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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광모 논픽션>
세월호 선장 구조·생포를 보면서 지강헌 일당의 무장탈옥·인질사건 체험을 회상한다
1.
모든 사건·사고와 그 대응에는 운(운수)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가장 큰 불운은 의사결정 의지도 능력도 책임의식도 없는 허수아비 선장과 허수아비 국무총리가 사고 당일에 그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늘이 무심했다는 점이다.
모든 의사결정과 그 집행의 성공에는 타이밍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선장은 승객들에 대한 탈출명령 타이밍을 놓쳤다. 500명 정도가 탑승한 여객선이 연안에서 침몰할 때, 해양경찰청장을 시작으로 하여 안전행정부장관, 해양수산부장관, 국무총리도 인명구조에 동원해야 할 적절한 인력과 자원을 급파해야 할 의사결정과 집행의 타이밍을 놓쳤다. 이외에 경찰청장, 국정원장, 해군참모총장, 소방방재청장, 청와대 안보실장과 비서실장도 즉각적인 지원에 함께 뛰어들어야 할 의사결정 참여와 지원의 타이밍을 놓쳤다. 검찰청, 감사원, 경찰청 등 사정기관들의 간부들도 타이밍을 놓치거나 부적절한 타이밍에 부적절한 짓으로 국민을 실망시키는 실수를 연발했다. 이와 같이 타이밍을 놓치는 것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 타이밍을 놓친 책임을 사람이 아닌 해양경찰청, 안전행정부, 내각 전체 등 국가조직의 책임으로 돌려 핵심적인 의사결정자였던 장차관급에 대해서 민·형사상의 책임과 그 구상권에 면죄부를 받게 해준다면 이들은 얼마나 행운을 얻게 되는 것일까.
2.
88서울올림픽이 10월 2일 끝나고 2주일이 경과된 1988년 10월 16일 일요일 오전 7시 반경, 치안본부(현재의 경찰청) 테러담당 실무경찰관(경감)으로부터 긴박한 목소리의 전화가 나에게 걸려왔다. 서울에서 중대한 인질사건이 발생하여 테러사태가 발령되어 경찰차를 집으로 보낼 테니 즉각 출동해 달라는 전달이었다. 나는 당시 테러에 관한 서적을 발간한 행정학교수로서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준비를 위하여 국무총리 산하의 ‘국가대(對)테러위원회’에서 1983년부터 위촉된 ‘대(對)테러 협상전문위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TV를 켜니 인질범과 경찰의 대치 자막과 뉴스가 이미 방송되기 시작했다.
바로 8일 전인 10월 8일,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충남 공주교도소로 죄수들을 이송하던 법무부 호송차 속에서 교도관들이 죄수들에게 제압당해, 총기를 탈취한 죄수 4명이 도로 위에서 집단 탈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이 8일 후에는 흉악한 무장인질범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탈주 주범은 35세의 지강헌이었다. 그는 556만원을 훔치고 도주하다 붙잡혀 올림픽 개최기간 중에 17년 형을 선고받았다.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이 더해진 것이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제정한 사회보호법에 따라 상습범죄자 등 사회악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었지만 그 집행의 형평성과 공정성에 있어서는 그간 문제가 많이 제기된 상태였다.
특히 지강헌은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새마을중앙회 총재로서 수십억 원의 공금횡령과 탈세 혐의로 구속되고도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 형평성과 사회적 부조리에 크게 분노했다. 그는 힘없고 돈 없는 교도소 동료들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선동했고 곧 다른 교도소로 이송될 20대의 죄수들과 탈주 계획을 짰으며 결국 안광술, 한의철, 강영일과 함께 4명이 호송차에서의 무장 탈주에 성공했다.
