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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문명과 드라비다어와 산스크리트어(범어)의 인도에 유입경로역사이야기 2013/06/24 09:18 1926년 영국 육군의 예비역 대령인 제임스 처치워드가 쓴 책 『잃어버린 무 대륙(The Lost Continent of Mu)』에 보면 인도 고대 사원에는 1만년 이상 된 점토판 책들이 있고 동방의 어머니 나라 [무]에서 인도로 문명이 전파되어 왔다고 되어 있다. 위 그림들은 한국에서 고인돌, 천손신화, 난생신화가 세계로 퍼져나가는 것을 대강 보여주고 있다. 중국대륙에도 한국에서 전해진 천손신화, 난생신화가 널리 퍼져 있었는데 후대에 말하자면 [중국의 자존심]에 의하여 사라진 것으로 본다. 한국은 [고인돌의 원조국]이고 천손신화와 난생신화가 모두 다 있는 곳. 난생신화 - 조상이 알에서 나왔다는 신화. 천손신화 - 하늘의 자손이라는 신화. 난생신화는 쌀농사와 함께 1만년 이상 전부터 동남아, 인도 등으로 퍼진 것. 1926년 영국 육군의 예비역 대령인 제임스 처치워드가 쓴 책 『잃어버린 무 대륙(The Lost Continent of Mu)』에 보면 인도 고대 사원에는 1만년 이상 된 점토판 책들이 있고 동방의 어머니 나라 [무]에서 인도로 문명이 전파되어 왔다고 되어 있다 위 지도에서 보이듯이 무대륙이란 고대에 육지였던 황해대평원과 태평양의 낮은 지역들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 - 특히 황해는 수심이 가장 낮아서 가장 오랬동안 육지였던 지역. [황해평원 마문명]에서 퍼져나간 [어머니 나라 - 무]의 문명 수준은 어떻했을까. 물론 이 또한 현재 정확히 알수 없지만 전편에서 다룬 [오키나와 피라미드]가 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위 오키나와(= 류큐 = 유구) 피라미드는 수심 약 20~25m 지점에 위치해 있으니 약 1만년전에 바다에 잠긴 것으로 본다. 당시 마문명의 수준은 최소한 저 정도. 당시 인류가 살기 가장 좋았던 황해대평원에서 보면 당시에도 오키나와는 변방 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저정도 수준을 보이고 있다. 이를 보면 마문명의 중심이었던 황해대평원의 문명은 저보다 훨씬 더 수준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오래전 문명이라고 무조건 무시하면 안된다. 현대 과학기술로도 [고려청자]를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고조선 고유문명인 [다뉴세문경]도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1만년전 마문명이 단지 돌도끼나 갈던 정도의 문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현대인의 선입견, 무지 또는 오만 때문이라고 본다. 17세기 서양인들은 대부분 과학이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한 갈릴레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인도는 범어(산스크리트어)가 들어오기 전에 드라비다어라는 것을 썼다. 드라비다어는 지금도 많은 인도인들이 쓰고 있는데 한국어와 근본적으로 너무 비슷해서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있다. 그에 대한 글들도 가면 갈수록 많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인도 드라비다어가 한국에 들어와서 한국어가 되지 않았나 하는 소리까지 나오는데 이는 황해평원 마문명을 생각하지 않은 데서 나온 착각. 사실은 1만년 이상 전에 일부 고대한국인들이 인도로 이동하고 그들의 말이 지금의 드라비다어의 뿌리로 본다. 그리고 전편에서 밝혔듯이 실제로 한국에서는 세계최초의 쌀농사 유물이 발견되었고 (충북 청원 - 1만5천년전 것.) 이 재배볍씨 중에서는 한국,일본에서 많이 기르는 쌀인 [자포니카]쌀과 함께 현재 동남아, 인도에서 많이 기르는 [인디카] 쌀도 발견되어서 자포니카와 인디카 모두 한국이 원산지 임을 밝혀주고 있다. ( 전세계 쌀은 크게 자포니카와 인디카로 나뉜다.) 즉 세계 모든 쌀의 원산지가 한국. 