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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9월28일 목요일 [(녹)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수도회] 불안과 의심을 몰아내는 사랑과 믿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하까 1,1-8
† 복음 루카 9,7-9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의 불안은, 권력에 집착한 나머지
양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진리를 외면하는 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대변해 줍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비행을 지적했던 세례자 요한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걸림돌로 생각했으면서도 그를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디아의 딸 앞에서 공언한 허세를 이용해
세례자 요한을 처형합니다. 헤로데는 진리 앞에서 양심의 가책과
두려움을 감추려고 했지만, 예수님의 등장은 그에게 또 다른
걸림돌이 되어 불안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성경에서 ‘죄’는 단순히 윤리적인 악행이나 법과 계명을 지키지 않는
무질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죄의 본질은 나의 삶의 바탕이자
근거인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하느님께서 선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모든 악행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라고 가르치신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나의 행위와 생각들이 세상의 논리와 관점에서
정당화되고, 사람들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합리화의
유혹에 빠질 때,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계명은 나에게 걸림돌이고
불안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진리에 눈을 감을 때 죄의 유혹과 불안감이 내 삶을 지배한다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헤로데에게 예수님은 불편한 진리였습니다.
나를 숙명처럼 지배하고 있는 죄의 근원들을 벗어 버리지 못한다면,
비록 내가 세상에서 인정받고 부유함의 안락을 누린다 하더라도, 내
영혼의 참된 평화와 안식은 없습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가 죄를 씻을 수 있는 기회를 교회가 주는
것은, 하느님과 맺는 관계가 불안과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과
평화여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2017년 가해 9월28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제1독서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리라.>
○ 하까이 예언서의 시작입니다. 1,1-8
복음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7-9
혹시 자동차 사고를 경험한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이제까지 크고
작은 사고를 몇 차례 경험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잊지 못할
사고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에 난 사고입니다.
차를 구입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눈길에 차가 미끄러져서
몇 바퀴를 빙글빙글 돌다가 근처 언덕 아래에 있는 집 담벼락에
처박힌 사고였습니다. 이때의 경험은 정말로 특별했습니다.
미끄러지면서 차가 빙글빙글 돌 때, 그리고 떨어져 아래에 있는 집
담벼락에 처박힐 때까지의 시간이 마치 스포츠 경기에서 다시
보기로 천천히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분명히 몇 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마치 몇 시간이 흐른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체험이 이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제 서품식 중에서, 바닥에 엎드려서 성인호칭기도를 바칠 때에
저의 삶 모두가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가는 것이었습니다. 10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이 제 삶 전체를 기억할 정도로 오랜 시간으로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시간이 엄청나게 빨리 지나가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좋은
친구들과 만나서 신나게 놀 때면 어떻습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어?”라면서 시간의 빠름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시간은 각 개인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는 과학에서 상대성 이론을 통해서 증명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분명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에
그냥 대충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 맞게 그리고 올바른
상황을 만들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내 자신에 맞게
살아간다는 것은 주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올바른 상황이란 주님의 뜻이 펼쳐지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가십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의 불안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체면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죽이지요.
어떤 소원도 다 들어주겠다는 헤로디아의 딸 앞에서 했던 허언으로
인해 그는 평생 불안과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명의 영역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만 달려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마치 하느님인양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자신에 맞는 삶을 살지도 못했고, 또 올바른 상황을 만들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의 시간을 기쁨과 희망이 아닌 불안과 절망의
시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이 원칙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먼저 내 자신에 맞는 시간인지를 그리고
올바른 상황을 만들고 있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시간을 기쁨과 희망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이다(조정래).
세례자 요한이 순교했던 마케루스 요새.
나의 시간
언젠가 결혼식 주례를 위해 예식장에 갔습니다. 예식 30분 전,
매니저라는 분이 저를 찾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에 관한 설명을
하더니 제가 담당해야 할 부분을 이야기하십니다. 한 5분 정도
이야기를 나눴는데 ‘참 사무적으로 말한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농담을 던지면, ‘괜한 말 하지 마라.’는 식으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더군요.