경·검·군은 이들을 체포하고 국민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방방곡곡을 검색했지만 이들의 행방은 1주일 동안 신출귀몰했으며 국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15일 밤에는 그간 서울 시내 가정집들을 돌며 도피행각을 벌이던 지강헌 일당이 서대문구 북가좌동 고영서씨 단독주택에 몰래 숨어들었다. 이들을 발견한 고씨 가족은 공포에 사로잡혔으나 침착하게 대응해 탈주범들을 안심시켰고 다음날 새벽 이들이 잠든 틈을 이용해 경찰에 신고했다.
3.
현장에 처음으로 달려온 경찰관은 인근 파출소장과 순경들이었다. 탈주범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파출소 경찰관들이 소지한 권총과 가스총과 방망이로는 집안으로 진입하여 무장탈주범 4명을 체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세월호 참사에서도 현장에서 고무보트 하나로 인명구조 활동을 벌였던 123경비정 정장의 계급은 파출소장급의 경위. 고무보트에 탄 몇 명의 해경대원에게 세월호 선체를 뚫고 들어가서 수백 명을 구조해 오라는 해경 고위층의 탁상 명령들은 실현 불가능한 허상이었음). 더욱이 경찰이 달려온 것을 눈치 챈 탈주범들은 즉각 고씨 가족을 인질로 앞세웠다. 이어서 서대문경찰서장이 전경 중대를 이끌고 현장에 도착하여 순식간에 고씨 집과 골목길을 에워쌌다. 이 때 지강헌은 총을 발사했다. 인질을 죽이겠다고 소리치면서. 물론 서대문경찰서장 등 간부들은 방탄조끼를 입고 담벼락 밑에 숨어 숨을 죽였다. 곧 이어서 서울시경 경비책임자(경무관)가 수백 명의 기동대원들과 함께 급파되어 서대문경찰서 전경들을 밀어내고 현장을 접수했으며 약 100미터 거리에 있는 빈집에 지휘부를 설치했다.
이렇게 되어 이 사건은 법무부 책임의 탈옥·무장탈주사건에서 경찰 책임의 긴박한 인질진압사건으로 변모되었고 만일 인질이 무사히 구조되지 않으면 정권 차원의 무능과 불신으로 이어질 중대한 인질구조 사태로 변질되었다. 그래서 법률적으로 각 부처를 통할하는 국무총리의 신속한 의사결정과 지휘가 필요하게 되었다. 더욱이 당시에 인질구조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특수조직은 대(對)테러특공대였는데 특공대는 경찰과 군에 각각 설치되어 운용되었으며 대테러특공대를 국내 사건에 동원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은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부여되어 있었다.
당시의 국무총리는 지강헌 일당의 무장인질사건을 보고받자 즉시 테러에 준하는 사태로 판단하고 경찰청(당시는 치안본부)의 대(對)테러팀이 현장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만일 국무총리가 지강헌 일당을 무장간첩에 준하는 인질사건으로 판단했다면 현장은 합참의장이 지휘하는 군에게 넘어가고 경찰은 후선의 지원을 담당하는 것이 당시의 매뉴얼이었다.
국무총리가 현장의 진압책임을 대(對)테러특공대에게 맡긴 것은 진압목표가 변경된다는 중대한 의미를 지녔다. 특공대는 대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인질을 전원 구출하는 최고도의 정밀타격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어느 국가이던 간에 진압 공격 시에 최우선적으로 범인을 사살하는 작전을 펼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 대테러특공대가 출동하도록 명령받으면서 지강헌 일당의 운명은 이미 죽은 목숨이 되어버린 것이다. 특공대의 지휘라인에 있는 경찰청장, 장관, 총리 또는 대통령이 범인들을 무조건 생포하라는 별도의 명령을 특공대장에게 추가로 하달하지 않는다면... 물론 그들은 침묵했고 그러한 진압목표와 매뉴얼을 알지도 보고받지도 못했으리라.
4.
