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에 대한 갈망
미국은 뛰어난 총(銃)들이 탄생(誕生)한 나라지만 정책 담당자(定策擔當者)의 오판(誤判)으로 제때 도입(導入)이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제1차 대전을 상징하는 유명한 맥심기관총(이하 맥심)도 그런 사례(事例) 중 하나입니다.
1884년 미국인 하이람 맥심(Hiram Stevens Maxim,1840~1916)은 이후 기관총(機關銃)으로 불리게 되는 혁신적(革新的)인 화기(火器)를 발명(發明)했으나 군(軍)의 무관심(無關心)으로 납품(納品)에 실패(失敗)했습니다.
그러자 영국으로 건너가 판매(販賣)에 성공(成功)하고 1899년 귀화(歸化)까지 했습니다.
↑하이람 맥심과 그가 만든 기관총
↑기관총을 테스트 중인 하이럼 맥심 경, 1897년.
맥심(Maxim)의 위력(威力)에 주목(注目)한 유럽 열강(列强)들은 제1차 대전 이전부터 이를 면허 생산(免許生産)해 사용했습니다.
전쟁 초기(戰爭初期)의 진격(進擊)이 멈추고 참호전(塹壕戰)이 시작되자 피아(彼我) 모두가 사용한 맥심은 현실(現實)에 지옥(地獄)을 등장(登場)시킨 최고(最高)의 살상병기(殺傷兵器)가 되었습니다.
반면 미국은 1917년 전쟁에 뛰어들었을 때 마땅한 기관총이 없어 쩔쩔매는 아이러니(irony, '모순된 점이 있다)를 연출(演出)했습니다.
이처럼 기관총의 초기 역사(歷史)는 유럽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닙니다.
↑영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루이스 기관총으로 사격 중인 미군, 그런데 이 또한 미국인이 만들었지만 미군이 채택을 거부한 기관총입니다
러시아도 일찍부터 맥심을 주목(注目)한 나라입니다.
1904년 발발(勃發)한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에서 비록 패(敗)했지만 뤼순(旅顺) 공방전(攻防戰)처럼 일부 전투에서는 일본군에게 엄청난 사상(死傷)을 안겨주었는데 이때 맥심이 대단한 역할(役割)을 했습니다.
효과(效果)에 만족(滿足)한 러시아가 기존(旣存) 제식 소총탄(制式小銃彈)인 7.62x54mmR을 사용(使用)할 수 있도록 약실(藥室)을 개조(改造)해 1910년부터 면허 생산(免許生産)한 맥심이 한국전쟁(韓國戰爭) 당시에 공산군(共産軍)이 사용하기도 했던 PM M1910입니다.
↑일본군은 1904년 5월 5일 요동반도에 상륙을 개시했으며 5월30일 대련을 점령했다. 프랑스 신문인 ‘르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이 1904년 6월 19일 당시의 전투장면을 묘사해 게재한 그림이다.
[사진가 권태균]
↑1920년대 소련군이 운용 중인 PM M1910 기관총
맥심의 최대 단점(最大短點)은 최소 5명이 달라붙어야 할 만큼 무거운 무게였습니다.
운반(運搬)하기가 어려워 주로 진지(陣地)에 거치(据置)해 방어용(防禦用)으로 사용했습니다.
특히 PM M1910은 이동용(移動用) 바퀴와 사수보호용 방패(射手保護用防牌)까지 포함(包含)하면 무게가 64kg에 이르러서, 맥심의 변형(變形)들 중에서도 가장 무거웠습니다.
다만 기갑장비(機甲裝備)가 등장(登場)하기 전까지는 공격에 나선 측의 화력(火力)을 압도(壓倒)할 수 있어 전술적 이점(戰術的利點)을 톡톡히 누렸습니다.
↑PM M1910은 무게가 64k여서 공격에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공격 제일주의(攻擊第一主義)가 기관총(機關銃)의 벽(壁)에 막혀 엄청난 참사(慘事)를 불러오자 제1차 대전 종결(終結) 후 열강들의 전술 사상(戰術思想)은 방어(防禦) 제일주의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기관총을 공격용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전쟁이 발발하면 제1차 대전 같은 장기간 소모전(長期間消耗戰)이 아닌 이상 방어만 해서 승리(勝利)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열강(列强)들은 앞 다투어 가벼운 기관총의 개발(開發)에 나섰습니다.
↑(좌)상하로 돌출과 회전이 가능한 포탑. <출처 :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Metrich_B8_75.jpg> (우)포구에 장착된 81mm 박격포의 모습. 이처럼 병사들이 완벽하게 보호 된 상태로 전투를 치를 수 있다.
<출처 :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LigneMaginot81CasInt.jpg>
그러나 러시아의 뒤를 이은 소련(蘇聯)은 1920년대 후반(後半)이 되어서야 프로그램을 진행(進行)할 수 있었습니다.
제1차 대전 이후 적백내전(赤白內戰)이 이어지면서 혼란(昏亂)이 계속(繼續)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회(社會)가 안정(安定)된 1928년이 되어 소련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는PM M1910을 대체(代替) 할 새로운 기관총(機關銃)에 대한 소요(所要)를 제기(提起)했습니다.
내전 당시에 외세(外勢)의 개입(介入)으로 말미암아 곤욕(困辱)을 치렀기에 소련은 좋은 무기 보유에 대한 의지(意志)가 컸습니다.
