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경도 - 이순신 장군의 압송
2월 : 왕명을 거부했다는 명목으로 삼도수군통제사직 박탈, 한양으로 압송
"이순신(李舜臣)을 잡아올 때에 선전관(宣傳官)에게 표신(標信)과 밀부(密符)를 주어 보내 잡아오도록 하고, 원균(元均)과 교대한 뒤에 잡아올 것으로 말해 보내라."
『선조실록』 선조 30년 (음력)2월 6일, 정묘 3번째 기사, 명 만력(萬曆) 25년(1597)
4월 1일 : 출옥 후 백의종군 시작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 밖 윤간의 종네 집에 이르니 조카 봉, 분(芬)과 아들 울(蔚)이 윤사행(尹士行), 원경(遠卿)과 더불어 한 대청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 4월 초하루(신유) 맑다. [양력 5월 16일]
4월 13일 : 모친상, 초계 변씨의 작고소식을 접함
새벽꿈이 매우 번거로워 다 말할 수가 없다. 덕(德)이를 불러서 대충 말하고 또 아들 울(蔚)에게 이야기했다. 마음이 몹시 불안하다.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이 무슨 징조인가?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종을 보내어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금부도사는 온양으로 돌아갔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 4월 11일(신미) 맑다. [양력 5월 26일]
일찍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니를 마중가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흥찰방의 집에 잠깐 들러 이야기하는 동안 아들 울(蔚)이 종 애수(愛壽)를 보내면서 "아직 배오는 소식이 없습니다." 고 하였다. 또 들으니, "황천상(黃天祥)이 술병을 들고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왔습니다." 고 한다. 흥찰방과 작별하고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이르렀다. 조금 있으니, 종 순화(順花)가 배에서 와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했다. 곧 갯바위(아산시 염치읍 해암리)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애통함을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에 대강 적는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 4월 13일(계해) 맑다. [양력 5월 28일]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비는 퍼붓고, 나는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울며 곡할 뿐,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 천안군수가 돌아갔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 4월 16일(병자) 궂은 비 오다. [양력 5월 31일]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며 울부짖었다.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 4월 19일(기묘) 맑다. [양력 6월 3일]
7월 16일 : 함량 미달의 후임자가 자신이 수년간 길러온 정예함대를 전멸시킴
새벽에 이덕필(李德弼), 변홍달(卞弘達)이 전하여 말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몰래 기습공격을 받아 통제사 원균(元均),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최호) 및 여러 장수 와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었고, 수군이 대패했습니다." 고 하였다. 듣자하니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조금 있으니, 원수(권율)가 와서 말하길 "일이 이 지경으로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하였다. 사시(오전 10시 경)가 될 때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다가 나는 "제가 직접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보고 듣고난 뒤에 이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말하니, 원수가 기뻐하여 마지 않았다. 나는 송대립(宋大立), 류황(柳滉), 윤선각(尹先覺), 방응원(方應元), 현응진(玄應辰), 임영립(林英立), 이원룡(李元龍), 이희남(李喜男), 홍우공(洪禹功)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이르니 삼가 현감이 새로 부임하여 나를 기다렸다. 한치겸(韓致謙)도 왔다.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 7월 18일(정미) 맑다. [양력 8월 30일]
◆ 이순신 수군 재건로(일자는 음력 기준)
감정을 추스릴 틈도 없이 최소한이라도 전력 재정비를 위해 남해안 일대를 순시하기 시작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충무공전서』 「기복수직교서(起復授職敎書)」
8월 15일, 선전관에게서 선조의 수군을 폐하라는 전교를 받고, 그에 대한 대답
"今臣戰船 尙有十二(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 이진성 작가 『이순신세가』
9월 16일 '명량해전'
: 지금에서야 명량해전이 장쾌한 대승이었다는 역사적 사실로 남았기에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지만 당시에는 단순 전선비교 '조선수군 13척 VS 일본수군 330여 척' 이라는 전력의 절대적 열세는 물론, 명량해협 특유의 거센 물살을 안은 채 일본의 수륙병진을 '반드시' 저지해야만 한다는 전략적 목표 등 상상하기도 힘든 엄청난 중압감을 유발할 요소들을 안고 장군께서는 전투에 임하셔야만 했다.