결혼식이라고 하면 분명히 즐겁고 기쁜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즐겁고 기쁠까요? 이 예식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반복되는
결혼식에 남들이 느끼는 즐거움과 기쁨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남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전달하는 소중한 역할임을 기억한다면
어떨까요? 그렇게 웃음 없이, 사무적으로 대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나의 말과 행동이
남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전해주는 소중한 역할이라고 한다면 내게
주어지는 매순간을 허투루 보내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소중한 나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이 예식장 직원들은 아주 친절했어요. 모든 예식장이 불친절한 것은
아닙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불안과 의심을 몰아내는 사랑과 믿음 -
기 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9월28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루카 9,7-9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루카 9,7)
불안과 의심을 몰아내는 사랑과 믿음
예수님께서 말씀과 행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자 사람들은
놀라워합니다. 당시 그 지방 영주였던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해 합니다(9,7).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해 사람들이 다양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요한에 뒤이어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하신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난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또 엘리야가
다시 와서 하느님의 위대한 개입을 준비하리라 기대했던 이들은
예수님을 다시 나타난 엘리야로 봤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라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예언자들이 예고한 메시아
시대를 여신 분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모두가 예수님을 종말에 앞서 오리라고 예고되던 그 예언자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예언자로 보긴
했으나 ‘하느님의 아들’이나 ‘오시기로 된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말씀과 행적을 보면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지만 그건
되살아난 예언자로서 한 일로 축소시켜버린 것이지요.
헤로데는 죽은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살아났다고 하는 이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또 이미 죽임을 당한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는
소문도 믿지 않습니다. 그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요한이 다시 살아날 리가 없으며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9,9) 사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23,8) 그는 자신의 불의와 부도덕을 서슴없이 지적했던
세례자 요한에 이어 하느님의 자비와 진리와 정의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존재 앞에서 두려워 불안에 빠졌습니다. 그는 거기서
헤어나고자 예수님을 직접 만나 확인하려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합니까? 말이 아니라 삶으로
말입니다. 혹시 헤로데가 안고 있었던 두려움과 불안, 권력에 대한
탐욕, 의심, 하느님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교만 이런 것들이
내 안에도 있지 않습니까? 헤로데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당황했던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지요.
두려움과 의심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현존과 활동은 오직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와 선을 거슬러
재물과 권력을 자기 소유로만 삼으로 하는 이들은 불편과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지요. 하느님의 진리는 거짓의 바다를 출렁이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탐욕의 뿌리를 뒤흔듭니다.
우리도 헤로데처럼 소유와 육의 경향에 사로잡혀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의심에 걸려 넘어져 하느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때가
있지요. 그러나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4,18) 그렇습니다! 내 안의 두려움과 불안은
사랑과 믿음이 부족하다는 표지임을 알아차려야겠습니다.
오늘도 두려움과 불안, 혼란과 의심의 자리에 사랑을 채우며, 온
몸으로 주님을 고백하는 사랑 고백의 날이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두려움 외에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을 버리고 사랑을 갈망하는 복된 우리였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서울]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2017년 가해 9월28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루카 9,7-9
어릴 때 배운 동요가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김 사랑.
그 이름 아름답구나.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박 장군. 그 이름
씩씩하구나.” 어린 아이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통하여 자신이
누구인지를 소개하는 노래입니다. 상대방은 그 이름을 듣고
아름답고 씩씩하다고 칭찬하는 노래입니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주인공은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상대방을 향하여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넌 누구냐?”
사람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변을 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하였습니다. 생각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고,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 한 것 같습니다.
