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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5. 묵상글 (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 모세와 파라오.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4:4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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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7.15 04:22
- 모세와 파라오
어제와 오늘 복음은 탈출기의 시작 부분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탈출기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구원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 역사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는 역사이고 그래서 탈출기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이스라엘의 이 탈출 역사에 있어서 영도자요 영웅은 단연 모세입니다.
그런데 이집트 탈출만 놓고 본다면
다시 말해서 탈출한 후 가나안 가기까지 역사를 보지 않는다면
모세보다 더 중요한 역할 곧 악역을 한 사람은 파라오였습니다.
파라오가 주님의 악역을 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결코 그리고 한 발짝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천국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승 생활이 너무 행복하면 저승 행복을 찾지도 않을 것이고,
저승이 더 행복하고 영원한 행복이라는 교리도 배우고
자신도 그러리라 생각할지라도 이승에서 결코 한 발짝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고 고통이 심한 사람은
하느님께 빨리 데려가 달라고 청할 것입니다.
이런 병자에게는 이승에서 탈출이 곧 구출이고,
데려가는 분은 저승사자가 아니라 하느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끄집어내 가나안으로 데려가실 때
쓰신 도구가 모세만이 아니고 탈출 순간에는 파라오를 더 중요하게 쓰셨습니다.
그래서 계속되는 탈출기에서 이런 표현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더 완고하게 하셨다는 표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승에 사는 우리에게 파라오도 보내고 모세도 보내십니다.
파라오를 먼저 보내고 모세를 나중에 보내십니다.
파라오를 통해 탈출케 하시고 모세를 통해 구출케 하십니다.
고통을 먼저 주시고 은총을 나중에 주십니다.
그래서 사실은
고통이 은총이고
악이 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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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일상화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회개의 일상화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에 대해 참 많이 나눴습니다. 이것은 제가 동방영성에서 배운 귀한 진리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이 지혜이며 바로 회개의 열매가 겸손과 지혜입니다. 정말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병이 문제입니다. 모르면 알려줘도 모릅니다. 주변은 다 아는데 본인만은 모를수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무지에는 답이 없습니다. 이념이나 사이비 종교에 중독된 맹신, 광신의 무지가 얼마나 무서운 치명적 질병인지 주변에서 겪지 않습니까? 그래서 ‘기계는 고쳐쓸수 있어도 사람은 고쳐쓸 수 없다’, 또는 ‘원판 불변의 법칙’이란 말도 회자되곤 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예수님의 갈릴래아 전도시 첫말마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와 더불어 시작되는 하늘 나라입니다. 그러니 회개를 부단히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습관화, 회개의 생활화, 회개의 일상화입니다. 이래서 회개에 앞선 침묵과 경청이 중요합니다. 침묵중에 잘 귀기울여 들을 때 비로소 자기를 아는 회개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다음 옛 현자의 말씀은 회개의 일상화로 참 어른이 된 분들에 대한 묘사처럼 들립니다.
“어른스러움이란 세월에 따라 잡히지도, 세월을 거스르려 하지도 않고, 기꺼이 나이다워지는 것이다.”<다산>
“쉰에는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고, 예순에는 말을 듣는 법을 터득했고, 일흔에는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논어>
이런 어른들이라면 젊은이들에게 정말 희망의 표징이 될 수 있겠습니다. 제가 가톨릭교회를 명품종교라 칭하는 것은 명품미사 때문입니다. 무지의 병에 대한 최고의 명약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입니다. 정말 미사전례 은총을 받은 자들은 회개와 더불어 무지의 병에서 치유됨으로 주님을 닮아 날로 겸손하고 온유하고 자비롭고 지혜로워집니다.
무수한 성인성녀들을 배출한 것이 바로 미사전례은총입니다. 매일미사 시작전 참회기도를 배치하여 회개로 시작하는 미사구조의 지혜에 저는 참으로 감탄하곤 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해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로 시작되는 참회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기도때도 공동참회기도로 하루를 마치니 수도원의 하루 일과표가 회개의 생활화를 위한 회개의 시스템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행복하여라”로 시작하는 행복선언과는 극명하 대조를 이루는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불행하여라, 너 가파르나움아!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회개했을 것이다.”
기적이 의도하는 바 회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음을 꾸짖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행하여라’는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예수님의 깊은 아픔, 또는 심판 예고로 이어지는 분노를 드러냅니다. 이 또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 신자들에 대한 회개 촉구의 불행선언일 수 있습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린 회개를 촉구하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무엇보다 성서와 교회의 성인들이야말로 빛나는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탈출기에서 모세를 지도자로 키우는 하느님의 섬세한 배려와 사랑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배려와 사랑을 연상케 하니 이런 모세 역시 참 좋은 회개의 표징입니다. 노아의 방주와 모세를 담았던 왕골상자가 히브리어로 같다 합니다.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하여 모세인데 노아 역시 홍수의 물에서 구원받았으며, 우리 역시 회개의 결정적 표지인 세례로 구원받아 또 하나의 모세가 된 신자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13세기 도미니코 수도회의 천사적 박사로 불리었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쌍벽을 이뤘던 프란치스코의 세라핌 박사로 불리었던 성 보나벤투라의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주지적主知的이고 분석적’이었던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와 ‘주의적主意的이고 신비적’인 보나벤투라(1221-1274)는 서로 참 좋은 상호보완관계를 이룸으로 교회를 풍요롭게 했던 분입니다. 나이는 보나벤투라가 4살 많으나 리옹공의회가 끝날 무렵 같은 해에 두분 다 선종합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에 붙는 명칭은 스콜라 철학자이자 신학자, 아우구스티우스주의자, 신플라톤주의 성직자 추기경, 교수, 작가 참 많습니다. 보나벤투라는 이름은 행운이란 뜻으로 성 프란치스코가 지어준 이름이라 하며, 성 프란치스코에 이어 말년에 수도회 총장 책임을 맡아 그 기초를 다진 분이며 <프란치스코 전기>를 쓰기도 했습니다. 레오13세 교황은 성인을 ‘신비가들의 왕자“라 불렀고 이브 콩가르는 성인의 신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신앙의 빛이 없는, 즉 신학에서 분리된 철학은 하느님과 인간의 신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인류와 구원에 대해서 올바르게 밝힐수 없다. 이성이 신앙에 의해 스스로를 넘어서지 않고 그 자체에 머문다면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이성은 그 자체의 힘만으로는 진리의 빛에 이르지 못한다.”
성 보나벤투라의 소박하고 겸손한 인품을 알려주는 세 예화를 소개합니다.
1.보나벤투라의 지혜가 놀라웠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를 방문하여 “그 높은 지성의 비결이 무엇인가?” 물었을 때, 그는 십자가를 보여주며, “이것이 나의 지혜의 샘입니다.” 대답했다 합니다.
2.한 할머니가 하느님께서 수사님의 지혜를 아시니 천당에서 분명히 하느님의 앞자리에 앉을 것이라 말하자, “저보다 할머니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실 수도 있죠.” 대답했다 합니다.
3.추기경 서임 칙서를 교황대사가 전달하러 왔을 때, 그는 부엌에서 친히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설거지를 다 끝낼 때 까지 추기경 모자를 나무에 걸어두고 기다리라” 하였다는 일화입니다.
대가 성인들의 공통적 특징은 겸손이요, 겸손이 바로 성덕의 잣대이자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성인들의 이런 겸손이 우리를 회개에로 이끄는 표징이 됩니다. 모세에 대한 다음 대목도 생각납니다. ‘모세는 실상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다. 땅 위에 사는 사람 가운데 그만큼 겸손한 사람은 없었다.’(민수12,3).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무지의 병을 치유하시어 날로 당신을 닮은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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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왜 인가?’