↑혁명과 내전의 혼란이 정리된 후 기관총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사실 겨울전쟁과 독소전쟁(獨蘇戰爭) 초기의 망신(亡身)스러운 패배(敗北) 때문에 당시 소련제 무기(武器)의 성능(性能)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는 전쟁 전에 있었던 대숙청(大肅淸)의 여파(餘波)로 지휘체계(指揮體系)가 무너졌기 때문이지 무기의 성능이 나빠서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물론 전투기(戰鬪機)처럼 기술 격차(技術格差)가 있던 품목(品目)도 있었지만 소총(小銃), 야포(野砲), 전차(戰車) 같은 경우는 일선의 독일군들도 부러워했을 정도로 성능이 좋았습니다.
↑DP, RDP, DShK 등을 개발한 바실리 데그차료프
새로운 기관총(機關銃)에 대한 요구사항(要求事項)은 소부대(小部隊) 전투는 물론 대공용(對空用)으로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연사력(連射力)과 화력(火力)이 강력(强力)하지만 기동전(機動戰)을 대비(對比)해 무게가 가벼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PM M1910은 여전히 중요(重要)한 무기지만 그 정도의 무게로 더 이상은 곤란(困難)하다고 보았던 것이었습니다.
많은 엔지니어(Enger)들이 개발(開發) 경쟁(競爭)에 참여 했는데 바실리 데그차료프(Vasily Degtyaryov)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기대가 컸지만
데그차료프는 유명한 DP 경기관총(輕機關銃)을 만든 인물(人物)이기도 합니다.
DP는 성능이 최고라고 할 수는 없지만 1950년대 말까지 소련군 및 동구권(東歐圈)에서 소부대용 화력지원수단(火力支援手段)으로 무난(無難)하게 사용되었던 성공작(成功作)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만들면서 확보(確保)한 기술과 기존의 여러 기관총을 참조(參朝)해 부가장비(附加裝備)를 제외(除外)한 총기 자체(銃器自體)의 무게가 PM M1910의 절반(折半)에 불과(不過)한 새로운 기관총 프로토타입(prototype)을 만들어 당국에 제출(提出)했습니다.
↑1891년 개발되었으나 아직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7.62x54mmR 탄
치열한 경쟁(競爭) 끝에 1934년 그의 제출안(提出案)이 채택(採擇)되었고 실험 과정(實驗科程)에서 드러난 이런저런 문제점(問題點)들을 수정(修正)한 후 제2차 대전 발발 직후인 1939년 9월 22일에,
데그차료프가 만든 7.62mm 기관총(機關銃)이라는 뜻의 DS-39라는 이름으로 제식화(制式化)되었습니다.
DS-39의 양산(量産)과 동시에 PM M1910의 제작(製作)을 중단(中斷)했을 만큼 새로운 기관총에 대한 소련군 당국의 기대(企待)는 상당(相當)했습니다.
하지만 기대는 실망(失望)으로 바뀌었습니다.
↑DS-39 기관총에 대한 소련 군부의 기대는 컸습니다
생산(生産)과 동시(同時)에 실전(實戰)에 투입(投入)해 본 결과(結果)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문제점이 나타났습니다.
특히 1939년 11월에 시작된 겨울전쟁에서 상당히 실망스런 결과를 보여 주었습니다.
툭하면 급탄 불량(給炭不良)이 발생(發生)했고 야전(野戰)에서 정비(整備)도 쉽지 않았습니다.
정작 필요(必要)할 때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무기가 부족(不足)했던 핀란드(Finland)군(軍)도 노획(鹵獲/capture)한 후 곧바로 전선(戰線)에 투입하지 못하고 개량(改良)한 후에야 사용(使用)했을 정도였습니다.
↑핀란드군이 노획해서 사용한 DS-39
대대적으로 손 봐야 했으나 1941년 독소전쟁(獨蘇戰爭)이 발발하자 당장 신뢰성(信賴性) 있는 무기의 공급(供給)이 급(急)했던 소련군은 PM M1910의 생산(生産)을 재개(再開)하면서 DS-39을 단종(斷種)시켰습니다.
덕분에 탄생(誕生)한 지 불과 2년 만에 생(生)을 마감(磨勘)했고 PM M1910의 대체(代替)는 1943년부터 도입(導入)된 SG-43 기관총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DS-39는 기대(企待)와 달리 PM M1910의 뒤를 잇지 못한 실망(失望)스러웠던 후계자였습니다.
↑PM M1910에 비해 가벼워졌으나 부가 장치까지 포함하면 42kg에 이르렀습니다
DS-39는 데그차료프의 전작(前作)인 DP처럼 가스 작동식(作動式)입니다.
덕분에 탄약(彈藥)과 노리쇠의 규격(規格)에 제약(製藥)을 덜 받고 사격(射擊) 시 총열(銃身)이 움직이지 않아 정확도(正確度)가 양호(良好)한 편이었고 총열에 부착(付着)한 방열(放熱)핀을 이용하는 공랭식(空冷式)이어서 무게를 대폭(大幅) 줄일 수 있었습니다.
개발 당시에는 총열이 스크루(screw)로 고정(固定)되어 교환(交換)할 때 드라이버가 필요(必要)했으나 본격 양산형(本格量産形)은 스위치에 고정되어 탈부착(脫付着)이 손쉽도록 개선(改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