당시의 대테러특공대장은 육사를 졸업하고 특전사의 특공대 중령으로 근무하다 1983년에 경찰 경정으로 발탁되어 88서울올림픽에 대비하기 위한 경찰특공대를 창설하고 이를 6년간 이끌어온 최고의 테러진압엘리트였다. 몸매와 용모도 유명배우 못지않았으며 지휘력이 탁월하여 88올림픽이 끝난 후 총경으로 승진되어 경찰서장급의 보직에 배치될 예정이었다. 특공대원들도 모두 경위나 경사 급으로 대부분이 테러특공 훈련 6년 차의 최정예 베테랑들이었다. 도둑고양이 네 마리를 잡기 위해 호랑이 떼가 동원된 형국이었다.
내가 현장 지휘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특공대가 고씨댁 진입작전 준비를 완료하고 대(對)테러협상팀과 조율한 진입 시점을 대기하는 중이었다. 현장지휘부가 설치된 빈집의 거실에는 장군스런 체형과 카리스마를 갖춘 경비경찰 책임자(경무관)의 지휘 하에 인질사건의 진압과 범인 체포 작전회의가 긴박하게 열리고 있었다. 그들의 무전으로는 신속히 진압하고 인질을 조속히 구출하라는 독촉과 현장상황을 보고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협상전문가들은 현장 지휘관에게 인질의 구출이 최우선목표라면 국제적인 관행은 3일 이내 더 나아가 7일까지도 시간을 끌어 범인들을 지치고 상호 갈등하도록 인내하는 것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목표에 실패하는 낭패를 보지 않으려면 언론의 성화와 비판이나 외부의 독촉과 몰이해에 상관하지 말고 현장에서는 인내와 냉정과 신중함을 유지하도록 격려했다. 현장지휘부는 지강헌의 형, 한의철의 애인, 강영일의 어머니 등을 데려와 이들의 자수를 권유하고 설득하고 있었다.
한편 현장지휘부의 안방에는 서울지검 차장검사와 검사 2명이 교도관들을 데리고 탈옥범들의 체포와 수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 그들은 뒷방마님 격이었고 현장에서의 누구보다도 전전긍긍했다. 수사경찰이 아닌 현장의 경비와 진압 경찰은 검찰의 지휘와는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검사와 교도관들은 지강헌 일당의 탈주사건에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법무부 소속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차장검사는 몇 년 전 자신이 부장검사일 때 지강헌을 직접 심문한 경험이 있는데 지강헌이 어릴 적에 몹시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을 보냈고 성품이 보기보다 여린 것으로 기억했다. 그래서 그는 지강헌이 결국 스스로 투항할 것으로 예측하고 기대하면서 또한 기원했다.
밖에 모인 기자들은 지강헌 드라마가 어떻게 결말날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지강헌 일당이 무장 탈주 후 1주일 이상이나 전국을 떼로 몰려다녀도 경·검·군이 이를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신고를 받고도 초동 대처 부실과 무능, 정부의 책임 소재 그리고 이들의 체포와 인질구출 대책 등에 대하여 질문들을 던졌다. 어떤 기자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인 세상에 분개한 지강헌 일당이 탈주 당시 교도관으로 부터 뺏은 칼빈소총을 들었을 뿐이지 테러범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왜 대(對)테러 진압작전으로 과잉대응하려 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정부의 책임을 묻어버리거나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하는 의도가 아니냐고 되묻기도 했다.