그 이유는 그들이 티로나 시돈처럼 바알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혹은 소돔처럼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또는 단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를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그렇습니다. 단지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가장 많은 기적을 보았는데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회개하지 않은 것은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영적 무지로 가려져 있는 어리석음과 굳어진 완고함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영적 무지의 어리석음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돌아온 탕자이야기’에서, 특은을 받고도 받은 줄도 모르고 죄지은 줄도 모르기에 돌아오지도 않은 ‘큰아들’과 같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 우리가 하느님과 공동체로부터 많은 사랑과 특은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영적무지로 어리석고 완고하고 고집스런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 이야기”(루카 12,41-48)의 말씀이 가슴을 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바로 제가 당신의 뜻을 알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요, 많이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주저하고 망설이며, 이기심과 자애심과 편리와 안주에 사로잡혀 깊이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도시들을 경고하신 것은 그들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애타는 사랑의 호소였습니다. 멸망으로 빠져드는 그들에 대한 동정과 애도의 한탄이요 경고였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애타는 호소를 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도 주님께서 저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은, 저희에게 그 사랑을 주신 까닭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제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저에게 그만큼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부를 건네주신 우리 주님께 우리도 전부를 건네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주님!
당신의 꾸짖음이 사랑임을 알게 하소서.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밑에 모으듯 품으신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그토록 많은 사랑을 요구하심은
그토록 많은 사랑을 주셨음입니다.
그토록 받고 또 받으면서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비뚤어지고 변덕스런 제 마음을 바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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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항해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위치를 아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망망대해에서 내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안다면,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등산로 지도나 지하철역 안내도에도 ‘현재 위치’를 표시하는 빨간 점이 반드시 들어가는 이유입니다. 현재의 위치를 알아야 비로소 방향을 잡고 목적지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는 구약의 모세 이야기를 들으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나아간 한 사람의 여정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의 산, 호렙에 도착합니다. 그는 한때 이집트에서 자라나 히브리인들에게도, 이집트인들에게도 외면받은 ‘경계인’이었습니다. 인생의 좌표를 잃고, 무려 40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방황하던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어라.” 모세는 드디어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게 됩니다.
자신의 위치는 하느님이 계신 곳, 곧 거룩한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어서 그의 사명을 밝히십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것이다.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어 내어라.” 그리고 덧붙이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모세는 자기 능력으로 그 일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망설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인간의 능력이나 재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이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율법 학자나 권력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겸손하고 단순한 이들에게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2025년 7월 15일이라는 현재의 좌표 위에 서 있습니다. 눈부신 과학과 기술의 발전 속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묻습니다. “지금 이곳이 하느님 나라일까요?”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행복한가요?”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창조 질서를 보살피며 살아가고 있나요?”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하나에도 일상이 무너질 수 있음을 경험했습니다. 탐욕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는 수많은 종의 멸종과 환경오염을 낳았고,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3년 넘게 전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란은 중동의 화약고에 불을 붙이려고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좌표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 앞엔 암초뿐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 이제 내가 너를 세상 속으로 보낸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우리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고, 주님의 뜻에 순명하는 믿음으로 새로운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발걸음을 내디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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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어둠의 양면(Two Sides of Darkness)!
하느님의 숨
2025.07.14. 16:17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7월 14일 월요일 - 스물아홉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어둠과 빛의 춤!
어두운 밤은 새로운 형태와 새로운 방식으로 하느님을 찾기 위한 기회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벗들이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혼을 어둠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면의 빛만 인식하도록 길들여져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을 비추는 내면의 빛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 아빌라 데레사, 내면의 성
리처드 로어는 어두움과 혼란과 투쟁의 시기라는 것이 우리의 변모와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어두움의 경험은 선하고도 꼭 필요한 선생입니다. 이 경험은 회피되거나 거부되어서도 안 되고, 거기로부터 도망쳐서도 안되며, 단순히 얼버무릴 것도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임상적으로 우울증을 경험한다거나 우울증 진단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대부분은 우리 삶에서 적어도 한두 번은 어두움과 의심, 막연한 불안의 시기를 거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시기를 거칠 때 우리 모두 우리를 도와줄 누군가 - 상담사, 영적 지도자, 친구 등 - 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되기를 저는 희망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강할 때에는 우리에게 기대오는 누군가가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요....
우리는 거짓 자아 혹은 분리된 자아를 따라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우리 자신의 죄(내가 분리되어 있다는 환상), 우리 자신의 이기심이 만들어내는 어둠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잔혹할 만큼 진솔하게 고백하고, 항복하고, 용서하고, 사과하고, 보상함으로써 이런 종류의 어둠으로부터 본래의 길로 돌아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과정은 죽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고, 또 동시에 해방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어둠이 있는데, 그 어둠은 하느님과 은총, 생명 그 자체의 본질로 인해 생겨나는 어둠입니다. 여러 모로 볼 때 여기서의 의미 상실은 훨씬 더 심각하며, 때로는 동기와 목적과 방향까지도 상실하는 것은 더더욱 심각함이 유발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빛이 완전히 없어진 칠흑같은 깜깜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성인들과 신비주의자들은 이것을 "어둔 밤"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느님에 의해 버려저 홀로 있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우리가 어떤 의도에 따라 이 어둠 속으로 이끌려졌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경계 공간, 즉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곳, 문턱과 같은 곳에 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근본적인 무언가를 배우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곳은 의심과 "악마들"로 가득 차 있어 정말로 재미없는 곳이지만, 이 어두움 속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바로 곁에서 우리를 꼭 붙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의 변모가 일어납니다.
물론 우리의 "죄스러운" 선택에 의해 우리가 들어서게 된 어둔 밤 또한 하느님의 어둔 밤이 될 수 있습니다. 동기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어둔 밤은 - 새로운 형태와 새로운 방식으로 - 하느님을 찾고 발견하기 위한 기회입니다. 하느님도 선도 오직 빛에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과 하느님은 오히려 보이는 곳이든 보이지 않는 곳이든, 이 모든 곳에 스며들어 계십니다.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떠나 보내(unknow)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여러분의 차가 진흙탕이나 눈더미에 빠졌을 때 여러분이 차를 후진시켜 새롭고 더 나은 길을 찾아 나가는 것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 같은 어두움의 시기는 사실상 우리가 빛에 매달려 얻은 지혜를 우리에게서 치워 버리게 함으로써 우리 삶에 참으로 더 나은 길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해 줄 것입니다. 오직 밝은 쪽만을 보면서 성장하는 사람이 있나요?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거짓 이미지를 해체하고 우리의 모든 자기 중심적 환상과 두려움 저 밑에 있는 절대적 현실을 발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는 것을 잃어야만 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20대였을 때, 저는 자살 충동이 강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상담과 약물 치료 덕분에 저는 제 삶을 지속해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하지만 제 내면 깊은 곳에는 여전히 공허함이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당할까봐 끊임없이 두려움에 떨며 살았습니다. 이제 60대가 된 저는 최근 향심기도와 렉시도 디비나를 수련하기 시작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저는 제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느끼고 깊이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정말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Mary H.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Wisdom Pattern: Order, Disorder, Reorder (Franciscan Media, 2020), 185–186; and “Two Kinds of Darkness,” Daily Meditation, September 5, 201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Niko Tsviliov, untitled (detail), 2023, photo, Ukraine,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저 달이 자기 자신의 모습은 그대로 간직한 채 그림자와 빛과 더불어 춤을 추듯이, 우리도 저 달의 지혜의 리듬에 맞추어 그림자와 빛과 더불어 춤을 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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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새로운 눈으로....
하느님의 숨
2025.07.15. 05:54
"회개" 혹은 "전환"이라고 하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μετάνοια"(metanoia)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단순한 "돌아섬"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전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meta'는 "무언가를 넘어서거나 초월하는"의 뜻을 지니고 있고, 'noia'의 어원은 '마음'을 뜻하는 'νους'(nous)이고, 그 동사형은 νοέω(노에오)인데, 이 단어는 '무언가를 감지하거나 인지하다', '관찰하다', '보다', '알아차리다' 등의 뜻을 지닌 말입니다.
