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이
서정주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시인부락』 창간호, 1936.11)
[작품해설]
이 시는 전 5행에 불과한 짧은 형식이지만, 언어의 관능적 융법과 생명 현상에 대한 집착으로 대표되는 생명파 시인으로서의 미당의 초기 시 세계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먼저 피를 토하듯 우는 슬픈 울음을 ‘꽃처럼 붉은 울음’으로 표현한 데서 언어의 공감적 표현과 관능적 용법을 찾아볼 수 있다. 꽃처럼 붉은 피가 배어나는 처절한 울음 속에는 단순한 감각적 차원을 넘어선 근원적인 체럼 의식까지 깃들어 있다.
그리고 생명 현상에 대한 집착은 ‘애기 하나 먹는’ 것으로 나타난다. 어둠 속에서 숨어 살며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드러내지 못하는 ‘문둥이’는 그저 ‘해와 하늘빛이’ 서러울 뿐이다. 문둥이는 해와 하늘빛이 있는 대낮 거리를 마음껏 활보하며 살아가는 장로운 삼ㄹ을 갈망한다. 문둥이는 ‘얘기 하나 먹’음으로써 병을 고치려 하지만, 이 같은 생에 대한 집념이 부도덕함을 깨닫고, 마침내 자신의 숙명적 운명에 대한 몸부림으로 인하여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 게되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시인의 체험이 아니다. 그러나 시인의 풍부한 상상력과 함께, 인간성이 파멸된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성이 회복된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그의 강한 생명 의식이 「문둥이」를 낳게 한 것이다.
[작가소개]
서정주(徐廷柱)
미당(未堂), 궁발(窮髮)
1915년 전라북도 고창 출생
1929년 중앙고보 입학
1931년 고창고보에 편입학, 자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등단
시 전문 동인지 『시인부락』 창간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시분과 위원장직을 맡음
1950년 종군 위문단 결성
1954년 예술원 종신 위원으로 추천되어 문학분과 위원장 역임
1955년 자유문학상 수상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2000년 사망
시집 : 『화사집』(1941), 『귀촉도』(1948), 『흑호반』(1953), 『서정주시선』(1956), 『신라초』 (1961), 『동천』(1969), 『서정주문학전집』(1972), 『국화옆에서』(1975), 『질마재 신화』 (1975), 『떠돌이의 시』(1976), 『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1982), 『미당서정주시선집』 (1983), 『안 잊히는 일들』(1983), 『노래』(1984), 『시와 시인의 말』(1986), 『이런 나
라를 아시나요』(1987), 『팔할이 바람』(1988), 『연꽃 만나고 가는 사람아』(1989), 『피
는 꽃』(1991), 『산시(山詩)』(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민들레꽃』(1994), 『미당시전집』(1994), 『견우의 노래』(1997),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