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74
3월26일[사순 제3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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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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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sblbnnEsNiA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이영준 모이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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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힘든 일을 기쁘게 할 때, 그 일이 곧 복음의 길입니다!>
사순시기를 맞아 특강을 다니면서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주제요 화두인 회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합니다.
회개라고 하면 대체로 이렇게 생각하십니다. 지난 잘못에 대해 크게 가슴 치는 것, 하느님과 이웃에게 소홀했음을 뉘우치는 것,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서 새삶을 모색하는 것...
그런데 또 다른 스타일의 회개가 있습니다. 참된 하느님의 얼굴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왜곡되고 그릇된 하느님 상을 깨트리는 일입니다.
저 역시 돌아보니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상이 많이도 엉뚱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 진노하시고 벌하시는 분, 너무 크신 분이어서 이토록 작고 부족한 나와는 상대도 하지 않으시는 분.
그런데 오늘 신명기 저자가 소개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그게 아닙니다. 우리 인생길이 너무 힘겹고 혹독할 때면,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면서, 즉시 응답하시는 하느님이시랍니다.
루카 복음 사가가 소개하는 하느님의 모습도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이 땅에 육화강생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엄청난 분, 대단한 분이셨지만, 절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고 일관되게 작고 겸손한 모습을 유지하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큰 사람들, 높은 사람, 고관대작들과 어울리지 않으셨고, 언제나 작고 가난한 사람, 세리, 죄인들과 기쁘게 어울리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죄인들과는 완전 동떨어진 엄청 대단하고 성스러운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가방끈이 짧은 사람들이나 어린이들조차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쉽고 재미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 역시 특별하고 대단한 행위를 통해서라기보다 일상의 작은 계명에 충실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요즘 마음이 하도 울적하고 거시기해서 시간 될 때 마다 피정 센터 구석 구석 봄맞이 단정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돌아보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가 생각해도 많은 일을 했습니다.
배수로 낙엽 치우기, 병들어 죽은 나무들 잘라내기, 매실나무 전지 작업, 쓰레기 분리수거... 머릿 속이 복잡할 때는 역시 단순 작업이 최고입니다. 일에 온전히 몰입을 하고 땀을 뻘뻘 흘리니, 기분이 많이 진정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 세상에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별것 아닌 일이 없습니다. 특히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다들 하기 싫어하는 궂은 일들, 짜증내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얼굴로 할 때, 그 일이 곧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이요, 복음적인 일, 결국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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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kYfanX0M9T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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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정해질 나의 위치: 나는 타인에게 어떤 비전을 주는가?>
얼마 전 어떤 모임을 하는데, 한 자매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오늘 말씀드릴 예화가 그에 해당할 수도 있겠습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주인공 앤디는 갓 대학을 졸업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런웨이라는 유명 패션 잡지의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의 비서로 일하게 됩니다. 미란다 프리슬리는 패션계의 교황이라 불릴 만큼 영향력이 큰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미 미란다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에밀리가 있었습니다. 에밀리는 처음 앤디를 무시하며, 그녀의 부족함을 지적하고는 “그렇게 옷도 못 입고, 여긴 그런 사람을 위한 자리가 아니야”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에밀리는 스스로를 완벽하게 보여주려 애쓰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더욱 경쟁적으로 행동합니다.
하지만 앤디는 점차 일을 배우고 실력을 쌓으며 에밀리와 차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에밀리가 못하는 일들을 해내고, 미란다에게 더 많은 신뢰를 얻기 시작합니다. 에밀리는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보다는 앤디를 경계하며, “너, 나를 밟고 올라서려는 거지?”라고 묻습니다. 그 순간, 앤디는 자신도 모르게 에밀리에게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합니다. “내가 원하는 건 승진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잘 해내는 거예요.”
그런데도 앤디는 미란다에게 점점 더 인정받으며, 더욱 많은 책임을 맡게 됩니다. 윗사람의 눈에는 남을 밟고 올라가 잘 보이려는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앤디는 점차 미란다의 방식에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왜 내가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야만 하나?” 경쟁적이고 냉정한 미란다의 업무처리 방식에 불편함을 느끼고, 그녀의 방식이 옳은 것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결국 앤디는 마음을 정하고 미란다에게 그만두겠다고 선언합니다.
