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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고봉산(高峰山)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에 있는 산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과 성석동에 걸쳐져 있다. 고도는 203m로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닌데, 그나마도 산 정상은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묶여있고 군사적 목적의 철탑 설치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중요한 점, 이 고봉산은 사유지다. 소유자는 필지별로 전부 다르다. 참고로 고양시의 고가 고봉산에서 온 것이다. 고양시의 상징과도 같은 산이 사유지인것이다. 백두산이나 한강이 사유지라 생각해 보라!
국토교통부의 스마트국토정보 서비스를 통해 보면 고봉산의 번지 수는 크게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 산60-5번지,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산67-1번지,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산56-1번지,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 산60-1번지 네개가 있다. 영천사와 고봉산 헬기장이 있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 산60-5번지(중산마을 11단지 뒤편 쪽)는 1982년 한국금융연수원이 매입했다가 연수원 건립 계획이 신통치 않았는지 국민은행에 1985년 매각하여 2022년 현재까지 국민은행 소유로 돼 있다. 영천사를 지나 중산마을 5단지로 이어지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 산60-1번지는 같이 국민은행 소유였다가 2022년까지 주기적으로 경매를 통해 소유권이 개인들 사이에서 이전되고 있다. 농업이 가능한 임야로 돼 있어서 중산마을 5단지 입구에 일부 농사를 짓는 바로 그 곳이다. 고봉산의 진짜 정상인 고봉산 전파방해 철탑이 있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산67-1번지는 1946년 개인이 사들였다가 해당 개인이 사망하고 1999년 풍산홍씨소산공파종중이 매입한 것으로 돼 있다. 만경사가 있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산56-1번지는 1941년 풍산홍씨랑장공파종중이 사들였다가 1984년 풍산홍씨모당공파종중을 거쳐서 1992년 풍산홍씨모당공파종회가 사들였다. 즉 고봉산의 성석동 부분은 풍산 홍씨 일가 소유이다. 풍산 홍씨로 유명한 사람은 정조 때의 권신인 홍국영이고, 2022년 현재 풍산 홍씨로 유명한 인물은 야구선수 홍상삼과 가수 홍진영이다.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수용이 된 부분(정상과 인근구역) 만 국유지고 나머지 모든 시설은 사유지라서 고양시나 일산동구가 고봉산 관련 행정처리 할 때 애로사항이 있다고 한다. 곳곳에 사유지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고, 사유지라서 동네 야산인데도 행위제한이 의외로 많다.
지리적으로도 꽤 중요한 산이다. 고봉산은 탄현동 일대 황룡산과 더불어서 외따로 존재하는 산으로, 북한산에서 이어지는 산맥인지 아닌지 논쟁이 매우 치열한 산이기 때문이다. 북한산은 화강암 기반인 석산인데 고봉산과 황룡산은 사암 기반의 토산이라 지반 구조 자체가 다르다. 사암 기반인 구조 덕분에 등산화 없이 심지어 슬리퍼만 신고도 등산이 가능할 정도라는 건 장점. 이때문에 아직까지도 고봉산-북한산 간 연관성은 논란거리다. 북한산 서-북-동쪽에 있는 산들은 북한산과 유사하게 거의 대부분이 화강암 기반 석산인데, 저 대부분에 속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예외 케이스(토산)가 바로 고봉산이다. 향토 지질학계에서 가끔씩 고봉산 일대를 점검하며 지반 연구를 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 때문이다. 주로 매년 여름철에 하는 듯.
곡릉천이라는 하천이 고봉산 철탑에서 발원하고 있다. 곡릉천은 고봉동 중 성석동 ~ 설문동 일대를 거쳐서 운정호수공원으로 들어간 이후 파주출판도시를 거쳐서 한강에 합류한다. 특이한 점은 곡릉천 바로 3km 위에 공릉천이라는 하천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다. 유사한 명칭을 가지고 있는 하천이나 공릉천은 북한산에서 발원하는 하천이다. 공릉천이나 곡릉천이나 둘 다 건천인 것은 똑같지만 말이다. 고양시에 있는 산인데 정작 수계가 파주시로 이어진다는 점이 특기할 부분이다.
