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옥수수가 익는 저녁/ 임동윤 감자꽃이 시들면서 정수리마다 자글자글 땡볕이 쏟아졌다 장독대가 봉숭아꽃으로 알록달록 손톱물이 들고 마른 꼬투리가 제 몸을 열어 탁 타닥 뒷마당을 흔들 때, 옥수수는 길게 늘어뜨린 턱수염을 하얗게 말리면서 잠자리들은 여름의 끝에서 목말을 탔다 싸리나무 울타리가 조금씩 여위면서 해바라기들이 서쪽으로 깊어지고 있었다 철 이른 고구마가 그늘 쪽으로 키를 늘이면서 작고 여린 몸도 하루가 다르게 튼실해졌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옥수수 줄기처럼 빠르게 말라가던 어머니는 밤마다 옥수수 키만큼의 높이에 가장 외로운 별들을 하나씩 매달기 시작했다 그런 날 나는 하모니카가 불고 싶어졌다 문득, 아버지가 켜든 불빛이 그리워졌다 그 여름이 저물도록 어머니는 가마솥 가득 모락모락 쪄내고 있었다 단맛의, 차진 알갱이들이 노랗게 익을 때까지 - 시집『따뜻한 바깥』(나무아래서, 2011) ............................................................. 지난 주 며칠 조석으로 제법 서늘한 초가을 기운이 돈다 싶어 달력을 봤더니 어제가 처서였다. 처서 지나면 모기 주둥이가 비뚤어진다는 말도 있고, 더위가 한풀 꺾여 선선한 가을을 맞이한다는 절기 아닌가. 얼른 그 한자만을 보면 거처할 '處'에 더울 '暑'인데 더위가 머물러 있다는 뜻이리라. 그래서일까, 어제 이곳 대구의 낮 기온은 35도를 기록하여 폭염주의보가 발령될 만큼 무더워고 오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처서’가 과연 바르게 조합된 낱말일까 싶어 옥편을 찾아 한자의 훈을 확인했더니 處는 '머무르다' 말고도 '돌아가다'란 뜻이 함께 포함되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처서를 기점으로 더위는 처분되고 여름시즌은 종쳤음을 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곡식이 야물어지기 위해서는 ‘정수리마다 자글자글 땡볕이 쏟아져’도 괜찮겠고, ‘옥수수는 길게 늘어뜨린 턱수염을 하얗게 말리’고, ‘잠자리들은 여름의 끝에서 목말을 타’도 좋으리라. 가을의 기운이 왔다고는 하나 햇살은 여전히 왕성해야 하고 날씨는 쾌청이라야 한다. 그렇게 계절의 엄연한 순행으로 지상의 모든 작물이 ‘하루가 다르게 튼실해져’가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부재는 삶의 중심부가 천공된 것과 같아 ‘어머니’와 ‘나’에겐 늘 뻥 뚫린 그리움이었다. 어머니는 ‘밤마다 옥수수 키만큼의 높이에 가장 외로운 별들을 하나씩 매달’았고, ‘나는 하모니카가 불고 싶어졌다’ ‘그 여름이 저물도록’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차진 알갱이들이 노랗게 익을 때까지’ ‘가마솥 가득 모락모락’ ‘찰옥수수’를 쪄내는 일 뿐이었다. ‘따뜻한 바깥’을 향한 그리움의 이미지가 수채화처럼 선연하다. 생각해보면 하나의 옥수수씨가 수많은 옥수수 알갱이로 바뀌는 것이나 이 뜨거운 햇빛으로 옥수수가 자라는 것은 모두 어마어마한 하늘의 섭리와 조화가 깃들어있기 때문이리라. 태양의 기운과 땅의 밀어 올리는 힘과 경작자의 정성이 어우러져서 찰옥수수를 만들어내는 일은 어머니의 찰옥수수 쪄내는 일과도 같다. 태풍이 오면 뽑혀나가고 홍수에 쓰러지기도 가뭄에는 말라비틀어지기도 하지만 푹푹 찌는 뜨거운 날들의 지속된 힘으로 옥수수는 자라는 것이리라. 저렇게 자라고 다시 순환하는 것이야말로 경이로운 자연의 힘이 아니고 무엇이랴. 섬세한 시인의 눈으로 펼쳐 보여주는 저 풍경들 모두 신성한 신의 조화이리라. 처서 무렵에 머문 이 맑고 뜨거운 햇볕으로 나락도 입을 벌려 꽃을 피운다. 호박이며 고추며 사과며 어느 것 하나 여물지 않은 것 없네. 깊어진 그리움이 ‘반투명의 그늘’로 길게 드리우는데 처서 지나도록 함께 여물지 못하는 나만 머쓱해지네. 권순진 |
출처: 詩하늘 통신 원문보기 글쓴이: 제4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