지 확보되지 않아서리...
이 정도 자료만 축적되어도 상당히 좋은 성과라고 생각은 됩니다만...암튼 첫번째 조언 감사합니다.
2. 구다국이 존재하던 시기의 주위 여러 국호에 대하여
먼저 제가 조금 심한 추론을 해보지만...ㅋㅋ 너무 소설같기는 하지만...
전 개마국에 비해 구다국의 국력이 약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자료가 극히 소략하므로 고구려-개마국-구다국 사이의 외교관계나 대립수준에 대해서 전혀 알 수가 없지만 일단, 인접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개마국은 전쟁을, 구다국은 항복을 선택한 것이 전 의심스러웠습니다. 반대로 고구려가 왜 구다국이 아닌 개마국을 먼저 멸망시켰을까? 하고 말이죠.
전 고구려가 국초 비류국과 대립해서 승리한 뒤에 그 나라를 '다물도'라고 명명하고 봉분지 형태로 관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2가지를 상정했는데 첫째는 상징적인 의미로서의 조치였을 가능성도 둘째는 고구려보다 거대한 비류국이었고 고구려가 국가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었기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죠. 하지만 이후 고구려의 정복전을 살펴보면 행인국 멸망, 북옥저 멸망, 선비 속국화, 양맥 멸망, 갈사국 멸망, 개마국 멸망 등으로 이어집니다. 즉, 대부분의 국가는 그 땅을 성읍으로 만들어 고구려 영토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마국을 치는데 있어 대무신태왕은 그 왕을 죽이는데 그 이전까지 '왕을 죽이고 백성을 안무하는 한편 인명과 재물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식의 내용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 개마국 정벌은 다른 국가들에 대한 정복전과 다른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겁니다. 이것도 몇가지 가능성을 상정해봤습니다. 첫째, 개마국의 왕이 고구려에 적대적이고 무례했다. 둘째, 개마국이 그 일대의 맹주로서 강대했기에 반드시 공격해야 할 전략적 공격대상이었으며 구다국은 그 휘하 소국이었다.(구다국이 그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이라 했던 것은 그들이 개마국과 연관이 있었음을 반증하는 기록이라 봅니다) 셋째, 어떤 이유에서 개마국을 반드시 공격해야만 했고 그 이유는 말의 확보였고, 왕을 죽이고 백성을 위무하고 이미지 관리를 철저히 한 것을 봐서 왕이 못됐다, 그래서 우리가 대신 없애줬다는 식의 대의명분을 내건 침략전을 자행한 것이다...이렇게 3가지입니다. 물론 증빙할만한 근거는 거의 없습니다.
이상이 제가 생각하는 개마국과 구다국에 대한 일련의 小考였는데 뭐 지금도 큰 차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증빙할만한 근거가 거의 없기에 왠만해서는 이에 대해 언급을 자제하는 편입니다. 그럼 다시 시작하죠.
님이 주욱 써 주신 국명들은 크게 봤을때 첫째, 우리식 발음이 한문식 명칭으로 쓰인 경우(이때 한문 자체의 의미가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와 둘째, 우리식 단어의 의미를 가진 한문을 차용해 쓰인 경우로 나눌 수 있을 듯 합니다. 맞습니까? 즉, 님 말씀의 요지는 이처럼 당시 주변의 여러 국가들이 갖고 있는 국명은 각각 그 의미가 다양한데 구다국도 이와 같은 다각도적인 측면에서 국명을 해석해야만 한다, 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맞나요? ^^
이 부분은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일단은 국명 고찰은 제 공부에서 10% 정도밖에 차지하지 않는 부분이 될 겁니다. 만약 고고학적으로든 자연과학적으로든지간에 백두산 일대와 차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구다국의 국명 고찰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작업이지 않겠습니까? 그때 가서 그저 '구다국의 다(茶)는 어떤 의미에서 붙은 명칭인지 모르겠지만 차(茶)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기보다는 우리식 발음을 한문으로 표기하다보니 생겨난 듯 하다'라고 결론내려도 큰 상관은 없을 듯 합니다. 제가 그 결론을 도출하기를 원하지는 않지만(절대로 -.-;;) 그렇다해도 그간의 제 공부는 폐기처분 되어야 옳겠지요. 잘못된 것을 고집한다면...그건 문제니까요.
