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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 대한 음모
요 7:19-24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요 7:19-24 / 너희 중에 과연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느냐?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20) 군중이 말하였다. `당신, 정신이 나갔소.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한단 말이오?' 21-23)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안식일에 사람들을 고친다고 해서 너희는 큰일이나 난 듯 놀라워한다. 그러나 너희도 할례에 대한 모세 율법에 따라 안식일에 할례를 베풀고 있지 않느냐? 사실 할례에 대한 이 전통은 모세가 정한 것이 아니라 옛 선조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너희 자녀들이 안식일에 할례를 받는 것이 합법적이고 또 너희가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시한다면 어째서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몸을 고치는 일은 지탄을 받아야 하느냐? 24) 잘 생각해 보라. 그러면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에 충돌이 발생합니다. 할례와 전신을 치유한 일을 두고 논쟁이 벌어집니다.
너희 중에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19-20) “너희 중에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19) 이 한 마디 말이 얼마나 유대인들을 자극했을지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보다도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덧붙인 규례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장로들의 전통이라고 합니다(막 7:3). 그런데 장로들의 전통은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멀리하면서도 형식적으로 전통만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자신들은 충분히 의롭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고 하셨습니다(막 7:9).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성취들과 규례들을 과시하는 교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격미달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는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말했을 때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귀신들렸다고 합니다(20). 이는 거짓말이요 신성모독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고 그 의도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25).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21-24)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5:1~). 이 기적은 안식일에 행해졌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따라 유대인들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22-23). 유대인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팔일 후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만일 태어난 지 팔일 후가 안식일에 해당할 경우 그들은 할례를 행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들의 조상들이 할례를 행한 것을 언급함으로써, 한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이 유대인들로부터 노여움 받게 된 것에 대하여 수긍하지 않으셨습니다. 할례보다 치유가 더 소중하지 않다는 이상한 적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준수에 대한 그들의 규정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의 진정한 의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외모로 판단했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피상적이면서도 끈질기게 자기들의 전통을 고수했기에 그들은 자기들의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메시야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외모로 판단 받으신 예수님, 그로 인해 거부당하신 예수님을 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십니다(롬 2:11).
적용: 외모 즉 외적인 조건이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선입견도 그런 것 중 하나일 겁니다. 선입견으로 인해 그릇된 판단을 했거나 오해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내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잘 들어야 합니다. 어느 정도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 들어야 잘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설 교 >
바른 신앙생활은
임덕순 목사
사람이 어떤 종교를 믿게 되면, 그 종교의 종교예식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 종교가 요구하는 행위를 하게 됩니다. 불교인은 손에 염주를 굴리며 절하는데 부처 앞에 절을 하는 것도 종교행위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종교행위에 해당될 것이고, 기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십 일이나 백일 동안 작정하고 기도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금식을 하기도 합니다. 또 거액의 재산을 기부하거나 헌금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은 종교적인 이유에서 행동한 것이므로 종교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 종교행위에 관련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유대인 지도자들과 종교적인 변론을 하고 있는데 그 핵심 주제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종교 행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1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문제를 제기하셨습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으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율법은 너희가 그렇게 존경하는 모세가 전해준 것인데도 너희는 왜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는 지적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기를 “당신은 귀신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라고 말했습니다. 당시에 귀신들렸다는 말은 가장 심각한 저주요 욕설이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반발하며 욕을 해댄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고 있고 얼마나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있는데 우리더러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고, 우리가 당신을 죽이려 한다고 말하니, 당신은 미친 사람이 아닙니까.” 라는 반응입니다.
