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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6. 묵상글 (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 먼저 하느님 앞에 서서 Ad Sum! 하는.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4:3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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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6. 연중 제15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7.16 04:18
- 먼저 하느님 앞에 서서 Ad Sum! 하는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오늘 탈출기는 모세가 ‘하느님 체험’을 하는 얘기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파라오로부터 구출하는 소명을 받는 얘기입니다.
이로써 모세는 이전의 모세 곧 어제 탈출기의 모세와 다른 존재가 되는 겁니다.
어제 탈출기에서 모세는 이집트 공주의 아들로 성장했지만
민족적인 정체성을 발견하면서 뜻하지 않게 동족을 위한 일에 끼어들게 됩니다.
어제 모세가 동족을 괴롭히는 이집트인을 때려죽인 것은
김구 선생님이 일본 순경을 때려죽인 것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니까 어제 모세의 행동은 김구 선생님의 민족주의적인 행동과 같습니다.
그리고 사막으로 도망친 것도 김구 선생님이 고향을 떠나 도망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하느님을 체험하고 사명도 받음으로써
이제 더 이상 김구 선생님과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모세에서 신앙적이고 예언자적인 모세가 되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것을 가르는 것이 오늘 하느님 체험입니다.
이 하느님 체험으로 인해 모세는 민족주의자에서 예언자로 변모케 되는데
오늘은 모세의 이 하느님 체험과 그가 받은 소명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하느님 체험에서 제일 첫 번째 단계는 하느님의 산으로 오름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가는데
이것은 그가 스스로 간 것이라기보다는 이끌려서 간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 체험임과 동시에 성소 체험일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시는 얘기나,
모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응답하는 것이 바로 성소 얘기의 전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성소를 보게 됩니다.
수도 성소든 선교 성소든 우리의 성소가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려면
모세처럼 이렇게 하느님 체험과 성소 체험을 먼저 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예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제 체험에서 비롯된 얘기입니다.
나갔던 수도원에 제가 다시 돌아온 것은 나간 후 하느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체험을 하기 전에는 제가 좋아서 선택했고
부적합하다고 제가 판단하고는 떠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체험하고 나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 부르심임을 확고히 깨닫고는
성소의 흔들림이 한 번도 없었고 하느님께서 나가라고 하시지 않으면
나가지 않겠다고, 아니,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모세의 불타는 떨기나무
체험처럼 하느님 체험이 강렬하면 강렬한 만큼 흔들림 없다고 생각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체험하기 위해서도 ‘Ad Sum(여기 있습니다)’하고 하느님 앞에 서야 하지만
체험하고도 소명 수행을 위해 늘 주님 앞에 서야 하고 ‘Ad Sum’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 맞서기 두려운 파라오 앞에 서기 전에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서기 전에 우리가 반드시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두려워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는 사람은
그전에 하느님 앞에 서지 않은 사람, ‘Ad Sum’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하기 전에 기도 중에
늘 주님 앞에 서기로, ‘Ad Sum’하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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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6. 연중 제15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신비 관상 체험
“날마다 주님과 새로운 은총의 만남이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을 찬미하여라.”(시편103,1)
오늘 우리는 공관복음에서 하나뿐인 예수님의 찬양기도를 만납니다. 내용으로 미루어 감사기도라해도 좋습니다. 찬양으로 표현되는 감사기도입니다. 루카복음은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합니다. 바로 어제 회개하지 않은 세 마을, 코라진과 베싸이다와 가파르나움에 대한 준열한 불행선언후 예수님의 하느님 아버지와의 만남이라는 신비체험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께 감사드립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말그대로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와의 참 친밀한 신비만남체험입니다. 예수님의 평생 삶에 활력소가 되었을 체험입니다. 참으로 순수한 철부지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계시되는 하늘 나라의 신비체험입니다. 이런 신비체험있어 새롭게 살아나는 영혼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불행은 이런 은혜로운 영적 신비체험의 부재에 기인합니다. 새롭게 하느님 아버지를 신비로이 체험한 예수님의 감격에 벅찬 찬양감사에 이어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고백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말 그대로 예수님의 하느님 아버지와의 독보적 신비만남체험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감사하게도 날마다 미사전례를 통해 주님 안에서 이런 하느님 아버지와의 신비스런 만남을 체험합니다. 고달픈 인생 광야 여정중 날마다 이런 미사전례를 통한 주님과의 신비로운 만남 체험이 우리를 살게 하는 내적힘이 됩니다.
복음의 예수님과 흡사하게 오늘 탈출기는 모세의 신비로운 하느님 체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모세는 정통적 신비가의 모범입니다. 오늘 모세의 광야에서의 하느님과 만나는 소명체험이 상징하는 바 심오입니다. 광야에서 양떼를 치며 고독중에 수련중인 모세가 때가 되자 하느님은 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모세의 인생에 진짜 획기적 전환점입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은 모세를 준비시키며 그날의 때가 올 때까지 인내로이 기다린 것입니다. 광야 한복판 하느님의 산 호렙에서 불타는 떨기 속에 하느님을 만난 신비기적체험입니다. 주님과 모세의 일련의 대화가 실감나게 펼쳐집니다.
“모세야, 모세야!”
“예, 여기 있습니다.”
주님 친히 먼저 모세를 다정히 부르시고, 깨어 준비되어 있던 모세의 즉각적 인 응답입니다. 이런 부름과 응답은 아브라함과 야곱에서도, 또 사무엘에게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있는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산 호렙만이 아니라 오늘 지금 미사가 거행되는 여기 성전도 발에서 신을 벗고 주님을 만나야할 거룩한 땅입니다. 사람들은 계속 떠나 사라져도 온 우주와 인류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어 하느님은 모세에게 당신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라는 소명을 주시며 여기서 대화도 의미심장합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철부지 순수한 영혼의 주님 제자들인 우리에게 계시된 하늘나라의 신비처럼, 겸손하고 순수한 모세에게 나타나 사명을 부여 하시는 주님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자비롭고 너그러운 주님은 오늘의 우리와도 늘 함께 계십니다.