그렇다면 본래 '메타노이아', 즉 회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지하거나 알아차리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말이겠지요?! 늘 보던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보아왔던 방식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 단어에 대해 영어 백과사전에는 여러 가지 정의 중에 심리적인 차원에서 이런 정의도 나오더군요. "정신적인 '붕괴'를 경험한 후 그 결과로 긍정적인 '심리'의 재건 혹은 치유를 이루는 과정"이라고요.
여기서 '정신적 붕괴'라는 약간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닌 말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정반대로 아주 긍정적인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정신적 붕괴'라는 말이 우리의 잘못된 관념이나 통념을 깨뜨려 주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으며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곳 사람들이 이 기적들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한 마음과 행위를 보고도 그들은 마음의 동요를 별로 느끼지 않았다는 말이겠지요?!
이런 상황을 선(善)을 선으로 볼 수 없는 왜곡된 마음의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요즘 우리의 시각이 이러하지는 않은지 곰곰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경이로운 것들에 대해 우리 마음이 무덤덤해지지는 않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하늘에 별들이 백여 년에 한 번쯤만 나타난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자주 하늘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특별한 것을 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특별함은 매일, 매 순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상 안에서의 특별함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런 특별함을 보는 눈이 무뎌져 있는 것이지요.
자, 이제 새롭게 눈을 떠 봅시다.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것이란 없었던 것이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것이지만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지금까지 별것 아니라고 여겨졌던 것이 선물이요 은총으로 인식된다면 그것이 바로 회개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관점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보아왔던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서 대상을 보는 것이겠지요?! 별 생각 없이 늘 생각하던 대로 생각하고 그 생각에 의해 우리 삶이 무의식적으로 좌지우지되는 삶에서 다른 생각으로 옮겨 생각해 보고 바라보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바로 회개의 시작인 것입니다.
17세기 스페인의 가톨릭 사제 발타자르 그라시안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남다른 통찰력과 판단력을 지닌 사람은 사물에 지배당하지 않고 스스로 사물을 만나면 넓은 이해심을 바탕으로 그의 실체를 파악해내며 꼼꼼한 관찰력으로 그의 내면을 읽어냅니다. 무엇을 바라보든 예리하게 주시하고 철저하게 파악하는 그의 결정은 언제나 올바를 수밖에 없습니다. 고정관념과 선입견으로 똘똘 뭉친 눈이 아닌 늘 새롭고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옳다마다요!
매일 같은 눈으로 우리 주변의 사물들과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아왔다면 새로운 눈으로 그 내면을 보려는 노력을 해봅시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창의력이 발휘되고 선을 선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겨납니다. 선을 선으로 볼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지금 새로운 하루를 맞이했고, 또 이렇게 세상을 보며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선물이요 은총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복음서를 봅시다. 나자렛이라는 마을은 구약성서에 등장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전혀 기대치 않았던 곳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타나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이방의 박사들(점성가들)은 그분께 경배 드리러 왔지만, 그분과 같은 민족 사람이었던 헤로데는 그분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새로운 눈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이 새로운 눈은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있어서 우리가 그 의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가까이 존재하는 분이 바로 하느님 아닐까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계셔서 우리가 알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해 주십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르 4,9; 23; 7,16; 마태 11,15; 루카 8,8;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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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4)
믿지 않는 이들의 무감각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저주는 순종으로 받는 축복과 구별됩니다. 유대인들은 꾸지람을 들어 마땅했습니다. 불신앙이라는 그들의 악한 의지는 주님께서 그곳에서 행하신 놀라운 은총의 행위와 확연히 대비됩니다. 유대인은, 온전히 믿음으로써 구원받은 믿는 이들의 본보기와 대비되어 비난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고을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서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뱃사이다와 카파르나움에서 벙어리들이 목소리를 찾아 주님을 찬양하고 눈먼 이들이 보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다리저는 이들이 걸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났지만 그처럼 놀라운 기적들로도 믿음에 대한 원의가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기적에 대해 듣기만 해도 경외감과 믿음이 생겨야 마땅했습니다. 이런 무감각은 티로와 시돈이 범한 작은 죄에서도 소돔과 고모라가 저지른 큰 죄에서도 발견됩니다. 만일 이런 놀라운 덕행에 그들의 미음이 움직였더라면, 아마 믿음에 대한 열망도 일었올 것입니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9와 10에서 살펴보았듯이, 고대 이스라엘에서 다산은 은총의 표지였다. 그것은 켈트 영성 전통에서도 그러하다. 차차 살펴보겠지만, 그것은 엑카르트의 신학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주제다. 낳음이 일어나는 곳에는 은총이 자리하게 마련이고. 낳음이 없는 곳에는 은총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낳음 속에서 “여러분은 모든 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고 엑카르트는 선언한다. “이 낳음을 무시해 보라. 그러면 여러분은 모든 복을 무시하게 될 것이다." 창조의 영성 내지 축복의 영성은 더 많은 복을 낳음으로써 절정에 달한다. 그러한 영성의 바탕이 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긍정의 길(창조계)+부정의 길(버림)→ 창조의 길
엑카르트의 영성은 창초의 길의 영성이다. 하느님이 낳는 자요 창조주이듯이, 모든 사람도 낳는 자요 창조자다. 그는 긍정의 길과 부정의 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변증법과 긴장을 인정한다. 심리학자이자 예술가인 오토랑크는 삶과 창작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긴장이야말로 모든 예술가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가장 근본적인 고투(苦鬪)라고 말한다. 그러한 고투를 해결하기 위해 엑카르트가 제시하는 방법은 둘째 오솔길, 곧 버림과 그대로 둠의 길인 듯싶다. 창작하기 위해, 예술가는 삶을 철저히 버릴 필요가 있다. 살기 위해, 예술가는 창작을 철저히 버릴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할 때 만, 부정의 길은 첫째 오솔길과 셋째 오솔길을 잇는 가교가 되어, 낳음과 창조성을 장려할 것이다. 가장 먼저 일어나는 낳음은 개인의 출산. 곧 자각과 새로 남, 우리 자신의 출산이다. 엑카르트는 이러한 자각을 지칭하는 한 낱말을 고안해 내는데, 그것을 일컬어 “돌파”라 부른다.(426)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거룩한 성심에 대한 묵상, 요셉 맥도넬 신부
성심에 대한 묵상
첫 번째 시리즈
첫 금요일 신심
VI.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의 이미지
제3 묵상. 십자가, 열린 상처
성찰
왜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은 우리에게 십자가 위에 놓인 모습으로 제시되는가?
그것은 성심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에게 십자가가 반드시 따라야 할 표징이자 증표임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십자가는 언제나 성인들과 그리스도의 벗들에게 뚜렷한 특징이었다.
복되신 성모님과 성 요셉께서는 인류 역사상 그 누구보다 무겁고도 험난한 십자가를 짊어지며 일생을 사셨다.
예수 성심의 열린 상처 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본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품으신 한없는 사랑의 영원한 증표,
고통 중에 피신할 안식처,
죄를 보속할 수 있는 길,
하늘의 은총이 샘솟는 은총의 샘물이다.
적용
"십자가 안에 구원이 있다.
십자가 안에 생명이 있다.
십자가 안에 원수로부터의 보호가 있다.
십자가 안에 하늘의 달콤함이 스며든다.
십자가 안에 마음의 힘이 있다.
십자가 안에 영혼의 기쁨이 있다.
…영혼의 건강과 영원한 생명의 희망은 오직 십자가 안에만 있다."
― 토마스 아 켐피스 (『준주성범』)
하느님께서 내게 십자가를 지워주셨다면, 나는 기뻐할 수많은 이유들을 가진 셈이다!
