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일산의 안토니 본사 1층 공장에서 김원길 대표가 붉은색 구두가 가득 깔린 공장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충남 서산의 한 작은 구둣방에서 시작된 그의‘구두장이’인생은 30여년 만에 꽃을 피웠다. 그가 얼마 전 쓴 책 제목 그대로 붉게‘불타는’구두 수십 켤레가 그를 향해 달려드는 듯한 모습이다. 동영상 보기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국내3위 제화업체 '안토니' 김원길 대표
"직원들 스트레스 줄일수 있다면…" 스포츠카ㆍ모터보트 타게 해
그는 구두장이다. 중학교 졸업 후 구두를 만들었다. 17세부터 24세 때까지 죽어라 하고 구두만 만졌다. 그의 '구두인생'은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던 충남 서산의 작은 제화점에서 시작됐다. 친구들이 아침마다 학교에 갈 때 그는 좁고 먼지 쌓인 구두공방으로 향했다.
제화(製靴)업체 '안토니'의 김원길(50) 대표는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구두 '기능공' 출신 구두회사 CEO다. 기능공에서 출발한 그는 30세에 작은 구두 부속 회사를 세워 20년이 지난 지금은 주요 백화점마다 빠지지 않고 입점한 국내 3위의 구두 브랜드로 키워냈다. 그가 만드는 '안토니' 구두와 국내 라이선스를 가진 이탈리아 브랜드 '바이네르'는 발 편한 구두의 대명사로 통한다.
김 대표의 오른쪽 무릎에는 지금도 작은 흉터가 남아 있다. 젊은 시절 칼로 구두 창을 깎다가 빗나간 칼날에 베어 생긴 상처다. 70~80년대 영등포와 인천에서 구두를 만들면서 그는 홀로 꿈을 키웠다. '현장'에서 품질관리·영업·기획·개발 등 구두 생산·판매의 전 과정을 배웠다. 시골과 도시 변두리 제화점의 좁고 냄새 나는 골방, 영등포 골목길의 다닥다닥 붙은 구두 하도급업체 작업실, 인천의 대형 제화업체 공장이 그의 학교이고, 놀이터고, 집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어렴풋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 무엇인지, 삶의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 할 것인지가 보였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는 국내의 구두 기능인들에게 우상이고 자랑거리가 됐다. 더 이상 직접 구두를 만들진 않지만, 아침 출근길에는 꼭 공장부터 들른다. 경기도 일산에 있는 안토니의 본사 겸 공장을 찾아가 요즘 그가 주목받는 이유를 들어봤다.
◆소년 앞에 놓인 인생이라는 '사다리'
―17세부터 구두를 만들었는데, 혹시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않고 가출했던 것인가.
"충남 당진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한테 고등학교 보내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더라. 중학교 졸업하고 1년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어떤 일 할까 고민했는데 신통치 않았다. 서산의 작은아버지가 구두 기술 배우면 먹고살 만하니까 배워라 해서 6개월 일하기로 하고 시작한 거다."
―그 6개월로 인해 구두가 당신의 천직이 된 것인가.
"초등학교 때부터 삼촌이 구두 만드는 것을 자주 보고 자랐다. 요즘 가끔씩 가업(家業)의 전통을 잇는 이탈리아의 장인들도 어릴 때의 나처럼 그 업(業)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치는 것인가 생각해본다. 지금 작은아버지는 우리 회사의 A/S 전담 엔지니어로 계신다."
―성공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나.
"시골 구둣방으로는 성에 안 찼다. 기왕 시작한 일, 18세 때 구두 기술 제대로 배우겠다고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영등포 역에 내려 구둣방마다 머리 들이밀고 기술 가르쳐달라고 찾아다닌 것을 생각하면, 그때 내가 참 기특하다. 여름철 일감이 없을 때면 휴가지인 강원도 속초에 가서 아르바이트했다. 서울에 처음 월세방 얻을 돈도 그렇게 만들었다."
―친구들과 다른 길을 걷게 된 소년의 머릿속은 어땠을까, 궁금하다.
