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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내정에 대해선 빛과 그림자가 분명했던 왕이었다. 정치 개혁 측면에선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지만, 정통성 시비를 없애기 위해 무리한 정치 보복을 일삼았던 점은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외교 감각만큼은 조선 역사상 가장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왕 중 한 명이 바로 광해군이었다.
당시 국제 정세는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전통의 강국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보내온 것과 함께 정쟁이 겹치면서 국력이 크게 약화됐다. 이 틈을 비집고 압록강 북쪽 여진족 내부에서는 누르하치가 중심이 돼 통일운동을 전개했다.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여진족의 세 분파 중 하나)을 통일하고, 1599년에 해서여진의 하다(哈達)를, 1607년에는 후이파(輝發), 1613년에는 우라(烏拉) 등을 병합했다. 여진족 대부분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 것.
역사적으로 동북아시아 이민족들은 세력이 강해지면 항상 중국의 중원을 공격했다. 흉노족,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등이 모두 그랬다. 누르하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명군과 연합해 여진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명군의 오인 사격으로 희생된 개인적인 원한까지 있었다. 당연히 명 정벌이 누르하치의 최종 목표였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던 광해군은 명과의 외교를 적극적으로 하면서도 후금(後金) 또한 자극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했다. 여진어를 사용할 수 있는 역관을 양성해 후금 정보를 수집하는 동시에 화기도감을 설치해 무기 개발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런 상황에서 후금은 더욱 강성해졌다.
1616년 누르하치는 ‘칸’으로 즉위하고 국호를 ‘후금’이라 칭하면서 동북아의 실질적인 맹주임을 선언했다. 12세기 초 아골타가 세운 금(金)나라 이후 다시 동북아 강국으로 자리를 잡은 후금과 명의 대결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1618년 누르하치는 조부와 부친의 죽음 등 명나라에 대한 ‘일곱 가지 한(恨)’을 내세우면서 무순(撫順) 지역을 공격했다. 무순의 점령은 중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었고, 명의 위기의식은 커졌다. 다급해진 명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준 명분을 들어 광해군에게 파병을 요청했다.
1618년 윤 4월의 일로서, 광해군이 출병을 반대할 명분은 없었다. 사대(事大)외교는 조선 외교의 기본 방향이었고, 불과 20여년전 위기에 몰린 조선을 명나라가 도와준 ‘재조지은(再造之恩·다시 나라를 일으켜 세워준 은혜)’의 빚도 너무 컸기 때문이다. 신료들도 오만한 오랑캐 후금을 응징하자는 데는 의견을 같이했다. 이 문제만큼은 당쟁도 없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다. 임진왜란 때 분조(分朝·임진왜란 때 만들어진 임시조정)를 이끌며 직접 참전한 경험이 있었던 그는 당시의 정세를 냉정하게 인식했다. 전후 복구가 시급한 상황에서 군사를 파견하는 것도 부적절했거니와, 후금을 자극해 조선이 공격을 받는 최악의 상황도 고려해야 했다. 광해군은 조선의 방어를 핑계로 명으로의 출병을 최대한 막고자 했다.
“훈련되지 않은 군졸을 적의 소굴로 몰아넣는 것은 비유컨대 양떼를 갖고 호랑이를 공격하는 것과 같으니, 정벌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채 우리나라 입장으로 보면 도리어 수비하지 못하게 되는 근심만 있게 될 것이다.”
광해군의 입장이었다.
1618년 4월 무순이 함락되자, 명나라는 다시 한 번 조선의 파병을 요청했다. 처음엔 총독 왕가수(汪可受)가 약 4만명을 청했으나, 경략(관직 명칭으로 지방장관)이었던 양호가 “조선에 병마가 적은 것은 내가 일찍부터 잘 안다”면서 그 수를 총 1만명 선으로 감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참판 강홍립을 5도 도원수(都元帥)로, 평안병사 김경서를 부원수로 삼고 최종적으로 5도의 군사 1만여명을 뽑아 출정에 나섰다.
