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오늘은 멋진 사랑과
신뢰의 축제를
-박재식
신부-
“와 부활입니다…
아이고 좋다. 좋아. 좋아. 알렐루야…알레루야…알렐루야.”
이렇게 외치는
이유는 성주간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묵상과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았던 저의 생활에 대한 반성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저에게 가장 큰 압박은
믿었던 제자들에게 배신당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3년 정도를 함께 살아오면서 그 누구보다 깊은 관계를 맺은 운명 공동체였는데, 온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토론을 하며 그렇게 믿었던 그들이 배신을 한 것입니다.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욕을 먹어도 참고 견디며 살아온
그들이었습니다. 저 또한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면서 예수님을 배반하였기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라는 소식은 저에게
사도들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주기에 진정 기쁜 소식이 됩니다.
또 다른 의미로
부활 소식은 저를 짓누르던 성공이라는 무거운 돌멩이가 진리의 발견으로 하나의 깃털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축제를
세상 모든 분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기쁨의 축제를 저를 포함한 우리 민족 더 나아가서 세상의 모든 사람과 함께 하였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이런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일가요? 우선적으로는 아마도 세월호 사건의 희생자 유가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고 소식을 접하고
모든 사람이 무사히 구조되리라는 소식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는데, 우왕좌왕하다 잃어버린 우리 가족들의 얼굴과 마음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20여 년 이상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정부의 정책을 믿고 취업을 열심히 준비한 젊은이들의 암담함은 어찌해야 하는가요? 떳떳함과 자존감으로 ‘그래 사나이라면
한번은 다녀와야지, 남들 다 하는 경험인데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군으로 떠난 젊은이가 싸늘한 시신으로, 살인자로, 정신병자로
분류되어 가족에게 되돌아왔을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요?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대만은 국민과 녹색공민행동연맹(GCAA)이 2025년 탈핵 국가의 목표를 이루고 있는데 우리만은 ‘안전하다’고 하면서 지구촌 가족들
대다수의 원의와 반대로 정책을 펴가니 과연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요? 신자본주의로 인하여 무한 경쟁에서 희생당하는 저임금 노동자와 어린이들의
눈물은 과연 누구에게 회개를 요청해야 하는가요?
이렇게 배신을
당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과 공동체에 진정 예수님의 부활소식이 전해졌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제자들과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고정 관념과 욕망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세상적인 욕망과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눈이 떠지고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세상에 사랑이신 하느님을 외치게 됩니다. 저는 간절한 마음으로 모든
이가 ‘경제 만능’의 착각에서 벗어나 진리와 사랑의 눈을 떠서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논어에 보면
자공(子貢)이 스승인 공자(孔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첫째는 먹는 것이고, 둘째는 국방이며,
셋째는 백성들의 신뢰”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자공이 다시 묻습니다. “그중에서 부득이 하나를 뺀다면 어떤 것입니까?” 공자는 “국방”이라고
대답하자 자공이 재차 “또 하나를 부득이 뺀다면 어떤 것을 먼저 빼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먹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는
“백성들의 신뢰가 없으면 조직의 존립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국민과 정부 그리고 서로 간의 신뢰가 우선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나라 정부와
국민은 서로를 신뢰하고 있는지? 평신도와 성직자는 서로를 존경하고 신뢰하는지요? 사회는 교회를 신뢰하는가요? 우리는 아직도 서로를 배신하는
수난과 고통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가? 개인과 단체 모두가 신뢰를 통하여 이기적인 욕망과 편견을 끊어버리고 진리와 사랑으로 멋진 부활을 맞이하는
멋진 축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은 정성으로 마련된 음식과 함께 울며 웃으며 살아가는 본당 가족과 신뢰의 축제를 열겠습니다. 부활은 서로를
사랑하고 믿어주는 축제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부활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
-황철수
주교-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의 기운이 모든 교우님들의 삶을 축복하시고 새롭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먼저 주님 부활과
관련하여 드는 의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나 베드로 혹은 사도들에게 먼저 나타나실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죽인 사람들에게 먼저 나타나
그들의 인식과 판단과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은 저만이 아니라 부활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의 저자도, 당시의 신자들도 품은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의 곳곳에 그 흔적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누구보다 먼저 목격한 사람들은 무덤을 지키는 경비병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뜻밖의 사건을 돈을 받고 파는 정도의 정보로 취급하였습니다.(마태
28, 11~15) 그들은 부활사건을 목격하였지만 그 사건을 통해 기존의 어떤 인식도 바꾸지 않았으며, 그들의 삶과 믿음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부활사건의 증언을 듣고 본 제자들마저도 즉각적 반응은‘헛소리 내지는 유령’이었습니다.(루카 24, 11. 37) 결정적
부활 증언에서 빠지지 않는 마리아 막달레나도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조우에서 당장은‘정원지기’로 밖에는 보지 않았다는 것을 요한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20, 15)
사실이 이럴진대,
예수님께서 자신을 재판하고 법정에 세워 처형한 사람들에게 나타나 보이셨다고 해도, 과연 그들이‘주님, 저희들이 정말 잘못 보았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하며 그들의 인식과 판단과 믿음을
바꾸었겠습니까?