"다른 아이들 사춘기에 빠져 있을 때 나는 '내 인생은 어떻게 되나' 고민했다. 기술 견습의 마무리 단계에서 정식 기술자로 막 넘어갈 단계였는데, '인생이 뭔가' 주위에 묻고 다녔다. 결국 돌아온 것은 '구두나 잘 만들어, 이 새끼…, 뭐 인생?' 이런 말이었다. 다른 10대처럼 방황 같은 것은 꿈도 못 꿨다. 그때 내 눈앞에 그려진 것이 사다리의 이미지였다. '아, 내 앞에 놓인 사다리를 오르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나는 사다리를 오르는 것이다'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사춘기는 결국 마흔 넘어 찾아와서 뒤늦게 방황을 했던 것 같기는 하다(웃음)."
―지금 그 사다리는 얼마나 올라왔나.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내 앞에는 구두라는 사다리가 있을 것이고, 의사들은 의학의 사다리, 학자들은 학문의 사다리를 오르고 있겠지 생각한다."
◆하루 스무 켤레로 만족 못하는 청년
―전문 구두 기능인, 장인의 길을 갈 생각은 없었나. 구두 명인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더 많은 구두를 만들고 싶었다. 내가 직접 만들면 하루 20켤레 만드는 게 끝이다. 기술자로 남아선 구두 산업 전체를 볼 수 없겠구나 생각했다. 나는 하루 1만 켤레 만드는 장인이 되고 싶었다. 마침 케리부룩이라는 회사에 다니던 시절 기능공 생활을 접고 품질 관리 파트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기능공 월급이 120만원이었는데 품질관리 파트로 옮기니 25만원으로 월급이 깎였다. 그래도 하루 1만 켤레를 만질 수 있게 됐다."
―기능공 출신이 품질 관리를 했으니 힘들었겠다.
"기능공들과 마찰이 잦았다. 내가 버티고 앉아서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으면 출고 안 된다고 계속 '노'(NO)를 하니까, 기술자들이 파업 직전까지 갔다. 6개월 만에 똘똘 뭉쳐 나를 내보내지 않으면 그만두겠다고까지 했는데 사장님은 나를 선택했다. 내 성실함을, 기능인으로서의 눈을 믿어준 것이다. 나는 지금도 순식간에 1000켤레 정도 불량 잡아내는 데는 자신이 있다."
―실제 구두를 잘 만들었나.
"내 실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제일 큰 회사인 케리부룩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절, 우리 회사에서 전국 기능인대회에 나가기로 돼 있던 사람이 회사에서 요구하는 '금메달'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사라져 버렸다. 그때 '내가 나가겠다'고 손들고 나섰다. 나는 숙녀화 전문이었고, 경쟁분야는 신사화였는데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대신 나갈 사람도 없었다. 결과는 동메달이었다. 내 실력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게 너무 분했다. 구두 기술 배운지 몇 년 되지도 않아서 국내 최고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원래 좀 무모한 편인가.
"회사 생활은 90%가 자신감이다. 내가 영업직을 맡게 된 것도 어느 날 인천의 한 백화점에서 우리 회사(케리부룩) 매출 실적이 낮아 매장이 철수하게 됐다는 소식에 열받아서 달려가 난동을 피우다가, 백화점 사람들한테 '한 달에 1억원어치 팔아 보이겠다'는 약속을 해버리면서부터다. 그런데 실제로 한 달 만에 나는 1억1000만원어치를 팔아 치웠다. 그렇게 백화점 영업과 인연을 맺었다. 사실, 회사 근처 공단에서 염가 세일할 때도 손님 불러모아 물건 파는 것은 내가 재주가 있었다. 그런데 사람 넘치는 백화점에서 그것도 못할까. 처음부터 안 되겠다고 포기하는 사람만큼 바보도 없다. 도전해서 성공하면 조금 배우는 것이고, 실패하면 많이 배우는 것 아닌가."