바로 광야 인생 여정중 오늘 지금 여기가 우리 모두 발에서 신을 벗어야 할, 그리고 살아 계신 주님을 신비롭게 만나야 할 거룩한 땅 성지입니다. 바로 날마다 거룩한 미사전례가 거행되는 하느님의 산 불암산 요셉 수도원 성전이 이런 곳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날마다 결정적 전환점이 되고 주님은 우리 모두 새하늘과 새땅의 사람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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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6. 연중 제15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으로 깊고 아름답습니다.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요, <뒤 장면>은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입니다. 오늘은 두 개의 절로 된 <앞 장면>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 장면>의 예수님의 감사기도는 마치 겟세마니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니 기도가 수난의 길을 앞두고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42)라는 순명과 의탁의 기도라면, 여기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라는 확신에 찬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우주의 주권자로서 당신의 뜻을 자유롭게 ‘드러내 보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처럼, “감추시고”와 “드러내 보이시고” 라는 표현을 통해서, 영적 진리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배려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주권적인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드린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찬양을 나타내는 감격스런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말합니다. 곧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뜻과 섭리에 대한, 완전한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감사의 이유를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은 결코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드러내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 해서, 모두가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라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고 일하셨음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일하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8)라고 말씀하신 사도 바오로처럼 말입니다. ‘하늘나라의 장막에 머무는 길은 우리 안에 일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라.’(수도규칙 머리말 22-30 참조)고 제시하신 성 베네딕도의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버지의 선하신 뜻”(마태 11,26)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그 드러내신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그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그 모든 것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시고
그 안에서 신비를 살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매달려 있으니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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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6. 연중 제15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 굿뉴스에 게재 된 1834577번, 연중 제 15주간 수요일
내용이 7월 15일 화요일 연중 제 15주간 화요일의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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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6. 연중 제15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어둑어둑할 무렵에 오는 질문들!
하느님의 숨
2025.07.15. 16:37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7월 15일 화요일 - 스물아홉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어둠과 빛의 춤!
우리 내면에는 오직 어둠만이 빛을 비출 수 있는 빛이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빛이 저에게 길을 보여주기 때문에 저는 빛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어둠이 별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어둠을 사랑할 것입니다.
- 오그 만디노(Og Mandino), 세상의 가장 위대한 비밀
조앤 치티스터 수녀(Sister Joan Chittister)는 어두움이 쉽지 않은 답을 지닌 우리의 질문들에 풍부한 결실을 맺어주는 장소라고 설명합니다:
우리의 방어력이 약해지고 낮 시간에 집중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들이 더 이상 우리 자신에게서 우리를 숨겨 주지 못하는 시간에, 즉 밤 시간이나 어둡고 소리가 없는 낮 시간에 용솟음치는 영혼의 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빛 속에서는 억누를 수밖에 없는 것이 어둑어둑할 무렵에는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생명의 고요함 속에서 비로소, 우리가 거의 예상하지 못할 때, 우리 내면의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지하 세계로부터 질문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어떤 자료들을 찾아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깊이 숙고해 보라고 요구하는 질문들입니다.
삶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에 답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깨달음에 이르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우리 내면에는 오직 어두움만이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는 빛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마침내 창조된 세상 전체의 궁극적 진리; 즉 하느님은 분명히 존재하시고 우리가 하느님이 아니라는 진리에 항복할 때 우리에게 덮쳐 오는 내면의 고요와 평화의 빛입니다.... 이 모든 것의 명료함은 놀랍습니다. 삶은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생명(삶)을 찾는 프로젝트에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영적인 시야가 우리의 남은 여생 전체에 빛을 비추어 줍니다. 그것이 바로 어둠 속에서 빛나는 빛입니다.
우리 자신이 겪은 어두움의 경험만이 우리에게 빛을 부여해 주는데, 이 빛이야말로 이제 겨우 삶의 어두운 지점으로 막 들어서기 시작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빛입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가 맛 본 어두움이 우리로 하여금 인류가 해온 오랜 여정에 빛을 비추어 주는 빛의 일부가 될 자격을 갖게 해 줍니다. 이런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바닥까지 내쳐졌다가 다시 일어서게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진리에 대해 오직 말뿐인 거짓 증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둠은 우리 자신이 가져온 빛을 삶의 미지의 영역으로 가져가 그 안에서 그 빛을 불타 오르게 하여 다른 사람들도 그 불빛을 보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려주는 멘토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얻은 빛은 그 어둠이 아무리 짙고 암울할지라도 그 어둠의 장소가 우리를 위해 마련된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삶이 어둠의 다른 한쪽에서 다시 시작된다는 것을 압니다. 다른 삶입니다. 새로운 삶입니다. 죽음과 상실, 거부, 실패 이후에도 삶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다르게 계속됩니다. 완전히 캄캄한 절망의 냉혹한 밤으로 빠져들어가 거기에서 살아 남았다면 우리는 새로운 빛으로 일어서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차분하고 명확하며 앞으로 일어날 일이 우리에게 선을 향하게 하기에 충분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성장은 미지의 어두움과 빛 사이의 경계구역에서 일어납니다. 이 빛은 우리에게 새로운 지혜와 새로운 통찰력, 우리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이 되었는지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던져 주는 빛입니다. 이 어둠을 겪고 나면 우리는 이제 이전과 절대 같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 강해지고 더 단순해져서 우리를 생존하게 해주는 것이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더 확신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삶이 비록 우리보다 더 거대할지라도 우리는 이 삶 안에서 가장 충만한 차원까지 성장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수 년 전부터 매일 성서를 읽기 시작했는데, 이 성경을 참으로 살아 있는 말씀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 있을 때에도, 그리고 힘들고 혼란한 시기에 있을 때에도, 저는 성서를 펼쳐 읽으면서 종종 어떤 때라도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위로와 은총, 그리고 영적 방향감을 얻게 됩니다. 저는 이윽고 하느님의 뜻을 신뢰하고 저의 잡스러운 생각들을 떨쳐 보내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통제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대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저는 이제 제가 전에는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침내 제 마음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고,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신 모습으로서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가요!
—Elizabeth H.
References
Joan Chittister, Between the Dark and the Daylight: Embracing the Contradictions of Life (Image, 2015), 11, 19–2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Niko Tsviliov, untitled (detail), 2023, photo, Ukraine,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저 달이 자기 자신의 모습은 그대로 간직한 채 그림자와 빛과 더불어 춤을 추듯이, 우리도 저 달의 지혜의 리듬에 맞추어 그림자와 빛과 더불어 춤을 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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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하느님 나라의 현실은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하느님의 숨
2025.07.16. 05:14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하여 다시 어린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8,3).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어린이'라는 단어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철부지'와 같은 단어로서 라틴어 [in-fans]인데, 이 말은 본래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말은 대상들을 구분하는 데 사용되는데, 이 '구분'이 조금 지나면 '분리'로 변하고, 그 다음에는 '반대'가 돼 버립니다.
우리 '에고'를 '거짓 자아'라고도 일컫지만 다른 말로는 '분리된 자아'라고도 합니다. 영어나 다른 서양 언어에서는 '나'(I)를 하느님(God 혹은 Deus 등)처럼 대문자로 씁니다. 이런 우리의 경향은 '나' 중심의 세계관을 여실히 드러내 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나'와 '나가 아닌 존재'를 분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 이것은 생명의 본질을 어긋나게 하는 일입니다. 본래 하느님께서는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존재하도록 창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와 '나가 아닌 다른 모든 존재'를 구분하고 분리하고 반대쪽에 놓으면서 이 '나'를 지키고 방어하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면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가 산소나 물, 음식 등 '나 아닌 다른 존재들' 없이 자기 생명을 지속시킬 수 있나요?!