고구려 안장왕 시절 미녀 한씨가 달을성현(達乙省縣)에 있는 봉우리 정상에서 봉화를 올려 안장왕을 맞이했다고 하여 고봉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곧 고봉산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고양시의 야산이라 중산, 탄현, 일산, 풍동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매일 아침 저녁마다 고봉산 등산을 하다 보니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특히 1월 1일 아침에는 새해 첫 해를 보려는 사람들로 인해 그야말로 헬게이트. 정상은 군사시설보호구역이라 민간인 출입이 불가능한 관계로 정상인근의 간이 헬기장에서 이루어진다. 원래 유인 군부대였으나 2010년대에는 무인화가 된 거 같다. 물론 출입 엄금. 그래서 곳곳에 참호가 파여있고, 이 참호들은 간간히 관리가 되는 듯. 몇 년 마다 한번씩 시설이 최신화된다. 일산쪽에 소속된 향토예비군들이 훈련 때마다 종종 고봉산 일대 경계루트와 시설들을 순회하기도 한다.
산 높이는 안 높지만 산세는 의외로 험해서, 중산마을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안곡습지공원 → 영천사 → 중산마을5단지 루트는 쉬운 편이나 성석동/사리현동 방향으로 나가는 수연약수터 → 장사바위 → 진밭 루트로 가면 이게 동네 야산인가 싶을 정도로 세가 험하다. 야밤에는 산행에 주의를 기울일 것. 진밭 쪽으로 가다가 보면 제9보병사단 신병교육대와 몇몇 군부대가 몰려있는(하나는 제1포병여단 소속) 샛길로 나가는 길도 따로 있다. 하여간 장사바위에서 진밭쪽으로 가거나 수연약수터 → 성석동 현대자동차 정비소로 가는 길은 이게 흔히 알던 고봉산 맞나 싶을 정도로 길 잃기 딱 좋다. 바위도 많고 중간중간 군사지역 표지가 붙어있다.
만약 고봉산 등산 중 길을 잃었는데 주변 군부대 쪽으로 간 경우 군인한테 상황을 말하고 부대장이나 당직사령의 조치를 받자. 괜히 우물쭈물하다가 거수자 돼서 부대 군인들 고생시키거나 지역 신문 사회면에 나오지 말고 군부대 근처에서 길을 잃었을 경우 군부대에서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소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준다.
고양시의 '고'자가 이 '고봉산'의 앞글자 '고'를(정확히는 이 '고봉산'에서 명칭을 딴 과거 조선시대의 '고봉현'의 '고')를 딴것이며, 고양시내의 여러 "고봉"지명의 근원이 되는 산이기도 한다. (예 - 일산동구 고봉동, 고봉초등학교, 고봉로(도로))
고양시뿐만 아니라 일산의 어원이 된 산이기도 하다. 당시 일산역 부근에 있었던 한뫼마을을 한자로 풀이하면 일산(一山)이 되는데, 당시 중면(일산의 옛 명칭)에 있던 산이라고는 고봉산 하나뿐이라고 해서 일산이 되었다고 한다. 정발산이 일산의 어원이 아니냐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일산신도시 한복판에 있는 정발산은 보면 알겠지만 '저게 왜 산이야?'라고 할 만큼 높이가 매우 낮다. 해발 88m. 서울의 이름없는 흔한 언덕들이 오히려 해발고도가 더 높다(!). 산이라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기에 이름만 산이지 전통적으로 일산에서도 산 취급 안 했다. 그리고 일산의 중심지였던 구일산 일대는 고봉산과 가깝지 정발산하고는 상당히 떨어져 있다.
정작 또 법곳동의 이산포라는 지명은 두 개의 산이 보이는 포구라서 이산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고봉산은 확실하나 다른 하나가 뭔 산인지는 현재 아무도 모른다. 이산포라는 지명은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등장하기때문에 어원이 알려질 법 한데도 불구하고 어원이 불명이다. 구 송포면과 법곳동의 위치를 보면 옆동네 파주의 심학산일 수도 있다.
고봉산 정상인근의 헬기장에는 고양시에서 소유하고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고양시 지부에서 관리하는 아마추어 무선국이 위치하고 있다. 소형 콘테이너 박스에 시설물이 들어가 있으며 안내판이 붙여 있다.