고대한국에서 기르던 개가 1만5천년전부터 사람을 따라서 이동하여 전세계 개들의 조상이 되었듯이 고대한국에서 기르던 쌀도 전세계 쌀들의 조상이 된 것. 한국의 [원조 쌀농사]가 세계로 퍼져나갔다. <- 관련글 인도에는 크게 2가지 언어가 있다. 1. 드라비다어 2. 범어 (산스크리트어) 둘다 고대한국에서 전해진 언어. 단지 전해진 시기가 다르다. 드라비다어가 더 먼저 인도에서 사용되고 있었고 (1만년 이상 전부터) 드라비다어는 인도 남부에서 먼저 쓰기 시작한다. (난생신화) 그런데 그보다 수천년 후에 [아리안]이 인도 북부로 들어오게 된다. (천손신화) 그들의 말인 범어가 인도북부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한다. [알타이 파지릭 고분에서 발굴된 그림]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이 당시 제1계급 [브라만] 동북아인의 모습. [브라만]은 인도로 들어온 [아리안]을 말하는 것이고 7천년 전에 이미 중앙아시아에 나타났다는 [아리안]은 고대 한국인들의 이동으로 본다. 고대 인도에서는 민족에 따라서 계급이 나뉘었던 것으로 본다. 이처럼 인도에는 크게 보면 2번의 문명전파가 있다. 1) 1만년 이상전의 황해평원 마문명의 전파( 쌀농사, 고인돌, 난생신화) -> 드라비다어 2) 8천년전 이후의 [고대한국 -> 중앙아시아 -> 인도]의 문명의 전파. -> 범어 (산스크리트어) [고대한국어]가 건너가서 [인도 범어(梵語)]가 되었다. <- 관련글 우리말과 가장 가까운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등
소위 우랄 알타이어인가 아니면 타밀어등 인도 남부의 드라비다어인가? 지금까지 학계에선 우리 민족은 북방 유목민출신이며 언어도 거기서
온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하지만 지난 2004년 5월 단국대 생물학과 김욱 교수연구팀은 미토콘드리아 DNA형을 분석한 결과 60%가량이
북방의 몽골족등 북방 유목인의 유전자 형을 보였고 40%가량은 동남아시아등 남방 사람들의 것과 같은 유전자형을 지니고 있다고
밝혀냈다. 그렇다면 남방에선 언제,
어떻게 들어왔을까? 이미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가야의 초대왕비
허왕후(許王侯?서기 32~189년)가 인도에서 건너왔다는 기록에서 볼 때 2천년전에 이미 인도와의 해상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신라시대엔
인도보다 더 멀리 떨어진 아랍 상인들이 도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허황후가 인도에서 건너왔다는
설화가 사실일 수 있다는 과학적 증거가 제시됐다. 지난 2004년 8월 서울대 의대 서정선 교수와 한림대 의대
김종일 교수는 강원 춘천시에서 열린 한국유전체학회에서 “약 2,000년 전 가야시대 왕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을 분석한 결과 인도 등 남방계와
비슷한 유전정보를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결과는 우리 민족의
기원이 북방단일설이 아니라 북방?남방계가 합쳐진 이중기원설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김교수는 학회 발표에서
“허황후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김해 예안리 고분 등의 왕족
유골에서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해보니 인도인의 DNA 염기서열과
가까워 이들이 남방 쪽에서 건너왔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유골 4구 가운데 1구에서 이같은
결과를 얻었으며 나머지 3구의
유골을 더 연구하면 정확한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미토콘드리아는 모계로 유전되는 세포소기관으로 미토콘드리아
DNA는 가계도 조사와 진화 연구에 많이 활용된다. 한국인의 기원 연구 작업
중에 유골의 유전물질을 분석해 데이터를 낸 것은 처음이다. 서교수는 “유골에 있는
DNA가 문화인류학에서 규명하지 못했던 사실을 밝혀내는 유용한 연구수단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필자는 허왕후가 기원전
