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과학관 - 파리 : 르 유니베르시앙세 예술 · 문화 · 과학이 합치되는 놀라운 상상력의 공간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3. 16. 13:35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세계의 과학관 - 파리 : 르 유니베르시앙세 예술 · 문화 · 과학이 합치되는 놀라운 상상력의 공간 인기멤버 2024.01.22. 08:32조회 3 댓글 0URL 복사 세계의 과학관 파리 : 르 유니베르시앙세 예술 · 문화 · 과학이 합치되는 놀라운 상상력의 공간 아름답고 화려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배고픈 군중을 향해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했다던 프랑스의 파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향수와 패션, 와인과 요리의 도시로 유명하다. 하지만 실제 18세기의 파리는 유럽에서 학문과 과학의 최고 중심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으로 가장 격동기였던 이 시기 동안 프랑스에서는 과학의 기초가 되는 대규모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특히 ‘산소’라는 기체의 발견으로 화학 분야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파리의 명물, 에펠탑 1666년에 루이 14세가 콜베르 수상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직한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국가 차원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 소수의 정예 과학자들은 월급과 함께 탄탄한 지위를 보장받았으며, 유럽의 가장 뛰어난 과학자들도 회원으로 초빙되었다. 국가의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은 덕분에 남아프리카로 대탐사를 떠날 수 있었고, 역사상 처음으로 1m의 길이에 대한 표준이 정해질 수 있었다. 파리를 뒤엎었던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은 지독한 신분 사회에 기초한 경제적 불평등이었다. 루이 16세 재임 기간 동안에 있었던 일련의 전쟁으로 국가 재정은 파탄이 났고, 민중에게는 과한 세금이 부과되었으며, 1778년 이래로는 흉작이 계속되었다. 특히 지역마다 무게를 재거나 길이를 재는 도량형의 기준이 달라 민중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고 원성은 높아 갔다. 도량형의 통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는데, 혁명정부의 정치가 탈레랑은 “미래에도 영원히 바뀌지 않는 것을 기초로 해서 만들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북극에서 남극까지 지구 자오선의 길이를 재고 그것의 2,000만 분의 1을 1미터로 정하자.” 이러한 취지하에 1791년부터 무려 6년간의 대탐사가 진행되었다. 유명한 천문학자인 장 밥티스트 들랑브르와 메생은 당대의 최신 과학기구를 마차에 싣고 각각 파리의 북쪽과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화학자 라부아지에는 “모든 힘이 완전히 다 소진될 때까지 임무를 다해야 한다.”는 충고를 던졌다고 한다. 혁명의 전야였던 당시에 두 사람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의심스러운 눈길을 받았다고 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도구들을 짊어지고 산이나 종탑에 올라가서 주위를 관찰하며 기록한 이들은 때때로 감옥에 갇혔고 부상도 당했으며, 심지어는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이들이 1798년에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파리로 돌아와 그 결과를 국제위원회(Internationa Commission)에 제출한 결과가 바로 1799년의 ‘미터원기’1)다. 과학기술에 우호적인 프랑스의 전통 속에서 태어난 곳이 바로 에콜 폴리테크닉(Ècole Polytechnique)2)이었고, ‘엔지니어(engineer)’라는 용어도 처음 등장했다. 프랑스가 세계 최초의 초음속 비행기인 ‘콩코드’를 개발한 나라이자 청정 원자력의 나라이면서 시속 500km로 평원을 거침없이 달리는 TGV(떼제베)의 나라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가 문화 예술 활동 후원을 의미하는 ‘메세나’를 과학 분야에도 폭넓게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정부는 과학 학술 연구를 후원하고 각 기관 및 재단에서 시행하는 메세나에 대해 세금 감면 등의 조세특혜를 주고 있으며, 기업의 과학 연구 메세나 활동에는 ‘연구 재단’이라는 특별한 법적 지위를 부여하여 보호해 주고 있다. 