여담이지만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이 일산 지역에 있는 유일한 산이기 때문에 일산 지역의 거의 대부분 학교 교가에 고봉산이 들어간다.
한북정맥의 한 구간이다.
고봉산 주변 주요 명소
* 고봉산 철탑 (민간인 출입불가)
이 시설물은 원래 대남방송에 방해전파를 쏘기 위해 세워진 시설이었다. 그러다 2000년대에 들어 대남방송이 중단되자 이 시설물도 무용지물이 되었는데 아직도 있는 것을 보면 어떻게 관리는 되고 있는 듯. 현재도 송출 중인 것으로 보인다. AM 라디오를 돌리다 보면 귀신소리마냥 기괴한 소리가 잡힌다. 이 고봉산 철탑 때문에 고양시민 중 아마추어 무선 하는 사람들의 주적취급을 받고 있다. 고양시 전체에 방해전파가 뿌려져 Bandwith(대역폭)를 심각하게 제약받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무선 하는 사람들을 위한 방송 설비를 따로 설치해야 할 정도로 대역폭이 부족한 것이다. 물론 고양시민들도 고봉산 철탑을 없애라며 물리쳐야 할 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제9보병사단 or 제30기계화보병사단 소속 병사들이 체크하러 일년에 두번씩 가는데 은근히 귀찮다.
l 안곡 습지공원
l KB국민은행연수원 (일반인 출입불가)
l 장희빈 가족묘 (고봉산 헬기장에서 만경사 방면)
l 영천사
l 만경사
고려 공양왕고릉(高麗 恭讓王高陵)
문화재 지정 : 사적 제191호
건립시기 : 조선시대 초기
면적 : 12,893㎡
소재지 : 덕양구 호국로1121번길 95-61 (원당동)
요약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고려후기 제34대 공양왕과 순비 노씨의 능. 사적.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0년 2월 28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무덤 양식은 쌍릉 형식이며 무덤 앞에는 비석과 상석(床石)이 각각 하나씩 있고, 두 무덤 사이에 석등(石燈)과 석호(石虎) 그리고 무덤 양쪽에는 문신과 무신 상이 세워져 있다. 석호는 고려의 전통적인 양식을 띠고 있지만, 조선 초기 태조의 건원릉(健元陵)과 태종의 헌릉(獻陵) 무덤 양식과 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등은 전체적으로 왜소하고, 하대받침 위에 4각의 간석(竿石), 8각의 화사석(火舍石) 그리고 8각의 옥개석(屋蓋石)으로 되어 있으며 화창(火窓)은 2개이다. 또한 능 양쪽에 배치되어 있는 석인은 모두 1m 정도인데, 능에 가까운 것은 보다 작고 손에는 아무 것도 쥐지 않고 두 손을 마주잡고 있는 형태이며, 그 옆의 것은 키가 약간 크고 손에는 홀(笏)을 쥐고 서 있다. 비석은 처음부터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라는 글씨가 있는 묘표석(墓表石)은 조선시대 고종 때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공양왕릉은 이곳뿐만 아니라 그의 유배지이며 사사지(賜死地)였던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도 있는데, 한 사람의 무덤이 두 곳에 존재하는 것은 고려 왕실의 마지막을 상징해주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이 삼척공양왕릉(三陟恭讓王陵)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1995년 9월 18일에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앞서 경기도 고양시의 공양왕릉은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강원도 삼척시의 공양왕릉은 민간에 오랫동안 구전되었던 것이다. 현재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된 삼척공양왕릉은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그 옆에는 왕자 나머지는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무덤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공양왕은 이성계 등에 의해서 즉위한 이름뿐인 왕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 원주로 추방 되었다가 태조 3년(1394)에 삼척부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태종 16년(1416)에 공양왕으로 봉하고 고양현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왕과 함께 묻힌 왕비는 노신의 딸로 숙녕·정신·경화 세 공주와 창성군을 낳았으나 고려가 멸망한 후 왕과 함께 폐위되었다.
[東語西話] 왕은 한 명인데 왕릉은 두 곳이니
원철·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조선일보 기사 입력일 : 2022.08.12.