애정과 결심
오, 나의 구세주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이시여,
당신께서 기꺼이 주시고자 하는 모든 시련과 십자가를 저는 기꺼이 당신께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당신 성심의 상처 안에 저를 숨기시고, 결코 당신에게서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 (성 이냐시오의 기도)
영적 독서
『준주성범』 제2권, 제11장~제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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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떤 사람이 낡은 운동복을 입고 조깅하다가 길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다가가 말을 건넵니다. 그 말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자기가 우주선을 만들고 있고, 원숭이 뇌에 마이크로 칩을 삽입할 것이고, 인공 지능으로 구동되는 가정용 로봇을 만들겠다는 등의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그 자리를 떠납니다. 만약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여러분이라면 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마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환자나 허언증 환자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직접 말을 들은 이 사람은 크게 감동했다고 합니다. 너무 기뻐했고, 이 이상한 말을 모두 믿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이 사람은 테슬라, 스페이스 X 등을 만든 억만장자 일론 머스크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설득력이 전혀 없겠지만, 너무나 유명한 일론 머스크의 말이기에 신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어떻게 받아들이시고 있습니까? 굳게 믿고 있다면 하느님의 말씀에 설득력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예언자들의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성모님을 떠올려보십시오. 불가능한 일이 자기 앞에 펼쳐져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가능하다고 믿었고,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이 세상 삶을 힘차게 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갈릴래아 지역의 도시들인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꾸짖습니다. 그들은 놀라움을 느꼈지만, 마음 깊은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은총과 사랑을 그렇게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선하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았기 때문일까요? 은총과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구원을 자동으로 받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심판 날에 티로와 시돈이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하시지요. 티로와 시돈은 구약 성경에서 교만과 우상 숭배로 대표되는 이방 도시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며 교만에 빠진 유다인보다 이방인이 더 낫다는 충격적인 선언인 것입니다. 커다란 은총과 사랑을 받았음에도 회개하지도 믿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론 머스크보다 더 크고 위대한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또 믿지 않아도 될까요? 성사, 성경, 교리, 교회 공동체를 계속 접하고 있음에도 회개하지도 또 믿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주님의 꾸짖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회개는 다시 하느님을 향해 걷는 삶을 의미합니다. 지금 다시 하느님을 향해 걷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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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때로는 짐이 버거울 때도 있겠지만 짊어지는 방법을 배운다면 우리에게 유익할 거야(영화 ‘작은 아씨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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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성실과 겸손으로 중세 신앙을 만든 위대한 스승 /
박윤식 [big-llight] 250714. 20:44 ㅣNo.183452
보나벤투라는 1221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이름은 ‘조반니 디 피단자’였으나 ‘보나벤투라’로 바꾸었다.
이는 사실 불확실한 사연이긴 하지만 보나벤투라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받은 이름이라나.
그가 어렸을 때 중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어머니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게 중재 기도를 바쳐,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성인의 설명에 의하면 어머니는 아들을 안고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달려가
“아이가 살아나기만 하면 꼭 수도원에 보내겠습니다.” 라고 약속했다.
성인은 아이를 안고 기도하고 축복을 주었다.
그러자 아이가 살아났다.
성인은 너무 기뻐서 “오! 보나벤투라(기쁜 일이여)” 라고 외쳤다.
그때부터 ‘보나벤투라’로 불리게 되었다나.
아이가 자라자, 어머니는 성인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는 열일곱에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수련기간을 마치고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
세계 최고의 신학대학인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는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파리 대학 교수가 되었다.
보나벤투라가 신학을 가르칠 때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보나벤투라는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두 사람은 철학, 신학, 과학 등 모든 학문에 대해 토론했고,
서로가 신앙적, 학문적 성장을 자극하고 독려했다.
성인에게는 이런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의 교황이 토마스 아퀴나스와 보나벤투라에게 성체 찬미가를 작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는 아마도 두 사람 작품 중에 나은 것을 택하려 한 것 같다고 다들 여겼다.
두 사람은 열심히 작사하였고, 드디어 일을 끝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작품을 먼저 본 보나벤투라는
“토마스의 작품이 제 작품보다 훨씬 훌륭합니다.” 라고 말하고는 자신의 것을 찢었다.
이렇게 그는 겸손했다.
사실 겸손을 뜻하는 영어는 ‘humility’이며, 이 말의 어원은 ‘흙’이다.
겸손은 흙처럼 되는 거다.
보나벤투라는 ‘흙같이 겸손한 성인’이었단다.
후에 보나벤투라 성인은 파격적으로 서른다섯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프란치스코회 총장이 되었다.
그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기를 쓰고 수도회 회칙도 만들었다.
1273년 그는 알바노의 교구장 직책의 추기경이 되었다.
보나벤투라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성모님을 지극히 공경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성인은 매주 토요일마다 수도원 부속 성당에서 성모 찬송 미사를 봉헌했고,
성당에서 저녁 종이 울릴 때마다 정성껏 성모송을 바쳤다.
그래서 성인을 얘기할 때 꼭 기억해야 할 게 바로 ‘삼종기도’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 기도는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성령으로 인해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한 사실을 알려드린 것을 묵상하며, 아침, 낮, 저녁 세 번하는 기도다.
이것이 삼종기도의 출발이다.
멀리 성당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을 그린 밀레의 ‘만종’이 그 대표적 그림이다.
다음 해에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로마와 동방 교회의 일치를 토의하려는
리옹 공의회의 의사일정을 짜도록 그를 위촉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의회가 열리고 있는 회기 중인 7월 15일에 리옹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보나벤투라는 중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사상가 중의 한 분이다.
그는 1482년에 교황 식스투스 4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1588년 교황 식스투스 5세에게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성체와 성합 그리고 추기경 모자가 그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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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분께 감사하는 그 마음만이 /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박윤식 [big-llight] 250714 20:44 ㅣNo.183453
사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께서 주신 축복이다.
우리가 어느 선에서 초능력이 있다 한들 그분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무엇 하나 우리 힘으로 되는 게 있을지?
자신이 남들보다 낫다는 게 좀 있다면, 늘 그분께 감사하며 살아야 하리라.
겸손과 회개로 하느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을 잃는다면,
어쩜 우리는 그분께서 주신 은총의 축복을 가로챈 ‘배신자로 낙인’찍힐게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많이 일으키신 곳들을 아주 엄하게 꾸짖으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에.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그 많은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 옷에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을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코라진, 벳사이다와 같은 유다의 여러 고을들을 아주 엄히 질책하신다.
그들은 그분께서 베푸신 그 많은 기적의 은혜를 입었지만, 감사를 느끼거나 지은 죄를 반성할 줄 몰랐다.
회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셨지만, 그들은 엄두도 모른 채 끝내 그 초청을 끝내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그만큼 이미 그들은 예수님 곁을 떠나 있은 채 경직되고 완고했기에.
사실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그만큼 더 높은 도덕적 의무가 요구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뜻하는 그 숭고한 의미이다.
우리 신앙 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은 이는 그만큼 더 큰 책임이 부과될 게다.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기적들과 풍요로움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가득 차면 결국 그분의 꾸지람을 피하지는 못하리라.
우리는 늘 부족할 때에야 주님을 찾는다.
부족함은 우리 마음에 늘 아쉬움을 안겨준다.
또 그것이 더욱 커져 가면 간절함이 되어 누군가를 의지하려 든다.
그러기에 우리는 풍족할 때에 오히려 주님을 제대로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이때에 더 큰 사명과 임무를 주신다.
이 세상에서 살다보니까 어쩌다 죄인 취급받는 이들의 경우도 그렇다.
범죄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그들의 인생 역정을 자세히 살펴볼 때,
우리역시 그들과 똑같은 환경과 처지였다면,
과연 그들처럼 불행한 길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어디 장담할 수 있을까?
그들이 지은 가장 큰 죄는 ‘회개 없는 것’이었을 게다.