그는 1990년에 독립해 직접 회사를 세운다. 내로라하는 국내의 제화업체들이 휘청거리던 90년대 후반 경제 위기에서 그도 자유롭지 못했다. 백화점에서 구두 잘 팔던 시절, 그는 몸담았던 케리부룩의 백화점 판권을 따서 한때 성공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그 회사가 부도나면서 궁지에 몰렸다. 케리부룩이 몇천 원에 뿌린 상품권 수만장이 백화점에 몰리면서 그는 사실상 '종이'를 받고 물건을 내줘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결국 접어야 했다. 이때 그가 붙잡은 것이 바이네르라는 이탈리아 브랜드였다.
◆내 브랜드를 갖고 싶다
―케리부룩이라는 회사에 기능공으로 들어가 관리직을 거쳐 백화점 영업까지 맡게 됐다면 꽤 잘나갔는데, 왜 그만두고 나왔나.
"내가 실적이 점점 좋아지니까 회사에서 '김원길이 구두 판 돈을 따로 챙겼다' '부자 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회사에서 그 일로 정식 조사까지 시작하자, '나를 믿어주지 못하는 회사 다닐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 길로 사직서를 내고 나왔다."
―그래서 바로 구두 회사를 차렸나.
"처음에는 작은 구두 부속 회사를 차렸다. 그런데 영세한 업체들을 상대하다 보니 수금도 안 되고 힘들었다. 1년쯤 지나 내가 떠난 이후 케리부룩의 백화점 영업이 힘들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 찾아가 케리부룩의 백화점 영업을 내가 도맡아서 하게 됐다. 아예 판매법인까지 만들어서 한 2~3년 물건 잘 팔았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은 언제였나.
"그러다가 내가 '팔 구두'가 없는 시절을 맞게 된다. 전국 각지에 매장과 판을 벌여 놓고, 케리부룩에 로열티를 주고 영업했던 시절인데 케리부룩이 부도나고 자금 회수 못 하고 다른 브랜드로 넘어가면서 3~4년 힘들었다. 그때 마포대교에서 차를 몰고 한강으로 뛰어들어버릴까 생각했었다. 내 브랜드가 절실했다."
―이탈리아 브랜드 바이네르와 인연은 그때 시작됐던 것인가.
"미친 듯이 해외를 돌아다니며 업체를 물색했다. 그때 눈에 띈 것이 '컴포트(comfort) 슈즈'를 내건 이탈리아의 바이네르 브랜드였다. 오래된 이탈리아 브랜드인데 그 기술을 물려받은 노인이 같은 구두공 출신인 나를 알아봤던 것 같다."
―안토니와 바이네르만의 '편한 구두' 노하우가 있나.
"우리 구두는 당일 사서 신고 해외출장 가도 고생 안 하는 신발이다. 경쟁 상대들 따라오지만 우리 회사 경쟁력이 가장 높다고 자부한다. 사장인 내가 기능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수십개나 되는 발뼈의 힘을 분산시켜 받쳐주는 섬세한 '라스트'를 만드는 기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 신발은 신어도 굳은살이 박이지 않는다."
―노하우는 뭔가, 비법이 있다는 것인가.
"기술보다는 결국 리더십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직원의 컨디션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나 역시 누가 시켜서 일을 해본 적이 없는 것처럼 직원들이 좋은 컨디션일 때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직원들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하는 것은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직원들이 행복할 때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온다. 그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직원들의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얼 하나.
"사람들 마음을 잡으려면 뭔가를 줘야 한다. 똑똑한 사람, 배운 사람을 내 옆에 두려면 내가 줄 게 있어야 한다. 직원용으로 벤츠 스포츠카, 말 두 마리, 모터보트 등을 구입해서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내가 하는 일은 '스트레스 다이어트'를 해주는 것이다. 돈이 많이 들지도 않는다. 모터보트 유지비로 한 달에 200만원 써서 직원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수백 배를 버는 것 아닌가."
―왜 컴포트 슈즈로 방향을 잡았나.
"구두는 결국 두 가지다. 시각과 마음. 나는 마음 쪽을 택했다. 마음 편한 구두가 더 좋지 않은가. '신으면 편한 구두'로 방향을 잡았다. 일단 마음을 얻으면서 눈까지 얻는 쪽으로 계속 가고 있다."