사실 이 '나'는 '나가 아닌 다른 모든 존재'에 의해 형성된 존재입니다. 물리적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몸은 우리가 우리가 지금까지 먹고 마시고 숨 쉰 것에 의해 형성된 것입니다.
이 진정한 현실을 우리가 깊이 새기며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살기 위한 첫 걸음을 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관계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물리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우리 생명의 연결된 현실을 의식하고 인식하지 못할 때 오는 삶의 고통은 아마도 분리된 자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꼭 거쳐야 할 과정일 겁니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우리는 갓난아기와 같이 다시 연결된 현실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톰 올리버(Tom Oliver)라는 사람이 쓴 책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타파해야 할 커다란 미신이 있다. 바로 우리가 주관적인 우주의 중심에서 독립된 자아로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이것을 저자는 "자기-망상"(self-delusion)이라고 말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얼마나 파괴하는지도 모른 채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이런 분리된 현실을 진짜 현실인 양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사실 우리와 너무나 다른 존재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싫어하는 존재와도 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 현실이 연결된 존재의 원천이요 완전한 사랑이신 하느님에 의해 완전히 실현되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부터 이 하느님 나라의 삶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전에 어느 여성 노숙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피폐해진 상태였고, 늘 자기 방어를 위해 몸에 칼을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 사람은 제가 그 이야기를 들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상이라고 여기는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나' 아닌 다른 모든 존재로부터 분리시키고 단절시키면서 '자기-망상' 속에서 '나'를 방어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우리의 생명은 죽어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철부지들, 혹은 미천한 이들은 단순히 어린이들이 아니라 변변치 못하고 힘도 없으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 당신의 말씀을 들으려는 마음을 지닌 이들, 즉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라고 말씀하실 때 의미하는 바는 자기들에게 하느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앎은 다른 모든 앎과 같지 않습니다. 이런 앎은 억지스러운 자기 주장을 낼 필요가 없고, 책을 통해 배우는 앎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도 바오로가 말하듯이, "이 세상의 우두머리들은 아무도 깨닫지 못한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바로 예수님 안에서 육화하신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란 존재의 본질인 분리된 자아에서 벗어나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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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6. 연중 제15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다
아버지께서 이것을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어떤 철부지들에게 말입니까? 나이가 어려 철부지가 아니라 죄와 사악함에서 철부지인 이들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낙원의 축복과 하늘 나라에서 누리게 될 것들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8,11-12),
-라탄인 에피파니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1
세가지 탄생
우리의 탄생, 하느님의 탄생, 하느님 자녀인 우리의 탄생
평화로운 침묵이 온 세상을 덮고 밤이 달려서 한고비에 다다랐을 때(지혜 18,14).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이루셨고, 끊임없이 이루고 계신 영원한 탄생을 이 자리에서 일시적으로 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동일한 탄생이 지금도 인간의 본성 안에서 제때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탄생이 끊임없이 일어나더라도 내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탄생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제부터 이 탄생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지, 이 탄생이 어떻게 선한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지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완전한 영혼 안에서 영원한 말씀을 들려주실 때마다, 이 탄생은 선한 영혼 안에서 일어납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려는 것은 하느님의 길을 따라 걷고 지금도 걷고 있는 완전한 사람과 관계가 있는 것이지, 하느님의 길에서 멀어져 이 탄생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427)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4기 : 1300 ∼ 1500년
서구 통일 붕괴 시대의 교회
제 3절: 르네상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사보나롤라
율리오 2세:
불행하게도 알렉산테르 6세는 wk신의 생활을 고치지 않았다.
후에 겨우 23일 동안 교황으로 비오 3세(1503)가 재위한 후, 식스토 4세의 조카인 율리오 2세 (1503∼ 1513)가 그 뒤를 이었다. 다시 성직 매매와 정치와 폭력이 이 교황의 임기를 지배하였다. 비록 율리오는 족벌주의와 윤리적인 비행에서는 면제되었을지라도, 재위 기간 동안 그는 오직 로마와 교황령을 확장하고 미화하고 명성을 얻으려고만 노력하였다. 그는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자신의 묘비를 설계하게 하고, 모세의 강력한 모습에서 자신을 구현하게 하였다. 그는 끊임없이 전쟁을 하였다. 루터는 1520년에 그를 “흡혈귀 율리오”라고 말하였다. 브라만테는 그를 위하여 성 베드로 대성전의 신축을 설계하였고(1506),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을 그렸고, 라파엘로는 바티칸 궁전의 호화스러운 방에 프레스코 벽화를 그렸다. 르네상스 예술이 그 정점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도 바로 문 앞에 다가와 있었다.(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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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6. 연중 제15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음악을 너무나 좋아하는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서 음악에서 뛰어난 재능까지도 보였습니다. 깊은 기도와 묵상으로 아름다운 곡을 많이 만들었고,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어느 날, 교회의 장상이 그를 불러 말했습니다.
“사제가 되려면 음악을 포기하게. 만약 음악을 계속하겠다면, 신부가 될 수 없어. 그만둬라.”
이 신학생은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음악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자기의 도구였고, 기쁨이고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음악 없이는 제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레고리오 성인은 ‘성가는 하느님 말씀을 더욱 깊이 마음에 새기게 한다.’, ‘말씀이 노래로 선포될 때, 그것은 두 배의 힘을 지닌다.’라면서 성가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기를 낮추는 순명이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결정해야 할 때, 결정 자체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고민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 결정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나의 중심이 되어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파악해야 “예”라고 응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먼저 “예”라고 응답하셨고, 그 뒤에 곰곰이 생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마태 11,25)라고 기도하십니다.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분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세상의 지혜를 쌓는 것보다 단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렇습니다. 아버지!”(마태 11,26)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 뜻에 대한 완전한 동의와 기쁨을 표현하십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언제나 옳고 완전하다는 것이며, 성모님께서 “예”라고 응답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예”라고 하느님 뜻에 순명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하느님 뜻에 얼마나 단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다가서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하느님 뜻에 우리도 “예”라고 먼저 응답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은 누구나 여러 번 좌절한다. 하지만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실패자는 아니다(존 버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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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6. 연중 제15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부족함 깨달아 도움 청하는 겸손함만이
박윤식 [big-llight] 2025-07-15 ㅣNo.183473
요즘 성당에 봉사하는 이들이 준단다.
대부분 맞벌이로 가정을 꾸리기에 봉사할 시간이 없다나.
문제는 누가 보아도 경제적 뒷받침이 있는 이들도 여러 여가 생활로 봉사시간이 정말 부족하단다.