국립 기술 공예 박물관의 모습 파리에 위치한 ‘국립 기술 공예 박물관’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과학과 산업 기술 관련 박물관이다. 그레고아 수도사가 당시 신기술 제품을 일반 대중에게 소개할 목적으로 성당 내부에 마련한 이곳은 18세기 이전부터 만들어진 과학 기구와 각종 발명품 및 특허품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 이곳 자전거 전시관은 체인도 없이 그냥 언덕에서 아래로 굴러만 가는 것에서 시작된 자전거가 기술 개발을 통해 어떻게 진화했는가를 한눈에 보여 준다. 여기에서 ‘공예(arts)’라는 용어는 과학과 좀 동떨어져 보이지만 사실은 18~19세기의 역사적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기술(techne)과 예술(art)은 사실상 그리스 시대에 동일한 기원에서 출발했으며, 당시 공예는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포괄하여 수작업을 통해 얻어진 모든 산물을 의미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당시 새롭게 제작되었던 실험 기구나 각종 기계 발명품들은 모두 장인 정신이 발휘된 뛰어난 공예 제품이었고, 정교한 시계나 화려한 외양으로 장식된 망원경에서는 고가의 예술품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느껴졌다.3) 국립 기술 공예 박물관에는 측정 도구, 통신기기, 건축 기계, 교통수단 등 7개 분야에 걸쳐 3,000개가 넘는 발명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별한 전시물로는 18세기 화학 혁명을 완성한 라부아지에가 사용했던 다양한 과학 기구들을 전시한 ‘라부아지에 실험실’이다. 파리를 대표하는 최고의 과학자로서 프랑스 대혁명기 때 단두대4)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던 라부아지에는 원래 세금징수원이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법과 대학을 졸업하고 법률가로 일하던 그는 자신의 집에 별도의 실험실을 구비하고 왕성한 화학 실험을 수행했다. 하지만 당시는 무거운 세금폭탄 때문에 세금징수원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고, 또 혁명에 적극 가담했던 화학자 마라(Jean Paul Marat)와 개인적으로 원한 관계에 놓이면서 그의 삶은 힘들어졌다. 뒤늦게 그의 죽음을 접한 프랑스 수학자 라그랑주(Joseph Louis Lagrange)는 “그의 머리를 베는 데는 한순간이면 충분하지만, 그와 같은 두뇌를 길러 내는 데는 100년이 더 걸릴 것.”이라며 몹시 한탄스러워했다. 라부아지에의 실험실 라부아지에는 18세기에 출현한 기체화학자이자 전형적인 실험 과학자였다. 그는 28세 때 15살이나 어린 마리 라부아지에5)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13세 때부터 라부아지에 곁에서 실험을 돕기도 하고 책에 들어갈 그림과 삽화를 그려 주기도 했다. 제일 중요한 도움으로는 프리스틀리의 책을 불어로 번역하여 라부아지에에게 최신의 과학 정보를 제공했다. 실험 조교와 개인 비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었다. 그 결과 라부아지에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산소’를 발견하는 명예를 안게 되었고, 산소를 중심으로 기체들의 새로운 명명법을 제시함으로써 화학 혁명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유럽의 서로 다른 나라에서 활동하던 3명의 과학자가 거의 동시에 산소를 발견했다는 점이다. 과학사학자들은 이것을 두고 ‘시기가 무르익었다’라면서 과학적 발견이라는 것이 고립된 과학자의 천재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여건, 더 정확하게는 당시 화학 연구에서의 최신 흐름 등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연관됨을 언급한다. 스웨덴의 셸례(Karl Wilhelm Scheele)는 비록 그 기체의 이름을 산소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산소로 불리게 되는 기체를 맨 처음 발견하여 발표한 과학자였다. 그리고 영국의 프리스틀리는 그것을 ‘탈플로지스톤 공기’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플로지스톤이란 물질이 연소하거나 금속이 녹스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독일의 베허(Becher, J.J)와 슈탈(Georg Ernst Stahl) 등이 제안한 물질이다. 