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시 군수뇌부의 반역행위,10가지증언 |
2005-02-21 20:16:40 |
남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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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지만원 등록일 2002-01-31 [09:23] 조회수 590 "6.25 때 군에는 간첩이 없었다. 6.25 때 간첩이 있었다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 허위이며 수많은 호국영령의 숭고한 넋을 모독하는 말이다" 이는 6.25를 치르지 않은 김동신 현 국방장관이 2001년 10.10일에 한 말이다. "나는 6.25 초전의 전후 사정을 종합 판단할 때 군 내외에서 좌익분자들이 긴밀 하게 합작, 국군의 작전을 오도했다고 확신한다. 그 일부로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6.25 10대 미스터리를 소개한다". 이는 6.25를 치른 군번 1번 이형근 대장이 한 말이다.
김동신은 사상을 의심받을 만한 14개의 행적을 보여준 사람이다. 이형근 대장의 말과 김동신 대장의 말 중 누구의 말이 옳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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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번 1번의 외길 인생 이형근 회고록"(중앙일보사) 제55쪽-57쪽에 군수뇌부에 숨어있는 간첩을 의심하는 10대 불가사의가 기록돼 있다. 그 전문을 게재한다.
나는 여기서 6.25전쟁 전후에 나타난 10대 불가사의를 지적함으로써 향후 국가 방위를 위한 교훈으로 삼고 싶다. 그것은 군사적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다.
나는 6.25 초전의 전후 사정을 종합 판단할 때 군 내외에서 좌익분자들이 긴밀 하게 합작, 국군의 작전을 오도했다고 확신한다. 그러면 통적(通敵) 분자가 과연 누구냐?
나로서는 수상하다고 느껴온 사람이 있지만 심증만 갖고 꼭 집어 거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들 가운데는 죽은 사람도 있지만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누군가가 확증을 제시할 것으로 믿으며 바로 이런 증언이야 말로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도 긴요한 일이라 믿는다.
나는 나의 생전에 이 문제에 관한 집중적인 연구가 진행되기를 갈망하며 이런 연구가 시작되면 나도 후세를 위해 밝힐 것은 밝힐 각오다. 이 연구에서 반드시 풀려야 할 가칭 10대 미스터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선 부대의 적정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했다는 점이다. 6.25 발발 직전인 1950년 4-5월께는 내가 지휘한 8사단뿐만 아니라 다른 사단에서도 적의 대규모 남침 징후가 보인다는 보고가 잇따랐을 것이다. 8사단의 경우, 1950년 3-5월 태백산맥으로 침투한 이호재 부대의 잔당과 김무현 유격대를 토벌하던 중 생포한 포로들의 심문 결과 이구동성으로 적의 대규모 남침을 거듭 예고했기 때문에 이 정보를 육본에 누차 보고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둘째, 각급 주요 지휘관의 이른바 6.10 인사이동이다. 6.25가 발발하기 불과 2주일 전, 중앙 요직을 포함한 전후방 사단장과 연대장급의 대대적인 교류와 이동이 단행되었다.
셋째,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다. 6.13-6.20일에 걸친 전후방부대 이동 역시 가장 부적절한 조치였다. 전투를 지휘해야 할 지휘관들이 적정, 지형은 물론 부하 들의 신상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넷째, 북의 평화공세에 대해 남은 6.11-23일간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그 이유는 6.10일 "조국통일 특사 체포 사건"에 대해 평양방송이 맹렬한 비난과 무력행사 위협을 해왔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6.23일은 김일성 장군이 남침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도록 결정된 날이었다.
좀 더 설명하자면 북측은 남북협상을 위해 특사 3명을 파견할 것이니 남측에서 메세지물을 받으라 했다. 남측은 이들을 그날 38선 남방 1km 지점에서 맞아 메시지를 인수했다. 그러나 이들은 유엔 감사 위원단에게도 수교할 문서가 있다면서 서울로 들어가겠다고 떼를 썼다. 우리 경찰이 이들을 체포했는데 북측은 즉각 석방하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렇게 남북이 티격태격거리고 있는데도 육본은 6.24일 0시부터(남침 4시간 전에) 비상경계태세를 해제해버린 것이다.
다섯째, 이런 위기 상황에서 육본은 비상경계 해제와 더불어 전 장병의 2분의1에게 휴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시켰다.
여섯째, 육군 장교클럽 댄스 파티다. 6.24일 밤 육군 장교 클럽 낙성 파티를 연다고 전후방 고급장교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참석 장교들은 6.25일 새벽까지 술과 댄스를 즐겼으며 일부 미 고문관과 장교들은 2차를 가기도 했다. 나도 초청장을 받았지만 시기적으로 너무 엉뚱한 짓이어서 불참했다.
일곱째, 적의 남침 직후 우리 병력을 서울 북방에 축차 투입해 장병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지만 군사적 기초 상식을 깬 작전지휘였다.
여덟째, 적의 공세로 국군이 퇴각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6.25-27일 우리 방송은 국군이 반격, 북진중이라고 허위방송함으로써 군부는 물론 국민들까지 상황판단을 그르치게 했다. (서울 북방에서 접전 중이던 국군이 상황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수많은 애국인사들이 피난을 가지 않고 있다가 서울에서 참살 당했다).
아홉째, 한강교의 조기 폭파다. 전술 원칙상 교량폭파나 차단은 퇴각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 추격군이 감행하는 법인데 한강교는 우리측이, 그것도 한강 이북의 국군만 믿던 많은 시민 그리고 병력과 군수물자를 방치한 채, 서둘러 폭파했다. 더구나 대통령, 정부고관, 육군참모총장이 국민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한강 이남으로 도피한 후 한강교를 폭파했다는 것은 전술적으로나 도의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반역행위였다.
열번째,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 사형집행이다. 최대령은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에 복종, 폭파했을 뿐인데 이에 책임을 지고 1950.9.21일 비밀리에 처형됐다.
이형근 대장이 위에서 열거한 10가지 불가사의 말고도 불가사의는 많이 회자된다. 예를 들면 6.25 남침 사실을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채병덕에게 보고하자 전속부관은 주무시는 총장님을 깨울 수 없다며 끝내 알리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그런 부관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지 않은 채병덕 장군도 수상했다. 수많은 예비역 장군들이 채병덕 장군을 수상하게 여기고 있다.
(이형근 대장의 약력)
1920. 충남 공주출생
1942. 일본 육사 졸업
1946. 국방경비대 대위 임관(군번 1번)
초대 사관학교장 겸 군기 사령관
1949. 8사단장
1950. 초대 3군단장
1952. 제1군단장
1954. 초대 합참의장(육군대장)
1956. 육군 참모총장
1958. 예비역 편입
1960. 대한민국 재향 군인회장
1961~7. 영국 등 10개국 주재대사
1976. 한국 반공연맹 이사장
1989. 국토통일원 고문
2001. 사망
2002. 1. 30 | ** 북괴는 정전협정 이후 43만번 이상 정전협정을 위반했고,4500여 명 이상의 무장공비를 남파했으며 6000여 회 이상 NLL을 침범하며 정전협정 무력화와 주한미군 철수를 기도해 온 양아치 집단이다.이런 적을 비난하기보다 적 편에서 방송하는 MBC좌익 선동방송은 이나라에 존재할 이유가 없는 빨/갱/이 방송이다. 국민이 이를 응징 영구 퇴출시켜야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