이 말만 들으면 유대인들의 말이 맞고, 예수님이 무엇인가 잘못 아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다음 절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21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한 가지 일이 무엇이냐 하면, 5장에 나오는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일입니다. 그 날이 하필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미워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사사건건 예수님이 하는 일을 시비 걸었고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다가 결국은 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미워한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그들의 종교행위를 비판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입니다. 안식일이 되면 성전에 모여서 율법도 낭독하고 기도도 했습니다. 구제도 열심히 했고 금식도 자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의를 쌓는 것, 공로를 쌓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서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순종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공로를 세우고 인정을 받고 저주를 받지 않기 위해서 하는 일종의 거래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들 중에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종교적인 행위를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하고 철야도 하고 금식도 합니다. 재산의 일부를 헌금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물으십니다. “너는 왜 그런 일을 하느냐?” 우리는 왜 주일 지키고 기도하고 십일조 하고 선교 하는 것입니까? 기도하면 공이 더 쌓이기 때문입니까? 헌금을 많이 하면 축복이 보장되기 때문입니까? 그런 동기로 하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짓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계산하기도 가르치기도 그쪽이 쉽습니다. 기도를 한 시간 한 사람보다 두 시간 한 사람이 훨씬 수고했고 마음을 더 드린 것이 분명하니까 그만큼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헌금을 십 만원 한 사람보다는 오 십만원 한 사람이 더 많이 드렸으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더 축복하실 것이라고 하는 계산이 가능합니다. 불교에서는 한 두 번 절하는 것보다는 천배를 해야 부처님이 돌봐주신다고 믿고 있고, 기독교에선 금식도 한 주간 하는 것 보다는 40일을 해야 확실히 응답받는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도 그렇다고 가르치는 것이 쉽고, 사람들도 그렇게 말해야 쉽게 수긍합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훨씬 더 열심을 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종교들은 다 그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진짜 하나님의 종이라면 그렇게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거짓을 가르치는 것이 되기 때문이고, 실컷 하고도 돌아올 것이 없는 헛수고를 강요하는 사기꾼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생명주심과, 죄 사함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심과, 영생의 축복은 도무지 계산할 수 없는 것이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으로 거저 주신 것인데, 인간이 푼돈 같은 행위를 내밀며 이것을 받고 그것을 달라고 하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100억짜리인데, 인간이 가진 것은 총 동원해도 10원어치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십 원을 내밀며 100억짜리를 달라고 하면 거래가 되겠습니까? 오래 사정한다고 100억 짜리 물건을 주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이 자기 행위와 공로를 가지고 신에게 나아가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신께서는 헌금을 많이 한 순서대로 인정해주신다. 기도를 오래 한 순서로 공을 인정해 주신다. 그러므로 공을 쌓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복을 받기 위해서 헌금 많이 하고, 천국에 가기 위해서 충성하라고 가르치면, 그것은 성도를 속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이 그런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고 있었으니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 중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22-24절을 보면,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맹세한 그들도 예외가 있었는데, 아들을 낳은 지 8일이 되면 그날이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구애받지 않고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자식의 건강을 위해서 그들은 할례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몸의 한 부분의 건강을 위해서 안식일을 범하는 그들이, 안식일에 한 사람 전체를 온전하게 만들어주신 주님의 행위를 비난하며 미워하는 것이 합당합니까?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기꺼이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는 것이 아니라, 신이 두려워서, 혹은 신에게 복을 받으려고 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모순만 가득했던 것입니다.
수년 전에 스님이 한분 돌아가셨는데 전국이 떠들썩했습니다. 그분은 남들이 따라가지 못할 수양으로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은 무려 팔년 동안이나 자리에 눕거나 벽에 기대지 않고 사는 장좌불와 라는 수양을 한 것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말이 팔년이지 사람이 팔년을 등을 침대나 벽에 기대지 않고 꼿꼿이 앉아서 생활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아마 누구라도 이 기록을 깨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스님들이 왜 이런 일을 합니까? 신에게 가까이 가보려는 노력입니다. 신이 이런 것을 요구할 것이라는 추측에 근거해서, 그렇게 힘든 노력을 하고 신이 받으실만한 행위를 해서 신에게 가까이 가려는 몸부림입니다.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금식을 해야 하고, 하루 다섯 번씩 기도를 해야 하며, 성지순례를 해야 한다는 등의 5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천국 가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순교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하드라는 전쟁에 앞다투어 지원합니다. 이슬람을 위해서 순교하면 그 즉시 천국으로 간다는 주장을 믿고 폭탄을 몸에 두르고 기꺼이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지난달 아프가니스탄 내 미국 중앙정보국 기지에서 자살폭탄 테러를 자행해서 십 여명을 죽인 요르단 출신 알 발라위(36)의 아내가 방송 인터뷰에 나와서 "내 남편이 자랑스럽다. 그는 이 전쟁에서 매우 위대한 임무를 수행했다. 알라께서 그의 순교를 받아들였다"고 했다는 뉴스가 어제 나왔습니다. 그녀는 말하기를 "남편이 지하드(聖戰)에 참여한 건 놀랍지 않았어요. 지하드 관련 인터넷사이트에 자주 접속했으니까요." 라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는 것입니다. 알 발라위나 그의 아내만 그런 태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 생명을 내던질 각오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신을 위해서 죽으면 77명의 처녀와 천국에서 살게 해준다는 말을 믿기 때문입니다. 모슬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중세의 기독교도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면 그동안 지은 죄가 한꺼번에 용서받는다고 선전해서 군사를 끌어 모았습니다. 그러나 과연 사실일까요?