이것은 가연성이 있는 물질이나 금속에 포함되어 있다가 연소 시에 발생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리스틀리는 수은을 가열하여 붉은색의 산화수은을 얻고 밀폐된 수은 수조에 넣어 햇빛을 렌즈에 모아 가열시키면 산화수은이 수은이 되고 공기의 부피가 증가하는데, 이때 증가된 물질을 탈플로지스톤 공기라고 불렀다. 그는 연소 시 관여하는 기체가 산소라는 것을 발견했음에도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라부아지에는 그 기체를 맨 처음으로 산소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런데 여기서 상황이 복잡해지는 이유는 라부아지에가 자신이 발견한 기체를 산소로 확신하게 된 데는 당시 파리를 방문한 프리스틀리와의 대화를 통해서였다는 점이다.6) 하지만 역사는 라부아지에에게 산소의 발견자라는 명예를 부여하고 있다.7) 라부아지에는 산소라는 기체를 새롭게 명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소의 이름을 산소, 질소, 수소, 탄소 등으로 정하고 그런 다음 화합물의 이름이 그 자체로써 화합물의 구성 성분을 나타낼 수 있도록 정의했다. 예를 들어 탄산염 속에 들어 있다가(고정되어 있다가) 가열하면 빠져나온다는 기체여서 ‘고정된 공기’라고 불렸던 기체는 ‘산화탄소’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이름 덕분에 이 기체가 탄소와 산소의 화합물임을 분명히 보여 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대단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기체가 체계적인 틀 안에서 정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라부아지에가 이 혁명적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실험’이라는 과학적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연소 현상에서 일어나는 질량 변화를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당대에 가장 정밀한 천칭을 만들었고, 실험 전후의 모든 실험 기구와 내용물의 질량을 정밀하게 측정 했다. 수은을 가열하여 수은의 금속재(오늘날의 산화수은)를 만드는 연소 반응 동안에 발생하거나 소모되는 기체의 모든 양을 정확히 측정한 그는 반응 전후의 질량에는 변화가 없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로부터 그는 정확한 정량적 방법을 통해 반응에 참여하는 물질의 무게의 합은 생성된 물질의 무게의 합과 같다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제시하게 되었다. 또 다른 대표적인 전시물로는 바로 ‘푸코의 진자’8)가 있다. 「물리학 세계」 지에 ‘결정적 순간(Critical Point)’이라는 칼럼을 쓰는 로버트 크리즈 박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리학 실험 10가지 중 하나로 꼽은 푸코의 진자 실험 장치의 원본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진자에 작용하는 힘은 중력과 실의 장력뿐이므로 일정한 진동면을 유지해야 하지만, 진자를 장시간 진동시키면 자전 방향의 반대로 돌게 된다. 이는 지면이 회전하는, 다시 말해 지구가 자전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인데 프랑스 과학자 레옹 푸코(Jean Bernard Lèon Foucault)9)는 실험을 통해 지구가 자전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 사실 진자를 흔들면 그 진자의 진동면이 회전한다는 것은 당시의 많은 과학자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푸코는 이를 지구가 자전한다는 증거로 활용한 최초의 과학자였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지구가 자전한다는 사실을 교과서를 통해 배워서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구 밖에서 살펴보지 않는 한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는 없는데 바로 그것을 푸코가 밝혀낸 것이다. 1851년에 과학자 푸코는 “파리 천문대 중앙홀로 오셔서 지구가 회전하는 광경을 목격하시기 바랍니다.”라며 사람들을 불러 모아 지구의 자전을 증명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나중에 나폴레옹 3세가 되는 보나파르트 왕자는 그에게 팡테옹10)에서 진자 실험을 다시 해 보도록 지시했다. 푸코는 팡테옹의 돔 중앙에 길이 67m나 되는 긴 쇠줄을 매달고 포탄만 한 28kg의 추를 달아 진자 실험을 감행했다. 