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 평양이 조선 평양(대동강 평양)으로 왜곡된 사연('평양' 지명이 같아서)
"조선 건국 이후 대륙과 만주 영토의 기억을 잃게 되자,
'과거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옛 영토가 지금 우리 조선의 영토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고 인식하고 있었던 조선의 유학자들은 단군·기자·위만 ·고구려의 정통성을 우리 땅 안에서 지켜내기 위해,
이동해온 지명을 한반도 내의 지명으로 착각하여 조선의 ‘대동강 평양’을 고구려 평양으로 착각하여 기록한 것이다."
1) 고구려 평양 지명(이름)은 지속적으로 동쪽으로 이동되어 조선의 대동강 평양이 되었다
평양(서경) 지명이 수차례 동쪽으로 이동되었는데 고구려 평양, 고려 서경(평양)이
조선 평양으로 한반도 대동강 평양의 문헌 근거는 평양 이라는 지명(이름)이 같았기 때문이다
(1) 고려도경(국성)과 원사지리지(동녕로)
고려사에 고려 왕건이 고구려 평양에 고려 서경을 설치했는데
고려도경과 원사지리지에
거란 전쟁 결과 이후에 고구려 평양 동쪽으로 이동한, 고려 영토와 고려 중기 서경(평양)이 있었다는 기록은
고구려 평양 지명이 거란전쟁 이후 고려중기에 동쪽으로 이동되어 동녕로 위치가 고려 서경(평양)이 된 것이다
-. 고려 도경 : 唐末, 高麗君長, 懲累世兵革之難, 稍徙而東.
-. 원사지리지 : 唐征高麗,拔平壤,其國東徙. 至王建,以平壤為西京
(2) 원사 지리지(동녕로)에
1269년에 최탄 이연령등이 서경(평양)과 북계 54성과 서해도 6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했고
원나라는 서경(평양)에 동녕로를 설치했다
따라서 고려 중기 서경(평양)인 만주 요양시가 원나라 동녕로가 되었으니
고려 후기 평양(서경)은 한반도 대동강 평양으로 이동된 것으로 보이고,
대동강 평양은 조선의 평양이 된 것이다
: 元至元六年, 李延齡, 崔坦, 玄元烈 等以府州縣鎮六十城來歸.
八年, 改西京為東寧府. 十三年, 升東寧路總管府, 設錄事司.
(3)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고구려 평양이 조선의 대동강 평양이라는 확정편향으로
대동강 평양이 고구려 평양이고, 낙랑군 왕험성이고 기자조선이고 단군조선의 왕검성이라고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윤두수의 기자지에서 설명한 것이다
(4) 이후, 한백겸이 동국지리지에서
대동강 평양이 고구려 평양이고, 낙랑군 왕험성이고 기자조선이고 단군조선의 왕검성이기에
남자남북자북(南自南 北自北:남쪽은 삼한, 북쪽은 낙랑군)을 선언하고 한수를 한강으로 주장하면서
한반도 북부는 고구려, 한반도 남부는 백제,신라,가야가 조선 유학자들의 통설이 되었고
일제 식민사학을 거쳐서, 대학역사 교수들의 반도사관 통설이 완성된 것이다
2) 고구려 장수왕의 요동 평양이 낙랑군 왕험으로 왜곡된 사연(요동군 험독현의 험독과 왕험은 같은 뜻)
▣ 북위 역도원은 수경주 패수조에서 고구려 평양성과 위만조선 영토는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설명한 것이다
수경주 패수조에서 위만조선 영토를 패수 서쪽인 요동군 동부지역으로 보았고 (요동군 험독현의 응소 주석 내용)
역도원은 북위시기 고구려 평양성이 고대 요동에 있음을 확인하고
장수왕의 평양성이 위만조선의 영토였다고 설명한 것이다
▣ 당 고종의 아들 이태는 고구려 장수왕의 요동 평양성이 장안성(평양성)으로 천도 이후의 인물이기에
고구려 평양성이 위만조선 영토에 있다는 수경주 패수조 내용을 보고,
사기 조선열전에 의해 위만조선 왕험성은 패수 동쪽의 낙랑군에 있어야 하기에
괄지지에서 고구려의 평양성는 낙랑군 왕험성을 주장함으로써
고대 요동에 있었던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성이 낙랑군 왕험성으로 강제 이동당하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 당 고종의 아들 장회태자 아현은
고구려 멸망 당시의 고구려 평양성(장안성)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개마대산 동쪽, 동옥저 서부(진황도시 무녕현)에 평양성(장안성)이 있다고 후한서 동옥저에 주석을 남긴 것이다
(1) 한서지리지에서
요동군 험독현을 응소가 '조선의 왕 위만이 도읍(왕험)인데 강물의 험한 것을 의지하였기에 험독이라 한 것이라고 했다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낙랑군 조선현을 응소가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했다:應劭曰. 武王封箕子於朝鮮.'
(2) 수경주 패수조에서 북위 역도원이
응소의 요동군 험독현의 왕험=험독 주석을 믿고서, 요동군과 낙랑군의 경계인 패수를 위만이 건너지 않았다
(若浿水東流,無渡浿之理: 패수가 동쪽으로 흐르는 것 같으니, 패수를 건널 이유가 없었다)고 했으니
패수 상류는 동쪽으로 흐르는데, 패수 상류의 북쪽에 위치한 요동군에 장수왕의 평양성이 있었으니,
장수왕의 평양성을 왕험성으로 설명한 것이다: 其(衛滿朝鮮)地 今高句麗之國治, 余訪番使, 言城在浿水之陽.
(3) 괄지지에서 당고종의 아들 이태가
수경주 패수조의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성이 왕험성이라는 설명을 참고하면서
사기 조선열전에는 왕험성이 패수 동쪽의 낙랑군에 있었던 것이 명확하기에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성이 낙랑군 왕험성으로 설명한 것이다(장수왕의 평양성이 요동군에서 낙랑군으로 바뀐 것)
: 朝鮮[正義, 括地志云: 高驪都平壤城, 本漢 樂浪郡 王險城, 又古云朝鮮地也] 王滿者, 故燕人也.
(4)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에서 당고종의 아들 장회태자 이현이
장수왕의 평양과 고구려 멸망당시의 장안성이 평양으로 지명이 같기에
괄지지 내용을 인용하면서 개마대산 동쪽의 동옥저 서부에 있는 고구려 멸망 당시의 평양성(장안성) 위치를 기록했다
: 東沃沮在高句驪 蓋馬大山之東, [蓋馬, 縣名, 屬玄菟郡. 其山在今平壤城西. 平壤卽王險城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