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창나이 선녀님
윤여희
제주살이 일상인 아침저녁 산책과 맛집 탐방이 시들해질 즈음 우연히 읍내에 있는 작은 영화관을 발견 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영화관에 거의 3년동안 가지 못했는데 무척 반가웠다. 좌석은 50석 정도 되며 작년에 개관하여 넓고 쾌적한 휴게실도 있다. 영화 관람료는 6천원으로 참 저렴하다. 더구나 기획 영화는 무료 관람에 커피도 제공하고 쿠폰북에 스탬프를 찍으면 선물도 준다고 한다. 최근에 관람한 「한창나이 선녀님」은 평점이 9.53인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드디어 영화 시작. 자막에는 바람 소리, 개 짖는 소리라는 자막도 뜨고 시각장애인도 느낄 수 있도록 해설도 곁들여 나온다.
주인공 임선녀 할머니가 소의 출산을 지켜보려고 헤드랜턴을 끼고 외양간 앞에서 밤을 새우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선녀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나무에 올라가 감도 따고 슬레이트 지붕에 올라가 자식들에게 보낼 도루묵을 말리기도 한다. 손톱이 닳도록 일을 하면서도 2만 8천원을 들여 택시를 타고 읍내에 있는 문해교실에 나가 한글 공부를 한다. 먼저 간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문맹을 걱정하며 꼭 한글공부를 하라는 당부를 실천한다. 돈이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버는 것이란 멋진 신념을 가진 할머니다. 삼 년 전에 암으로 남편과 이별하면서도 자식들 걱정한다고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강인한 어머니. 18세에 결혼하여 외부 세계로는 평생 산 하나밖에 넘어보지 못한 선녀 할머니는 평생 살던 쓰러져가는 집을 떠나 죽기 전에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것이 작은 소망이라며 근처에 새집을 짓고 이사를 준비하는 내용이다.
온종일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고 밤에는 공책에 또박또박 글씨를 쓴다. 공부를 하려면 머리가 아프고 공부한 내용을 잊어버려 선생님께 미안하다는 선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어르신이 있다.
몇 년 전 도내 읍면지역을 순회하며 어르신들 상담을 하였다. 70세까지 작은회사에서 청소일을 하시던 어르신이었는데 한글을 모른다고 남편이 구박하고 공부하려면 면박을 준다고 호소하는 분이었다. 상담도 진행하면서 한글 공부 책도 사다 드리고 틈틈이 알려드려도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아 참으로 답답했는데 이제야 그 어르신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공감이 된다.
내담자로 만난 어르신들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삶을 사신 분들이 많았다. 그중 잊을 수 없는 분이 계시다. 결혼을 했으나 자녀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소박당하고 부인과 사별한 가난한 남편을 만나 살며 전실 자식과 조카들까지 키워내신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신다. 사내아이들 키우며 딱 한번 야단친 기억이 마음에 남는다고 하셨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쓰러지셔서 반신 마비가 되고 기초연금에 의존하며 생활하시지만 당신은 저승보다는 이승이 좋다고 수줍게 말씀하셨다. 홀로 사시며 불편한 몸으로 꽃밭도 가꾸고 텃밭에 콩 농사도 하신단다. 상담이 종결됨을 알리자 속고쟁이에서 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 주셔서 극구 사양하자 아쉬워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올해 아흔 세 살이 되셨을 맑은 미소의 어르신이 생존해 계실지 궁금하다. 녹록하지않은 삶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긍정적인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오래전에 읽은 글귀가 생각이 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텔마톰슨 부인은 남편을 따라 캘리포니아주 모하비 사막에 있는 육군 훈련소로 오게되었다. 심한 더위와 모래 바람등 열악한 상황에서 친정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도저히 살 수 없어요. 차라리 형무소가 낫겠어요”
친정 아버지의 답장은 “감옥의 창살 너머로 밖을 내다보는 사람 중에 한사람은 흙탕물을 보고 다른 한사람은 별을 본다”
이 편지에 충격을 받은 톰슨 부인은 관점을 바꾸어 낯선 이웃들과 친구가 되고 자연을 깊이 관찰하여 【빛나는 성벽】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는 내용이다.
인생에는 출생과(BIRTH) 죽음(DEATH) 사이에는 선택(CHOICE)이 있다. 흔히 B와 D사이에는 C가 있다고 말한다. 인생이란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인생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선택이 우리를 불행하게 또는 행복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관점을 바꾸는 학습이 필요하다. 정신과 의사이며 의미치료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간은 어떤 삶의 조건, 상황 속에서도 뭔가를 스스로 선택 할 수 있는 자유까지 빼앗기지 않는다고 한다.
살다보면 가끔 작은 돌뿌리에 발 걸려 넘어지지만 “나에게만 나쁜 일이 피해가란 법은 없지. 누구나 이런 일은 겪어. 수고했어 ”라며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는 영화였다. 저녁 하늘에는 초승달이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