바로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주님의 부활을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주님 발현의 사진이나 비디오를 보고 갑작스럽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 아니라고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십자가의 길과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야 참 생명으로 거듭나는 부활의 삶’에 대한 동의이고 긍정입니다.
그러한 동의와 긍정의 길을 통해 우리는 한걸음씩‘생명의 길, 부활의 길’을 깨달아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부활이야기는
이러한 깨달음의 길을 짧은 이야기 속에 압축한 것입니다. 이 부활 이야기에서 전해지는 메시지는 고단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죽음 저편의
세상만을 동경하며 살아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죽음을 통한 거듭남의 이치’를 깨닫고, 현실의 삶에서 더 적극적으로‘자신을 버리고 죽으며
새롭게 태어나도록’ 촉구합니다. 주님 부활의‘생명의 기’가 모든 분들의 삶을 더욱 새롭게 이끌어가기를 빕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그리스도 -
죽음에서 부활하신 우리의 희망”
-안명옥
주교-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들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15) 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그리스도교 복음 선포 전체를 위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매우 단호하게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복음 선포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로부터 부활하셨다는 증언에서 자라납니다.
만일 우리가 이
부활에 대한 증언을 배제하면,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죽은 것이 됩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제할 때라야 세상과 인간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것이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부활
사건
우리는 부활하신
분을 만난 증인들의 증언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 역시 너무나도 엄청난 사건 앞에 휘청거렸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경험의 지평을 부수어 버리는 전혀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였습니다. 이들이 실제로 체험하는 부활은 그들을 압도하고 증언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정도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현실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사람의 아들이“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9,9)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제자들이 의문을 가졌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서로 묻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부활사건을 현실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고, 부활 신앙을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약의 증언들이 전하는 소식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과 소멸이라는 법칙에 더 이상 예속되지 않으면서 새로운 삶 안으로
<들어서는 사건>입니다. 이 <들어서는 사건>은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고, 새로운 형태의 미래를 열어주는 관문입니다.
새로운 삶은 새로운 세상을 전제합니다. 그분은 다시 살아나시어 다시금 죽어야만 하는 시신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영원히 사시는 분이십니다.
부활에 대한 고백
- 작은 겨자씨
모든 생명의
역사에서 새로운 것을 가능케 하는 원천들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서 지나치기 십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겨자씨와 같다(마태 13,31-32 참조)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작은 겨자씨는 그 안에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역시
가장 작은 겨자씨입니다. 무릇 위대하고 힘 있는 것은 가장 작은 것에서 출발합니다. 작은 겨자씨는 결국 큰 나무로 성장합니다.
로마
서간은(10,9),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고백은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그것은 우리를 진리로, 구원으로 이끌어 갑니다. 고백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현이고,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내가 무엇인지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고백은 삶이 됩니다. 이 삶은 부활하신 분의 새로운 실존에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성립합니다.