암튼 봉사할만한 이들이 이러저러한 갖가지 이유로 꽁무니를 뺀다.
우리의 실상은 어떤지?
권력에 기대거나 재물에 의지하는 건 아닌지?
주님 앞에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를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찬사를 보내시는 저 철부지들이란 과연 어떤 이들일까?
어쩌면 예수님 자신과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며 맹목적으로 따르는 그 제자들 아닐까?
그렇다.
오로지 외길 인생인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철부지일 게다.
예수님은 이처럼 철부지들에게만 나타나신단다.
미루어 보건대 그 옛날 멋모르고 그분께 불려간 그들은 정말 소박하고 단순한 모습으로 따랐다.
그것도 삼 년이나 줄곧 따랐다.
그런 철부지 같은 성품이 아니었다면 도중에 수도 없이 그만두었을 게다.
그런 과정을 통해 스승의 참모습을 깨닫는다.
그분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참 모습을 본다.
우리도 그 철부지 제자들처럼 단순함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하리라.
그 단순함만이 그분의 뜻을 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니까.
그러기에 우리 역시 철부지의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누구나 다 주님 앞에서는 그저 소박하고 단순한 철부지이기에.
우리 신앙인에게 성찰과 숙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근본인 것은 마음을 비운 수도자들처럼
단순하고 무조건적인 믿음과 신뢰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를 말자.
그분께 늘 순박하고 끊임없는 감사로 나아가야만 사심 없이 마냥 철부지처럼 살게다.
사실 전적으로 어리석고 우둔하기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철부지 아이처럼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이렇게 우리 앞에 다가오는 매일의 삶을 뚜벅뚜벅 잘 걸어가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지혜이지만,
신앙은 우리에게 대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지혜롭고 슬기로운 이들,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는 능력 있는 이들이 공동체의 커다란 기둥이고 힘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신비는 세상의 지혜가 아닌,
그분 말씀의 진리 안에 스미고 그 행동은 사심 없는 순박한 행동에서 나타나리라.
우리 모두는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이름을 가지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 속에서 임마누엘 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같은 존재들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 안에 의당 머무르신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시며 늘 곳곳에서 당신을 알게 해 주신다.
이 시각도 그분도 함께 하심이리라.
하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공동체에서 일하는 데 자꾸 걸리적거리는 이가 앞자리를 차지할지도.
어쩜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구원 소식이 전해지고 수고하고 짐 진 이들이 먼저 초대될 수도.
이렇게 그분 나라에 먼저 도달하는 이들은 스스로 더 작아질 줄 알고, 더 겸손할 줄 아는 이들이리라.
사회가 발전할수록 우리 욕심도 더 커지고 요구하는 것들도 더 무거우리라.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주님의 도우심을 청할 줄 아는 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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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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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6. 연중 제15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슬로우묵상] 비 오는 창문 앞에서
서하 [nansimba] 250716. 01:34 ㅣNo.183478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마태 11,25)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저는 '지혜롭다' '슬기롭다'는 말이 좀 달리 들려왔습니다.
마치도 세상의 이성적 판단, 지식, 사회적 평가에 의해 만들어진
'마음의 틀'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하느님을 만나기
우리는 언제나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살고 있습니다.
더 성공해야 하고, 더 알아야 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들 말입니다.
직장에서는 인정받는 직원이,
가정에서는 모범적인 부모나 자녀가,
교회에서는 모범적인 신자가 되어야 한다고 느끼죠.
하지만 예수님은 '철부지들'에게 하늘나라의 비밀이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철부지는 세상의 평가나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마치 아이들이 놀이에 푹 빠져 있을 때처럼,
완전히 '현재'에 집중하며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존재 자체가 주는 메시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넘기셨다"라는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느냐가 아니라,
그분이 어떤 분이셨느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존재 자체로 하느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나는 살아있다"라는 가장 단순한 사실 앞에서 감사할 수 있을 때,
그 순간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복잡한 신학 이론을 모르더라도,
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와 존재의 만남'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예수님의 존재와 만나고,
그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존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알려고 하지 말고 함께 있기
세상의 지혜는 모든 것을 분석하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하느님도 마치 문제를 풀듯이 이해하려고 하죠.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을 분석하지 않고,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잖아요.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연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존재해야 할 분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도 말년에
"내가 지금까지 쓴 모든 신학서적이 지푸라기 같다"라고 했는데,
이는 직접적인 하느님 체험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줍니다.
내 안의 진짜 '나' 찾기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이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를 알 수 없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삶에서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세례를 통해 이미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교회에 소속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 존재 자체가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받는 나, 가족들 때문에 힘든 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걱정하는 나...
이 모든 것 너머에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는 나'가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사회적 지위나 성취가 아니라,
"나는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깊고 참된 정체성입니다.
혼자가 아닌 함께, 하지만 각자의 깊이에서
이런 깊은 영적 체험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부입니다.
마치 오케스트라에서 각각의 악기가 서로 다른 소리를 내지만
하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 각자의 영적 체험도 공동체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미사에 참례할 때를 생각해 보세요.
나는 개인적으로 기도하지만,
동시에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기도합니다.
각자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하느님을 만나지만,
그 만남이 공동체 전체의 기도가 됩니다.
주님,
저희가 세상의 지혜에 의존하지 않고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존재로
'지금 여기'에서 당신께 나아가게 해주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저희의 참된 존재를 발견하고,
그분을 통해서 아버지와 하나 되어
일상 속에서도 당신의 현존을 느끼며 살아가게 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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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6. 연중 제15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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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16. 연중 제15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1,25-27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사제로써 다른 사제의 강론을 듣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강론을 하려면 어떻게 준비하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 년 넘게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성경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해당되는 성경 구절에서 사목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신자분들께 무엇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드려야 할지 나름대로의 기준을 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그렇게 사전지식을 많이 갖추고 있으면 듣는 내용을 더 잘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는게 문제입니다. 신자분들처럼 귀기울여 들으면 너무나 좋은 말씀인데도, 성찰해보고 묵상해볼 꺼리가 많은 내용인데도 그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겁니다. ‘내가 해봐서 잘 알아’라는 교만을, ‘왜 그 정도밖에 못해?’라는 비교의 마음을 떨쳐내기가, 순수한 마음으로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그만큼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런 저에게 뼈를 때리는 메시지를 던지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여기서 ‘철부지’란 철이 들지 않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아직 정신적으로 완전히 성장하지 못했기에 여러 측면에서 미성숙하고 결핍된 존재입니다. 세상 물정도 모르고 분위기 파악도 느려서 핀잔을 자주 듣기도 하지요.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만 있는 장점도 많습니다.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쓸 데 없는 일에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보느라 주눅들지 않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실수하더라도 합리화하거나 감추려 들지 않고 솔직히 인정하며 사과할 줄 압니다. 작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알기에 참된 기쁨을 누립니다.