아무리 악랄한 미란다지만, 그래도 그녀의 눈에 여전히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경쟁하며 경쟁자를 끌어내리려 하는 부하직원은 예뻐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제로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많은 신자를 만나게 되고 인사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우선순위를 매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분도 있습니다. 일을 매우 잘하고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본인은 그 이유를 모를지 모릅니다. 그 신자가 다른 신자들에게 “그냥, 이 정도만 하면 돼!”라며 그 신자가 사제의 인정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을 느낄 때입니다.
사제는 모든 봉사자가 최선을 다하고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기를 바랍니다. 사제가 본당 전체를 생각할 때 그 한 사람만을 좋아하기보다는 전체가 잘 돌아가게 하는 사람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와 반대로 누군가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리 일을 잘해도 예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도 이와 똑같이 자리가 매겨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에도 높낮이가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늘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내 주위 모든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만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만약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등학교 때 매우 공부를 잘하는 한 친구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난 치과의사가 될 거야. 다른 의사들은 환자가 오면 밤에도 나가야 하지만, 치과의사는 정시 출근, 정시에 퇴근하면서도 돈을 많이 벌거든.”
저는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똑똑한 사람이 사회에 어떤 공헌을 하려고 하는지보다는 자기 안위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많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아이에게 이런 생각을 누가 품게 하였을까요? 그런 부모나 선생은 세상에서 기억될 수 없습니다.
반면 헬렌 켈러와 설리반 선생님의 사례는 참 좋습니다. 만약 설리반 선생이 헬렌 켈러를 완전하게 키워내려 하지 않았다면 지금 설리반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설리반 선생님은 헬렌을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 자신도 깊은 만족과 성장을 경험하며, 헬렌을 돕는 일이 자신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신앙교육을 하였는지 알면 나의 위치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주일미사만 빠지지 않고 나가라.” “성당 나가는 게 다 너에게 좋은 거야.”라는 식은 나의 위치도 하늘에서 낮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그리스도의 얼굴이 되어라.” 등의 완전한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부모라야 합니다. 부모가 그렇게 하지 않으며 그렇게 가르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주는 비전이 무엇이냐에 따라 나의 위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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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뭘 배울 때, 어깨너머로 배우곤 했습니다. 스키도 강습을 한 번도 받지 않고 남들이 타는 걸 보고 따라 했습니다. 많이 넘어지면서 나중에는 곧잘 탈 수 있었지만, 상급자 코스에서는 탈 수 없었습니다. 기본기가 약했기 때문입니다. 테니스도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공을 주고받았습니다. 친구들과 노는 정도는 되었지만, 정식으로 게임을 할 수준은 되지 못했습니다. 당구도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즐기는 정도는 되었지만, 기본기가 약해서 실수가 많은 편입니다. 정식으로 배워서 자격증을 취득한 것이 있습니다. ‘스킨 스쿠버’입니다. 물속에서 하는 운동이고, 자칫 잘못하면 큰 위험에 직면할 수 있기에 이론과 실습을 정확하게 배웠습니다. 지금도 스킨 스쿠버는 설명할 수도 있고, 바다에서 즐길 수 있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저와 달랐습니다. 스키도, 테니스도, 스킨 스쿠버도 강습을 먼저 받았고, 늘 기본기를 먼저 배웠습니다. 기본기가 탄탄한 신부님은 저와는 다른 차원에서 운동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로니아로 유배를 갔을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고난의 이유를 성찰하였습니다. 성전에서 제사 지내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군대가 강한 것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하느님의 계명과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을 정리하였습니다.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모세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주 나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대로 규정과 법규들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었다.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규정과 법규를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린다고 결실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는 밭에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주어야 합니다. 가뭄에는 물을 주고, 장마에는 물길을 내 주어야 합니다. 한문으로 쌀은 ‘米’입니다. 이는 농부가 88번의 정성을 들여야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기본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계명과 율법’입니다. 오늘 독서는 율법과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으로 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지 않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은 축복의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살인하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않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않는 사람은 축복의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 신앙의 기본기가 없는 사람은 엉뚱한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입니다. 앞서가는 사람은 끌어내리고, 뒤에 오는 사람은 밀쳐내면서 성공이라는 바벨탑에 오르려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이라는 바벨탑에 오르려 합니다. 위선과 가식으로 치장된 명예라는 바벨탑에 오르려 합니다. 그런 신앙생활은 우리를 축복의 땅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신앙생활은 우리를 무한경쟁의 싸움터로 내몰기 마련입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아름다운 자연은 훼손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푸른 지구는 병들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기도, 희생, 나눔, 봉사’를 충실하게 실천하여서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 모습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율법과 계명을 지키고,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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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에 관하여 하신 말씀이나 행동에 불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도 유다인들은 왜 예수님께서 율법을 아예 없애시려 한다고 생각하였을까요?