시대의 놀라운 볼거리가 마련된 것이다. 바닥에는 모래 둑을 쌓아 진자 아래쪽의 뾰족한 부분이 왔다 갔다 하면서 모래에 자국을 남기도록 했는데, 대여섯 시간 동안 진자는 시계 방향으로 60도에서 70도가량 움직인 흔적이 남았다. 지구가 회전함을 증명해 보인 희대의 멋진 실험이었다. 지금도 파리 팡테옹에 가면 중앙 홀에서 진자가 움직이면서 커다란 원 주위에 놓인 작은 인형들을 넘어뜨리는 것을 볼 수 있다.11) 국립 기술 공예 박물관 내부 이밖에도 국립 기술 공예 박물관에는 1799년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전지, 볼타전지가 전시되어 있다. 볼타전지는 화학전지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전지로, 작은 원판 모양의 은판과 아연판을 사이에 두고 소금물을 적신 판지를 번갈아 겹겹이 쌓아 만들어 맨 위와 아래를 전선으로 연결한 것이다. 이때 은판이 +극이 되고 아연판이 -극이 되며 소금물이 전해질로 작용하여 전류가 생긴다. 또 이곳에는 1642년에 파스칼(Blaise Pascal)이 세계 최초로 만든 계산기도 전시되어 있다. 12세 때 유클리드의 기하학에 몰두했을 정도로 수학에 뛰어났던 파스칼은 오트노르망디의 세금을 재분배하는 일을 도맡았던 아버지를 돕게 되면서 계산 기계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기계는 처음에는 산술 기계 또는 파스칼의 계산기라고 불리다가 나중에 파스칼린(Pascaline)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덧셈과 뺄셈을 할 수 있었고 반복을 통해서 곱셈과 나눗셈도 할 수 있었다. 파스칼의 기계가 세금을 계산하기 위한 실용적 목적을 내포하고 있듯 프랑스 역사, 특히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한 18세기에 저울이나 자와 같은 도량형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이슈였다. 이곳에는 각국마다 도량형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비교할 수 있도록 중국・독일・영국・터키・이집트 등의 물건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또 하나 1986년에 개관한 라 빌레트 과학산업관(Cite de Science et de Industries)은 파리라는 도시를 기억할 수 있게 하는 훌륭한 공간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전시물과 즐거운 체험 그리고 체계적인 과학기술의 원리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개관된 이곳은 1974년에 제20대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하고 추진한 랜드마크적인 대규모 건축물 중 하나다.12) 파리 외곽의 낡고 방치되었던 가축 도살장을 과학박물관으로 리노베이션한 이곳은 원래는 빈민가였다. 건축가 베르나르 추미(Bernard Tschumi)는 이곳을 자연과 만나는 휴식 공간이자 과학과 음악의 이벤트가 열리는 교류의 공간이면서 상상력과 미래를 생각하는 공간으로 기획했다고 말했다. 라 빌레트 과학산업관의 구체 극장, 라 제오드 유리와 콘크리트, 강철로 외장을 꾸민 라 빌레트 과학산업관은 우주와 물, 빛을 표현하고 있다. 지하에는 지중해에 서식하는 50여 종의 물고기가 헤엄치는 작은 수족관이 있으며, 3~5세 어린이가 만지고 느끼면서 호기심을 키울 수 있는 어린이 전용관 ‘라 시테 드 앙팡(아이들의 도시)’이 마련되어 있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형형색색의 색깔에 매료되는데, 마치 페인팅 등의 아트 전시관에 들어선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2층과 3층의 전시장에는 우리나라도 참여한 ITER(국제열핵융합 실험로)13)의 연구 성과 등 프랑스의 대표적인 기초과학 성과를 전시하는 물리학 분야와 우주과학 분야의 전시장이 마련되어 있다. 라 빌레트가 갖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고정된 내용으로 전시하고 운영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매달 혹은 특정한 주기를 정해 수없이 많은 특별전이 기획되는데 주로 에너지, 식량, 질병, 물 등과 같은 지구와 인류가 현재 안고 있는 이슈를 다루고 있다. 이곳 전시의 특징은 흥미와 과학 그리고 예술이라는 3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을 주제로 한 특별전의 경우에는 물의 중요성을 과학적 정보를 통해 알려 주기도 하지만, 컵에 탄산수를 부을 때 생기는 물방울의 기포를 소재로 찍은 예술 사진들을 함께 보여 준다. 자연스럽게 전시를 보면서 사람들은 물의 중요성, 물 자원을 보존하려는 노력, 가정에서의 실천 등 다양한 측면을 느끼게 된다. 