종합검진 때문에 두 끼를 굶었다. 일산 동국대 병원의 행정동 이름은 식사동이다. 칠백여 년 전 ‘식사’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한 끼가 간절했던 곳이다. 왜냐하면 왕족도 끼니를 걱정했던 장소인 까닭이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등극(1389년)하고 또 퇴위(1392년)당했다. 그 와중에 잠시 피신까지 하던 시절 그에게 하루 세끼 밥을 제공한 곳은 인근 사찰이다. 그래서 ‘밥절’ 즉 식사(食寺)가 되었다. 절은 이야기만 남긴 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연의 주인공은 인근에 무덤을 남겼다. 삼복 더위가 주춤할 때 왕릉을 찾았다. 새 왕조 조선이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면서 고려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태종 이방원은 1416년 공양왕(恭讓王·왕위를 공손하게 양보한 왕)이란 이름으로 능을 다시 정비했다.
그 사이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유배지를 강원도 원주와 간성을 거쳐 삼척으로 옮겨야 했고 왕위에서 물러난 지 3년 만에 마침내 삼척 근덕면 궁촌(宮村)에서 1394년 생애를 인위적으로 마감해야 했다. 이를 애달피 여긴 주민들의 노력으로 숨겨둔 묫자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늘에 이르렀다. 배롱나무 꽃이 일렬로 줄지어 흐드러지게 핀 끝자리에 안장된 무덤은 총 4기였다. 두 왕자를 포함하여 타고 왔던 말(혹은 시녀 무덤)까지 함께 묻힌 곳이라고 한다. 지역사회 안내문에는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공양왕릉의 존재를 언급하면서도 문헌 기록이 부족하여 어느 쪽이 진짜 왕릉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수도권 왕릉이 진짜인지 의심하는 눈초리를 지금까지도 거두지 않고 있다.
만약 이장했다면 매장 후 12년 뒤 일이다. 설사 이장했다고 할지라도 원래 무덤 자리는 지역민에게 의미 있는 가치가 그대로 부여된다. 왜냐하면 왕릉의 존재는 처음과 다름없이 그대로 같은 정서로 남기 때문이다. 1837년 삼척부사 이규헌(李奎憲)이 봉토를 새로 조성했고(허목 ‘척주지’), 일제강점기인 1942년 김기덕(金基悳) 근덕면장은 고려왕릉봉찬회를 구성하여 매년 제향을 올렸으며, 1977년 최문각 근덕면장은 군수의 지시로 묘역을 재단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한 인물에 두 무덤은 전쟁 와중에 더러 있는 일이다. 소설 삼국지의 관운장도 묘가 두 곳이다. 하남성 낙양의 관림(關林·머리 무덤)과 호북성 담양의 관릉(關陵·몸 무덤)이 그것이다. 고려 개국 공신인 신숭겸(申崇謙·?~927) 장군의 무덤도 복수다. 춘천 서면의 공식 몸 무덤과 비공식적인 전남 곡성의 머리 무덤 두 곳이 전해온다. 말이 머리를 물고서 고향 땅으로 가져온 것을 태안사 스님네가 거두어 모셨다고 한다.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공양왕과 같은 시대를 산 함허득통(涵虛得通·1376~1443) 선사의 부도(무덤 격)는 정수사(강화) 현등사(가평) 봉암사(문경) 등 3곳에 전해온다. 무학 대사의 제자이며 절집 안에서 교과서급 사랑을 받고 있는 ’금강경오가해’를 편집한 공덕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두 무덤도 자연스럽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세 무덤도 경우에 따라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관(官)은 관대로 공식 역할이 있고 백성은 백성대로 민심이라는 것이 있다. 또 절집은 절집대로 그 몫이 있기 마련이다. 어쨌거나 공식 기록과 구전을 아우른다면 보이지 않는 사연까지 살필 기회가 된다.
아, 비운의 공양왕이여…
경향신문 기사 입력일 : 2003.07.16.