반면에 ‘자칭’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은 어떠합니까? 많은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으로서 품위와 예의를 지킬 줄 압니다. 그만큼 세상과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퍼뜨릴 수 있지요.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방끈 좀 길다고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다닙니다. 마음 속에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우월감으로 가득 차서는, 남들보다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면 무시당한다고 여겨 참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보다 상대적으로 못하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무시하고 깔봅니다. 겸손의 덕을 갖추지 못한 지혜, 타인에 대한 존중이 밑바탕이 되지 않은 지식이란 이처럼 위험하지요. 그래서 ‘아는 게 병’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교만과 고집으로 똘똘뭉친 ‘헛 똑똑이’들은 참된 지혜와 하느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없음을.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만큼만 그분에 대해 알 수 있음을. 그래서 천주교를 ‘계시 종교’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내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계획을 받아들이고 따라야겠습니다. 내가 세상의 이치를 다 깨달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과 섭리가 무엇인지를 먼저 헤아려야겠습니다. 그러면 나의 구원과 참된 행복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지금 이 순간에도 여지없이, 언제나 한결같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보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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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 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286
7월16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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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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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의정부교구 정호영 요셉(송내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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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예수님의 진면모!>
오늘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바친 기도를 통해 우리는 참으로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예수님의 진면모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당대 유다 지도자들의 노선과는 너무나 판이한 것이었기에, 순식간에 예수님은 요주의 인물, 공공의 적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지혜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지평을 대폭 확장시키게 되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6)
이 선언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지혜에 대한 종래의 고전적인 가르침, 고정관념을 180도 완전히 뒤집어 버리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로써 그간 가방끈이 길어, 나름 지혜롭다며 ‘개폼’ 잡고 다니던 사람들이 아주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오랜 세월 청춘을 바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쌓아올린 세상적, 학문적 지혜는 이제 많은 것들이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보물처럼 소중히 여겼던 인간적 지혜가 영원한 생명과 구원, 참 진리를 얻는 데는 오히려 큰 장애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자칭 지혜로운 사람들, 엄청난 학문적 성취를 통해 한 분야의 최고봉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유치원생보다 못한 사고를 하는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기에 요즘 와서 자주 생각하는 것이 편식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너무 한 과목에 집중하지 말고, 여러 과목에 골고루 신경써야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기를 쓰며 쌓아 올리고자 노력하는 학문적, 세상적, 인간적 지혜 위에, 인문학적, 영적, 정신적, 신앙적 지혜가 가미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지혜에 대한 개념은 대폭 확장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간 자칭 지혜롭고 슬기로운 존재라고 자처했던 사람들, 비본질적인 것, 가시적인 것에 집착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것, 내면적인 것을 놓쳐버린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로움의 끝판왕이라며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사실, 지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스스로 지혜의 최첨단을 걷고 있다고, 사실 가장 우둔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가장 똑똑한 척 했지만, 사실 가장 멍청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영세세 지속되는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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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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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밥만 잘 먹고 공부만 잘하면 사회생활도 잘할 수 있을까?>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지혜와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아버지는 철부지들에게 어떤 것을 드러내 보이실까요? 예수님은 진리를 증언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그 진리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시지 않으셨다면 알 수 없는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그저 외워야 하는 딱딱한 공식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이 삼위일체 신비를 아는 것이, 이 세상과 하느님 나라에서의 우리 운명을 결정짓는 가장 절박하고 실질적인 ‘생존의 문제’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모든 아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공부는 ‘부모님의 관계’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는 선택 과목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과목입니다. 아이는 부모가 서로를 어떻게 사랑하고 신뢰하며 용서하는지를 본능적으로, 그리고 필사적으로 공부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서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남는 유일한 교과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히 감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범죄 연구 중 하나는 하버드 법대의 셸던과 엘리너 글루크 부부 교수가 수십 년간 진행한 연구입니다. 그들은 청소년 범죄에 영향을 미치는 수백 가지 요소를 분석한 결과, 가장 결정적인 변수는 가난이나 거주 지역이 아니라 바로 ‘가정의 관계적 요인’임을 밝혀냈습니다.
어떤 사회복지사가 말해준 내용입니다. 평생을 소년원에서 아이들을 상담해 온 그분은, 아이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되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라고 했습니다. 한번은 한 아이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아빠가 엄마를 때리고, 엄마는 저를 버렸어요. 사랑이 뭔데요? 그걸 어떻게 하는 건데요?” 이 아이에게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이었고, 관계는 빼앗거나 빼앗기는 전쟁이었습니다. 사랑의 모델을 보지 못했기에, 그는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몰라 주먹을 휘두르는 방식으로 세상을 대한 것입니다.
반대로, 비록 가난한 단칸방에 살았지만, 서로를 끔찍이 아끼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한 자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퇴근길에 늘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풀빵 한 봉지를 사 오셨고, 어머니는 그 풀빵을 받으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자매는 ‘사랑은 크고 화려한 것이 아니라, 작고 따뜻한 관심이구나’ 하는 것을 온몸으로 배웠습니다. 훗날 이 자매는 커서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모의 관계를 공부한 아이는 세상을 살아갈 튼튼한 뿌리를 갖게 됩니다.
20세기 미국 가톨릭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인 도로시 데이의 삶은 이 진리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녀는 젊은 시절 급진적인 사회운동가로 살며 하느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자와의 사이에서 딸 ‘타마르’를 낳았을 때, 그녀의 마음에는 이전에는 없던 거대한 바람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 작고 연약한 딸에게 자신이 줄 수 없는 영원하고 안정적인 사랑의 공동체, 즉 ‘가족’을 선물하고 싶다는 열망이었습니다. 그녀는 딸이 불완전한 자신을 넘어서는 더 큰 사랑의 관계 안에서 보호받기를 바랐습니다. 이 열망은 그녀를 가톨릭교회로 이끌었고, 결국 그녀는 딸에게 세례를 주고 자신도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 선택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져야 하는 큰 아픔을 겪었지만, 그녀는 삼위일체 신비를 자신과 딸 사이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려면 부모의 관계를 잘 배워야 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잘 살려면 하느님 삼위일체 신비를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하시며 당신의 모습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남자와 여자가 이루는 사랑의 일치가 바로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이루시는 사랑의 관계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온갖 지식과 정보에는 기꺼이 무관심하고, 오직 부모의 관계 맺는 법에만 필사적으로 관심을 갖는 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젊고 유능한 신경외과 의사였던 폴 칼라니티의 자전적 소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이에 대한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는 뇌과학의 정점에 있던 ‘지혜롭다는 자’였지만,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죽음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 그가 쌓아온 모든 의학 지식이 자신에게 진정한 답을 주지 못함을 깨닫습니다.