바오로 사도의 말에서 그 까닭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15)라고 말합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으로 이민족과 자신들을 구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구별은 단순히 서로의 다름이 아니라, 이민족에 대한 적개심이 그 밑에 깔린 구별인 것 같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방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을 적개심이 가득한 상태에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지하시려 한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반면에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2,16)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갈등을 빚는 상황들을 보면, 반목과 불신을 넘어 적개심으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적개심을 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화해의 길을 함께 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율법의 완성인 하느님의 사랑을 스스로 지키고 가르치는 사람이 이 시대에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초대받은 소명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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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17-19: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17절) 율법과 예언서는 둘 다 중요하다. 이 책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과 살아가는 일에 관한 법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둘 다 완성하셨다. 거룩한 계명들은 어느 것 하나도 폐지해서도 고쳐서도 안 된다.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하며 잘 가르쳐 하늘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작고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하찮은 것이 아니라, 필요하게 여기신다. 주님께서는 그 계명들을 모두 가르치셨고 또 지키셨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그 율법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말씀을 실천하며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완성해 갈 것이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8절)라는 말씀은 율법에서 가장 작다고 여겨지는 것조차도 영적 의미로 가득 차 있으며, 모든 것이 복음서에 요약되어 있음을 알려 주는 표현이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19절)는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으로, 마지막 날에 가장 작은 자, 내쳐진 자요, 말째가 되어 벌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업신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지금 중요한 사순시기를, 부활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부활은 우리 자신의 새로운 탄생을 촉구하고 있으며, 또한 영광스러운 나 자신의 하느님 안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가 부활을 축하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제 하느님 사랑의 계명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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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1)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예수님 말씀은, 율법에 불완전한 부분이 있어서 그것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들의 율법 실천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실천’을 가르치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은 ‘율법 실천의 완성’을 뜻합니다.
그런데 ‘율법 실천의 완성’은 ‘사랑 실천의 완성’을 뜻하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 실천의 완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10)
<여기서,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라는 말은, “사랑은 항상 빚으로 남아 있다.”라는 말이고, 이 말은 “이만큼 했으면 충분히 했다.”라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한 사도는 ‘사랑의 완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7-18)
사랑 없이 심판에 대한 두려움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려면 ‘사랑으로’ 지켜야 합니다. 여기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라는 말은,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은 없고 기쁨만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사랑으로’ 율법을 지키고, ‘사랑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삶은 기쁨만 가득한 삶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사람의 삶에는 기쁨이 없기 때문에 그 삶은 삭막하고 어둡고 피곤하고 불행하기만 합니다. 또 속마음과는 다르게 겉으로만 지키는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위선 죄’를 짓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위선을 버리고 진실하게, 또 진심으로 율법을 실천해야 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말만 하면서 행동하지 않는 것, 또 생각만 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살지 않는 것, 그런 것은 모두 위선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말씀은, 그렇게 위선자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올바른 실천을 하도록ㅠ바로잡으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2) 유대인들은 안식일 문제나 정결 예식 문제 등으로 예수님과 충돌하면서, 예수님이 율법을 폐지하려고 하시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음식에 관한 규정과 이혼장에 관한 규정 등을 당신의 권한으로 폐지하셨습니다.(마르 7,19; 마르 10,5-9)