태양을 주제로 한 특별전, 우주여행에 관한 전시회, 날씨 변화를 주제로 한 기후변화 특별전은 라 빌레트가 세계의 다른 과학관들과 차별되게 기획하고 순회하는 전시들이다. 이들은 과학이 우리 사회 속에서 수행하는 다양한 역할을 잘 보여 준다. 도시 파리의 정신을 만날 수 있는 세 번째 과학박물관은 2010년 라 빌레트와 함께 ‘유니베르시앙세(universcience)’라는 이름하에 통합된 ‘발견의 궁전(Palais de la dècouverte)’이다. 프랑스 최초의 여성 우주인이 관장으로 재임하고 있어14) 그 인기가 높은 이곳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장 페렝(Jean Baptiste Perrin, 1870~1942)이 1937년에 파리 엑스포 기간 동안에 개최했던 ‘발견의 궁전’이라는 임시 전시회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페렝은 “시민에게 과학 쇼를 보여 주고, 실험실을 공개함으로써 과학적 발견의 순간을 목격하도록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실험을 통한 과학 대중화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발견의 궁전 이 전시회는 다음 해에 그랑 빨레(Grand Palais)15)의 서쪽 건물에서 계속되다가 지금까지 이어졌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수학 · 물리학 · 천문학 · 화학 · 지질학 · 생물학 등 주로 기초과학의 원리가 전시된다는 것과 각 코너에서 데몬스트레이션 쇼와 설명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특히 과학을 전공한 이공계 박사급 인력들이 사이언스 미디에이터(science mediateur)로 활동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학급별로 방문한 학생들이 재미있는 실험도 하고 토론도 주고받으며 생생한 과학 교육을 경험할 수 있다. ‘31개의 보물을 찾아보세요’, ‘뭐든지 만져 보세요!’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있는 이곳에는 유명한 파이의 방이 있다. 파이의 값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3.14로 간략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소수점 이하 숫자가 704개나 이어진다. 그리고 이 방에선 그 파이 값의 비밀을 체험할 수 있으며, 빛에 관한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광학의 방도 마련되어 있다. 아이작 뉴턴이 프리즘을 사용하여 빛의 본성을 발견했던 실험을 재현하는 코너와 함께 프랑스의 물리학자 프레넬이 직접 제작한 프레넬의 렌즈가 전시되어 있다. 영국의 뉴턴이 프리즘을 사용하여 빛이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단색광의 혼합임을 밝혀냈고 또 빛의 입자성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프랑스의 프레넬은 빛의 파동성에 큰 공헌을 했다.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에 관한 논쟁은 한 세기 동안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영국에서는 빛의 입자성을 인정하고, 반면에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륙에서는 빛의 파동성을 널리 인정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 논쟁은 결국 1905년에 아인슈타인이 광양자설을 내놓으면서 빛이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는 이중적 특성을 가지고 있음으로 결론지어졌다. 오늘날 세계적 디자이너들이 앞다투어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는 도시, 한동안 와인 소비량이 급감하여 레드와인이 심장병 예방에 좋다며 와인 마시기를 적극 권장하던 도시,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도 빨간색 립스틱을 애용하는 도시, 그 도시가 바로 파리다. 이제 이 도시를 방문하거든 국립 기술 공예 박물관과 라 빌레트 그리고 발견의 궁전에 남아 있는 과학자들의 흔적을 경험해 보길 권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리 : 르 유니베르시앙세 - 예술 · 문화 · 과학이 합치되는 놀라운 상상력의 공간 (세계의 과학관, 2015. 10. 25., 조숙경) hanjy9713님의 게시글 더보기 좋아요0 이 글을 '좋아요'한 멤버 리스트 댓글0 블로그/카페 공유수0 공유 댓글 댓글을 입력하세요 hanjy9713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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