사랑을 거스르는 가장 큰 죄도 무관심이리라.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손가락질할 것이 아니라,
은총으로 지켜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 은총에 충실히 응답하며,
나날이 회개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가시 틈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장미를 보고
감사하기보다는 가시에 찔렸다고만 투덜거린다.
날이면 날마다 그저 주는 그 많기도 한 축복에 감사는커녕,
자신이 갖지 못한 것들을 두고 두루두루 조상 탓하며 불평만을 쏟아 낸다.
어찌 보면 역설적으로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지기 시작한단다.
그래서 십자가에 매달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참된 부활을 체험하리라.
이를 두고 우리는 신앙의 역설이라 일컫는다.
감사할 줄 모르는 이야말로 참으로 불쌍한 이다.
그런 오만 방자함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복마저
언제 그랬냐면서 우리를 서서히 외면하리라.
이 시각 ‘주님, 제게 정말 부족한 당신께 늘 감사하는 마음을 꼭 주십시오.’라며
정성을 다해 기도해 보자.
그러면 그분께서는 감사하는 마음을 꼭 안아 주실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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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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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보십시오.
늦게 올라오거나 다음날 또는 게재 아니될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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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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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리스트에서 작성자 “박영희”님을 찿아가시면 보실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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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 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285
7월15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연중 제15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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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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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서울대교구 류호영 안토니오(등촌1동(지)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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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역시 또 다른 코라진이요 벳사이다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으로부터 강력한 철퇴같은 경고의 말씀을 들은 도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모두 겟네사렛 호수 연안에 있는 도시들로, 갈릴래아 지방에 속해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지방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 활동의 베이스 캠프와도 같은 지역이었습니다. 수시로 이 지방 저 지방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무수한 기적과 치유 활동을 전개하신 곳입니다.
그 도시 사람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훨씬 자주 예수님을 뵈었고, 직접 그분으로부터 말씀을 들었으며, 예수님께서 행하신 특별한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끝끝내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저주에 가까운 경고성 발언을 듣게 된 것입니다. 타락한 도시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 말씀은 마음이 활짝 열려 들을 귀가 있었던 백성들에게 선포하셨던 행복 선언과는 정반대의 분위기입니다. 행복 선언과는 완전히 대치되는 불행 선언인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마태 11,21-23)
불행하여라! 라는 이 말씀은 언젠가 반드시 재앙을 내리시겠다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실제로 재앙이 시작될 것임을 선언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참된 행복을 선포하셨을 때, 그 자리에서 구원이 구체화된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지척에서 뵈었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자신들의 귀로 들었으며, 그분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봤던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이로움과 은총 체험은 잠시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두운 과거로 되돌아갔습니다.
오늘 성전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예수님의 경고성 발언입니다. 성전에서 봉사한다든지, 성전의 문턱이 닳도록 들락날락하지만, 타성에 빠지고, 보다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뒷전인 채,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목숨을 걸 때, 우리 역시 또 다른 코라진이요 벳사이다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성하게 활동하셨던 도시들이 그분의 은총과 축복을 거부했으며, 회개와 결단의 시간을 낭비해버렸기에, 구원의 은총은 다른 도시 주민들, 그리고 이방인들의 몫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 상태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깊은 타성의 늪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요? 기쁨과 자발성은 찾아볼 수 없고 의무감과 형식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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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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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통독을 많이 하면 그만큼 착해질까?>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그 도시들에서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지만,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마태 11,21)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질문을 던집니다.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 중요한 영적 원리가 숨어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그것을 소화시켜 영양분으로 만드는 시간이 필요하듯, 하느님의 말씀이나 기적이라는 영적인 양식도 우리 안에서 살과 피가 되기 위한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묵상’이라고 부릅니다.
묵상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되새기고, 그 의미를 깨닫고, 마침내 삶을 바꾸는 결심, 즉 ‘회개’로 나아가게 하는 영혼의 소화 과정입니다. 오늘 복음의 도시들은 기적이라는 진수성찬을 맛보기만 했을 뿐, 그것을 묵상으로 소화시켜 회개라는 영양분으로 만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늘에서 내린 만나(기적)는 먹었지만, 믿음으로 바위를 쳐서 나온 생수(회개)는 마시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소화되지 않은 음식은 오히려 몸에 해롭듯, 묵상 없는 기적 체험은 영적 교만으로 이어져 더 큰 심판을 부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보고도 믿지 않는’ 비극은 역사 속에서도 반복됩니다. 19세기 조선, 흥선대원군의 시대를 생각해 봅시다. 당시 조선의 문 앞에는 거대한 ‘시대의 표징’이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서양의 검은 배, 이양선(異樣船)이 출몰했고, 목숨을 바쳐가며 새로운 하느님을 증거하는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가 이어졌습니다. 이것들은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명백한 신호이자, 기존의 질서만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강력한 표징이었습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그 표징들을 어떻게 ‘소화’했습니까? 그는 변화의 가능성을 묵상하며 미래를 준비하기보다, 오직 ‘위협’으로만 해석했습니다. 그의 눈에 서양 세력은 왕권을 위협하는 오랑캐였고, 천주교는 성리학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표징 앞에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과거의 질서를 지키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며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고, 전국에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즉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척화비를 세웠습니다.
결국 조선은 변화의 물결을 외면한 채 문을 닫아걸었고, 머지않아 더 큰 힘에 의해 강제로 문을 열리고 국권을 상실하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반면에, 아주 작은 표징이라도 그것을 깊이 묵상하여 위대한 믿음에 도달한 이들도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순교자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입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 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에 정통한 학자였습니다. 그에게 천주교 교리, 즉 ‘서학(西學)’은 그저 하나의 새로운 학문, 낯선 사상(표징)으로 다가왔을 뿐입니다. 다른 많은 유학자들처럼, 그는 그것을 쉽게 비판하고 배척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달랐습니다. 그는 이 낯선 가르침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자신의 모든 지성과 영혼을 다해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 인간 영혼의 불멸, 상선벌악과 같은 교리들을 깊이 연구하고 되새겼습니다. 이 묵상의 과정 속에서 그는 천주교가 단순한 서양 학문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과 목적에 답을 주는 참된 진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의 묵상은 너무나 깊어서, 마침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국 최초의 한글 교리서인『주교요지』를 저술하기에 이릅니다.
오늘 복음의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엄청난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묵상이라는 소화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미사 안에서 말씀과 성체라는 기적을, 그리고 일상 속에서 수많은 주님의 손길이라는 표징을 만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또 읽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건으로만 여긴다면, 우리 역시 코라진과 벳사이다의 사람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이든 기적이든, 우리가 받은 은총은 반드시 묵상하고 생각하고 소화시키는 과정을 거쳐야만
참된 믿음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사제로서 이 묵상의 힘을 절감하며 살아갑니다.
신학교 시절, 성체를 영할 때 제 마음속에 아주 선명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거의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저는 이 짧은 한마디를 되새길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습니다. 때로는 위로로, 때로는 질책으로, 또 때로는 제 소명을 확인시켜주는 빛으로 다가옵니다. 그 말씀이 제 안에서 계속 소화되면서, 지치고 나태해질 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제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도록 이끄는 힘이 됩니다. 하나의 말씀, 하나의 성체라는 표징이 수십 년에 걸쳐 한 사람에게 끊임없는 영적 영양분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묵상의 힘입니다.