그러나 하느님께서 직접 내려 주신 계명들과 율법들을 폐지하신 적은 없고, 바리사이들이 만든 규정들이나ㅠ유대교에서 만든 규정들만 폐지하셨을 뿐입니다. 그런 규정들이, 인간들에게 계명들을 내려 주신 하느님의 본래의 의도와 사랑을 거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사랑은 종말이 될 때까지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상 ‘영원히 변함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즉 인류 구원 사업이 완성된 다음에는,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 있는 나라입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는 자”는, “계명들을 자기 마음대로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분류해서, 작은 것은 무시하고 안 지키는 자”입니다.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자기 혼자서만 위선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잘못된 길로 이끌고 가는 자”입니다. 그런 자는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큰 죄인’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라는 말씀의 뜻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입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자기 자신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충실하게 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잘 인도하는 신앙인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는 말씀의 뜻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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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끝내 이기리라>
마태오 5,17-19 (예수님과 율법)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끝내 이기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불신을
먹고 사는
불신의 세상
거슬러
믿음으로
끝내 이기리라
절망을
먹고 사는
절망의 세상
거슬러
희망으로
끝내 이기리라
증오를
먹고 사는
증오의 세상
거슬러
사랑으로
끝내 이기리라
저주를
먹고 사는
저주의 세상
거슬러
축복으로
끝내 이기리라
불의를
먹고 사는
불의의 세상
거슬러
의로움으로
끝내 이기리라
선동을
먹고 사는
선동의 세상
거슬러
올곧음으로
끝내 이기리라
가름을
먹고 사는
가름의 세상
거슬러
이음으로
끝내 이기리라
누름을
먹고 사는
누름의 세상
거슬러
섬김으로
끝내 이기리라
버림을
먹고 사는
버림의 세상
거슬러
품음으로
끝내 이기리라
어둠을
먹고 사는
어둠의 세상
거슬러
밝음으로
끝내 이기리라
굴종을
먹고 사는
굴종의 세상
거슬러
저항으로
끝내 이기리라
죽임을
먹고 사는
죽임의 세상
거슬러
살림으로
끝내 이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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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머리로는 이해한다고 하지만 사실 이천년도 넘는 시간의 차이와 그 속의 유목민의 생활양식입니다. 사막이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잘 잡히지 않듯 사실 유목민의 삶을 우리가 사실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순례를 가서 시나이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버스를 타고 씩 지나가는 것이 고작입니다. 몇 년 전 순례를 하는 한 본당 교우들과 버스를 타고 카이로에서 출발해서 르피딤이라는 곳을 통과할 때입니다.
옛날 생각이 나서 그곳에 잠깐 머물기로 했습니다. 삼십년도 넘은 공부하던 그 시절 학생신부들은 그곳에서 강의를 들으며 야영을 했었습니다.
동행한 히브리 대학의 교수들에게 온갖 주의를 듣고 나서야 어스름한 무렵 제각기 슬리핑백을 들고 적당한 자리를 찾아 밤을 지냈던 것입니다.
르피딤이라는 장소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나와 사막에서 아멜렉 족과 싸웠던 장소입니다.(탈출기 17장 8절 참조)
사막이라는 곳은 참 낯설고 십 여일을 이곳저곳을 다니며 여행한다는 것은 참 힘들었습니다.
모래가 항시 날려 숨 쉬기 조차 힘들었습니다. 옛날의 추억을 되살려 르피딤에 머문 것까지는 좋았는데, 순박한 교우들은 낭만 플러스(plus) 동심으로 돌아가는지 주저함도 없이 모래와 바위, 언덕을 마귀 휘잡아 다니며 사진을 왜 그렇게 많이도 찍는지요?
그곳은 전갈도, 독사도 아지 못하는 독초도 많은데요. 그래서 그때 많이 긴장했나 봅니다. 아직도 그 장면들을 기억하고 있을정도입니다. 조심해서 다니라고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사막의 무서움을 모르고 여행의 멋에 취해 있었나 봅니다. 멋고 낭만만 가지고 사막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지역과 문화, 역사가 다른 우리는 죽음과 같은 광활한 사막의 고통과 어려움을 다 모르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호렙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며 율법을 주십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며 감독의 지시만을 따랐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제 율법이 생겼으니 모세는 이 백성이 얼마나 자랑스러워요?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탈출기 4장 7절-8절)
사막에서 모세는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규정과 볍규들을 일일이 일러주며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잘 지키도록 당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사막에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며 생활했던 모든 생활과 그 가르침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며 이렇게 이릅니다.
“너희는 오로지 조심하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 너희가 두 눈으로 본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그것들이 평생 너희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 또한 자자손손에게 그것들을 알려 주어라.”(탈출기 4장 9절)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그 율법을 존중하고 또 지키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그 법의 주체는 바로 하느님이시기에 그 법은 얼마나 존엄한 것입니까?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5장 17절-18절)
다만 그 법이 세월이 가면서 그 정신은 퇴색하고 그 법을 해석하고 더덕더덕 붙는 관습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왜곡되고 틀 속에 갇혀 좁아진 하느님의 법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무리로 하셨던 말씀을 다시 새겨 보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오 복음 5장 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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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수원 바오로 신부님]
< 하느님 현존 안에서 삶>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신 규정과 법규를 잘 실천하고 완성하는 것인지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법을 지켜야 하고,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도 교회가 가르치는 계명과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법과 계명을 지켜야 합니까?