―이탈리아와 우리가 다른 게 무언가.
"우리나라 구두산업이 사양산업으로 주저앉은 것은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기능공 출신이기 때문에 기능공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안다. 우리 회사는 1년에 한 번씩 기술자들 모아서 기능인의 밤을 열고 있는데, 가능하다면 한국의 구두 기술자 다 모아서 '우리는 자랑스러운 예술가다' 그런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 싶다. 그동안 잘 나가는 회사들이 기능인들을 이용해서 돈만 벌 줄 알았지 소중한 줄 몰랐다. 회사를 돈 벌게 해주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더불어 살아야 미래가 있는 것이다."
―구두 기술자가 예술가인가.
"옛날에는 먹고 살 게 없어서 구두 기술 배웠지만, 앞으로 잘살수록 좋은 구두 신고 싶어한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된다는데, 실제로 기술자들이 예술가로 대접받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사람들의 발을 편하고 예쁘게 만드는 예술가들…. 이 사람들이 대우받게 될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성공은 뭔가.
"옛날에는 돈 많이 벌면 성공한 것이었다. 지금은 많이 먹으면 병나는 시대다. 돈 벌면 성공하는 시대가 아니다. 남을 이기는 것이 성공도 아니다. 우리가 존경받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성공이다. 경쟁사도 잡아야 하고, 하도급업체도 죽여놔야 되는 사회는 아니다."
김 대표의 휴대전화에는 매일 아침 전국의 매장 직원들이 보내는 문자 메시지가 끊이지 않는다. 그가 보여준 휴대전화 메시지함에는 직원들이 보내온 그날의 각오를 담은 문자가 가득했다. 하루에 100통 넘는 문자를 받는 날도 있다고 했다. 그를 만난 날도 '오늘 하루 열정을 가지고 즐겁게 하루를 시작합니다'(롯데 광복점 김○○) '매장 홍보물을 적극 활용해서 브랜드 홍보에 힘쓰겠다'(천안점 이○○) 등의 메시지가 가득했다.
―직원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까?
"실적이 좋으면 안 시킨다. 각 백화점에서 다른 브랜드와 경쟁해 3등 바깥으로 밀리면 문자를 보내게 한다. 매장 직원들이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보낸다. 최소한 사장한테 문자 보내면 뭔가 한 가지라도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내 경험으로 6개월 지나면 다 달라진다. 유능해진다. 문자를 주고받다 보면 경영이 단순한 관리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소통이다. 관심을 가지면 사람이 바뀐다. 옛날에는 내가 앞에서 끌고 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된다."
―매장 직원들이 사장 휴대폰 번호를 모두 알아도 상관없나.
"괜찮다. 나도 마찬가지로 각 매장에서 보유한 고객들 휴대폰 번호 필요할 때 요청한다. 중요한 일 있을 때 고객 45만명에게 동시에 문자를 보낼 수 있다. 이것도 큰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문자를 다 확인할 수 있나.
"나만 받는 것은 아니다. 영업이사도 함께 받는다. 나 역시 직원들한테 답장을 쓴다. 오늘은 '가을을 멋지게 준비하는 우리 가족들 덕분에 나는 행복합니다. 때문에보다는 덕분에라는 말을 많이 씁시다. 덕분에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행복할 가능성이 훨씬 많습니다' 이런 답장을 보냈다."
◆내 꿈은 구두 세계 명품 브랜드
―이탈리아의 바이네르에서 기술을 배운 것인가.
"오늘 처음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이탈리아 바이네르 브랜드를 인수하기 직전 단계에 있다. 며칠 뒤 바이네르 브랜드 55%의 지분을 인수하는 계약서에 서명할 계획이다. 앞으로 이탈리아 바이네르는 유럽을 맡고, 아시아는 우리가 맡게 된다. 구두는 한국에서도 만들고 이탈리아에서도 만든다. 오랫동안 고유 상표 없이 살아왔던 '무(無)브랜드'의 설움을 떨쳐 버리게 됐다."
―다음 꿈은 뭔가.