그를 구원한 것은 복잡한 뇌 지도가 아니라, 아내와의 사랑, 갓 태어난 딸아이의 숨결, 그리고 그가 다시 마주하게 된 하느님과의 관계였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 세상의 가장 ‘지혜로운 자’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철부지’가 되어 평화를 얻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어려운 신학 공식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아이에게 ‘너희 부모님이 어떻게 사랑하는지는 알 필요 없어. 그냥 밥 잘 먹고 공부만 잘하면 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말입니까.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는 아이가 제대로 살아갈 수 없듯, 삼위 하느님의 사랑의 관계를 모르면 우리의 영혼은 결코 하느님 나라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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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항해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위치를 아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망망대해에서 내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안다면,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등산로 지도나 지하철역 안내도에도 ‘현재 위치’를 표시하는 빨간 점이 반드시 들어가는 이유입니다. 현재의 위치를 알아야 비로소 방향을 잡고 목적지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는 구약의 모세 이야기를 들으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나아간 한 사람의 여정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의 산, 호렙에 도착합니다. 그는 한때 이집트에서 자라나 히브리인들에게도, 이집트인들에게도 외면받은 ‘경계인’이었습니다. 인생의 좌표를 잃고, 무려 40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방황하던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어라.” 모세는 드디어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게 됩니다.
자신의 위치는 하느님이 계신 곳, 곧 거룩한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어서 그의 사명을 밝히십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것이다.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어 내어라.” 그리고 덧붙이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모세는 자기 능력으로 그 일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망설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인간의 능력이나 재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이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율법 학자나 권력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겸손하고 단순한 이들에게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2025년 7월 15일이라는 현재의 좌표 위에 서 있습니다. 눈부신 과학과 기술의 발전 속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묻습니다. “지금 이곳이 하느님 나라일까요?”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행복한가요?”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창조 질서를 보살피며 살아가고 있나요?”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하나에도 일상이 무너질 수 있음을 경험했습니다. 탐욕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는 수많은 종의 멸종과 환경오염을 낳았고,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3년 넘게 전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란은 중동의 화약고에 불을 붙이려고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좌표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 앞엔 암초뿐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 이제 내가 너를 세상 속으로 보낸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우리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고, 주님의 뜻에 순명하는 믿음으로 새로운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발걸음을 내디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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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안식을 약속하시면서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라고 하십니다. 지금 지고 있는 짐도 힘든데 그분의 멍에를 메라고 하시니 선뜻 내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여러 마리의 소를 ‘함께’ 부려 밭을 경작하였기 때문에(1열왕 19,19 참조) 예수님께서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하신 말씀에는 우리가 멜 멍에를 당신께서도 함께 지시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기에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멜 멍에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멍에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멍에는 개인이나 집단이 경험할 수 있는 사회적, 정서적 또는 심리적 부담이나 제약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으로도 쓰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하면서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감, 부담감, 일의 성사 여부에 대한 초조함을 지고 살아갑니다. 수많은 일이 내 뜻과 내 노력만으로 되지 않음에도 모든 것이 내게 달린 듯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멍에를 지라고 하심으로써 일은 당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여 일의 진행, 성공과 실패, 이 모든 것은 당신의 몫이며, 우리는 그저 당신의 일을 당신과 함께해야 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하셔야 할 몫은 그분께 맡겨 드리고, 그분 뜻대로 일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일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멍에를 멥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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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25-27: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25절) 당신에 관한 신비를 지혜롭다는 이스라엘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인 다른 민족들에게는 드러내신 아버지의 뜻에 대한 찬미이다. 우리도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지만,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도 외면을 당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일들을 다 하시고도 아버지께서 그 일을 하신 것으로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신다. 주님의 말씀에서 철부지들은 나이가 어려 철부지가 아니라, 죄와 사악함에서 거리가 먼 철부지라는 것이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이유가 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인지는 설명하지 않으시고, 다만 감사를 드리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그분의 뜻을 따리 실행하고 그분께 충성을 다하는 일만이 우리의 할 일이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27절)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 다가간 사람들과 전에는 반항했으나 이제는 하느님을 알게 된 모든 사람을 맡기셨다는 뜻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27절) 그러기에 아들을 아는 사람은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신비를 통하여 아버지에게 있는 모든 것이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주님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잘 아시며, 아버지를 잘 아는 유일한 분인 만큼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아버지의 모상이신 아들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아버지만이 당신의 아들을 아신다. 오직 아들만이 자신을 낳으신 아버지를 알아본다. 그리고 거룩하신 성령만이 하느님의 깊은 비밀, 곧 아버지와 아들의 생각을 아신다. 하느님을 아는 우리는 그분의 뜻을 알고 실천하여 참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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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철부지의 기도>
마태오 11,25-27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철부지의 기도>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당신께
가고 싶지만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몸소 오소서
당신을
보고 싶지만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몸소 보여주소서
당신께
듣고 싶지만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몸소 들려주소서
당신을
알고 싶지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몸소 가르쳐주소서
당신과
함께하고 싶지만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몸소 함께하소서
당신처럼
하고 싶지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몸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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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구원을 방해하는 것들은, 버려야 할 ‘쓰레기’일 뿐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6)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1)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좁은 뜻으로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처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세속적인 처세술에 능했던 사두가이들과 헤로데 당파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넓은 뜻으로는 인간 세상의 기득권층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철부지들”은, 좁은 뜻으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도들과 신자들을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인간 세상의 소외계층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인간 세상의 소외계층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는 소외되지 않는 것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만한 기득권층 사람들이 구원받지못하는 것을 감사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받는 것이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고,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일입니다. 교만한 기득권층 사람들도 회개하고, 교만을 버리고, 기득권을 내려놓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도 다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2)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뜻’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코린 1,27-31) 구원이란,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자비’입니다.
3) 만일에 구원이라는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부자들만 구원을 받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구원받은 자들이 들어가는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고, 그냥 ‘돈의 나라’일 뿐입니다.
만일에 구원이라는 것이 인간적으로 머리가 좋고 학식과 학력이 많은 사람들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배울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과 무식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구원을 받은 자들이 들어가는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의 놀이터일 뿐입니다.
만일에 구원이라는 것이, 권력을 많이 가진 자들이 권력으로 얻는 것이라면, 힘없는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고, 그런 구원을 받은 자들이 들어가는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동물의 왕국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고, 희망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이 아무런 차별 없이 똑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똑같이 행복한 나라,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는 나라, 부유한 사람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는 나라, 잘난 사람도 없고 못난 사람도 없는 나라, 모든 사람이 똑같이 ‘천사들과 같아져 있는’ 나라입니다(루카 20,36).