- 범칙금을 물지 않기 위해서 지킵니까?
- 주일미사에 빠지면, 고해 성사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까?
어렸을 때, 저는 말썽을 피워 부모님의 속상하게 했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어렸을 때의 저의 잘못된 행동들을 되돌아보며 ‘그 때, 왜 그랬을까?’ 라며 후회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부모님의 마음을 힘들게 하였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 한 가지 예로, 초등학교 때 배가 고프기도 하고 친구들이 맛있는 과자 먹으면 저도 먹고 싶어서 부모님 지갑의 돈을 몰래 사용한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저의 잘못이 발각된 후, 매로 무척 많이 맞았습니다. 그때 매를 맞으면서 ‘부모님 돈을 마음대로 쓰는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은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의 행동이 얼마나 부모님을 힘들게 하고,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매 맞지 않기 위해서... 잘못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저의 잘못된 행동들이 얼마나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부모님의 매와 꾸지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기 보다도,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께서 알려 주신 규정과 법규들을 잘 지킴으로써 하느님께 가까이 있을 수 있다고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의 사명은 율법이나 예언서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저처럼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잘못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 규정과 계명을 어겨 받게 되는 불이익과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 주일 미사를 의무 때문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 주일 미사를 고해성사를 보기 싫어 지키는 것이 아니라,
- 레지오 활동보고를 위한 실적위주가 아니라,
사랑과 나눔의 실천과는 상관없이 그저 밥 한 끼 굶고 고기 안 먹는 것으로 만족하는 단식재와 금육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위에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담겨져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행위가 빛을 발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율법을 완성하는 길이라 믿습니다.
은혜로운 사순절에 계명 지키기에만 급급한 소극적인 신앙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지향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인 가운데,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은총의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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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전화를 받았습니다. 모르는 전화는 잘 받지 않는데, 책을 읽다가 전화벨이 울려서 습관적으로 받고 말았습니다. 보험 관련 전화였습니다. 노후 대책으로 의료비를 지원하는 보험이었습니다. 솔직히 자동차 보험 외에 어떤 보험에도 가입하지 않는 저입니다. 가족이 없으니 생명 보험 같은 것이 필요 없고, 건강하기도 하지만 의료비 지원을 교회 병원에서 해주고 있으니 이 부분 역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연금 보험도 있지만,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한 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교회에서 책임져주니 이 역시 필요가 없습니다. 전화 속 상담사는 ‘노후 대책’을 세워야 할 때라면서 강력하게 말했지만, 상담사가 말하는 대책을 이미 세운 상태였습니다.
보험회사에서 강조하는 ‘노후 대책’도 있지만, 더 시급한 노후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곳에 가기에 합당한 ‘나’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이 아닌 부정적 감정으로 가득 차 있어서는 안 되고, 철저하게 사랑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하느님과의 대화가 중요하듯이 이웃과의 대화에서도 사랑으로 소중한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가장 훌륭한 노후 대책이 될 것입니다. 쓸데없는 대책으로 시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랑할지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바로 지금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한 행동과 말씀을 하셨습니다. 철저하게 사랑에 연관된 말과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는 모습이라며 비판합니다. 특히 당시 사회 안에서 커다란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종교 지도자들의 이런 비판에 일반 사람들도 동조할 수밖에 없었지요.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핵심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노후 대책이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랑에 집중하고 사랑의 완성을 이루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서의 큰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가장 노후 대책을 잘 세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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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율법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모세를 통해 내려 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는 것 중 나쁜 것은 없습니다. 불완전한 것도 없습니다.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것도 없습니다. 그 자체로 완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제 손에 종이 한 장이 있습니다. 이 종이는 백지입니다. 백지라는 말은 그 의미 안에 미완성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이 종이 안에 무엇인가를 채웠을 때 백지가 완성되었다고 말합니다.
제가 만약 이 백지 안에 내용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채우면 그것으로 백지는 완성된 것입니다. 반대로 종이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채워도 종이는 완성된 것입니다. 두 가지 다 완성된 것입니다만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무슨 차이이지요? 하느님이 들어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들어있나, 미움이 들어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삶 속에서 율법의 완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완성은 바로 사랑이 들어있는 율법을 말합니다. 율법이 곧 사랑의 행위가 되는 것이고 사랑이 곧 율법이 된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가 하얀색의 백지라면 그 안에 무엇을 채워 완성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의 하루가 사랑으로 가득하길, 하느님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하길, 형제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하길 말입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셨듯이 오늘 우리의 하루도 사랑으로 가득하길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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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사람들은 인생에 행복만이 존재하기를 바랍니다. 슬픈 것과 고통스러운 것들은 사라지길 바랍니다. 어떤 이는 스스로 고통을 잘라내고 행복만을 바라보며
정신과 마음을 병들게 만듭니다.
