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첫 사랑을 떨어뜨렸는가
요한계시록 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찬송가 280장(천부여 의지 없어서)
오늘 본문 말씀은 부활의 주님께서 에베소교회에 보낸 메시지 중 일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주후 50년경에 사도 바울이 개척하였고 그의 후계자였던 디모데가 목회하였으며 주후 80년부터 100년경까지 사도 중에서 마지막으로 생존하였던 사도 요한이 목회하였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께서 밧모 섬에 귀향살이하고 있는 사도 요한에게 친히 영광 중에 나타나셔서 에베소교회에 대하여 이 내용의 말씀을 써서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에서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노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처음 사랑이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엄중하게 요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 첫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대로, 그 사랑을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잘 생각하여 깨닫고 돌이켜서 처음 행위를 되찾아야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처음 사랑을 에베소 교회는 어디서 떨어졌을까요? 주님께서 에베소교회에 보낸 전체 메시지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나친 활동 속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7 말씀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에베소 교회가 한 일들이 굉장히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인정할 만한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악한 자들이 그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를 흔들어놓으려고 하였으나 그들을 용납하지 아니하였고 자칭 사도라 하는 자가 나타났지만 그를 시험하여 그의 거짓 사도임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며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낸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니골라 당파의 일들 아마도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유도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일들도 잘 막아냈습니다.
더욱이 에베소 성읍은 온갖 이교적 풍습이 강력하게 있었고 고대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거대한 아데미 신전도 성중에 있었고 수많은 마술사들이 들끓었습니다. 그러한 영적 혼란이 강력한 도시 분위기 속에서 에베소 교회가 영적 싸움을 싸워야 했으니 교회는 늘 초긴장 상태가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소아시아 지역의 수많은 다른 교회들의 모교회 역할까지 감당해야 했습니다. 다른 교회들을 재정적으로 돕고 상담해주는 등의 일까지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일이 많다 보니 지치고 거짓 교사들을 시험하여 내쫓아야 하는 일들을 계속하다 보니까 영적으로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와 성도들의 마음에 충만했던 처음 사랑이 차츰 식어져버리고 뜨거움이 식어져버리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일이 너무 많다 보면 몸이 지치고 그리고 영적으로 침체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영적인 비판을 계속 하다 보면 은혜가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이단 사이비와 싸우다 보면 그만 교리적인 냉랭함이 찾아오고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식어져버릴 수 있습니다. 교리적 정통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도리어 영적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에베소 교회의 영적인 취약점을 마귀도 노렸고 그 점에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계시록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도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아니하고 뜨뜻미지근하여서 주님께서 토하여 내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었으나 자기들이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교회가 재정적으로 부요하니까 자기들의 믿음도 부요한 줄 알았습니다. 성도들이 아름다운 옷을 휘감고 출석하니까 자기들의 믿음도 아름답고 수준 높은 줄로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상 그들의 믿음은 지극히 가난하였고 영적으로는 눈이 다 멀어버린 소경들이었고 그들은 사실 의로운 행실이 없어서 벌거벗은 사람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영적 착각을 하고 있었기에 부활의 주님은 그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너를 권하노니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요한계시록 3:18)
면서,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19~20)
고 말씀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세상적인 부와 출세와 육신적인 형통의 축복만을 가지고 신앙의 수준을 판단하였습니다. 그렇게 세속화 되다 보니까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기 자신의 신앙적 가난과 무능력과 비참함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자기들은 영적으로 부유하고 영적인 눈이 밝고 의로움의 옷을 입고 있다고 자부하였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주님께서는 그들의 신앙이 뜨뜻미지근하여 토하여 내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시면서 그들이 사실은 영적으로 가난하고 벌거벗었고 눈이 멀었고 비참한 처지라고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된 까닭은 그들이 세상적인 부요함과 성공으로 인하여 마음의 교만해졌으며 둔하여졌기 때문에 자기들의 신앙도 대단한 수준이라고 착각하였던 까닭입니다. 그들도 초창기에는 뜨거운 열심을 가졌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뜨뜻미지근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한 채 있다가 이러한 무서운 경고를 들었던 것입니다.
또한 믿음이 없는 환경에 오래 노출되는 경우 처음 사랑을 일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들이 가나안 족속들과 계속 접촉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믿음을 잃어버리고 열심을 잃어버렸습니다. 기독교인이 된 후에 세상 사람들과 깊은 접촉을 계속한다면 그렇게 믿음이 식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부유해지고 유명해지고 나름 성공하게 되면 믿음이 식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영적인 게으름 때문에 처음 사랑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아가서에 나오는 술람미 여인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그녀는 신랑의 사랑을 여전히 받았으나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랑이 밤중에 찾아왔으나 나가서 마중하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서 누워 잠들어 있다가 신랑이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익숙함의 함정에 빠졌고 영적으로 게을러져서 결국 이렇게 사랑을 놓쳤던 것입니다. 다만 여인은 곧장 정신을 차리고 밤중이라도 거리로 나가 헤매며 신랑을 열렬히 찾았습니다. 이처럼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그 감격이 식어져버리는 이유는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사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이나 라오디게아 성도들이나 가나안 정착 이스라엘인이나 한결같이 그들 본인 스스로는 자신의 영적 은혜가 소실되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메시지를 전해주었을 때에, 혹은 선지자들이 그들의 영적 위험을 전해주었을 때에야 뒤늦게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지금 우리에게도 큰 경각심을 줍니다. 우리 자신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가장 중요한 신앙적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늘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신의 현재 신앙적 상태를 잘 살펴서 자신이 영적 침체에 빠졌거나 주님과의 처음 사랑이 식어졌거나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심령 상태에 있음을 정확히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영적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자신이 무엇 때문에 또 언제 어디서 이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살펴서 그 이유를 잘 깨닫고 속히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첫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와 성도들에게 엄숙하게 요구하신 부활하신 주님의 지엄하신 명령입니다. 우리도 우리는 이 명령을 무겁게 여기고 깊이 마음에 새기고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이 명령에 순종할 때에 우리 영혼은 다시 살고 힘을 얻고 승리할 것이요 큰 영적 부흥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주님과 깊은 친교의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