부족한 제가 체험한 것처럼, 말씀과 표징의 소화불량에 시달리지 말고, 깊이 되새기는 은총의 시간을 꼭 가지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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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거인들의 발걸음』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성경 속 네 인물, 아브라함과 모세, 베드로와 바오로의 지도력을 비교하며 우리 시대의 지도력에 대해 묵상하게 합니다. 먼저 모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 시킨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처음부터 용감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말이 느리고, 자신감이 없었고, 책임지는 것이 두려웠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한 걸음씩 나아갔습니다. 모세의 지도력은 신중함이었습니다. 사람의 뜻이 앞서기보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기다리고 분별하며 움직였습니다. 그 신중함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시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왔고, 시나이산에서는 십계명을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든 사건은 모세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신중한 모세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모세는 ‘내가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제가 듣겠습니다’라고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또 다른 유형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 안정감 있게 응답한 사람입니다. 떠나라 하면 떠났고, 아들 이사악을 바치라는 말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안정감은 바로 하느님을 깊이 신뢰하는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가라는 부르심, 아들을 바치라는 시험 앞에서도 그는 흔들리지 않고 응답했습니다. 베드로는 사교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실수도 있었지만,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어 했고, 예수님께 다가가려 했던 열정이 있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는 예루살렘의 중심에서 당당히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의 사교성은 공동체 안에서 하나 됨을 이끄는 큰 힘이었습니다. 바오로는 추진력의 지도자였습니다. 다마스쿠스에서의 회심 이후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 쉼 없이 움직였습니다. 수많은 도시를 순회하며 교회를 세우고, 편지를 보내며 가르쳤습니다. 추진력은 복음을 머무르지 않게 하고, 끊임없이 전진하게 했습니다. 이 네 사람의 특징을 곰곰이 묵상해 봅니다. 신중함의 모세, 안정감의 아브라함, 사교성의 베드로, 추진력의 바오로. 그들 모두 다른 모습이지만 하느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그들이 가진 차이는 하느님 안에서 조화를 이루었고, 그들의 공동체는 그 조화 속에서 살아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지도력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혹은 직장에서 우리가 맡은 자리에서 우리는 모세처럼 신중합니까?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안정감이 있습니까? 베드로처럼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며 마음을 엽니까? 바오로처럼 추진력 있게 살아갑니까? 하느님께서는 단 한 가지 모습만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격과 재능, 심지어 약함까지도 하느님께서는 도구로 쓰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고, 자신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신중함으로, 아브라함은 안정감으로, 베드로는 사교성으로, 바오로는 추진력으로 하느님의 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신중한 성격이라면, 모세처럼 귀 기울이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한결같은 사람이라면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다면, 베드로처럼 공동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앞장서기를 좋아한다면, 바오로처럼 복음을 널리 퍼뜨리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약점도 강점도 모두 사용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부르심에 “예, 주님”이라고 응답하는 마음입니다. 그럴 때, 우리도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하나의 ‘거인의 발걸음’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소돔과 고모라에 내려졌던 재앙보다 더 큰 재앙이 내릴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납니다. 알이 깨어지는 아픔이 없이 병아리는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힘들고 어려운 일은 있었습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절망하는 것도 우리의 선택이고, 장애물을 넘어서는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품는 것도 우리의 선택입니다. 지도자의 가장 큰 덕목은 먼저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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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카파르나움은 예수님 활동의 거점입니다. 코라진은 카파르나움에서 북쪽으로 삼 킬로미터 떨어진 아주 가까운 도시이고 벳사이다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필립보의 고향입니다. 이 세 도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과 활동을 아주 가까이에서 자주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하신 것처럼 먼저 사랑의 표징으로 치유의 기적을 이 고을 사람들에게 베푸셨고, 그들은 기쁨과 해방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았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면서 자기에게만 머물러 있다면, 이는 하느님 없는 삶, 죄의 삶으로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불행한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 불행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꾸짖으신 것입니다.
단죄와 저주는 내치는 행위이지만, 꾸짖음은 행동을 고치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이 그 바탕에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불행하여라.”(마태 11,21)라고 하실 때 사용된 낱말은 장례식 때 슬픔과 애도의 마음을 표현하는 낱말입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은 죽음의 상태이기에,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슬프고 걱정하는 마음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11,23)라는 말씀에는 마치 떼쓰고 고집부리는 아이를 무섭게 겁주는 듯한 부모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잘못된 고집을 버리기를 바라서 엄하게 말을 하지만 실제로 그대로 하려고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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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20-24: 회개하라
오늘 복음에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주님께서 베푸신 기적을 보았지만 믿음도 회개도 하지 않는 것을 염려하여 애태우는 슬픔이 서린 탄식의 말씀을 하신다. 그것은 갈릴래아 지방에 있는 코라진과 베싸이다 지방은 띠로와 시돈, 소돔과 고모라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많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우리의 잘못된 삶으로 주님을 배척하게 된다면, 우리도 유다인들과 똑같은 말씀을 하실 것이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23절) 예수님의 자비와 기적과 행적으로 하늘까지 들어 올려지는 특혜를 받았건만, 그들은 믿지 않았기에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회개했더라면 이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 나아가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일어났을 것이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24절). 이 고을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서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벙어리가 목소리를 찾아 주님을 찬양하고 눈먼 이들이 보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다리 저는 이들이 걸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났지만, 그처럼 놀라운 기적들로도 믿음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티로와 시돈에서도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발견된다.
코라진과 벳사이다가 비난을 받는 이유는 주님께서 몸소 그곳에 가셨는데도 그분을 믿지 않았지만, 티로와 시돈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믿었기 때문에 용서를 받았다. 예수께서 소돔에 대해 말씀하신 데는 이유가 있다. 소돔에 빗대 이 고을들의 죄를 강하게 따져 묻기 위해서이다. 이 고을들은 예수께서 사랑하시어 오래 머무신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강하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회개로 부르시고자 하신 것이다. 우리 자신이 그러기에 올바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지 못하면, 주님께서는 이 고을들에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도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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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적과 회개>
마태오 11,20-24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기적과 회개>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하느님께서
내게
하시듯
내가
하느님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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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경고는 ‘모든 사람’을 향한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0-24)
1) 이 말씀은, 세 고을들만 꾸짖으신 말씀이 아니고, 사실은 이스라엘 전체를, 또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다른 곳보다 죄가 더 큰 고을들’이어서가 아니라, 본보기로 언급하신 고을들입니다. 티로, 시돈, 소돔도 어떤 특별한 점이 있어서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그냥 예로 들었을 뿐입니다.>
이 말씀은, 21장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이스라엘이 특별히 선택된 민족이라는 것과 하느님의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맞지만, 그들이 선택된 민족답게 살지 않았고, 회개하지도 않았고, 받은 은혜에 제대로 응답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믿지 않았고,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을 꾸짖으시는 말씀이면서, 동시에 그들이 특별히 선택된 민족이라는 지위를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불행하여라.’는 ‘구원받지 못한다.’ 라는 경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경고대로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선택된 민족이라는 지위를 잃었고, 그 지위는 ‘그리스도교’ 라는 ‘하느님의 새 백성’에게로 넘어갔습니다.>
2) 그런데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는 예수님께서 처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는 그 경고 말씀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솔로몬이 성전을 신축했을 때 내린 경고 말씀입니다.
“네가 네 아버지 다윗이 걸은 것처럼, 내 앞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바르게 걸으며, 내가 명령한 모든 것을 실천하고 내 규정과 법규를 따르면, 나는 너의 왕좌를 이스라엘 위에 영원히 세워 주겠다. 이는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네 자손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를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한 대로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나에게서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계명과 규정을 따르지 않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예배하면, 나는 내가 준 땅에서 이스라엘을 잘라 버리고,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별한 이 집을 내 앞에서 내버리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속담거리와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1열왕 9,4-7)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되는” 특권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선민의식’과 ‘특권의식’에 빠져 있었던 것 자체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었고, 자신들이 받은 특권과 은총을 스스로 버린 것이었습니다.
3) 그리스도교라고 해도 방심하거나 자만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경고는 그리스도교를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실 때, ‘저승의 세력도’ 당신의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 약속은 교회가(신앙인들이)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살 때에만 유효한 약속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21-22)
4) 예수님의 경고는 각 개인에게도 해당됩니다. “나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 아니다.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라고 큰소리치면 안 됩니다. 그런 자만심은 신앙생활의 ‘적’이고, 아주 큰 걸림돌입니다. 누구든지 “내가 바로 그런 교만한 위선자일 수 있다.”라고 스스로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지금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자신은 전에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자랑하는 것이나,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안 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잘하겠다고 장담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겉으로만 신앙인’인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2) 또 ‘끝까지’ 가지 않으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경고 말씀도 하셨습니다.(루카 14,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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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은총은 풍부하다>
심판 날이 다가온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두려움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대가 됩니다. 열심히 노력하였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다고 자부하는 이에게는 충만한 행복을 누리는 때입니다.