인생은 이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진 반죽과 같습니다. 어우러져야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반죽은 면이 되고 빵이 되어 그 맛을 펼쳐냅니다.
행복만이 존재하는 인생은 없습니다. 인생은 밥 한 그릇 덩그러니 있는 상차림이 아닙니다. 인생은 모든 것이 어우러진 진수성찬(珍羞盛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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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오. 5,19)
사랑하라는 주님의 큰 계명을 아주 작게라도 어기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 모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들로 살아갑니다. 하늘 아래 큰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모두가 하늘나라에서 보기에는 거저 작은 사람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작은 사람은 하느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기에 그 사람들에게 이타적인 하늘나라의 계명은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늘나라의 가치는 쓸모도 없고 불필요하게 여길 뿐 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작은 사람은 이 땅에서 큰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늘나라의 계명’보다 ‘세상의 계명’을 더 잘아서 새깁니다. 사랑하고 돌보라는 ‘하늘나라의 계명’을 거부하고 ‘세상의 계명’을 새기는 마음은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하여도 늘 불안하고 공허하기만 합니다.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때로는 온갖 핍박도 받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작은 사람들이 불안하기에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을 끌어내리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을 끌어내려야 함께 작아져야 작은 사람들이 사는 동안 불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사는 동안 이 땅에서 때로는 아주 작은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세상의 눈에 쉽게 띄지 않습니다. 진실된 사랑을 하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의 모습은 이 땅에서 깊고 조용하게 흐르는 강물과 같아 잘보이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큰 사람도 하늘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에 불과합니다. 이 땅에서 큰 사람은 한 줌의 먼지가 되어 땅으로 돌아가지만, 하늘에서 큰 사람은 죽어도 영원한 생명을 하늘나라에서 누립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할 것이다."(신명기 4.1)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사랑과 정의와 평화와 진리인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과 가치를 전하며 이 땅에서는 작고 하찮은 존재처럼 살지만, 언젠가 주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가 전하고 가르친 기쁜 소식과 가치가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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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들과 다른 점을 하나를 들라면, 아마도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 하나를 들라면, ‘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이는 복음을 예표하고 있던 구약의 율법이 ‘복음’ 안에서 완성(성취)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온몸으로 율법과 예언을 실행하셨고, 결정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고 하시면서 모든 것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실행하는 이가 복됨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는 계명을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알고 있는 것을 말로 선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킴’으로써 계명을 ‘실행’하고, 그 실행으로 가르치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 그레고리우스는 말합니다.
“설교자에게는 법이 하나 있는데, 설교하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는 법이다.”
그리고 유명한 설교가였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가르치는 바를 행동으로 파괴시킨다면, 사람이 법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실현’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행하는 일입니다. “스스로” 한다는 것은 ‘사랑의 원의’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사랑하기를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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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행동으로 지키고 가르치며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말이 아닌 행실로 사랑하고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며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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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법과 규칙, 상식의 준수>
-영성의 기초-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 기쁨을 주소서."(시편86,4)
오늘 복음과 독서의 주제가 일치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과 율법’이고, 독서는 '하느님의 법'입니다. 공동체 삶의 기초가 법과 규칙입니다. 공동체의 그누구도 법이나 규칙위에 있지 못합니다. 누구나 법앞에 평등은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지도자들에게 해당되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오히려 지도자들은 법이나 규칙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제가 1992년부터 지금까지 33년동안 금요강론을 멈춘적이 없는데 다룬 내용은 <베네딕도 수도규칙>이었고 저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그날까지 반복하여 이 규칙을 공부할 계획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자명하게 실천되어야 할 법이 유린됨을 목격합니다.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두려워할줄도 모르고 너무 뻔뻔하게 공공연히 법을 위반하면서 법위에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 국민들의 신뢰를 잃으면 나라도 망합니다. 그래서 법을 가장한 도적 무리란 뜻의 ‘법비(法匪)’라는 말도, 온갖 법 지식을 이용해 성긴 법망을 빠져나가는 ‘법추(法鰍;법꾸라지)’란 말도 회자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말씀은 인간 누구나 공감하는 불문율입니다. 법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란 말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법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법없이는 못삽니다. 법이 있어야 생존경쟁치열한 약육강식의 시대에 약자들을 보호하고 지켜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이 규칙이 준수되지 않으면, 특히 지도자들이 법을, 규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그 공동체는 서서히 내적으로 무너집니다.