수천년전에 인더스문명을 일으킨 드라비다족의 최대 일파인 타밀족출신으로 보고 있다. 백인인 아리안족의 침략으로 인도 남부로 쫓겨 내려 온
드라비다족은 타밀어, 텔루구어, 칸나다어, 말라얄람어등 드라비다어를 구사한다. 남인도 동해안및 스리랑카
북부에 살고 있는 타밀인들이 동남아시아와 중국남부를 휘젓고 다니면서 마침내 한국 및 일본과도 교류했다는 증거는 한국어와 일본어 형성에 스며든
타밀어의 영향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조선 고종의 외교고문이자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는
1905년 ‘한국어와 인도 드라비다어의 비교 문법’이라는 저서에서 “두 언어가 유사한 것은 한반도에 정착한 선주민이 최소한 일부 지역이라도
남방에서부터 이주해왔음을 입증해주는 누적된 증거의 고리” 라고 주장했다. 강길운(姜吉云) 전 수원대교수도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1990년)에서 드라비다어와 우리말이 무려 1천여개 어휘가 같다면서 드라비다족이 한반도에 이주했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원로 언어학자 오노
수수무(大野晉, 86세) 학습원대학 교수는 ‘일본어와 타밀어’(2000년) ‘야요이 문명과 남인도’(2004년)등 일련의 역작을 통해 타밀인들이
기원전 수세기에 이미 일본열도에 집단 거주, 타밀어와 유사한 일본어 단어가 5백개가 넘는다고
강조했다. 필자는 이를 확인,
추적하기위해 30여만명으로 추산되는 토론토 거주 타밀인들가운데 교수, 교사, 힌두교 성직자, 타밀인 협회 간부, 여성단체 관계자등 전문가
수십명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면서 언어와 습관등에서 우리와 유사한 것이 적지않음을 발견했다. 첫째, 현대 타밀어에서
우리말과 똑같은 말이 속속 포착되고 있다 1."바나깜(반갑다)"
"아빠(아빠), 암마(엄마), 안니(언니)" 등 가족관계 명칭들 2. "빨(이빨)" ,"
무크(코)", "깐(눈깔)", "코풀(배꼽)", "궁디(궁덩이의 경상도 사투리)" "찌찌 (자지)" "불(불알)" "보지( 고대 타밀어로
'보지') "등 신체기관의 명칭들 3."난(나), 니(니)" "
난, 우람(난, 우람하다)""난, 닝갈비다 우람(난, 니보다 우람하다)""난, 비루뿜(난, 빌다)" " 난,서울꾸 완담(난, 서울로 왔다)"
)" "니, 인거 바!(니, 이거
봐!)""니, 인거 와!(니, 이리 와!)" " 못땀(몽땅)" "니, 못땀 다!(니, 몽땅 다오!)"등 상호 호칭과 소통의 대화들
둘째, 동물과 식물이름및
농경사회의 용어들이 우리말과 고대 타밀어가 너무나 똑같다. 우리말의 비단, 삼, 길쌈,
벼, 풀 등은 고대 타밀어와 그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서진하던 KOREAN들은 한반도 돌단(적석)신앙을 결코 잊지 않았다 지나사서인 [구당서]는 장수태왕 60년 (479년) 고구려군이 대홍안령 건너 편에 있는 '지두우'라는 풍요로운 초원국가를 유연과 나눠 갖기로 모의했으며, 거란이 고구려군을 피해 남쪽으로 도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장수태왕시기 대홍안령 산맥넘어 몽골지역인 '지두우'를 정벌하여 초원의 실크로드를 확보하게 된다.이 때문에 서역(페르시아)과의 교역이 아주 활발해지는데, 고구려 벽화속에서는 서역인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배경이라 할 것이다. 티무르는 군사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인물로,
생애에 걸쳐 벌인 전투에서는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티무르는 비록 징기츠칸의 후손은 아니였지만, 칭기스칸의 자손이기도 한 왕녀를 왕비로
맞이하여 [칭기스칸 가문의 사위(큐레겐)]를 자칭하고 징기즈칸이 실현한 세계제국의 꿈을 이상으로 삼았고(다물), 또한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투에서 승리를 계속해, 전리품을 휘하의 여러 부족에게 분배해 주어야 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에 대외 원정을 계속 되풀이하였다.