4) 가장 높은 곳에 계시던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이고, 죄 없으신 분께서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것은 죄의 억압에서 인간들을 해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을 받으려면 인간들 쪽에서 진심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바치면서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은, 죽음의 억압에서 인간들을 해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해방을 얻으려면 인간들 쪽에서 간절하게 ‘영원한 생명’을 원해야 하고, 그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5)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5-9ㄱ)
바오로 사도는 인간적으로, 또 세속적으로 남들이 높게 평가하는 것들을 ‘쓰레기’ 라고 말합니다. 그런 것들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쓰레기들은 그냥 미련 없이 모두 버리는 것이 ‘신앙인의 참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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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주홍 티모테오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런데 이 찬미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하느님께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나타내 보이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흔히 철부지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철부지들에게만 드러내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시는 것이 뭐가 그렇게 감사한 일인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철부지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살펴볼 때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철부지를 희랍어로 네피오스(νηπιος)라고 하는데 사전적 의미로 젖먹이 어린아이 또는 배우지 못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철부지란 과거 유대 사회의 약자들인 시골뜨기, 촌놈, 천민이라는 의미를 가진 땅의 백성이라는 딱지가 붙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 곧 가진 것도 없고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사실은 예수님의 삶에서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처음 보여준 모습은 짐승들의 침이 가득한 구유 속의 아기였습니다. 공생활 중에는 머리 붙일 곳 없는 그런 가난뱅이의 모습이었고 돌아가실 때는 그 당시 가장 치욕적인 형벌인 십자가 형벌을 받은 극악무도한 죄인의 모습이셨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비천한 사람의 모습이었고 안다는 사람,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보기에 모자라고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비천하고 모자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그 처지를 잘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옛말에 유유상종이란 말도 있듯이 처지가 비슷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서로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첫 번째 바탕은 비천함이고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자신의 비천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본다는 것은 자신이 부족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족함을 느낄 때 우리는 부족함을 채워줄 무언가를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대상을 향해서 끊임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되고 그 대상만을 향해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삶을 살펴볼 때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셨지만 스스로 부족한 존재가 되셨고 그래서 아버지만을 바라보셨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것을 채워주시는 아버지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님을 체험하는 순간은 배부르고 등이 따신 순간이 아니라 우리가 힘겨움에 몸부림 칠 때라는 것을 많은 분들이 경험해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나의 나약함은 나를 무너뜨리지만 관점을 조금만 달리해 보면 우리가 무너졌기 때문에 주님을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무너지는 순간이 은총의 순간임을 깨닫게 되고 감사의 마음으로 기쁨 속에 머물 수 있게 됩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비참함과 어리석음, 상처와 슬픔을 바라봄으로써 우리와 함께 머무시는 주님을 느끼는 은총 속에 머무시길 바랍니다.
그러한 시간 속에서 예수님의 감사 기도를 우리의 마음으로 아버지께 봉헌할 수 있는 기쁨의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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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진호 안토니오 신부님]
요즈음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점점 바뀌고 있습니다. 복잡하고 힘든 도시생활을 떠나,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려는, 소위 자연친화적 스타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들이 자연 속에서 얻고자하는 삶은 “단순함” 입니다. 단순한 생활 방식으로 세상을 보다 쉽고 편하게 살면서,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즐기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식정보화사회는 점점 복잡․다양해지고, 여기에 적응해야하는 우리의 삶 또한 그렇게 바뀌어 갑니다. 신앙생활도 그렇게 변해 갑니다.
배우고 익혀야 할 것들이 더 많아지고, 행해야할 의무와 사명이 자꾸 늘어갑니다. 마음이 바쁘고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복잡하고 바쁜 이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단순함입니다.
복잡․다양해질수록 더욱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원리와 원칙을 알고, 그것에 충실하는 단순함만이, 복잡한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어린이처럼 모든 것을 단순하게 보고, 매사를 쉽게 생각하고, 편안하게 행동하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신앙생활은 더욱 그러합니다. 무엇을 더 많이,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라도 제대로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원리와 원칙을 알고, 그 정신과 본질에 따라 올바로 행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고, 의미로운 일입니다.
재산, 명예, 권력 같은 것을 이용한 화려함이나, 특별한 재주, 능력 지식 따위의 복잡함은 오히려 신앙생활을 어렵고 힘들게 하고,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올바르고 참된 신앙생활, 쉽고 편안한 신앙생활은 단순함에 있습니다. 그저 하느님과 친해지는 것입니다. 그냥 믿고, 사심 없이 받아들이고, 사욕 없이 그냥 머루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위하여 그 무언가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시시각각 다가오시는 그 분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모 품안에 평화로이 머무는 어린이처럼, 그저 단순하게 가만히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 주십니다. 그래서 내 삶이 쉽고 편안해집니다.
독서의 아시리아 왕처럼 복잡하게 “딴 맘먹고, 엉뚱한 일이나 꾸미면”, 그 만큼 머리가 복잡해지고, 그래서 자신도, 이웃도, 힘들고 괴롭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깨우쳐주십니다.
“단순하라! 그래서 어린이처럼 순수하라. 그러면 하느님도, 세상도, 인간도, 알 수 있고, 그 모두를 가질 수 있다.”
세상이 자꾸만 복잡해집니다. 그러나 모든 원리는 하나입니다. 세상사는 사람이나 신자나, 삶의 원리는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그냥 그 세상에 머무는 것입니다. 세인은 세상에, 신자는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냥 거기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그 사랑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신앙 스타일도 바꾸어야 합니다. 하느님 친화적 스타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 생활이 훨씬 더 쉽고 편하고 즐거울 것입니다.
“e~~~ 편한세상!!”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찬미 받으소서.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어린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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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최승일 스테파노 신부님]
<누가 아버지를 아는가?>
오늘 복음 말씀은 “누가 아버지를 아는가?”라는 말씀을 들려주심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해야 아버지 하느님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해 가르쳐주시고, 동시에 아버지 하느님을 아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 줍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하심으로써, 누가? 즉 어떤 사람이 아버지 하느님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다는 사람들”은 “예지의 소유자”라는 뜻이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지혜와 재주가 뛰어난 사람, 어려움을 교묘하게 뚫고 나가는 사람”을 뜻하는 데, 여기서는 아버지의 계시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만함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소박한 사람들은 아버지 하느님을 알고, 그 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문턱에 가까이 와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알고 그 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 있어서 “안다는 지식”과 “똑똑하다는 영특함” 그 자체를 죄로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안다는 것과 똑똑하다는 것을 예수님의 복음 앞에 내세우는 교만함을 단죄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러한 경우는 예수님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매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말씀 앞에 사람이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고, 자신의 똑똑함을 앞세울 때, 예수님의 복음은 그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복음이 무식함과 우둔함에 기초를 두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만일에 무식함과 우둔함으로 복음을 대한다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본당에서 가정방문을 다닐 때의 일입니다. 오랫동안 쉬고 있는 교우의 집을 방문하여 “이제 그만 쉬시고 다시 신앙생활 열심히 해 봅시다.”라고 권고하였더니 그 분의 말씀이 “신부님, 강요하지 마십시오. 나도 알만큼은 다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이렇게 책도 여러 종류로 다 읽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천주교. 개신교, 불교, 회교에 관한 책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참 책을 많이 읽으시네요. 그래도 성당에는 나오셔야죠?”라고 다시 권했더니만, “신부님, 내가 이렇게 많이 공부를 하고 있어도 아직 성당에 나가야 할 필요성을 도무지 못 느낍니다. 좀 더 공부해 보고 필요성을 느끼면, 그때 가서 나갈 테니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 친적 가운데 신부도 있고 수녀도 있으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저는 하도 기가 막혀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나왔습니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형제님, 그러면 뭐하러 성당에 나와서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냥 성경책 한 권을 사다가 읽고, 하느님께 직접 ‘당신을 아버지로 모실테니 나를 당신 아들로 받아주십시오’하면 되지, 부러 성당에 나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자기 구원은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지 친척 신부 수녀가 대신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랍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년이 지나고 나서 그분이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떻게 돌아가셨겠습니까? 자신이 고집하던 식으로 돌아가셨겠습니까?