필연적으로 이런 불의하고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사회 공동체는 내적분열을 겪고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법이 잘 지켜져야 공동체의 성원들도 공동체를 사랑하며 효능감을 지니고 살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의 법과 규칙의 준수는 함께 하는 공동체의 성원들도 그대로 보고 배우기에 지도자들은 누구보다도 법과 규칙을 잘 지켜야 합니다.
옛 수도원을 창립했던 분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분들이요 삶자체가 살아있는, 걸어다니는 복음서라 할 정도로 보고 배울 법이나 규칙 자체였기에 규칙이 없어도 평화공존의 융성한 공동체도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이 살아 생전에 우선 마련한 것이 법규와 규칙이었습니다. 카리스마와 관계없이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우선적인 것이 무엇보다도 공동체가 동의하고 합의한 법규나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삼학(三學)도 계정혜(戒定慧)의 순서입니다. 계울준수의 바탕위에 안정(安定)이 있고 관상의 지혜가 뒤따릅니다. 영성신학도 예전에는 수덕신비신학이었으니 수덕의 준수위에 바탕한 신비신학임을 말해 줍니다. 이런 법규나 규칙의 준수가 없는 공동체라면 사상누각, 모래위에 공동체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예전 장상의 언급도 있지 못합니다. 상식과 양식에 기초하지 않은 영성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영성을 말하기전에 우선 기본이 되는 상식부터 규칙부터 지키라는 것입니다.
제가 맨처음 베네딕도 수도자는 ‘평화의 전사’라는 말마디를 배운 것은 황춘흥 다미아노 선배수도사제였고 이분이 당신을 찾는 수녀들과 주고 받았다는 문답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이분이 없었다면 제가 수도원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제 수도성소에 주님의 가교역할을 했던 결정적인 분으로 타계하신지 이미 오래지만 지금도 여전히 고마워하고 있는 분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입니까?”
물음에 신부님을 일언지하에 답변하신 내용은 단 하나였습니다.
“규칙대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이치럼 잘 사는 것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요 단순합니다. 규칙대로 살면 됩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규칙을 사랑하고 존중하여 자발적 정신으로 규칙대로 살아야 공동체의 기강도 서고 견고한 공동체도 건설됩니다. 대통령이나 입법, 사법, 행정부 지도자들 역시 나라 공동체 질서의 기초와 기본이 되는 법대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오늘 신명기 제1독서의 모세야 말로 살아있는 법과 같은 분임을 봅니다. 모세가 우선적으로 강조한 것도 규정과 법규의 준수였습니다.
“나는 주 나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규정과 법규들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었다.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규정을 듣고 ‘이 위대한 민족은 정말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구나.’할 것이다.”
이런 종교가 명품종교요 이런 신자가 지혜롭과 슬기로운 명품신자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단호하기가 추상같습니다.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사랑과 존중은 그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존중의 표현입니다. 바로 그 사랑의 법이 오늘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입니다. 율법주의자가 아닌 율법정신의 사랑으로 살았던 ‘살아 있는, 걸어 다니는 복음서’와 같은 예수님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빛날 사랑의 율법이요, 스스로 지키고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모세처럼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법 준수에 철두철미한 율법정신의 사랑이 체화(體化)된 분입니다. 모세와 예수님, 이분들의 율법사랑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요, 절대로 율법주의자가 될 수 없는 분들입니다.
작금의 문제는 좌우의 문제라기 보다는 상식과 비상식, 준법과 위법의 문제입니다.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한 비상식이, 위법이 일상화되고 만연되어가는 비정상적인 사회가 문제입니다. 사순시기 비상한 회개가 아닌 삶의 제자리로 돌아와 상식과 준법의 정상적 삶을 사는 회개가 긴요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상식과 준법의 삶을, 예수님처럼 ‘살아 있는 걸어 다니는 사랑의 복음서’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여,당신의 길을 내게 가르치시어, 그 진리 안에서 걷게 하소서."(시편86,11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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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큰 사람,, 작은 사람>
오늘 신명기는 큰 민족에 대해 얘기하고, 오늘 주님께선 큰 사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이 말씀에 비춰볼 때 하느님을 모신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크신 하느님을 모신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인데 이는 하늘을 품은 호수가 가장 큰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은 하느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고 가르치는 이가 위대하다고 합니다.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우리는 흔히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어떤 사람을 칭찬하곤 합니다. 그런데 오늘 신명기는 모세의 법을 지닌 민족이 위대한 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더 훌륭합니까?