2010년이 시작되어 두 번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한가람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정말 열심히 하는 분들입니다. 각자 맡은 자리에서 아무 불평 없이 봉사를 정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헌금도 열심히 드리고 있고, 전도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아마 출석률이 한국교회가운데서 열 손가락 안에 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적 교인의 83-84%가 매 주일 출석합니다. 선교를 위해서 하는 헌신은 어떻습니까? 한국교회가 따라 올수 없는 열심을 우리가 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새해에는 더 잘하자고 새 결심을 하였습니다. 주님과 365일 동행하는 한해가 되기를 원하고, 주의 종이나 성도들과 같은 마음을 품고 이웃들과 동행하는 새 해가 되겠다는 것이 우리의 결심입니다. 이웃을 섬기겠다는 결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을 인정받으려는 것입니까? 이렇게 하면 복이 올 것이라고 믿고 선행을 투자하는 것입니까? 농사를 지으면 가을에 추수하듯이 미래 자녀를 위해서 미리 복을 지어 놓는 것입니까? 이런 이야기는 일반 종교에서 많이 들어본 소리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 종교가 요구하는 행위를 하게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해야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1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 교훈은 내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나는 세상에 유행하는 사람들의 교훈을 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훈을 가르치려고 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만든 종교가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행위를 어떤 동기로 하고 있습니까? 현존하는 종교들의 행위를 살펴보면 답이 나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하는 종교행위도 그랬었고, 지금 이 땅의 종교인들이 하는 행위와 동기도 역시 그랬습니다.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오고 사람들에게서 배운 행위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보상주의요 공로주의입니다. 신이 인정할 만한 덕을 쌓으라, 신이 보답할 만 하도록 지극한 공을 들이라, 나중에 돌려받도록 복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종교들이 그 신도들에게 가르치는 보상주의, 공로주의 사상입니다. 천주교도, 불교도, 이슬람교도, 다 똑같고 성경을 제대로 이해 못해서 예수님과 다툰 유대교인들도 그랬고, 오늘도 성경을 제대로 이해 못한 한국의 일부 교회들도 똑같습니다.
모든 종교에는 공통적으로 기도가 있는데 기도하는 모습은 다 다릅니다. 천주교는 이마와 양 가슴에 손을 옮기며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고, 불교는 손을 합장하고 엎드려 절을 한 다음에 손을 펴서 기도하며, 일년정종이라는 종교는 남묘호렝겡꾜 라고 부르며 기도합니다. 종교가 다양함에 따라 그 종교가 요구하는 행위도 다양하지만, 이 모든 종교가 요구하는 행위의 동기는 똑같습니다. 이렇게 하면 복을 받는다. 저렇게 하면 기도 응답을 받는다. 이렇게 하면 건강해진다고 하는 것으로 신에게 보상받기 위한 목적이거나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한 행위입니다.
이런 사상에 오래 물이 들어서 기독교인들 중에도 하나님께 헌금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봉사를 하면서 하나님께 인정이나 축복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너희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하셨는지를 깨달으라. 받아들이라. 감사하라. 기쁘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를 창조하시고 이 세상의 모든 환경을 제공하시며 너를 죄와 비참에서 구원하려고 오랜 세월 계획하시고 마침내 하나님이신 아들을 보내신 그 은혜를 깨달아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할 첫 번째 행위입니다. 드리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입니다.
다음에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라.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죽어 주신 그 놀라운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라. 그분이 나의 구주이시고 내가 그분의 백성이 된 것을 시인하라. 그리고 그분의 백성답지 못하게 산 지난날의 생활을 회개하고 새로운 생각과 삶을 시작하라. 이것이 두 번째 해야 할 우리의 행위입니다.
참된 신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도 못할 때에 우리를 위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크신 사랑을 해주시고 나서, 제발 이 사실이나 알아라. 그리고 그것이 너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 믿으라고 하십니다.
롬 5:6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고 하였고, 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하셨고, 10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살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멸망할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되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요일4:19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진짜 행위는 신이 인정하실 만한 어떤 공을 세우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못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위대하신 사랑을 깨닫기부터 해라.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여 믿으라는 것입니다.