암튼, 이 국명에 대한 부분은 워낙 학자들마다 개인차도 크고 해석의 여지가 다양해서 국명만 갖고는 별다른 주요한 증빙자료가 될 수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3. 구다국과 개마국의 경우
아! 그런데 님 말씀처럼 황룡국의 경우에서처럼 구다국도 '구다'가 꼭 조합된 단어여야 할 필요성이 있나요? 그 점이 전 더 궁금합니다. 뭐 억지로 끼워맞춘다면 구(句)의 의미는 '글귀, 구절' 뿐만 아니라 '굽다, 막다, 세다, 당기다' 등의 의미도 있기 때문에 차의 맛이나 찻잎의 모양새를 묘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죠. 고구려의 경우처럼 그 국명을 높다, 위대하다의 의미의 고(高)라고 하는 한문과 성, 성읍을 의미하는 구루의 합성어라고 볼 수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른 성격의 두 단어(의미+발음)가 결합되는 것으로 해석해볼 여지도 있는만큼 님의 이 말씀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개마국 역시 백두산 근방 어디라고 했을때 님 말씀처럼 특별난 말 방목지를 찾기는 힘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님의 그 말씀도 여타 확실한 증빙없이 그냥 상식적인 추론에서 나온 말씀 같습니다. 이 역시 과학적으로 '백두산에는 예로부터 말방목지가 생길 수 없는 자연조건을 갖췄다'라는 결론을 도출해낼만한 연구성과는 없었으니까요. 이번에 차에 대한 연구성과가 없는 것처럼요.(그러니까 제가 이런 용감한(?) 글을 쓸 수 있었겠지만요. ㅋㅋ)
『翰苑』에 보면 이런 구절도 등장하고 있죠.
山中有南北路. 路東有石壁. 其高數仭. 下有石室. 可[容]千人. 室中有二穴. 莫測[深]淺. 夷人長老相傳[云]. 高麗先祖朱蒙. 從夫餘至此. 初末有馬. 行至此山. 忽見群馬出穴中. 形小[疆駿]. 因號馬多山也.
해석하면 다음과 같죠.
- 산 속에 남북을 지르는 길이 있다. 길 동쪽에 낭떠러지가 있는데, 그 높이가 몇 길이나 된다. (낭떠러지) 아래에 석실(동굴인 듯)이 있는데 가히 1천명을 수용할 만하다. 동굴 안쪽에 두 개의 굴이 있는데 너무 깊어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이인(夷人 : 고구려인) 장로가 (옛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를 해줬다. "고(구)려의 선조인 주몽이 부여를 따를때 이곳에 이른 적이 있다. 일찍이 (주몽이) 아직 말을 갖고 있지 않았을때 (그는) 이 산까지 가서, 갑자기 말떼가 굴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꼴은 작으나 튼튼하고 잘 달린다. 때문에 (이 산을) 마다산이라 일컫는다." -
한원은 7세기 중엽 이후에 쓰여진 책입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을 통해 봤을때 마다산의 전통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내려온 듯 합니다. 아마 국초 부여를 따를때를 언급한 것을 보면 고구려 국초의 상황을 전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고구려는 유리명태왕 시절까지는 확실하게 부여보다 약했으니까요. 그때 고구려인들은 이미 마다산에서 과실수 아래로도 지나갈 수 있는 과하마(果下馬)를 발견한 것이 아닐까요? 이후 고구려의 특산품으로 과하마를 꼽지 않은 문헌이 없는데, 그런 기록들이 등장하는 시기는 고구려가 부여 지방이나 더 서쪽의 내몽골고원 등지를 차지하기 이전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대무신태왕때인 1세기 초반 무렵, 고구려는 부여를 한번 크게 격파하지만 그 영토를 경략했다는 기록이나 증거는 없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전 과하마의 방목지가 백두산 일대일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물론 지금도 백두산 근방에서 말을 치는지는 한번 살펴봐야 겠습니다. 혹은 방목지로 적합한 지형인지도요. 그러므로 덮을 개(蓋)와 말 마(馬)가 합쳐져 개마국일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백두산이 고구려때는 말이 많아서 마다산(馬多山)이라고 불려졌다고 하질 않습니까? 그리고 말과 양이 살 수 있는 여건에 대해서도 알아봐야겠지만 말이 살 수 있는 곳이라고 꼭 양이 살 수 있는지 여부도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대무신태왕의 신마 거루가 끌고온 100여마리의 말이 개마국의 말일수도 있다고 한 이유 역시 고정관념을 탈피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의 발상이었습니다. 님 말씀처럼 실제『三國史記』를 보면 三月, 神馬<駏䮫>將<扶餘>馬百匹, 俱至<鶴盤嶺>下<車廻谷>라고 하여 거루가 끌고온 말이 부여산 말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중국 문헌을 보면 부여의 말은 특산품으로서 이미 중국에도 널리 알려질 정도였고 부여 문화에 유목문화의 요소가 상당히 많음도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요. 하지만 고-부 대전에서 대무신태왕은 전투는 이겼을지 모르지만 결국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옵니다.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자책하는 장면도 역시『三國史記』에 나오죠.
