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이름없는 포도주는 전혀 유명하지 않다.
학교에 갈때면 그 포도밭 울타리를 따라 걸어가곤 했다..
그 포도주는 별로 특별한 맛을 지니지도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포도주 맛을 알고, 그 맛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포도 나무들 곁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왔어야 한다.
그리하여 울타리 수와 포도밭 수만큼의 포도주들이 탄생하게 되고,
그 포도주들은 각 술창고의 특별한 맛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포도를 전문적으로 재배하는
드넓은 평야들이
시골 마을의 이름 없는 포도주의 존재를 위협하게 되었다.
포도재배법의 발전으로 포도주의 질을 개선하게 되자,
모든 포도주들이 서로 비슷한 맛을 갖게 되었다.
본래 각 지방의 재래식 포도주들은
시큼한 막포도주로 변해 가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그것은 포도주가 나이를 먹어 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골 농부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괴팍한 성격을 띠어 가는 것과 비슷하다.
마을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시큼한 막포도주를 마지못해
찡그리고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 한다.
시골 주막집이나 노동자들이 자주 가는 식당의 테이블
위에는 반드시 그 마을에서 빚어진 포도주 병들이
세워져 있기 마련이다.
당시 막 식사를 하려는 순간, 옆테이블에 앉은 마을
사람이 당신의 잔을 자기 포도주로 가득 채워 준 다음,
자신의 잔을 채우고 당신과 술잔을 맞부딪치면서
건배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순식간에 친밀함이 생겨날 수 있다...
포도주는 때로 우리의 모든 기능을 약하게 만드는 효과도
지니고 있다..
취기가 살짝 들면 우선 흥분을 일으키게 되고,
그 다음엔 점점 마비 상태에 이르게 된다.
진짜 술꾼은 순식간에 벌컥벌컥 마시는 법이 없다.
조금씩 그 멍한 상태에 빠져드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어느 4월 빛나는 아침.
한 남자가 혼자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있다.
분홍빛 포도주 잔을 앞에 두고서, 그는 아직 포도주 잔에
입도 대지 않은 상태이다.
그가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 것은 단지 청명하고 고요한 하늘과,
그를 반기는 듯한 정다운 거리의 풍경 때문일까?
포도주 잔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에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간에 전혀 아랑곳없이
오직 자신만을 응시해 달라고 속삭인다.
한때는 영광스러운 행복의 시대를 구가했지만 지금은 초라한
모습만 남은 어느 가난한 남프랑스 지방과
그곳의 포도나무를 연결시켜 본다.
당시에 포도재배사람들은
그저 시골 마을에서 겨우 겨우 살아가고 있다.
땅은 온통 포도나무들이 뒤덮고 있었다.
그 곳에서는 강이 흐르는 감동적인 부드러움과
해안지대인 리비에라 지방의 아늑함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곳의 풍경은 유년기나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과
아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곳에서 빚어내는 포도주는
그 지방 특유의 마디 굵은 포도가지에서 느낄 수 있는 투박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 투박함은 어떤 비장감마저 주기도 했다.
포도나무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원가지를 중심으로 저절로 뒤틀리고 서로 얽혀 갔다.
포도원이 함부로 다뤄질 때 포도나무들이 느끼는 분노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포도나무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고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궁핍한 삶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결코 평범치 않은 위엄을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이다..
지하 창고를 정돈하는 것은 미래를 믿기 때문이다.
병 속에 든 포도주가 서서히 익어 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술이 무르익을 시간을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간절히 염원하게 된다.
한창 아름다운 나이의 포도주를 따는 우리들에게는,
이제 막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이 포도주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성급히 술병을 따버리고 마는 약간의 무례함이 있다.
나는 지금 아늑한 아파트, 혹은 소박한 가옥, 그 안에 자리잡은
지나간 시대의 가구들,
소곤거리는 가족이나 친구들의 말소리를
상상해 본다..
따분한 어느 날 오후,
너무 오래 된 것이라 여간해서는 잘 사용하지 않은 낡은 술잔에
무르익은 과일주를 따른다.
시골 여름날 오후의 무기력감을 받아들이는 데
이보다 더 우아한 방법이 어디 있으랴!
만일 인간과 장소와 계절이 섬세하고 은밀하고 감동적으로
조화를 이루었을 때 시정이 태어나는 것이라면,
포도주를 마시는 그 자체가 시적인 행위임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첫댓글 아~!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1권에 나온 내용이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