박상진 경북대 교수 공감
=[나무이야기](11)‘고려의 최후’ 지켜본 음나무=
동해안을 남북으로 이어주는 7번 국도는 어디에 멈춰서도 절경이다. 짙푸른 동해바다의 수평선에 걸쳐진 구름 한 조각을 아련하게 바라보면서, 부딪치는 파도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번뇌를 모두 잊게 한다. 삼척에서 출발하여 조금 내려가면 금세 해수욕장으로 알려진 궁촌 마을을 만난다. 혹시 가난이 일상이던 시절의 궁촌(窮村)을 상상하였다면 착각이다. 임금이 살던 곳을 뜻하는 궁촌(宮村)이란 마을이다. 이어서 공양왕릉 입구라는 팻말을 보고 나서야 역사의 현장임을 눈치챌 수 있다. 이곳은 비극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궁촌 마을의 서쪽 끝 작은 개울가에는 높이가 20m에 나무 둘레가 5.4m나 되는 음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다. 나이는 700년에서 길게는 1,000년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 음나무 중에는 가장 큰 ‘왕음나무’다. 이 나무에는 공양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죽음 맞기 전에 머물던 곳’ 전설 전해져-
그 당시를 되돌아보면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1392년, 왕위에 오른 지 불과 2년8개월 만에 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밀려난다. 처음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강원도 간성으로 쫓겨가고, 다시 삼척으로 옮겨져서 추방된 지 2년이 채 안되어 왕비와 두 아들과 함께 목이 졸려 죽는다. 그를 죽인 이성계의 변명은 조선왕조실록에 이렇게 실려 있다.
“여러 신하들이 당신을 죽이라고 청하길 12번이나 하였으나 내가 여러 날 동안 버티었소. 이제는 마지못하여 억지로 따르게 되었으니 이 사실을 잘 알아주시오”
이성계가 보낸 저승사자 앞에 무릎을 꿇은 치욕의 장소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지금 천연기념물 음나무가 있는 곳이 공양왕이 잠시 머문 집의 마당이라는 전설이 있다. 공양왕이 간성에 있다가 1394년 3월14일 삼척으로 옮겼는데, 그 장소가 바로 지금의 궁촌 마을로 짐작된다. 죽음의 그림자가 시시각각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던 그는 궁촌리에 오면서 더욱 다급해졌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절박한 심정으로 커다란 음나무가 있는 집을 찾았을 것이다. 음나무는 아주 옛날부터 귀신을 쫓고 불행을 몰아내는 벽사(●邪)의 의미가 있다고 알려져 있어서다. 마지막 삶의 희망을 오직 이 나무에 걸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이곳에서 한달남짓 살다가 4월17일, 음나무의 효험은 보지도 못하고 474년 34대를 이어오던 고려왕조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실록에 ‘교살(絞殺)시켰다’하였으니 전설이 사실이라면 당시에도 커다랗게 자랐을 이 음나무에 목매달려 죽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비극의 현장을 외면하였던 마을 사람들은 사자가 떠나자 팽개쳐진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지내려 하였다. 그러나 상여꾼들은 얼마를 가지 못하고 발이 땅에 붙어버려 꼼짝 못하였다한다.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산소를 만든 곳이 지금의 공양왕릉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공양왕릉은 경기도 고양시에도 또 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논란이 있으나, 정황으로 보아서는 궁촌리가 진짜일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어쨌든 이곳은 거대한 음나무와 궁촌리라는 마을 이름과 공양왕릉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지나온 역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임에는 틀림없다.
-‘슬픈 인연’ 잊은채 성황당 나무로 보호받아-
나무의 둘레에는 아담한 돌담을 쌓았고 앞에는 대문까지 달아 두었다. 담 밖에는 향나무와 소나무 한 그루가 음나무를 호위하듯이 모여 작은 숲을 이룬다. 오랫동안 성황당을 에워싸는 나무로 보호받아온 것이다. 매년 음력 정월과 단오에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며 집안에 어려움이 있으면 나무에 금줄을 치고 치성을 드리는 나무일 따름이다. 600년 세월은 공양왕의 통한을 완전히 묻어버리고도 남는다. 이제는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흔적은 바람결에 스쳐갈 따름이다. 공양왕과의 슬픈 인연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혼자만 싱싱하게 살아가고 있는 음나무의 모습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는 듯하다.
■문화재이름 : 삼척 근덕면의 음나무
■천연기념물 363호 1989년 9월16일 지정
■강원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452
고양시 [고봉산&공양왕릉]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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