우리는 부활 고백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고백을 코린토 1서 15장에서 만나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15,3) 여기서 복음은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 따르면, 여러분이 서 있는 토대입니다(15,1참조).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15,2) “그리하여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믿게 되었습니다.”(15,11)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맨 마지막으로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5,4.8)
부활의 전제 -
죽음
코린토 1서 15장
3절은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분의 죽음은 우연이 아니고 자연사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일어난 모든 것은 심지어, 그분의 죽음까지도 성경의 성취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부터 와서 말씀 안으로 들어가 그
말씀을 보증하고 성취하는 사건이 바로 그분의 죽음입니다. 아울러 그분의 죽음 ‘우리의 죄를 위해’돌아가심입니다. 다시 말해‘무엇을
위한’죽음입니다. 이러한 죽음은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의 관계 안에 놓이게 되면서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려고 했으나 스스로의 교만으로 인해
죽음이라는 운명에 던져질 수밖에 없었던 원죄의 결과인 죽음과 구별되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 차원을 달리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교만과
불손에서 오는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겸손에서 오는 죽음입니다. 그것은 진리에 역행하는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에게로 끌어올리기 위해 인간에게 내려가신 사랑의 완성의 결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은 속죄를 위한 봉사로서 화해를 가져다주고
백성을 위해 빛이 되어 주는 죽음입니다.
우리의 다짐 -
부활의 삶
사도 타대오가 스승
예수님께 드린 질문을 출발점으로 삼아 부활의 삶을 살고자 다짐하는 계기로 삼기를 제안합니다. 해마다 되풀이하는 부활 사건을 기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부활이 참으로 우리 믿음의 핵심이라면 우리는 그 사건의 참된 의미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타대오는
예수님에게“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하고 묻습니다. 온갖
이유로 나 자신도 알아들을 수 없이 고달프게 살아가는 우리 역시 묻고 싶은 물음입니다.
이 물음은 단지
부활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시는 방식에도 관련되는 물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무기력하게 드러나지 않게 행하시는 행동 방식은 그분에게만
속하는 하느님만의 방식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과 하느님이 아닌 인간을 구분하는 경계 지점입니다. 그분은 인류의 장대한 역사 속에 서서히 결코
요란하게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당신의 역사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역사를 주도하는 권력자들과 온갖 인간적인 가치에 몰입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철저하게 외면하였고, 처형에 앞장섰습니다. 그분은 고난 받고 죽으셨으나 부활하신 분으로 당신 제자들의 믿음과 신앙고백을 통해 역사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외적인 힘이나 권력으로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과 사랑을 통해 일깨우는 것이 하느님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심히 들여다보면 언제나 아주 보잘것없이 작은 것이 진실로 위대한 것이 아니던가요? 예수님의 부활이 약속하는 영원한 생명을
통해 행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서공석신부-
예수
부활 대축일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제자들이 믿기 시작한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절망하여 각자 자기 고향으로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으면,
제자들이
다시 모여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분을
살아 계시다고 선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여느 생명과 같이,
예수님도
죽음으로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갔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가
어둡다고 말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물지 않게 하려고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12,46).
이
세상의 믿지 않는 마음의 어두움을 물리치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모두가 절망의 어둠 안에 있을 때,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갔다고 말합니다.
이 여인은 무덤의 돌이 치워진 것을
보고,
예수님이 무덤 안에
계시지 않는다고 직감하였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고,
사도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무덤을 향해 달리는
데에는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빠릅니다.
그는 무덤에 먼저
도착하였지만,
베드로를 기다려
줍니다.
베드로가 무덤에
들어가고,
뒤따라 들어간 그 제자는
보고 즉시 믿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분이 아꼈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발견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베드로와 함께 무덤에 가서 그 사실을
확인하게 합니다.
두 제자가 함께 가서 빈
무덤을 확인하였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은 사람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였습니다.
복음서들이 빈 무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
그분이 사셨던 삶에 대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빈 무덤만
남겼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그분의 죽음에서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실
때,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따랐던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발생하였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지상의 삶으로 환생하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분을
죽였습니다.
시편의
말씀대로,
그들은 그분을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23,4)로 보낸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분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은 베드로사도가 이방인들에게
설교한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이
사흘이라고 말할 때는 72시간을 의미하지 않고,
결정적인 날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때에,
예수님을 당신 안에
살려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고 사셨기에,
사람들은 그분을 죽여
없앴지만,
하느님은 그분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에게 성령과 힘을 부어 주셨고...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령,
곧 당신의 숨결을 주셔서
예수님이 좋은 일,
살리는 일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숨결,
곧
생명을 받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권위주의로 경직된 유대교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에게
절대적인 것은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선하고,
고치고
살리시는 분이라,
예수님은
그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듯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말한 대로 그분은 두루 다니며 선한 하느님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은 예수님이 살아서 행하신 하느님의 선한 일을 실천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자유롭게 당신의 일을 실천하며 살 것을 원하십니다.