"이제 내 꿈은 15년 뒤 세계 명품 시장에서 리더가 되는 것이다. 한데 그 꿈을 아껴서 쓰고 싶다. 그 꿈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나의 추억, 에피소드 같은 것을 즐겁게 만들 수 있도록 설계를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그는 요즘 꽤 명사가 됐다. 기업체, 대학 등에서 강연 요청이 끊이지 않는다. 대학 안 나온 그가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강연으로 생기는 부수입은 봉사 활동이나 비즈니스 꿈나무 육성 사업에 모두 쓰고 있다. 지난 5월 자신의 스토리를 담아 출간한 '불타는 구두를 신어라'(21세기 북스)도 한때 경제·경영 부문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등 꽤 많이 팔렸다.
―혹시 중간에라도 대학에 가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나.
"학력 콤플렉스가 없지는 않았다. 우리나라는 웬 신청 서류에 대표이사 이력서 요구하는 곳이 많은지…. 그래서 한때 대학에 진학할까 그런 생각도 했는데 주위 사람들이 말렸다. 내가 사업의 멘토처럼 모시는 한 선배님으로부터 '네가 여기서 대학 나온다 해서 더 폼날 것 하나 없다. 에너지 그런 데 쓰지 마라. 너 인마 대학에서 네가 가르쳐야 돼' 그런 말까지 들었다. 실제로 요즘은 내가 나름대로 학교 잘 다니고 부자였다면 이렇게 살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 나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갔기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나만의 드라마를 쓸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비즈니스 꿈나무'는 무엇인가.
"대학에서 강연을 하고 나면 사업하겠다는 친구들이 찾아온다. 그 사람들 중 몇명이 모인 것이다. 대학생들을 만나면서 대부분의 관심사가 오로지 어떻게 취직하고 어떻게 사회에 나갈 거냐뿐이라는 것이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사업하겠다고 하니 얼마나 반가운가. 생각해보면 내가 사업하다 성공한 것은 돈이 있어서도 아니고, 인맥이 뛰어나서도 아니다. 오로지 끈기와 전문성이었다. 나는 그것을 학생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지금은 어렵지만, 고시 공부하는 것보다 멋있는 사장 10명 기르는 것이 내 꿈이다."
―정작 본인은 아직 집도 마련하지 않았다고 하던데.
"일산에서 전세 살고 있다. 회사는 잘되지만, 나 개인은 부자가 아니다. 여력이 없다. 그것(집 사는 것)말고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장이니까 월급 높게 책정하면 되지 않나.
"그러면 회사가 잘 될 때는 괜찮은데 회사가 힘들어지면 어렵다. 내가 여력이 있을 때 얼마나 가치 있게 의미 있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돈을 벌면 가능하면 잘 쓰려고 한다. 봉사 활동 다니고 비즈니스 꿈나무, 골프 꿈나무 육성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돈에 대한 철학이 좀 다른 것 같다.
"돈이 무섭다. 돈만 보고 좇아가면 돈의 노예가 된다. 백화점 판권을 갖고 있던 케리부룩이 망하고 브랜드 바꿀 때 정말 힘들었다. 내가 지금도 열심히 일하는 것은 그때 4년 동안의 무서운 악몽에 다시 빠지지 않기 위해서다. 긴 악몽의 터널에서 빠져 나오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많은 사람이 돈 앞에서 꼼짝 못하는데, 돈은 내가 쓰는 게 내 돈이지, 쌓아놓은 것은 내 돈 아니다. 자식한테 돈 물려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집은 없어도 성공한 삶이라는 이야기인가.
"나는 내 덕분에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이 더 즐겁다. 내가 직원들 불러서 요리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전복무침, 전복젓갈, 간장게장도 담글 줄 알고, 초밥도 만들 줄 안다. 재료만 싱싱하면 요리는 그냥 다 된다."
―요즘 강의 요청도 많다고 하던데 무슨 이야기를 자주 하나.
"사회가 성공의 개념이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성공의 개념이 바뀔 때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로 바뀐다. 그리고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지. 하지만 그 운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에서 나왔다. 만약 내가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렸다면 지금의 김원길은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