현장 컨트롤 타워의 정상에 있는 서울경찰청장은 오늘 자신의 지휘 하에 긴급 편입된 대테러특공대장의 바로 직속상관임을 과시하려 했는지 또는 인질구출이 실패했을 경우 그 후폭풍의 심각성을 지나치게 염두에 두었든지 특공대의 진압작전을 직접 장악하려는 듯 특공대장의 바로 옆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본격적인 인질사건이 시작된 지 8시간 이상이 지나자 범인들의 집중력과 긴장감은 이완되고 상호간의 신뢰와 의견이 엇갈려 서로 소리쳐 싸우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강영일이 인질 1명을 데리고 집밖으로 나왔다. 자기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고 당국과 협상을 해보겠다고. 대테러협상경찰관(경감)이 나서서 이들이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격리하다가 특공대원들이 그를 제압했다. 그간 집안에 설치된 감시카메라에는 막내 한의철이 극도의 불안감과 초조감에 휩싸인 모습이 흐릿하게 나타났다. 결국 얼마 후 강영일이 자진 투항한 것으로 오인한 막내 한의철은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쏴 죽음을 택했다. 안광술도 지강원의 총을 빼앗아 같은 방법으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갑자기 두 발의 총성이 울렸어도 특공대장은 진입을 자제했다. 진압매뉴얼을 벗어나서 이제는 지강헌을 생포하면서 인질을 100% 구출할 자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특공대장은 대원들에게 발포명령이 내리는 경우에도 범인의 하반신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정오 쯤 동료 2명의 자살에 신경질이 된 지강헌은 라디오의 볼륨을 크게 올렸다. 영국 록그룹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장중하면서도 구슬프게 울려 나왔다. 잠시 후 고씨의 큰 딸을 인질로 붙잡고 창문에 나타난 지강헌은 유리창을 깨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며 깨진 유리창 조각으로 인질과 자신의 목을 그으려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 이에 놀란 서울경찰청장은 총을 쏘라고 소리쳤다. 대원들은 최대한으로 범인의 하체를 겨냥했지만 창문으로 다리가 가려져 결국 복부에 총격을 가하면서 방안으로 진입하여 피로 범벅이 된 범인을 제압했다. 물론 마지막 인질도 손톱자국 하나 없이 무사했다. 전날 밤부터 14시간에 이른 숨 막힌 인질극은 이렇게 주범의 참혹한 사살과 2명의 자살 그리고 1명의 체포로 종료되었다.
5.
복부와 넓적다리에 수많은 총탄을 맞은 범인을 병원으로 빨리 이송하기 위해 특공대원들이 그를 업고 앰뷸런스를 향해 뛰어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차장검사와 검사 2명이 뛰어나와 범인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특공대의 과잉진압에 경악했고 혀를 내두르며 경찰 지휘관들을 수사해야 한다고 수근거렸다.
그러나 나는 현장에서 다른 중요한 두 가지의 문제점을 보았다.
첫째는 인질사건 진압의 최고전문가인 대테러특공대장의 발포 시점 결정과 이에 따른 특공대원들의 발포를 아마추어인 경찰청장이 직접 명령하는 체계가 얼마나 위험하고 실패가능성이 높은 것인가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날은 상황과 운이 좋아 인질구출작전이 성공하긴 했지만 테러사건이 아닌데도 더욱이 자살을 시도하려는 범인을 체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하게 처참한 상황으로 범인이 사살된 것이 아닌가?
둘째는 지휘책임자의 지휘 위치가 각각 어디여야 되는가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지강헌 진압작전에서 대한민국 경찰의 2인자인 서울경찰청장이 총경 진급예정자인 대테러특공대장을 데리고 자신이 직접 공격명령을 내리기 위해 담벼락에 붙어있는 장면은 코미디가 아닐 수 없었다. 지휘총책임자가 직접 담벼락에 붙어있으니 현장지휘부는 물론 다른 경찰관들은 할 일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도 그들의 조력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위기 발생 시 장관과 청장급은 무조건 자신의 자리(상황실 포함)에서 지휘를 해야 분초를 다투는 긴박한 골든 시기에 대응하여 불확실성과 피해를 최소화는 의사결정을 신속하고 올바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장차관이 즉각적으로 현장에 달려갈 때에는 대규모 사건·사고일 경우 오히려 초동 조치를 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칠 뿐만 아니라 초동 조치에 방해가 될 뿐이다. 