하늘 아버지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심판의 날이 두렵습니다. 살아온 지난날이 허물로 누벼놓은 날이요, 마음이 흔들 비쭉이었기 때문입니다.
에제키엘서에 보면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렇게 하여 죄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라”(에제18,3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걸어온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아니 지금, 이순간에 어떤 길을 걸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자칫 잘 살아왔다고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될 때 그 인생이 올가미에 걸려들게 되고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코라진, 벳싸이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열심히 활동하신 지역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필립보는 벳사이다 출신입니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 활동의 근거지요, 가장 많은 기적을 행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은총을 거부하였고 결단의 시간을 낭비하였기에 불행합니다. 반면에 티로와 시돈, 소돔은 이방인 도시로써 교만과 사치스러운 부의 표본이 된 곳으로 퇴폐와 음란, 악의 도시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더 큰 구원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기적이 그곳에 있었더라면 그들은 분명 회개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은총이 아무리 많아도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인연을 내세우고 예수님을 자주 모셨다고 해도 그것이 곧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나 구원을 받지는 못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걸맞은 삶의 변화를 가져올 때 완성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코헬12,14).고 하셨으니 마음을 다잡아 오늘을 충실히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불 속에 던지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니만큼 알곡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먼저 자신을 잘 살핀다면 심판은 기쁨이요, 곧 하늘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두려워 마십시오. 자신을 갖고 심판을 맞이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으니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기를 다짐하며 이 날을 봉헌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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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계만수 안토니오 신부님]
지갑에 29만원 밖에 없다 하면서도 챙길 것 다 챙겨 먹으며 누구보다 당당하고 떵떵거리는데 자세히 보면 수많은 경호원 뒤에 숨어 사는 사람, 경제를 살리겠다며 큰소리 치곤하지만 오히려 경제를 더 말아 먹고 있는 사람,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도 탈세를 일삼으며 호의호식하는 사람, 평화를 사랑한다 하지만 불화와 갈등을 더욱 조장하는 사람,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러 놓고는 자기 잘못이 기억나지 않는 사람.
속 터지는 소식을 접할 때면 ‘하느님은 저런 놈 안 잡아가고 뭐하시나’라는 말이 그냥 튀어 나옵니다. 너무도 불공평한 세상, 그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우리 입장에선 하느님의 축복이 너무도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 같이 생각되고, 그러한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이 너무도 원망스러워서 하느님을 멀리하고 싶은 생각들이 고개를 쳐 들곤 합니다.
세상이 빨라지고, 편해지고, 화려해지는 만큼 그 만큼 우리의 불평거리들도 늘어나고 힘겹고 벅찬 일들만 내 주위로 마구 몰려오는 것 같이 여겨집니다. 그래서 사는게 힘이 듭니다. 어렵습니다.
성당에 앉아 차분히 내 자신을 돌아보고 하느님에게서 위로를 받고 싶지만 내 마음을 채워가는 것은 분노와 아픔, 상처들이고, 근심걱정거리들만 싹을 틔우며 커져 갑니다.
그러다 보면 하느님도 나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내 자신 안으로 들어가 보면 나를 바라보며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꾸짖으며 불행을 선포하십니다. 어느 고을보다 기적을 많이 베풀었지만 회개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해 준 것이 없다며 불평하는 우리들이지만 가만히 나의 지나간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한 발 한 발 내 삶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 가다보면 지나온 삶의 흔적 속에 묻어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생각보다 감사할 일들이 많이 있음을 내가 불평하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은 하느님의 축복이 내 삶을 채우고 있음을 우리는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화려한 모습으로 빠르게 달려가는 세상의 뒷꽁무니만을 쫓다보니 정작 가야할 방향을 놓쳐 버리고 엉뚱한 곳에서 걱정하고 짜증내며 불평만 내 뱉곤 합니다.
오늘은 다만 30분만이라도 아니 15분, 10분만이라도 가까운 성당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어 봅시다. 익숙하지 않은 성체조배이다 보니 답답하고 불편할 것입니다. 갖가지 분심도 들겠지요. 걱정거리, 아픈 상처, 불평불만, 속에 담아 놓았던 욕지거리. 내뱉고 싶은 만큼 하느님 앞에 쏟아 놓고, 하나씩 감사한 것들을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살펴보십시다.
하느님께로 방향을 다시 잡는 회개는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올바로 방향을 잡고 하느님을 향하는 것, 바로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회개입니다.
성당까지 가기가 시간상 여건상 힘 드신 분들은 방에 촛불을 켜 놓고 나만의 성전을 만들어 볼 것을 제안합니다. 단지 30분의 시간이라도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30분 투자해서 불평불만을 늘어놓던 내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내 자신이 변화되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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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석희 라우렌시오 신부님]
<우리의 닫혀 진 마음을 열고 주위를 바라본다면>
어느날 아침 창밖을 보면서 "모든 것들이 오늘 아침에는 이전과 다르게 보이는군! 풀밭은 그전보다 더 푸르고, 나무도 그전보다 더욱 청아하고, 꽃도 그전보다 더욱 아름답구나!" 하고 말하면서 새날을 맞이한다면 그 사람의 하루는 유쾌하고 즐거운 날이 될 것 입니다.
사실은 풀밭이 변한 것이 아니고 나무와 꽃이 변한 것도 아니며, 다만 자신의 마음이 변화되어 온 세상이 달라지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것을 보면서 좋다고 말 할 수 없고 선한 것을 보면서 선하다고 말 할 수 없으며 주위에 펼쳐진 하느님의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 우리의 굳어진 마음에 조금의 변화를 갖도록 노력한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제대로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갖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복음 말씀을 묵상합시다.
오늘 복음을 얼핏 보기에는 예수의 말씀과 기적들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에게 화가 나시어 저주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전해주는 듯 하지만 사실상은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슬픔이 베여있는 탄식의 말씀입니다.
예수의 활동이 펼쳐진 주 무대는 갈릴래아였고, 그중에서 유명한 도시 셋, 즉 코라진,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이었습니다.
이 도시들은 랍비들의 종교 교육이 가장 성행하던 종교 도시였기에 누구보다도 하느님께 열려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도취와 오만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들은 눈을 감고 빛을 보지 않았고, 귀는 틀어막고 자기의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이 도시들에서 많은 기적을 보여 주셨고, 그 기적을 보고서라도 회개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고개를 돌리고 돌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코라진은 후에 상처만 남았고, 벳사이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카파르나움은 예수의 이름조차 역사에서 지워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은 선입견과 편견, 물질적 이익 때문에 볼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마음의 눈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반성의 시간을 갖게 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은혜를 제대로 볼 줄 모르고 마음을 꼬집은 우화를 전할까 합니다.
어느날 여러 동물들이 창조되었을 때 하느님은 그 동물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몸에 맞는 것들을 선물로 붙여 주셨습니다. 새에게는 빨리 날 수 있는 날개를, 어떤 짐승에게는 뿔을, 추위에 견디도록 털을 각각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만은 털도, 뿔도, 날개도 어떤 선물도 받지 못하자 선물을 기다리던 인간이 하느님을 찾아가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내가 특별히 생각해서 준 것에 대해서 깨닫지도 못하고 있구나, 나는 너에게 다른 동물들 보다 몇 배나 좋은 걸 주었단다. 그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속에 들어 있어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랑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인간은 그제야 받은 선물의 소중함을 깨닫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닫혀 진 마음을 열고 주위를 바라본다면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발견하게 되고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돌아섬이요, 회개이며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향해서 탄식하시는 예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길들여진 삶의 방식과, 은혜로움을 잃어버린 마음으로는 새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름다우면 세상과 이웃이 새롭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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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종이 베드로크리솔로고 신부님]
<삶의 향기>
우리는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고, 찌개를 끓입니다. 이렇게 음식을 하다 보면 당연히 그 음식에서 냄새가 납니다. 그 고유한 냄새는 그 음식이 진짜 그 음식이게끔 합니다.