1370년 중앙 아시아에서 티무르 가문의 권력이 확립되고, 티무르 가문에 의한 지배가 진행되면서 이를 티무르 왕조(티무르 제국)이라고
불렀다. 1388년 토그타미슈가 티무르 제국을 공격한 것을 계기로 잠시 3년 전쟁을 종료한 티무르는 토그타미슈를 격파한 뒤 다시 이란에 대한 원정을 재개하여 1392년부터 시작하여 5년 전쟁에서 무자파르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란 전역을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맘루크 왕조와 대치하게 된 티무르는 여기서 북상하여 카프카스를 넘어 토크타미슈를 격파하여 볼가강 유역에까지 진군하여 주치 우루스의 수도 사라이를 파괴하고 루시제국(諸國)까지 침입한뒤 1396년에 귀환했다. 1398년 티무르는 인도 원정을 결심하고, 델리 술탄 왕조를 격파하고 델리를 점령했다. 1399년 시작된 7년 전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반란을 일으킨 3남 미란 샤를 굴복시키고, 그루지아,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시리아로 들어가서 다마스커스를 점령하고, 거기서 이라크로 전진해 모술을 정복했다. 1402년 중앙 아나톨리아에 진출한 티무르군은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여 오스만 제국의 확대를 저지하고, 아나톨리아의 오스만 영지를 바야지드에게 영토를 빼앗겼던 옛 영주들에게 반환해 준 뒤에 귀환했다. 이 원정을 통해 몽골 제국의 서쪽 절반에 해당하는 곳이 티무르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오스만 제국, 맘루크 왕조가 티무르에게 명목상 복속하여 티무르의 지배영역은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1404년말 티무르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격파하여 원나라의 옛 영지를 탈환한다는 목표를 갖고 지나원정을 개시했다. 그러나 티무르는 원정 도중에 갑자기 병이 나서 1405년 2월 오트라르에서 병사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 맏아들 자한기르의 둘째 아들 피르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무굴 제국은 티무르 왕조에 속한 바부르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부르는 원래
인도보다 사마르칸트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티무르의 옛 영광을 되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두 번에 걸친 시도에서 오히려 고향까지 잃어버린 바부르는
차선책으로 파니파트 전쟁을 통해 당시 쇠락한 델리의 로디 왕조를 멸망시키고 무굴 제국을 세웠다. 무굴 제국의 공식 칭호는 ‘구르카니’로, 이는 티무르(다물) 왕조의 지배자들이 칭기스
왕실과의 결혼으로 ‘구르칸’ 칭호를 사용한데서 유래했다. 당대의 타국인들은 무굴 제국의 지배계층을 ‘차가타이인’이라 불렀다.
사자와 태양이 그려진 표장은 차가타이 울루스에서 사용했던 것이다. 17세기 초 무굴 제국에 파견되었던 영국 최초의 공식 사신은 무굴 제국의
지배계층이 무굴(몽골)인이라 불린다고 기록하였으며, 반세기 후 인도를 방문한 한 프랑스인은 무굴황제들이 스스로 칭기스 칸의 후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무굴(몽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무굴 제국 스스로도 지배계층을 몽골(무굴)족이라
불렀다. 수메르인들 (어디선가 나타나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 역시 아리안의 일종으로 본다. 그들은 6천~7천 년전에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머리카락이 검은 사람들] [5천년전에 만들어진 수메르 왕조 지도자 '구데아(gudea)'의 인물상] 수메르의 말이 한국어와 비슷하다는 것은 많은 학자들이 밝혀낸 바 있다. 고대 이집트에도 고대한국인들의 모습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얼굴이 넓적하고 쌍꺼풀이 없는 동북아시아적인 얼굴. 역시 동북아시아적인 얼굴. 이집트의 여왕 하트셉수스의 묘지에 있다. [아주 고대의 이집트 왕족들] - 이집트 창건의 전설적 인물인 [Tiu(티우)] 관련 왕족들. [스핑크스] 스핑크스는 코가 떨어져 나갔는데 (후대에 어느 군대의 대포에 맞았다고 한다.) 얼굴이 사람(여성) 그런데 광대뼈가 튀어나온 동북아 여성의 얼굴!
인류문명의 시원과 전개를 총체적으로 밝히는 것이 어찌 쉽기만 하겠는가. 하지만 이미 밝혀진 것만 하더라도 많은 것이 드러나 있다 하겠다. 일단 한반도 주위의 상황부터 보자. 1만5천년전부터 지구기온이 급격히 올라가면서 바다물이 밀려들고 1만4천년 전에는 마문명이 지금의 경기, 충청, 전라, 경남의 앞바다 지역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출처:http://www.cheramia.net 안원전 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