그때, 신마 거루가 100여필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말을 끌고 고구려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를 한번 상기해 봤습니다. 것도 대무신태왕이 타고 있는 말을 잃어버릴 정도의 혼전 속에서 그 말이 살아남아서 말이죠. 그래서 전 이 기록을 예전에는 곧이곧대로 해석했는데 최근에는 의심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말들은 방목지에서 길러지는 말이라고 보기는 힘들 듯 합니다. 요즘에도 야생마 한마리 멋진 놈이 나타났다 해서 방목지의 암말들이 그 녀석을 따라 어디론가 100마리씩이나 이동하는 건 우스운 일인데 하물며 말이 귀한 옛날에는 뭐 말 다 했죠. 부여왕이 죽었다해서 부여가 국가에서 관리하는 방목지를 허술하게 둘 만큼 국가가 흔들렸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봤을때 전 그 말들이 야생마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며 그렇기 때문에 전 부여산 말이라고 했지만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를 한 것 뿐입니다.
기실 거루라는 한문 단어 중 '거(駏)'는 버새, 즉 암나귀와 수말 사이에 난 종을 의미하며 '루(馬+婁)' 역시 큰 당나귀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루 역시 과하마의 일종인데 일반적인 과하마보다 조금 더 큰 변종 정도로 보여집니다. 그렇다고 했을때 거루가 끌고온 100여필의 말들 또한 과하마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물론 부여산 말의 종에 대한 정확한 연구는 없지만 당시 부여가 서역산 호마(胡馬)에 대한 인식이 있었고 또 보유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가능성으로만 따진다면야 부여산보다는 마다산에 전 더 비중을 두고자 합니다.
어차피 국명은 차후에 언급한다고 했지만 어쨌든 국명에 대해서는 님 생각도 일리가 있겠지만 제 생각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게다가 과학적인 근거자료만 제시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개마국도 생각해보니 재밌는 소재가 될듯 합니다. 하지만 일단 저는 차에 주목해서 자료를 정리해볼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님처럼 국명, 그 자체에 대한 의미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님 말씀대로 그건 중국식 시각의 호칭일지도 모르는데 그게 얼마나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겠습니까?
4. 구다국이 차 생산지로서의 자격이 있는가
님이 제시한 4가지 사항, 제가 앞으로 공부할때 많은 도움이 될 듯 합니다.