요 6:28에 보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라고 사람들이 물으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라고 아주 명쾌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행위는 깨닫고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셨습니까? 믿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깨닫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깨닫고 믿는 사람으로서 믿는 사람 답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주일에 일터로 가지 않고 교회로 갑니다. 더 이상 자기 욕심만을 위해서 돈을 쓰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위해서 돈을 쓰기 시작합니다.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하고 선교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와 구원이 너무 크고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하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동기가 아주 순수합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사고날까봐서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 것이 너무 좋기 때문이고, 주일에 말씀을 듣는 것이 일주일의 생활에 큰 힘이 되기 때문이고, 주일에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다른 성도에게 도움이 된다니 너무 보람되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니 행복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는 이유는 십일조를 드리면 물질이 더 들어올 것이라고 기대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이미 내게 생명과 건강을 주셨고 일터와 성실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주셨고 그래서 지금 손에 물질을 받았으니, 이것을 주신 하나님께 마땅히 받았다는 표시를 하는 게 당연해서 이고, 주신 물질을 먼저 거룩한 일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는 것도 오래 강하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나의 기도에 설득되어서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시집간 딸이 친정 어머니를 만나서 미주알고주알 모든 이야기를 다 하듯이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내 사정을 다 말씀드리고 지도를 구하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그것을 명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실 것이라는 믿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하고 선교헌금을 하는 것이지 몇 배로 주시겠지 하는 투자심리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세상 종교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믿는 것이고, 믿은 뒤에는 믿는 사람답게 사는 것을 요구하시는데, 믿는 사람답게 사는 생활은 종교행위가 아니라 신앙생활이요 신앙생활의 동기는 순수한 감사함이라는 것입니다. 순수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서 사는 삶이 성경을 바로 알고 믿는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
자식이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나 학생이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은 그 자체가 지극히 옳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자기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님이나 선생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됩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의 자세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를 지으셨고, 죄와 비참에서 구원해 주셨으며, 오늘도 사랑과 보호로 인도해주신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이 사실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성경에 우리가 어떻게 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살도록 만든 존재이니까 이렇게 살아야 해, 이렇게 해야 네가 행복하게 되어 있으니까 이렇게 살아라,” 이게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우면 감사가 나옵니다. “아 그랬군요, 알았습니다.”하고는, 옳고 당연한 우리의 길을 감사한 마음으로 따라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복을 받은 신자가 마땅히 살아야 할 옳은 삶을 사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종교행위가 아니라 신앙인의 생활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신과의 거래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복을 주시겠지, 주일을 지켰으니까 사고가 나지 않겠지, 십일조를 드렸으니까 재산이 늘어나겠지, 기도 했으니까 평안하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내가 알지도 못할 때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너무나 감사해서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믿고 살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게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세상 종교의 가르침에 오염되어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순수한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 3가지
요한복음 7장 17-24절 / 이한규 목사
1.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것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려 하다 보면 어떤 교훈이 하나님의 교훈인지 알 수 있다(17절). 참된 지식인이란 ‘머리로만 아는 사람’이 아니라 ‘아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잘 알고 잘 가르쳐도 실천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행동이 없는 지식인을 보면 거리의 이정표가 생각난다. “이쪽으로 가라! 저쪽으로 가라!”고 방향 표시를 해서 남은 다 그쪽으로 보내면서 자기는 그쪽으로 가지 않고 그대로 서 있는 이정표의 모습이 행동이 없는 지식인의 약점이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좋은 줄은 알지만 실제로 원수를 사랑해야 그 말씀을 온전히 아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작은 교회면 어때요? 작은 교회가 훨씬 보람이 있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몸은 큰 교회로 간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으면 참된 축복이 멀어진다. 반면에 행하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축복이 반드시 있다. 진리라고 생각되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면 그대로 행할 때 참된 축복이 예비된다.
미국의 종업원이 주문받는 레스토랑에서 팁이 필수다. 그런데 주문받는 종업원에게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고 하고 식사한 후 팁은 놓지 않고 동전 몇 개만 남겨두고 심지어는 팁 대신 전도지를 남겨둔다면 믿음에 먹칠을 하는 셈이 된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믿는 하나님을 누가 믿고 싶겠는가? 천국 성도는 늘 권리보다는 책임을 먼저 생각하고 부분보다 전체를 먼저 생각하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참된 사람과 불의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참된 사람이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불의한 사람이다(18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삶에 머물게 하고 싶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말라. 가끔 보면 위선자들도 영광을 거절할 때가 있지만 그들은 가식으로 겸손하게 행동해서 더 영광을 받으려고 한다. 하나님은 그 속마음을 다 아신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말라.