따라서 고위층이 현장을 방문할 때는 우선 긴급사태가 일단락된 이후에 현장 관련자들을 격려하고 지원하거나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돕거나 현장에서만 가능한 협의사항이 있을 경우 등으로 자제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얼마 후에 서울경찰청장으로부터 검찰의 수사결과를 전해 들었다. 검찰에 소환된 대테러특공대장은 특공대가 출동명령을 받는 순간부터 발포권이 자신에게 부여되는 것이며 이 사건 진압에 있어서도 자신의 고유권한인 발포시점의 결정을 자기가 직접 특공대원들에게 명령하여 발포된 것이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또한 일반 군경과 달리 대테러특공대는 특수무기와 최신자동장비로 무장되어 한번 발사되면 파괴력이 엄청난 다발 총격이 되기 때문에 처참한 결과는 당연한 것이고 그러한 상황과 결과를 공개하는 것이 차후 범죄 예방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으로 어느 국가의 대테러매뉴얼에도 적시되어 있음을 검찰에 알렸다. 한편 서울경찰청장은 테러사태가 발령되었으므로 자신은 진압총책임자로서 모든 진압 절차와 과정을 법령과 대테러매뉴얼에 따라 집행했으며 범인이 인질을 죽이려는 순간을 포착하고 대테러특공대장에게 즉각 대응하라고 현장에서 명령했다는 점을 검찰에 이해시켰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죽은 범인은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으며 모든 진압 관련자들에 대한 검찰의 조사는 대테러매뉴얼에 따라 과잉대응이 아닌 것으로 무혐의 처리되었다.
사건 주범 지강헌의 참혹한 죽음으로 그의 범행동기와 관련된 사회적 부조리와 부패를 감싼 각종 제도와 시스템에 관한 논의는 물론 책임질 인사들도 다시 모두 암흑에 가려졌다. 지강헌 사건 이전이나 이후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악행과 죄는 모두 지강헌의 몫으로 돌려졌고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한줌의 뼛가루에 불과했다. 다만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지강헌의 자학적인 어록이 대한민국에서 유명해졌을 뿐이고 지강헌의 인질이 되었던 고선숙씨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유일한 생존자였던 강영일은 19년을 복역한 후 출소되었다.
6.
세월호 참사에서 선장과 항해사들이 선박과 함께 수장되었다면 그들에게 침몰과 구조와 관련된 모든 불법행위와 책임이 떠넘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선장과 승무원들의 승객구조 용기와 성과를 극대화시켜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후속대책에 많은 사람들과 언론이 열중했을 것이다.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 사건에서도 빙하와 충돌한 운항책임 자체만으로도 선장의 죄 값은 죽을죄에 해당되는데 선장은 승객 구조에 최선을 다 하고 스스로 배와 함께 목숨을 버린 영웅으로 만들어졌다. 침몰 책임으로 죽어야 될 선장이 스스로 구조과정을 통해 죽었기에 영웅이 된 것이다. 위기 시에 사회적 좌절감과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희망과 용기와 힘을 되살릴 수 있는 영웅에 관한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에서는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모두 살아있다. 그들은 각기 자신의 과실을 숨기고 살기 위해 서로 공격하며 서로 잡아먹으려고 한다. 살아 있으니 입을 막을 수도 없다. 그들 민간인들은 침몰과 구조실패의 책임을 무능과 늦장대응과 헛발질과 비리에 찬 행정부와 공유하자고 달려들게 마련이고 이에 놀란 현직 관료와 정치인들은 다시 민간인들을 격렬하게 공격하면서도 각기 다른 부서들이나 과거 행정부의 적폐로 책임을 떠넘기는 치열한 횡적인 싸움의 소용돌이로 빠지면서 그간 숨겨졌던 각종 정보와 상호갈등이 넘쳐흐르게 되었다.