그 음식의 냄새를 맡으며 ‘아!’ 하면서 기분 좋음을 느끼거나 황홀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그 냄새 때문에 곤란할 때도 있습니다. 밥을 지었는데 쉰내가 난다거나 김치찌개를 끓였는데 고약한 냄새가 난다면 누가 그 음식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음식의 냄새를 맡으면 기분이 확 상하면서 그 음식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됩니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인종마다 고유한 냄새를 풍기는데 그 진원이 몸에 밴 똥냄새랍니다. 인종마다 민족마다 먹는 음식에 따라 그 냄새가 다르니 평생을 두고 몸에 배어 풍겨 나오는 냄새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몸에서 나는 냄새 말고도 우리 삶에서 나는 냄새도 있습니다.
왠지 옆에만 가면 기분 좋아지고, 입가에 엷은 웃음이 번지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옆에도 가기 싫고, 옆에 가더라도 기분이 썩 좋지 않으며, 찜찜함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한테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내 삶에서 어떤 재료로 음식을 만드느냐에 따라 나한테 풍기는 냄새가 다를 것입니다. 그 냄새가 좋은 향기가 되어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지 또는 악취가 되어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우리가 내고자 노력하는 그 삶의 향기는 바로 우리가 회개하는 모습이고, 주님께 마음을 향하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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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사람이 낡은 운동복을 입고 조깅하다가 길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다가가 말을 건넵니다. 그 말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자기가 우주선을 만들고 있고, 원숭이 뇌에 마이크로 칩을 삽입할 것이고, 인공 지능으로 구동되는 가정용 로봇을 만들겠다는 등의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그 자리를 떠납니다. 만약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여러분이라면 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마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환자나 허언증 환자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직접 말을 들은 이 사람은 크게 감동했다고 합니다. 너무 기뻐했고, 이 이상한 말을 모두 믿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이 사람은 테슬라, 스페이스 X 등을 만든 억만장자 일론 머스크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설득력이 전혀 없겠지만, 너무나 유명한 일론 머스크의 말이기에 신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어떻게 받아들이시고 있습니까? 굳게 믿고 있다면 하느님의 말씀에 설득력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예언자들의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성모님을 떠올려보십시오. 불가능한 일이 자기 앞에 펼쳐져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가능하다고 믿었고,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이 세상 삶을 힘차게 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갈릴래아 지역의 도시들인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꾸짖습니다. 그들은 놀라움을 느꼈지만, 마음 깊은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은총과 사랑을 그렇게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선하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았기 때문일까요? 은총과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구원을 자동으로 받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심판 날에 티로와 시돈이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하시지요. 티로와 시돈은 구약 성경에서 교만과 우상 숭배로 대표되는 이방 도시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며 교만에 빠진 유다인보다 이방인이 더 낫다는 충격적인 선언인 것입니다. 커다란 은총과 사랑을 받았음에도 회개하지도 믿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론 머스크보다 더 크고 위대한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또 믿지 않아도 될까요? 성사, 성경, 교리, 교회 공동체를 계속 접하고 있음에도 회개하지도 또 믿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주님의 꾸짖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회개는 다시 하느님을 향해 걷는 삶을 의미합니다. 지금 다시 하느님을 향해 걷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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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 찬미예수님
저는 세 명의 조카를 갖고 있는데, 조카들을 만나게 되면 자꾸만 제 사랑을 확인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항상 무언가를 사주고 나서는, 혹은 야구장에 다녀와서는 “삼촌이 최고지? 둘째 삼촌이 더 좋아, 내가 더 좋아?”라고 물어봅니다.
제 착한 조카들은 그럴 때마다 “삼촌이 최고야”라고 이야기 하지만, 혹시라도 이러한 반응이 아니면 내심 섭섭합니다. 그러면 저는 종종, “너 다른 애들한테 물어봐라 이런 삼촌 어디 또 없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처럼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었다면, 상대가 그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마음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타인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았다면 그것을 인지하고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이 표현 방식을 언뜻 보면, 마치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에게 화가 나 이들을 저주하시는 듯합니다. 하지만 성서상의 의미로 볼 때 이것은 분노의 어조 보다는, 슬픔이 서린 사랑과 탄식의 어조입니다.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코라진과 벳사이다의 사람들이 티로와 시돈, 소돔보다 죄가 많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티로와 시돈은 현재 레바논의 항구 도시로 고대 페니키아의 경제를 좌지우지 했던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자주색 염료와 유리제품으로 유명했으며 악마 “바알”을 신으로 여기고 이를 이스라엘에 유입시킨 곳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소돔은 죄악과 교만으로 가득 차 하느님으로부터 재앙이 선포된 곳이었습니다. 이곳 지역의 사람들은 이방인으로서, 혹은 타락한 자들로서 많은 죄를 지었지만, 사실상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기적이나 회개의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지리상의 문제로 예수님께서 직접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복음을 보며 티로와 시돈, 소돔보다도 더 악하다고 하신 코라진과 베싸이다의 죄가 무엇인지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이들 지방에 대해 예수님께서 남달리 특별한 은혜를 베풀었지만 그것을 외면하고 망각한 죄입니다.
다시 말해서 갈릴래아 지방에 있는 이 코라진과 베싸이다 지방은 예수님이 직접 활동하심으로써, 다른 지역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그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예수님의 슬픔과 탄식이 더 컸던 것입니다.
두 번째, 그들의 죄는 무관심하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이 도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성 밖으로 내쫓지도 않았으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에 대해 완벽하게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합니다. 바로 이러한 무관심의 죄가 예수님을 더욱 슬프게 했습니다.
사랑을 남달리 누구에게 쏟았는데, 더 많은 특전을 주었는데, 상대가 그것에 무관심하다면 베푼 사람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게 되는지, 경험이 있으신 분들이면 더욱 실감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은총과 사랑만큼이나,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 또한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늘 우리에게 많은 은총을 무상으로 전해주십니다. 물론 우리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현실적 고충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한 차원 뛰어넘는, 이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이 공통적으로 누리고 있는 은총이 있습니다.
성당에 나올 수 있는 힘, 성체를 모실 수 있는 은총, 기도할 수 있는 시간, 하느님의 사랑을 인식할 수 있는 지혜, 그리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무상의 은총이지만, 우리가 그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것은 나 자신만의 평안함을 위한 단순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당을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성당을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가 죄인도 아닙니다. 성당에 다니면서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 즉 욕심과 이기심에 젖어 사는 이들도 많고, 비록 믿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사랑을 실천하며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마련해 놓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느님께 응답하는 우리의 마음과 생활 자세는 어떠합니까?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많은 은총을 누리고 있는 우리 자신이, 신앙이 없는 이들보다 더 행복하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과연 나 자신이 신앙이 없는 이들보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더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는지 돌이켜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복음 화답송은 우리에게 다시금 권고합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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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응답인
회개입니다.
오늘이
중요합니다.
내일은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감탄이 아니라
회개를 요구합니다.
기적은
하느님의 자비이며
동시에 책임입니다.
기적은 순간이지만
회개는 여정입니다.
회개는
삶 전체를
바꾸는
긴 여정입니다.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낮출 때
비로소 회개가
시작됩니다.
영적 무감각인
익숙함의 덫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회개의 기회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특권 의식과
교만에서
무너집니다.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깨어있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을
다시 바라보는
회개의
오늘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회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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