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18:3 악한 자가 이를 때에는 멸시도 따라오고 부끄러운 것이 이를 때에는 능욕도 함께 오느니라 (개역개정판)
북한이 정말 5.18.을 주도했다면
대단히 실패한 군사 작전인 것이 분명하다.
대도시였던 광주에도 간첩은 많이 있었을텐데
광주는
1956년 10월 3,000여명 이상 사망(또는 전사)했고 300명 가량이 처형되었던 헝가리 혁명이나
1976년 6월 역시 수백명이 사망했고, 수천명이 부상, 실종되었던 남아공의 인종차별적인 소웨토 봉기보다 넓은 범위의 군사 작전이 전개되지 못했다.
1988년 4월 5,000명 이상이 사망했던 버마의 8888혁명
1989년 8월 3,600명 이상으로 추정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이 희생된 것이 분명한 천안문 사태보다 피해는 적었다.
사실, 인류 역사상
적성국가에 침투해서
그 국가에서 성공적으로(?) 내전이나 전쟁을 획책한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CIA나 MI6도 해내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걸 저 부실하고 어리석은 북한이 잘 해낼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비행기나 터뜨리고, 폭탄 테러 정도도 겨우 해냈던 그 실력으로 말이다.
잠수정을 보내도 택시 기사님에게 발각되는 그 실력으로 말이다.
물론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노력에 온 나라가 매달렸으니,
기본적인 재래식 전쟁 준비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온 나라가 이미 기울어져서 망조가 들었던 1980년대에
평양에서 광주까지 소련과 중공 등의 도움 없이 보급도 힘들었을 듯하다.
북한이 만약 군사 작전을 계획한 것이라면
철저히 실패했던 것이 맞다.
아니, 거의 그 어떤 군사 행동을 일으키지도 못한채
무려 2015년까지 이어왔던 지극히 산발적이고 지엽적인 목표조차 성공시키지 못한 것이다.
공수부대(와 약간의 경찰력)만으로 진압되는 간첩들이라면
사실 부실하기 짝이 없다고 봐야 한다.
(뭐, 물론 국민 여론을 반으로 나눠버리는 것이 목표였다면 그건 꽤나 성공한 셈이지만...)
북괴는 오판말라.
고도의 심리전 문구였는지는 알 수 없고
그 문구가 북괴의 정보부까지 언제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북괴는 늘 오판해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6.25. 당시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전쟁만 일어나면 남조선의 인민들이 들고 일어설 것이라고 했지만,
들고 일어나기는커녕 피난 가기에 바빴던 민초들은
공산당이라면 치를 떨었다.
오판의 역사는 참으로 길었다.
미친 듯이 남하하던 소련제 탱크는
남한의 험한 산세를 제대로 넘지도 못했고
보급은 한 번도 그들을 제대로 보조하지도 못했다.
유엔군과 국군의 필사적인 저항과 헌신적인 노력 앞에
북한군은 초기 급습 외에는 뭐하나 제대로(?) 싸워본 적도 없다.
심리전조차 제대로 못펼쳤던 것이 그네들의 실상이다.
악한 자가 이를 때에는 멸시가 따라온다고 했다.
발포의 최종 책임자가 누구인지 아직까지도 속 시원하게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그 책임자라는 양반이 자기 마음대로 쏴버리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과를 기대한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전혀 미안하지 않으니까
사과하는 것보다 사과하지 않는 것이 더 이익이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북한이 가장 싫어할 인물들이
정권을 잡았다.
북한이 5.18.을 주도했다면
또 한 번 그들은 실패한 것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것 같았던 권력은 매서웠다.
버스에서 "대통령이 왜 대머리야?"라고 묻는 아이의 입을 황급히 가리던 엄마가 당황해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지만
영원히 시퍼럴 것 같은 정권은
이전 대통령들보다 영 인기가 없었고
1980년대가 지나고 1990년대로 넘어가면서
파랑새 한 마리는커녕, 파리 한 마리도 떨어뜨리지 못하는 시대가 열려버렸다.
물론 멸시와 능욕은 이어질 예정이다.
어쩌면 그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희미해질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AI도 그들에 대해서 쉽게 단죄하거나 돌을 던지지 않으니 말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들에 대한 기록도 달라지고, 기억도 굴절될지도 모른다.
다만, 거의 기억받지 못하는 한 사람을 떠올릴 필요는 있겠다.
1958년에 부산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 미아리 빈민촌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1970년대 재개발로 인해 광주대단지로 강제이주 당한 후
아버지마저 연탄가스 중독과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소년가장' 노릇을 해야했던 그 사람 김종태 청년...
18살 때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가나안 농군학교도 수료했던 그는
성남주민교회 이해학 목사(現 주민교회 원로목사)를 만나 노동운동가가 된다.
집안 사정 때문이었는지 방위병으로 복무한다.
1980년 6월 1일 주일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을 증언했던 동화작가 윤기현이
당시 교회 집회에서 5.18.에 대해 증언하자,
“우리 국군이 그런 일을 벌이다니... 유언비어 퍼뜨리지 마시오.”라고 항의하고
실제로 광주까지 내려가서 그 현실을 보고 온 다음
누구보다 열심히 서울에서 그 사실을 전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고작 8일 후, 제대를 며칠 앞둔 6월 9일
그를 체포하려고 하는 형사에게서 도망하면서
그는 분신자살하면서
노동삼권 보장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보수적인 기독교인으로서
그의 자살에도
그의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지만
그의 유서는
오늘날의 정치, 언론계 종사자들의 글보다 강한 힘이 느껴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실이 무엇인지 알려고 했던 그의 열정은
진실이 무엇인지 알리고자 했던 그의 마음은
오늘도 광주를 찾은 수많은 정치인들의 문법과 셈법과는 무관하게
여전히 오늘날의 나를 부끄럽게 한다.
1958년생 어르신들이
이제는 지도층이 되고
벌써 은퇴하신 분들도 계시는데
청년 김종태가 지금 살아있었다면
은퇴를 앞두고 계실 시점일 것이다.
성남이든, 어디든 근처 다른 교회를 계속 섬기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소시민을 넘어서
비겁한 삶을 살고 있는 나 자신이
악한 자에게는 멸시가 따라온다는 잠언 말씀을 선포할 용기나 있는지
진실을 마주대할 관심조차 있는지
진리가 무엇이냐 빈정대던 빌라도를 닮아있지나 않았는지
다시금 나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