특히 2번째 경우는 많이 비슷하긴 하지만 절대적으로 같지만은 않죠. 또한 더 생각해볼 것이 그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는 다른 식물종자가 더 있는지도 연구대상에 포함됩니다. 그렇다 했을때 제가 애초에 제시한 자료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겠죠. 제가 그 쪽 전공이 아니라서 공부는 더 해야겠지만(아마 앞으로 적어도 3주간은 할 듯 합니다) 일단 말씀드리는 싶은 것은, 제가 제시한 자료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약간의 고찰만 한 것 뿐이고요, 이 부분은 차후 제 글을 기다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여휘님이 비교의 대상으로 삼은 차일 가능성은 없다고 봅니다"와 같은 님의 단정도 아직은 시기상조일 듯 합니다. ^^ 그리고 제가 구다국과 차와의 연관성에 대해 확신이 없던 것은 언제까지나 '~ing' 형임을 의미하는 발언이었습니다. 고고학도 마찬가지지만 자료가 생겨날수록 학설은 바뀌지요. 그게 쉽지만은 않아서 문제지만요. 님의 이 조언에 대해서는 제가 차후 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접근방법론을 적용하면 해결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국명 고찰보다는 더 확실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4번째의 구다국에서만 차가 대량생산되었나와 다른 국가에서는 차라고 불릴만한 것이 없는가? 에 대해서는 김용만 선생님 말씀대로 약재로서 차로 음용된 것이나 님말씀처럼 보리와 같은 곡물인데 차로 음용된 것들을 살펴봐야겠죠. 그런데 보리와 같은 곡물을 차로 끓여먹는 것은 티백으로 가공된 것일뿐, 찻잎처럼 직접 가공하여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닐테니 그건 비교대상은 아닐 듯 합니다. 전 보리를 직접 어떻게 해서 차로 끓여먹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모를 수도 있지만요. 일단, 지금까지 제가 봤던 식물고고학 관련 자료 중에서 선사시대인들이 곡물로 차를 끓여먹었다는 근거는 희박합니다. 쌀차니 조차니 밀차니 하는 건 없으니까요.
이건 보리차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봐야 겠네요. 하긴 최근 (식물고고학 하는) 그 후배가 알아보니 미국에서 강아지풀로 만든 과자가 있답니다. 강아지풀이 보리의 선조격 식물이랍니다. 아셨습니까? ㅋㅋ 저도 얼마전에 알았습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강아지풀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무슨 성분이 어쩌구 저쩌구 설명하는데 관련된 외국 논문을 보여주면서 하는 말이 동물도 안 먹는 거랍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강아지풀로 만든 과자가 있다고 해서 항공우편 택배로 사서 시음해보고 또 논문 준비하고 하더군요. ㅋㅋ 못 먹는 것도 먹는 세상이니 원~암튼 이 부분은 더 알아봐야겠습니다. 과거에 끓여서 그 향과 맛을 우려내어 먹을 수 있는 종류의 식물이 얼마나 있는지 말이죠.
그런데 티백(Tea Bag)의 기원을 보면 보리차도 20세기에 들어서나 먹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1904년 뉴욕의 한 가게에서 헝겊 주머니에 찻잎을 넣어 샘플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 티백의 기원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봤을때 이 부분은 한참 더 생각해봐야겠네요.
물론 약재류도 차로 먹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차라기보다는 대부분 탕(湯)이 아니었을가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려서 마시는 것이나 끓여서 마시는 음료는 모두 차라고 하는데 이는 대용차(代用茶)와 구분해야만 합니다. 그와 관련되어 참고할만한 자료가『朝鮮王朝實錄』에 나와있습니다. 선조 31년(1582) 6월 23일, 대신들과 함께 양 경리가 참소당한 사정과 중국에 보낼 자문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의 에피소드입니다.
- 그리고 지난번 나에게 ‘귀국에는 차(茶)가 있는데 왜 채취하지 않는가?’ 하고는, 좌우를 시켜 차를 가져오라고 하여 보여주며 ‘이것은 남원(南原)에서 생산된 것인데 그 품질이 매우 좋다. 그런데 귀국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것을 마시지 않는가?’ 하기에, 내가 ‘우리 나라는 풍습이 차를 마시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다시 ‘이 차를 채취해서 요동(遼東)에 내다 판다면 10근에 1전(錢)은 받을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할 것이다. 서번인(西蕃人)들은 기름기를 즐겨 먹기 때문에 하루라도 차를 마시지 않으면 죽을 지경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차를 채취하여 팔아서 1년에 전마(戰馬) 1만여 필씩을 사고 있다.’ 하기에, 내가 ‘이것은 육안차(六安茶)의 종류가 아니고 작설차(鵲舌茶)이다.’ 하니, 답하기를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귀국에서는 인삼차를 마시는데 이것은 탕(湯)이지 차가 아니다. 그것을 마시면 마음에 번열이 생기므로 마음이 상쾌해지는 차를 마시는 것만 못하다. 귀국의 배신(陪臣)들이 차를 마신다면 마음이 열리고 기운이 솟아나서 온갖 일들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이어 나에게 차 두 봉지를 주었는데, 이는 당신도 차를 마시면 일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깨우쳐 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또 차를 위해 말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일을 잘하지 못한다 하여 꺼낸 말이니, 계획적으로 한 말이다.” -