자유롭게
살라고 주신 인간의 생명입니다.
율법에
얽매이고,
성전의
권위에 순종하며 살라는 우리의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돈에 얽매이고,
우리의
명예욕과 허례허식에 짓눌려 삽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성령과 능력을 받아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는,
오늘
베드로의 말씀은 사람을 짓누르는 것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킨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발견하였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
곧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가 함께 무덤에 가서 그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는 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빛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확인된 사실이지만,
그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신앙인의 길을 배우라는 말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을 믿고 배우는 사람들 안에 그분의 삶이 관찰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류역사
안에 그런 삶이 계속 발생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성전으로 요약되는 그 시대 유대교의 관행에 얽매이지도 않고,
유대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순종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실천하고,
악마에게
짓눌린 이들이라고 그 시대 사람들이 말하던 병자들을 그 병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부활은 우리도 예수님을 배워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실천하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라고 초대합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일을 배웁니다.
예수님이
자유롭게 하신 실천들을 배웁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우리의 삶이 과제를 가졌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높여 허세를 부리거나,
남을
짓누르면서 죽음을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신 선한 실천,
고치고
살리는 실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실천 안에 자기가 해야 할 바를 읽어냅니다.
그런
신앙인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살아 계십니다.
신앙인은
그런 실천으로 하느님이 선하고 살리신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분으로부터 배워서 우리가 하는 실천 안에 그분이 살아 계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예수님의
아픔을 자기 아픔보다 더 크게 느끼는 사람
-박영식신부-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진 것을 보고 무덤 안을 들여다보지는 않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달려가서 보고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당시
무덤을 도굴한 사례가 많았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마리아 막달레나가 시신을 도둑맞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익명인 ‘다른 제자’와 함께 마리아 막달레나의 보고를 듣고 걱정하며 무덤으로 달려왔다. 이 제자는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 먼저 무덤에 다다랐는데,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베드로보다 더 빨리 무덤에 다다랐다. 위
제자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그분과 가장 친밀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제일 먼저 믿고 따를 수 있었다. 또
베드로와는 달리, 그는 예수님이 부활하여 물고기를 기적적으로 많이 잡게 하신 것을 보고 호숫가에 계시는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알아
뵈었다(요한
21,7).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성격, 가치관, 사고방식, 사상이 무엇인지 알고 그의 독자성이나 개성이나 특성을 인정하고 그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와는 다른 상대방의 성격, 가치관, 사고방식,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제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느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있는 그대로 완전히 다 알고
계신다(1코린
13,12).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해야 그분을 부분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녀야 그분이 채찍질과 고문을 당하실 때 고통의 강도와
인격적인 모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과다출혈과 호흡장애와 내분비 결여로 말미암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과 인류를
향한 치열한 사랑으로 가득 하신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버리고 예수님의 입장에 서야 그분의 헌신적인
사랑이 나에게 무슨 뜻이 있는지 깨달을 수 있다. 이와 달리,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분의 고난은 나와 무관한 것에 지나지 않고, 강 건너
불 구경하 듯 할 따름이다.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애정을 느끼며 사랑해야 예수님의 신비를 알아들을 수 있는 법이다. 성령의 힘으로 사랑의 불꽃이
우리 마음속에 활활 타올라야 하느님의 목소리가 우리 마음속으로 파고들고 예수님 부활 신비를 깨달 수 있다.
“가장
깊은 진리는 가장 깊은 사랑에 의해서만 열린다.”(H.
하이네)
“알뜰히
사랑을 바쳤음에도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 주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G.
와싱턴 카버)
“내가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L.
톨스토이)
익명인
그 다른 제자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예수님과 맺은 친밀한 관계에 힘입어 그분의 신비를 부분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빈 무덤만 보고도 믿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죽음의 사슬에
매이지 않고 자기를 만나러 오실 것을 굳게 믿은 이상적인 신앙인이다. 한없는 사랑은 한없는 생명을 창조한다. 이기심이라곤 하나도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완전한 사랑을 베푸셨다. 이미 십자가 위에서 부활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사랑은
모든 삶과 운동의 원동력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랑하신 그 다른 제자처럼,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드러난 예수님의 사랑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났다.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순간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이 우리 마음속에 깃든다.
“타인의
아픔이 내 아픔보다 더 크게 느껴지고,
그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랑이다.”
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