이 와중 장군께서는 옥고를 치루며 몸이 쇠약해진 상태였었고(난중일기에 기록된 몸살, 토사곽란...), 경상우수사 배설의 탈영 등 지위고하 할 것 없이 진중에서도 전투를 앞두고 불안감이 만연한 상황
또 막상 전투 초반에는 자신의 대장선 빼고 나머지 전선들이 다 꽁무늬를 빼버렸기에 이순신 장군은 상당 시간을 홀로 적군의 포위망 속에서 분투하여야만 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그대로 김안도(金安道)의 집에 머물렀다. 동지 배흥립(裵興立)도 같이 머물렀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 8월 10일(무진) 맑다. [양력 9월 20일]
날이 채 새기 전에 도와리(음식이 체하여 토하고 설사하는 급성 위장병)가 일어나 몹시 앓았다. 몸을 차게 해서 그런가 싶어 소주를 마셨더니 한참동안 인사불성이 되었다. 하마터면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나 하고 밤을 앉아서 새웠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 8월 21일(기묘) 맑다. [양력 10월 1일]
도와리(음식이 체하여 토하고 설사하는 급성 위장병)가 점점 심하여 일어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 8월 22일(경진) 맑다. [양력 10월 2일]
병세가 무척 심해져서 정박하여 배에서 지내기가 불편하므로 배타는 것을 포기하고 바다에서 나와 (뭍에서) 잤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 8월 23일(신사) 맑다. [양력 10월 3일]
"병법에 이르길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하였으며,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족히 천명도 두렵게 한다.' 하였다.
이는 지금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 9월 15일(계묘) 맑다. [양력 10월 25일]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더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더냐? 달아난다 하여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흔히들 단편적으로만 보여지는 이 멘트의 엄청난 여파 때문에 겁쟁이 장수로만 인식하기가 쉽지만
실제로는 명량해전 당시 홀로 싸우는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으로 김응함과 제일 먼저 합류한 용장임)
『난중일기』 정유년(1597) 9월 16일(갑진) 맑다. [양력 10월 26일]
10월 : 셋째 아들 이면이 의병 활동 중 고향 아산에 침입한 일본군과 싸우다 사망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䓲, 둘째 아들)의 편지를 보니, 겉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짐작했다.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한 것인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가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 내 지은 죄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어본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꼬?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 10월 14일(신미) 맑다. [양력 11월 22일]
우수사(김억추)와 미조항 첨사(김응함)를 해남으로 보냈다. 해남 현감도 보냈다. 나는 내일,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지 나흘째가 된다. 마음놓고 통곡할 수도 없으므로, 영 안에 있는 강막지(姜莫只)의 집으로 갔다. 이경(오후 10시 경)에 순천 부사(우치적), 우후 이정충(李廷忠), 금갑도 만호(이정표), 제포 만호(주이수) 등이 해남에서 돌아왔다. 왜놈 열 세명과, 투항했던 송원봉(宋元鳳) 등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왔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 10월 16일(계유) 맑다. [양력 11월 24일]
새벽꿈에 고향집의 종 진(辰)이 내려왔기에 나는 죽은 아들이 생각나서 통곡하였다.
어두울 무렵 코피를 되 남짓이나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어찌 다 말하랴! 이승에서의 영령이라 마침내 불효가 여기까지 이르렀을 줄은 어찌 알랴! 비통한 마음 찢어지는 듯하여 억누를 수가 없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 10월 19일(병자) 맑다. [양력 11월 27일]
- 요약 -
1. 파직 + 압송 + 백의종군 + 모친상 4연타, 심지어 어머니 장례는 제대로 치루지도 못함
2. 칠천량해전으로 박살난 조선수군 재건도 힘든데 각종 병마와 싸움 + 휘하 지휘관 탈영
3. 그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명량해전을 지휘하고 역사에 남을 대승을 거둠
4. 그런데 명량해전이 끝나자 셋째 아들 이면의 전사 소식을 접하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