그때는 유별나게 성당에 병자성사를 청하고서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가시고 말았습니다. 이런 경우가 사목자로서 씁쓸한 맛을 보게 되는 경우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허무하게 가고 마는 것을, 뭐가 그리 잘났고 똑똑하다고 하느님께 도전하다가 이렇게 생을 마쳐야 하는 것인지 생각에 생각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친애하는 평화방송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복음이 지혜와 영특함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지만, 복음 앞에서는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누구를 막론하고 온전히 의지하는 겸손한 자세가 우선적으로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을 알 수가 있으며 동시에 우리는 그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인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잘 관리하라고 맡겨 주신 선물이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마음, 즉 관리인의 자세로 겸손되이 자신의 시간이나 재능 그리고 재화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합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정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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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철부지들에게는>
하느님께서는 파란만장의 모세의 삶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펼치십니다. 그 시작은 장인인 미디안의 사제 이트로의 양떼를 돌보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도망 중인 그에게는 사막은 광활하고 미래의 꿈도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호렙 산에서 떨기나무에서 꺼지지 않는 불로 모세를 초대하십니다.
보통 사막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아 큰 나무가 없기 때문에 웬만한 덤불이나 잡목들은 어느 정도 타다가 꺼지는데 계속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고 모세는 하느님을 뵈려 그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모세가 목격했던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박해받는 삶에서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알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10)
모세는 타향에서 양치기의 신세인 자기 처지를 알고 있고 또 도망 나온 터에 당연히 용기 없는 말을 하는 것은 솔직한 고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11절)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함께 있으시겠다는 말씀과 그 자체가 표징이 되리라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가난한 이들이 받아들이는 것을 보시며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세상은 따지고 약삭빠르고 똑똑한 사람들의 것 같이 보입니다. 또 학교 교육도 인간성숙보다는 성과위주의 결과만을 따지며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위해 또 주님을 위해 현재 나의 삶을 철부지처럼,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도 못 미치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바로 이런 못나고 어리숙하고 셈이 빠르지 못한 사람들에게 심어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왕궁의 화려함을 떠나 사막에서 정처 없는 나그네의 삶을 사는 모세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원대한 구원의 일을 알려주시고 또한 펼치십니다.
우리의 사랑이신 주님께서도 당신의 십자가의 삶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현실의 가치관을 떠나지 못하고 주님의 뜻을 외면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뜻을 기쁘게 따를 준비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당장은 끝도 가능성도 보이지 않고 상황도 더 나빠지는 것 같더라도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에 귀를 기우리며 기다릴 줄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왕국으로부터 버림받고 사람들로부터 잊혀 진 미디안 땅에서 모세를 부르시는 것처럼 오늘도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펼치십니다.
세상은 나를 잊을 수는 있어도 주님께서는 나를 찾아내시어 당신의 소중한 소명을 주십니다.
세상은 지혜롭다는 사람, 무엇인가 웅켜 쥐고 있는 사람을 찾아 다니지만 주님께서는 철부지인 나를 찾아 손을 내미십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시시하고 아무것도 아닌 나를 미디안 땅이 아닌 바로 여기에서 나를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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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으로 깊고 아름답습니다.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요, 뒤 장면은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입니다. 오늘은 두 개의 절로 된 앞 장면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 장면의 예수님의 감사기도는 마치 겟세마니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니 기도가 수난의 길을 앞두고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42)라는 순명과 의탁의 기도라면, 여기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라는 확신에 찬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우주의 주권자로서 당신의 뜻을 자유롭게 ‘드러내 보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처럼 '감추시고'와 '드러내 보이시고' 라는 표현을 통해서, 영적 진리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배려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주권적인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드린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찬양을 나타내는 감격스런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말합니다. 곧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뜻과 섭리에 대한 완전한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감사의 이유를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은 결코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드러내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 해서 모두가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라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고 일하셨음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일하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8)라고 말씀하신 사도 바오로처럼 말입니다.
‘하늘나라의 장막에 머무는 길은 우리 안에 일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라.’(수도규칙 머리말 22-30 참조)고 제시하신 성 베네딕도의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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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마태 11,26)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그 드러내신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그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그 모든 것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시고 그 안에서 신비를 살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매달려 있으니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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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11,26)
<누가 철부지들인가?>
오늘 복음(마태11,25-27)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완전한 자기 계시이십니다.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완전하게 드러내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11,25-26)
'누가 철부지들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철부지는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 아니라, '악에 물들지 않은 사람, 거짓이 없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일들 안에서 임마누엘이신 하느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고,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사도이신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1코린8,1ㄷ-2)
하느님은 지식으로 알아지는 분이 아닙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지식으로 하느님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알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4,8)
그러니 철부지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가까이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철부지들이 우리 안에 많아져서, 지금 여기가 천국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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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땅을
어루만지는
비가 내립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이
나의 뜻과
다를지라도
그것이
가장 선한 것임을
믿는 마음입니다.
이렇듯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열린 마음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이가
참된 진리를
봅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께서 친히
드러내시는
은총입니다.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며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 열립니다.
신앙은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참된 지혜는
단순함 속에서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의탁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진리는
높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낮고 단순한
마음 안에
머뭅니다.
우리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쁨으로 여깁니다.
하느님의 뜻앞에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철부지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철부지의 믿음은
모든 것이
이해될 때가 아니라
이해되지 않을 때
"아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철부지들의
마음은
가장 가난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부유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철부지의 마음을
찾고 계십니다.
철부지의 믿음은
계산이 없고
조건이 없습니다.
오늘도
선하신
하느님의
뜻만으로
우리에게는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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