정부 내의 상하관계에서도 싸움은 치열하다. 대통령 뒤에 숨어 자신들의 과오와 책임을 은폐한 청와대 참모들에게 등을 떠밀린 대통령은 내각에 책임을 떠넘기고 사법고시 출신의 국무총리와 정치인 출신의 장관급들은 행정고시 출신의 해경청장을 포함한 관료들과 세월호 관련 공공기관들에게, 해양경찰청장은 서해해양경찰청에, 서해경찰청장은 목포해양경찰서에게, 목포해양경찰서장은 123경비정에게, 123경비정장은 고무보트 경찰관들에게 침몰하는 세월호에 올라가 승객들을 구조하라고 명령했는데 고무보트에 승선한 경찰관들이 자신의 명령을 불복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현장에 제일 빨리 달려온 100톤급의 123경비정에는 배를 떠날 수 없는 정장과 운항핵심요원을 포함하여 경찰관 10명과 의경 4명이 탑승했고 세월호에 접근할 수 있는 고무보트 1개와 밧줄 등을 장비했을 뿐이다. 지강헌 무장인질사건 때 현장에 처음으로 도착한 파출소 순경들에게 집안으로 진입하여 인질들과 무장인질범 4명을 체포하라고 파출소장이나 서대문경찰서장이 명령했다면 난센스가 되었을 것이다. 파출소 순경들에게는 무장범인들을 제압할 수 있는 인력이나 장비나 무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도 피출소 순경이나 파출소장에게 더 나아가 경찰서장 등에게 초동 진압의 실패 책임을 요구하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세월호 참사에서는 줄줄이 고무보트 순경들에게 1차적인 책임 묻기가 쏠렸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까지 다른 경비정이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수십 명을 구조한 123경비정의 고무보트 경찰관들은 오히려 격려되고 감사되어야 할 처지일 것이다.
그래서 책임회피 과정은 다시 역순으로 반복되지 않을 수 없었다. 500명 승객을 구조할 인력과 자원을 급파하지 않고 비현실적인 탁상공론적 명령만 내리거나 아예 그 책임을 방기했던 고위 관료들 그리고 행정부의 최종 책임자인 국무총리로 그 책임이 되밀리는 현상으로 되돌아갔다. 침몰신고 즉시 해경과 해군과 민간선박 등을 총동원하는 즉각적인 명령을 내리고 총괄 지휘해야 하는 법적 권한은 내각을 통할하는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선주나 정부가 부담해야 할 경비와 보상액이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니 민·관간에도 서로 죽기 살기의 떠넘기기 싸움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와중에서 국무총리는 이미 자신과 정부의 책임을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사임발표로 위기를 탈출하려 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은, 이태리 해경이 침몰선박에서 도망 나온 선장에게 선박으로 돌아가 승객을 구조하라고 명령했듯이, 세월호 사고 수습에서 국무총리가 도망가지 말고 최선을 다해 사고가 수습된 후에 사표를 받겠다고 공약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해난구조 난맥상의 총체적인 책임을 해양경찰청의 해체라는 ‘조직 벌’의 형식으로 발표해 버렸다. 이러한 상황이므로 앞으로 해양경찰청장은 물론 국무총리까지도 민·형사상의 책임에서 자유롭기 힘들게 되었다. 또한 대통령도 이들에게 도의적 행정적 조치뿐만 아니라 민·형사상의 책임까지 묻는 정치적 결단을 내리지 않고는 세월호의 사태해결과 ‘신뢰성의 균열’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을 스스로 만들었다.
7.
하버드대 정치학교수였던 뉴스태트(Neustadt)에 의하면, 대통령에게 불운 사태와 여건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 때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실황과 실태를 최선을 다해 가감 없이 주지시키고 국민적 기대와 여망의 수준이 너무 높게 설정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국민들에게 여유와 냉정과 희망을 잃지 않도록 선도하는 교육자(teacher)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을 주문한다.