법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지키며 사는 사람이 더 훌륭합니까?
제 생각에 아무리 주님이 하느님 계명을 지니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고 해도 법 없이도 법이 가르치는 것 이상으로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법을 가지고 법에 따라 사는 것보다 더 훌륭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라고 오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을 함부로 어기고 무시하는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 학자가 하는 말은 지키되 그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는 주님의 가르침과도 맥락을 같이하는 것일 겁니다.
사실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율법주의가 문제이고, 율법주의자의 문제는 율법 준수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율법을 지키건 어기건 그것은 자기중심이고, 사랑이 있으면 율법을 지키건 어기건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율법을 어길 때는 언제나 사랑을 위해서이고 사람을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만일 율법에 사람과 사랑이 없이 법만 있다면 그것을 진정한 하느님의 계명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순 시기를 지내는 요즘 제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단식재와 금육재의 준수 문제입니다.
저 혼자일 경우에는 이것들을 어길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누구와 같이 식사할 경우에는 이것을 쉽게 어기곤 합니다.
사제가 더 모범이 되어야 하나? 그래서 밥을 먹으러 가도 채식 식당을 골라서 가야 하나? 식사를 하면서 술은 먹지 않고 먹지 말자고도 해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다 그가 또는 그들이 선택하는 곳에 가지만 실은 비겁하게 선택의 고민을 그들에게 미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술이 먹기 싫었는데 그 때문에 먹은 것이 아니라 먹고 싶었는데 그에게 술 먹은 책임을 돌리고 제 합리화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문제를 가지고 고민이나 하는 저는 작은 사람인 것이 틀림없고, 욕망을 숨기면서 남에게 책임을 돌리고 자기합리화나 하는 저는 작다 못해 찌질한 사람입니다.
하늘을 담은 호수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담은 큰 사람이 되라고 도전을 받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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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
<율법의 완성인 실천!>
오늘 복음(마태5,17-19)은 '예수님과 율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데, 그들이 예수님께 씌운 죄목이 '율법 파괴죄와 신성 모독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파괴하셨다는 죄와 하느님이 아니면서 하느님 행세를 했다는 죄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예수님을 메시아로, 하느님으로 받아들이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아직도 구약성경 안에 머물러 있고, 신약성경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계명들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완성인 실천!'
'신앙생활의 목적은 부활이요 기쁨'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리고 마지막 때에 영원히 부활하고 기뻐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굳게 믿으면서,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러니 기도하는 것이 기뻐야 하고, 나누는 것이 기뻐야 하고, 절제하고 극기하고 희생 봉사하는 것이 기뻐야 합니다. 그리고 가까운 내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기뻐야 합니다. 한마디로 나의 성소가 기뻐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생각과 입으로만 믿지 말고, 구체적인 삶으로 믿는, 그래서 날마다 율법을 완성하려고 애쓰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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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 19)
평화로운
우리의
일상이
무너지고
흩어진
혼란스러운
이 시간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율법과
예언서들도
스스로 지키고
삶으로 가르치는
이들이
완성합니다.
돌아가야 할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입니다.
지키는 율법이
지키는 참된
행복이 됩니다.
삶의 빛깔은
율법의
폐지가 아닌
완성으로
더욱
아름답습니다.
율법과
예언서가
제시하는 분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최상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가르침을
한 데 모으면
사랑의 십자가가
됩니다.
십자가가
가르쳐준
값진 교훈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하느님의
좋으신
가르침도
우리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귀한 것은
몸소 보여주신
삶이었습니다.
우리 시대가
잃어가는 것은
스스로 지키고
삶으로 가르치는
진실된 삶입니다.
지키고
가르치는
진실한 삶이
주는
참된 가치를
다시 만나는
사순입니다.
힘들수록
하느님의
가르침을
되새겨야 합니다.
스스로
지키고
삶으로
가르치는
큰사람이
많아지는
건전한 사회가
되길 진심으로
기도드리는
소중한
오늘입니다.
하늘 나라의
진실한 인격은
스스로 지키고
스스로
실천하는
인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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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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