제자란 몇 단계 성경공부를 이수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힘들어도 하나님의 영광이란 목표가 흔들리지 않으면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역사가 이뤄지면서 내면에 기쁨이 차오른다. 그때 눈을 감으면 나를 통해 예수님의 향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거울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을 느낀다.
사람이 마음이 가장 무거워질 때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삶의 목표를 잃을 때다. 삶의 무게는 생활의 무게 때문이 아니다. 거룩한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영혼은 거룩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 얻는 보람을 먹고 살게 되어 있다. 자기 영광에 몰두하지 말고 남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특히 하나님께 필요한 성도가 되라. 그때 영혼은 배부르게 되고 내면에 기쁨이 차오르고 삶은 상쾌해진다.
3. 공의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를 했느냐? 안했느냐?” 혹은 “율법을 겉으로 지키느냐? 아니냐?”로 사람을 판단했다. 그러나 주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하셨다(24절). 내면의 진실이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다. 잘 알지 못하면서 자기 생각만으로 남을 판단하지 말라. 물론 판단도 필요할 때가 있다. 열을 알면서 하나를 말하면 바른 충고가 되지만 하나를 알면서 열을 말하면 나쁜 판단이 된다.
잘 알지 못하면 판단을 최대한 유보하고 더 많이 알려고 하라. 섣부른 판단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특히 자기 기준과 자기 장점으로 남을 판단하지 말라. 자기가 기도를 많이 한다고 기도로 신앙을 판단하고 자기가 봉사를 많이 한다고 봉사로 신앙을 판단하지 말라. 남을 쉽게 판단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결심을 예수님의 마음의 고요함이 내 안에 생긴다. 진리의 증언을 남에 대한 판단으로 하지 말고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하라.
잘못된 판단은 무력에 의한 폭력 못지않게 큰 해를 입히는 말의 폭력이 될 때가 많다. 진리를 지키려는 마음보다 자기를 지키려는 마음이 클 때 판단력의 지수가 크게 떨어진다. 판단이 심해지면 말의 칼로 상대를 말살하려고 한다. 판단하는 습성을 극복하지 않으면 점차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칼을 믿는 사람처럼 된다. 판단하는 마음에 굴복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요한복음 7:10-24 / 신성종 목사
가정은 에덴동산을 상실한 우리 인간에게 대신 주신 지상의 천국이요 광야를 살아가는 나느네 인생에게 주신 둥지입니다.
세상에서 피곤한 우리들에게 날개를 접고 편히 안식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가정이란 둥지입니다. 문제는 사랑과 대화가 있고, 관심이 있는 가정이 될 때 가정다운 가정, sweet home이 될 것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과 함께 은혜받기를 원하는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하면]이란 제목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가정의 행복과 세상에서의 성공의 비결이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유대인들 사이에는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첫째는 예수, 과연 그는 누구인가?
둘째는 그의 말하는 교훈이 어디서 왔는가? 다른 말로 말하면 그것이 진리인가, 믿을 수 있는가? 였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문제에 역점을 두고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먼저 예수님의 가르침의 권위에 대한 유대인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그의 교훈이 사람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에게서 유래했다고 했습니다. 16절에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는데도 그의 유식함에 놀라서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15절).
이런 불신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 랍비들의 방법과 너무도 대조가 되고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랍비들은 오늘날의 학자들의 논문처럼 다른 유명한 랍비들의 말을 많이 인용하는 것이 권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말을 다른 랍비들의 권위에 의지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의 성경 외에는 소위 랍비들의 말이나 다른 어떤 권위에도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에게 권위 있게 들려졌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의 차이점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5:8절에 보면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각과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다릅니까?
세 가지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부분적으로 보지만 예수님은 전체를 보십니다.
이것은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공간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재만 보지만 예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여기만 보지만 주님은 저기도 보시고 세상 어느 곳에도 그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이해관계와 우리의 영광만을 구하는 관점에서 보지만 예수님은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구하는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문제는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내게 무엇이 유익한가의 이기주의적인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바로 보지 않고, 삐뚤어지게 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24절의 말씀대로 공의로 판단하시지만 사람들은 외모로 봅니다. 내적인 면을 전혀 보지 못하고, 외면만 보기 때문에 속이고 속습니다.