물론 대통령의 가르침은 적어도 네 가지의 측면에서 매우 다른 성격의 교육이다. 첫째로 대통령의 교육은 대통령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크지 않은 일반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둘째로 이 학생들은 대통령이 말하는 것이 대통령 자신이나 정파의 이익에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느낄 때에 대통령에게 주의를 기울인다. 셋째로 대통령은 말에 의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국민대부분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을 실행함으로써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넷째로는 대통령이 과거에 행했던 발언의 신뢰에 의하여 국민들은 현재의 가르침과 방향 제시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점이다. 그가 아무리 미사여구와 창의와 박력과 감성적인 연설과 회견을 한다 하여도 그의 언행에서 눈속임과 정파적 이득이나 거짓 정보가 다시 노출된다면 그의 교육적 효과는 곧이어 사상누각이 되어버린다.
뉴스태트는 대통령이 측근과 고위직의 무능과 비리를 경계해야 하지만 ‘오도된 충성심(misguided loyalty)’에 대하여도 각별한 관심을 집중할 것을 지적한다. ‘오도된 과잉충성심’은 단기적으로 이득이 있는 경우가 많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반드시 대통령의 영향력에 무서운 재앙을 주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번 세월호 참사 수습과정에 있어서도 대통령 참모진과 관료와 여권 일부의 ‘오도된 과잉충성심’이 대통령의 교육자로서의 역할과 의지에 찬물을 끼얹는 사례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충성심으로 뭉쳐진 ‘청피아(청와대마피아)’는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줄은 잘 알아도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둔감하기 쉽기 때문이다.
첫댓글 . . . 105(백오)님의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는 논문 잘읽었습니다.
그러나 지강헌의 “유전무죄 무전유죄” 도 일리가 있지 않을가 ? - 단지 때를 말못 만난 것 뿐 아닐가 ? 우리가 숭상하는 (자본주의 법치국가) 미국의 예를 보면 “유전무죄 무전유죄” Case 를 우리는 종종 보지 않는가 ?
무심헌! 반갑습니다. 나는 이 글을 누가 읽어주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우리공동체에 조용한 증언기록으로 남겨놓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길고 건조한 문체로 썼는데도 무심헌이 읽어주어 감사합니다.
@105(백오) 싸늘하지만 준열한 논리, 무거운 마음으로 정독했습니다.
@뒷메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안보관련 어느 국제회의에서 "우리 좀 더 성숙해지자"라는 주제로 토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회의참석자들이나 자유세계의 지도자들이 미개해서 성숙해지자는 것이 아니라 현재 성숙해 있지만 그래도 이념적으로 윤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전략적으로 계산적으로 좀 더 성숙해지자는 취지였습니다. 세월호 참사 앞에서 '성숙'이라는 단어가 자꾸 귀에 맴도는 것은 이제 많이 늙은 탓이겠지요.
@105(백오) . . . ㅎ ㅎ, 사실은 105(백오)님의 비교문학 박사학위가 참 궁금한데 ... !
지강헌과 세월호 예기를 읽으니 모파상의 소설을 읽는 느낌입니다. 인간의 비겁함, 어리석음, 인간의 나약함이 어우러져 하나늬 사건을 증폭하는군요. 이런 잘난 인간들이 줄어 들기를 바랄뿐입니다.
일제강점기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사무관 급으로 해방을 맞은 관료들이 6.25전쟁 이후 국장급 이상의 고위직으로 승진하여 그들 중 일부가 3.15부정선거를 주도하고 서로 이끌어주는 등의 패거리를 이루어 결국 제1공화국을 몰락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승만 정권은 '고고피아(고등고시 마피아)'에 당했고, 박정희 정권은 '군피아'에 당했으며, 세월호 참사를 맞은 박근혜 정권은 '관피아'에 당했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김대중 정권 이후에는 정권별로 '청피아(청와대마피아)'가 만들어져 정부 부처를 마음대로 바꾸고 찢어놓고 감투들을 확대하며 정권퇴진 이후에도 서로 싸우고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군요.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읽어보니 너무 어려운 말씀이라 무어라고 할 말이 없군요,
앞으로 무장인질범 지강헌과 세월호 이준석 선장 등이 악당과 연적으로 대결하면서 결과적으로 사회개혁을 이룩하는 쉬운 말씀의 '대중소설'을 써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