선조때 명나라 장군 양호(楊鎬)가 탕과 차를 혼동하여 먹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빗댄 표현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이것은 육안차, 즉 안위성 육안현에서 산출되는 중국차가 아니라 작설차, 경남 하동군 화개와 전남 보성 제다에서 만든 차라고 얘기를 하면서 구분을 짓자 양호가 하는 말이 그것은 크게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죠. 차의 출산지에 의한 구분이 중요한게 아니라 너네 조선인들은 차와 탕도 구분 못 한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러니까 중국산 차 2봉지를 주면서 이걸 먹으면 일 잘 할꺼다, 라는 식으로 무시한 것이었고요. 이 지적은 한국의 차문화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다산 정약용 역시 '차를 탕환고처럼 마시는 따위로 알아 (중략) 생강차, 귤피차, 모과차, 상지차라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중략) 정통차는 오직 녹차, 홍차, 오룡차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찾는 것은 김용만 선생님이 언급하신 약재류를 끓인 탕도 아니고, 님이 말씀하신 보리차와 같은 근대의 소산물도 아닌 순수한 차, 그것도 녹차 쪽에 심증을 두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봤을때 구다국, 아니 이 용어 자제하죠. 백두산 일대가 차 재배지로서 적격지인지 이제부터 알아봐야겠죠? ^^
5. 실제 우리역사에서 차에 대한 기록은??
분명히 위에서 차와 탕(단순히 우려먹는 것...)을 구분했으니 님의 이 글에서 상당부분은 해당사항이 없는 글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습니까? 그리고 님은 '백두산이 한라산처럼 안개가 가시지 안고 뿌옇게 되어 있다고 해서 차가 자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설사 백두산에서 한라산에서 자라는 차나무가 자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명을 차지할 정도의 규모나 특성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으니까요.'라고 하셨습니다. 전 백두산이 한라산처럼 안개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차가 자랄 수 있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 중에서 녹차가 자랐을 것이다, 라고 했던 기억이 나는데 제가 틀렸난요? 그리고 그런 흔적이 없다는 것도 님이 제게 확인시켜주신 것이 아니니 단정짓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 아닙니까?
그리고 님은 특산품 갖고 국명을 댄 것을 아직 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국명은 중국식 호칭일 수도 있다고 말씀하신 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적이 당황스럽습니다. 순 우리식 표현이 확인되지 않는 이상, 이 역시 상식에 기초한 섣부른 단정이라고 봅니다. 특산품과 국명 사이의 관계에 대한 님의 집요한(?) 관심은 이제 제가 앞에서 얘기했듯이 크게 중요한게 아니므로 앞으로 언급되는 횟수가 한층 적어질 것으로 봅니다. 혹시 참고가 될까 해서『부족지』(라시드 앗딘 / 김호동, 2002, 사계절)의 내용을 잠시 인용합니다. 110page의 내용입니다.
- 캉글리(Qangqli)는 다른 사람들이 노략물과 약탈물을 가축 위에 싣고 있을때 이 종족은 자기 나름의 기지를 발휘하여 수레를 만들어서 자기네 노략물과 약탈물과 재물을 그 위에 실었다. 이런 연유로 그 종족에게 캉글리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캉글리인의 모든 지파는 그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알라께서 가장 잘 아신다! -
캉글리는 투르크어의 수레, 마차를 뜻하는 qangli에서 나왔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가미민족정복설로 유명한 에가미 나미오는 궁려(宮廬) · 궁려(宮閭) 등이 고대 유목민이 이동시 가옥을 싣는데 사용하던 수레를 의미하는 말이지만 수레 위에 가옥이 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국측 자료에는 그 말이 천막(天幕)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중국측 문헌의 투르크계 족명인 고차(高車) 역시 qangli의 뜻을 한자로 옮긴 것이라고 역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수레 정도면 특산품이 될 수 있고, 그에 따른 족명이 이후 계속 붙여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님이 투르크의 사례가 한국사에 적용되냐고 하신다면 제가 할말은 없습니다. 그런 사례를 님이 보신 적이 없다고 하길래 전 인용한 것 뿐이니까요. 단지 딱히 고정적인 시각으로 한국사를 볼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또한 님은 구다국의 구(句)에 자꾸 집착하시는데 앞에서 얘기했지만 '구다'가 꼭 하나의 단어를 이뤄야만 한다는 것도 님만의 고정관념 아닐런지요? 고차국의 경우도 어울리는 단어는 차(車) 하나 뿐이고 고(高)는 뭐 많다, 위대하다 정도의 고구려와 같은 의미로만 쓰였을 듯 싶은데. 그럴때 님처럼 국명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쓸 필요가 그렇게 있는지 전 그게 더 궁금합니다. 역사복원의 방법론 중 국명에 의한 그런 부분이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요? 물론 고증 가능하면 좋은 자료가 되겠지만요.