이때 광해군의 외교적 역량이 돋보이는 부분이 강홍립을 파병군 총사령관인 도원수에 임명한 점이다. 강홍립은 국왕 직속의 통역관인 어전통사(御前通事) 출신으로 중국어에 능통했고, 광해군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는 측근이었다. 장수적인 능력보다 외교적인 역량을 총사령관 선임의 주요 요건으로 삼은 것이다. 파병 부대는 1618년 9월 평양에 이르렀고, 1619년 2월 1일 선발대가 압록강을 건넜다. 강홍립이 거느리는 본진은 2월 23일 압록강을 건넜다.
사실 강홍립은 출정에 앞서 광해군으로부터 비밀 지침을 받았다.
“명나라 장수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해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하라.”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하다 항복해도 좋다는 메시지까지 전달받았다.
1619년 3월 2일 조선군은 마침내 심하(深河)에서 후금군을 처음 맞이했다. 이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후금군에 대항해 치열하게 싸웠지만, 철기(鐵騎)를 앞세운 후금군의 위력 앞에 전세는 점차 불리해져갔다.
김응하, 이계종, 이유길 등 지휘관을 비롯해 수천의 병사들이 심하 전투에서 희생됐다. 중영장으로 참전했던 김응하는 죽기 직전까지 무수한 적을 베었고 창에 찔려 죽어가면서도 칼을 놓치지 않아 후금에서조차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김응하의 전사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호조판서의 벼슬을 내렸고, 그를 추모하는 사당을 짓게 했다.
심하 전투에서 김응하와 대비됐던 인물이 강홍립이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강홍립은 더 이상의 희생을 막아야겠다고 판단해 후금 진영과의 적극적인 강화 협상을 도모했다. 광해군 밀지가 강홍립의 선택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강홍립은 통사 황연해를 시켜 후금 진영에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나라가 너희들과 본래 원수진 일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겠느냐. 지금 여기 들어온 것은 부득이한 것임을 너희 나라에서는 모르느냐.”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가 후금군에 투항하고 누르하치를 만난 사실은 광해군을 제외한 대부분 신료들을 분노케 했다. 변변한 전투 없이 오랑캐에게 바로 항복한 강홍립을 처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광해군은 강홍립과 그의 가족을 끝까지 보호했다.
1623년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 세력에 의해 강홍립은 전형적인 매국노로 인식됐고, 이후 조선의 역사에서도 강홍립은 결코 긍정적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그러나 강홍립은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 아니라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군 장수로 출정했을 때도 조선과 후금의 강화 협상을 주선하는 등 오늘날 관점에서 재평가 여지가 많은 인물이다.
조선이 자신들과 친교의 뜻이 있음을 확인한 후금은 조선 침공은 유보한 채 명나라 공격에 주력군을 파견함으로써 광해군 시절만큼은 국제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후금과의 일촉즉발 전쟁의 위기 상황 속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냉철하게 힘의 현실을 인식하고 후금을 자극하지 않은 광해군의 외교적 역량이 큰 몫을 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강력한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으로 외교 전략을 수정했다가,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의 굴욕을 당한 것과 비교된다.
실리외교는 큰 성과를 거뒀지만 광해군과 서인 세력에게 광해군은 한낱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위시킨 패륜적인 국왕, 전통적인 국제적 신의를 저버린 인물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1623년 서인이 인조반정을 성공시키고 광해군을 폐위시킴으로써 광해군의 외교 정책은 조선시대 내내 빛을 보지 못했다.
광해군은 연산군과 함께 ‘조(祖)’와 ‘종(宗)’으로 칭해지는 조선의 다른 왕들과는 달리 ‘군’이라는 왕자 시절 호칭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의 묘도 ‘릉’이라고 칭해지는 다른 왕들의 무덤과는 달리 ‘광해군묘’로 지칭된다. 지금도 이 묘는 거의 찾는 이 없이 방치된 상태로 남아 있다.
연산군이야 검증된 폭군이므로 그리 억울할 것도 없겠지만 광해군은 조금 다르다. 그가 수행했던 강력한 전란 복구 정책, 국제 감각을 통해 추구했던 실리외교 등은 오늘날 재평가될 부분이 많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경쟁이 치열히 진행되는 지금, 광해군이 보여줬던 능동적인 실리외교는 우리에게 큰 지혜로 다가올 수 있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