3. 행복과 성공의 비결인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불행과 실패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살 때에 옵니다. 반대로 행복과 성공의 비결은 영원 속에서 보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때에 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1)하나님의 뜻은 [하라], [하지 말라]는 두 가지 형태로 성경의 율법속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크게는 구약에만도 하나님의 율법이 613가지, 그 중에서 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개, 하라는 말씀이 248개가 있습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십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십계명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바른 관계를 가지는 비결] 입니다. 위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이고, 아래로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로 가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핵심은 관계에 있습니다. 어원적으로 보아도 종교(religion)와 관계(relation)란 말은 같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에서 중요한 것은 위로는 하나님과, 아래로는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때에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까? 그것을 예수님은 마태복음 22:37-40에서 [경천애인]이란 말로 요약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본뜻)이니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사랑하는데서 오고, 사람들, 즉 이웃과의 관계도 내 몸처럼 사랑하는데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요일 4:8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한 것은 바로 기독교의 본질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마태복음 7:12절에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아이삭 왓트는 이 구절을 황금률(the golden rule)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것이 개인은 물론 가정의 행복의 비결이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공의 비결입니다.
황금률과 비교가 되는 것이 소위 은률(Silver Rule)입니다. 은률은 유대교의 힐렐과 유교의 공자의 가르침인데 “네가 싫은 것은 남에게 하지말라”는 것입니다. 은률은 소극적인데 반해서 예수님의 황금률은 적극적이라는 것이 다릅니다.
은률은 소극적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기회주의적인 데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황금률은 이타주의 적입니다.
■ 힐렐이 이 은유를 말한 데는 일화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이방인 한 사람이 내가 외다리로 서 있는 동안에 당신이 유대교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다면 내가 믿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때에 힐렐은 “남이 당신에게 하기를 원치 않는 일을 당신도 남에게 하지 말라. 그것이 율법의 전부요 다른 것은 다 주석일 뿐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다 성공하기를 원하고, 행복하기를 원하는데 그 비결은 바로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성경의 핵심인 사랑입니다. 황금률의 핵심은 자신의 권리주장을 앞세우지 말고, 겸손하게 먼저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화, 분쟁, 정죄 등으로 일그러져가는 사회의 악순환의 고리를 제거하는 비결은 남에게 받고 싶은 것을 내가 먼저 주면 됩니다. 우리나라가 잘 사는 길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교회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없고, 생기가 없고 생명이 없는 것은 배우기는 하는데, 알기는 하는데 실천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알고, 믿고 행하는 것이 바로 황금률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실천은 어디서 시작해야 합니까? 바로 가정입니다. 가정은 부부간이라는 핵 단위에서 시작됩니다. 그 다음에 위로는 부모가 있고, 아래로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단위는 부부간입니다. 그러므로 부부간에 행복하지 못하면 가정의 행복은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부부간의 행복은 결코 일방적이 아니란 것입니다. 아내가 불행하면 남편도 불행하고, 남편이 불행하면 아내도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정의 행복의 핵심은 바로 황금률을 실천 하는가 못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다음이 부모와 자식들과의 관계입니다. 여기에도 황금률을 지킬 수만 있다면 만사가 다 이루어집니다.
과거 우리 부모들이 어린이였을 때에 받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주자는 것입니다.
제가 어린이였을 때에 부모에게서 받고 싶은 열 가지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황금률을 적용한 것이기도 합니다.
(1)친구처럼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는 부모
(2)좋은 추억 만들어주는 부모
(3)함께 여행을 해주는 부모
(4)많은 꿈을 심어주는 부모
(5)책망보다는 칭찬을 통해서 격려해주는 부모
(6)잔소리 안하는 부모
(7)약속을 지키는 부모
(8)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 부모
(9)거짓말 안하는 부모
(10)성경을 가르쳐주고 위해서 기도해주는 부모
맺는 말
오늘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방법을 가정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가정들이 금이 가고, 깨지고, 더러워지고, 그래서 집은 있으나 가정은 없는 그런 사회 속에서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만이라도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런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뜻인 황금률을 개인과 직장과 가정에서 실천하여 빛과 소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은 바로 나의 권리주장만 앞세우지 말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내가 먼저 실천하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믿는 종교입니다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는 종교, 생활하는 종교란 것을 잊지 마시고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참 가정을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