그런가하면 시편 8장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유혹에 빠지는 인간, 시기와 질투로 상처를 받는 인간,
폭력과 전쟁으로 서로를 죽이는 인간, 병들고, 늙고 죽어야하는
나약한 인간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행복이란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이란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 합니다.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싶어
합니다.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더 건강하게 그리고 더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하는 것, 더 많은 권력을
가지려 하는 것, 더 건강하게 그리고 더 오래 사는 것’들은 정말 헛된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매 순간 삶의 자리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사람의 손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이 세상을 좀 더 깨끗하게 하였다는 행복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형편이 어려운 조카의 등록금을 내준 삼촌이
있습니다. 본인도 그리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공부할 조카를 보며 삼촌은 이 세상이 좀 더 환해진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지난 봄 길가에 코스모스를 심었던 분들이
있습니다. 가을, 길가에는 예쁜 코스모스들이 바람에 춤을 추고
있습니다. 코스모스를 보면서 길을 걷는 분들은 참 마음이 밝아질
것 같습니다. 봄에 코스모스만을 심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희망을 심은 것입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결국 꽃이 시들어야
결실을 맺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땀을 흘리고, 자신을 희생해서
누군가를 위한 다리가 되어 줄 때, 진정한 결실을 맺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인생은 허무 한 것이 아니라, 인생은
하느님을 만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하고 싶은 일만을 좋아했던 헤로데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행복입니다. 해야 할 일은 좋아하다면 우리 모두는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예수님께 대한 헤로데의 반응!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9월28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9,7-9: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해 묻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간단히
말씀해 주셨다. “길을 떠날 때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9,3-5)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스승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한 선교의 효과는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헤로데 왕의 동요가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기도 했으며, 또는 예언자 엘리야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혹은 신명 18,15에서 말하듯이 다른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는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자 헤로데 왕은 가뜩이나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해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에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9절)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한번 만나고 싶어 했다. 예수님께 대한 소문은 꽤나 영향이
컸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일을 제자들의 복음선포 활동에 연결 지어 볼 때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데 어떠한 자세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여 사심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진리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주님 앞에 참 삶을 통하여 복음의 향기가 이웃으로 퍼져 나가도록
열심히 노력하자. 여기에 우리의 참 행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쁘고도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위하여 기도하자.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청주]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유를 회복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9월28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루카9,7-9)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유를 회복하라.
가끔 꿈 얘기를 듣습니다. 좋은 꿈을 꾸어서 복권을 샀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무서운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설치고 그 꿈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험해도 꿈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좋게
생각하고 기뻐하고 또 준비하면 되는 것입니다. 꿈에 끌려 다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꿈대로 안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좋지 않은 꿈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꿈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꿈에 매여 집착하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때로는 죄를 짓고 그 죄책감 때문에 꿈을 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을 행하여서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불안한 마음과
죄책감으로 몸을 괴롭히기 때문에 상황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그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용서를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허물에 대해서도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얽매인 것을 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을
통해 용서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자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 대한 여러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습니다. 헤로데가
불안해하고 당황한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왕이라 할지라도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 값을 스스로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예수님이
무서워진 것입니다. 사랑을 전하러 오신 분을 심판관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심판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못한 것이
부끄러워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뻐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1요한 1,9).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에제33,11). 혹시라도 마음의 불안이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주님의 품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혹 두렵습니까? 거짓을 벗어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십시오!
용서하시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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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득형씨는 권위와 권력을 설명합니다.
권위는 1)인간적인 매력과 인격에 매어지는 것
2)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옴
3)자리에 관계없이 평가가 높아감
4)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음
5)지도자 선택의 첫째가는 기준이 됨
권력은 1)직제상 지위(자리)에 주어지는 것
2)사람들을 덮어놓고 복종시킴
3)자리가 높아질수록 더 강해짐
4)권위가 없는 사람일수록 더 휘두름
5)그 자리를 떠나는 동시에 없어져버림
권위와 권력은 분명히 다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만나는 헤로데는
권력을 잡았지만 권위는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권력을 가지고도
불안해하였습니다. 권력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에게 폭력을 사용했고
특히 당시 유다인들이 최고의 예언자로 알고 따르던 세례자 요한을
죽였는데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소리도 들렸고 여러 소문이
있었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어도
‘도둑이 제 발이 저린다.’고, “때린 놈은 발을 오그리고 자도 맞은
놈은 발을 펴고 잔다’고 합니다. 자기가 한 짓을 알기에 늘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인 권력이 아니라 권위를 지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혹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마음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재물이나 지위를 가지고 대접
받고자한다면 그에게서 권위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권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로마13,1-2). 주님께서 생명을 주관하는 권위(루가12,5)를 가지셨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힘을 지니셨습니다(요한5,39). 또한 가르침대로
행하심으로써 권위를 지키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각자의
권위를 키워야 하겠습니다(2고린10,8).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아내는 아내로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위치기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권위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직장이든 가정에서든 각기
권위가 살아나기를 기원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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