그리고 님이 만드신 그 지명 파일은 저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님 말씀처럼 시기가 올라갈수록 한자와 의미가 상통하지가 않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은 위에서부터 계속 하시는 말씀이 국명의 글자 해석을 두고 어떻게 해야하냐, 는 것이니 제가 볼때는 조금 모순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명으로 그 나라의 문화 혹은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견강부회(牽强附會)한 해석이 아닐까요?
다시 한번 더 말씀드리지만 구다국의 국명을 통해 차에 대해 공부를 시작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구다국의 국명을 곧이곧대로 한문 의미로 해석한 뒤 받아들여 구다국은 차를 재배하던 나라였다, 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이는 님도 아실 겁니다.
그래서 제가 채택한 방법론은 구다국을 제외한 상태에서, 인삼이라는 모티브를 얻어 인삼과 차의 재배환경이 얼만큼의 유사성이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며 아울러 식물 유체 등을 통한 자연과학의 연구성과를 빌어 백두산 일대의 차 재배와 관련된 각종 자료를 얻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는 현지답사를 통해 확인된 백두산 근처의 차 재배 관련 기록이나 민족지학 측면에서 연구된 자료도 포함되는 것이겠죠. 이를 통해 저는 과거 신고고학이 고고학계의 돌풍을 불러일으킨(물론 지금은 비판받지만 ^^;) 연역적 접근법을 사용해서 피드백 과정을 통한 가설 검증으로 논지 전개를 할 생각입니다. 이 사이 토양, 기후, 강우량 등의 식물이 자라는 최적조건 등에 대해서도 알아볼 것이며 과학적인 성분 분석 또한 병행하도록 노력할 겁니다. 그 뒤에 문헌상에 보이는 차의 흔적을 찾아나갈 겁니다. 고대 문헌 중 차에 관련된 것은 한정되어 있으니 이 작업은 그리 이견이 없을 듯 합니다. 그리고 이 작업 중에 구다국에 대한 국명이 다시 거론되어야 옳겠지요. 그래서 만약 앞에서 연구한 결과, 차 재배지로서 백두산 일대가 적합하다, 는 결론이 나온다면 그때 가서야 구다국의 국명은 차와 연관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적합하지 않다면 그때 가서야 구다국의 국명은 차와 연관이 없다, 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렇게 해야만 확실히 이 부분에 대해서 알 수 있을 듯 한데 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물론 방금 제가 쓴 이 말은 까페에 지금 써놓은 글이 이렇게 안 써진 글이므로 님 말씀대로 논지 전개가 매끄럽지 못 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이제 '진행중'이니까 전 크게 개의치 않겠습니다.
제 글이 결코 짧은 글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주의깊게 읽어주시고 일일히 조언을 해 주신데 대해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꼭 좋은 성과 보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저도 기대합니다. 처음에 '구다국'과 차를 관련시킬 때, 그 박물관측이 다른 설명 없이 관련시킨 것이 좀 뜬금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 사실 박물관에서 설명을 붙인 것을 다 믿는 것은 무리입니다. 제 경험상 틀린 것이 많더군요 ㅎㅎㅎ) 님의 공부를 보니 아주 재미있습니다. 진도가 팍팍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
ㅋㅋ 역시 제 편을 들어주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알겠습니다. 김용만 선생님과 아혜모호님 때문에라도 제가 딴 생각을 못 하겠습니다. 그럼 조만간...좋은 결과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