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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신 이에게 돌아가리라
요 7:25-36
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6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31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32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
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요 7:25-36 / [이분이 그리스도인가] 예루살렘 사람들 몇이 수군거렸다. `우리 지도자들이 죽이려고 벼르는 사람이 이 사람이 아닙니까?' 26) 그런데 그가 여기서 보란듯이 설교를 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아무 말도 못하니 결국 그를 참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27) 하지만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가 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는 갑자기 나타나기 때문에 어디서 오는지 아무도 모른다는데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다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28) 그때 예수께서 성전에서 설교를 하시는 중에 이렇게 외치셨다. `너희는 내가 어디서 났으며 어디서 자랐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누가 나를 보내셨는지는 모르고 있다. 그분은 참되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과 같이 있었고 또 그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를 잡아가고 싶었지만 아무도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아직 그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31) 성전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가 달리 온다 해도 이분이 보여주신 것보다 더 많은 이적을 보여줄 수는 없을거요' 하고 서로 말하였다. 32) [나를 찾지 못하리라] 군중들이 이런 분위기가 되어 있다는 것을 전해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합세하여 예수를 잡아들이라고 성전 경비병들에게 명하였다. 33)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여기 있을 시간도 잠시뿐, 나는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되돌아간다. 34) 너희는 나를 찾아도 찾지 못할 것이며, 내가 가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할 것이다.' 35) 이 말씀을 듣고 유대인 지도자들이 당황하여 수군거렸다. `이 사람이 어디로 갈 작정인가? 혹시 이곳을 떠나서 다른 나라에 사는 유대인들을 찾아가 가르칠 속셈일까? 아니면 이방인들에게 가려는 것일까? 36) 우리가 자기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한다느니, 자기가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할 것이라느니 하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예수님을 죽이려는 시도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찾습니다. 하지만 손을 대는 자가 없습니다. 그 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25-30)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25). 그런데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놀랄 일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나서서 예수님의 이런 행동을 제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정말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구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무리들은 어떻게 추론했습니까?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27)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요. 목수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듯이 사실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28-29)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고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신분이 무엇인지에 대해 무리 중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무리 중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억류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30).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31-36) 무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말합니다. 여전히 예수님의 신분은 무리들에게 궁금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한쪽을 선택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었고,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실을 아셨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시사하고 계십니다. 그 때까지 아무도 예수님의 생명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예정된 시간에 따라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심은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메시야가 오시길 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메시야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메시야가 이미 오셨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기회란 계속해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메시야가 오셨지만 그 분을 알아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있으되 존재를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들을 귀가 중요합니다. 볼 수 있는 눈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적용: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어떻게 해야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역할을 계속해야 합니까?
세상의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오직 능력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출신이나 신분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을 잘하는지 안 하는지에 대해 사람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 설 교 >
생수의 강
요 7:25-53 / 이동휘 목사
1. 예수께서 유월절 절기가 가까워 오자 더욱 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희생하실 때가 다가 오고 있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영원히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의 유례는 이렇습니다. B.C.1450경,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 애굽에서 노예생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애굽 왕 바로는 쉽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하나님께서 바로 왕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줄 수 있도록 재앙을 내렸습니다. 물이 피가 되는 재앙을 비롯해 흑암이 온 땅에 드리우는 재앙 등 9가지 재앙을 내렸지만 애굽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장자 죽음의 재앙’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든 초태생, 처음 난 것은 죽임을 당하는 재앙입니다. 그리고 이 재앙으로 인해 애굽 전역에 전무후무한 큰 통곡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출11:5-6) (5)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6)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 재앙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면 죽음의 사자가 그 피가 보이는 집은 그냥 넘어가 ‘장자 죽음의 재앙’을 당하지 않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재앙을 통해 결국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유월절 절기를 영원토록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12:6-7) (6)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출12:12-14) (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예수께서 이 유월절에 자기 자신이 세상 모든 인류를 죽음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희생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유월절을 온 인류가 지켜야 하는 영원한 규례로 세우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유월절이 가까워지면서 예수께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자 유대인들 상당수가 그를 지지하며 따르기도 했습니다.
(요7:31) (31)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그러나 대세의 흐름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어떻게 해서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월절이 가까워올수록 예수 그리스도와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 바리새인들 등과 정면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자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요7:25-27) (25) 그때 어떤 예루살렘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당국에서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냐? (26) 이 사람이 터놓고 말해도 그들이 말 한 마디 못하는 것을 보니 지도자들도 이 사람을 진짜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27)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실 때는 어디서 오실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는데 우리는 이 사람이 난 곳을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유대인들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 정말 알아야 할 사실들은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던 예수께서 이러한 말에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요7:28-29) (28) 그때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시던 예수님이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렇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이 따로 계신데 그분은 참되신 분이시다. 너희는 그분을 모르지만 (29)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은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 말, 특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말씀을 듣고, 감히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린다며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지만, 한 사람도 그분에게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아직 그분의 때, 아직 십자가에 죽으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 죽이려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음악가 모짜르트가 한 번은 어느 도시를 지나가다가 어느 집 문 앞에 걸린 한 간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모짜르트 연구소”라는 눈을 정지 시킬만한 간판이었습니다. 누가 자기를 연구하기 위해서 연구소를 내었구나 생각하고 그곳에 들어갔습니다. 마침 거기에 많은 음악 교수들이 모여 세미나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짜르트의 곡목을 나열 해놓고 누가 연구 발표를 합니다. “이 곡은 작곡할 당시 모짜르트가 어느 여인을 사랑하다가 실연을 해서 마음에 상처를 입고 비통한 마음으로 쓴 곡입니다.” 모짜르트가 뒤에서 가만히 듣고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가 손을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모짜르트는 그런 일이 없었고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 곡의 내용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그랬더니 적어도 대 음악가, 대 교수가 음악을 해설하고 있는데 당신이 무슨 근거를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느냐는 눈치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중요하지 않은 몇 가지 지식으로 예수를 아는 척했습니다만 사실은 정말 알아야 할 사실을 몰랐습니다. 다시 말해 가장 중요한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알고 연구하고 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도 자기들의 지식과 경험 수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도 바울의 눈의 비늘을 벗겨서 바로 예수를 볼 수 있게 하셨듯이 저들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바르게 알게 된 사람은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대답을 두고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는 고백을 할 수 있도록 하신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스스로 노력하고 연구해서, 아니면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영적 세계, 하나님의 세계는 하나님이 알려주신 것만큼만 알 수 있는 것이지 우리가 노력하고 연구해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과 유대인들은 계속 서로 동문서답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오순절 성령 강림한 다음에,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할 때, 마음의 문이 열려야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도 보면 루디아는 사도 바울을 만나 잠깐 이야기했는데도 당장 성령께서 마음 문을 여시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행16: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당장 자기 집을 열어놓고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3년씩이나 주님을 따라다녔지만 아직도 마음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볼 때 역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들에 진리의 영, 성령이 충만히 임하시어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그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바로 깨닫는 신령한 은혜, 영원히 사는 생명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생수의 강이신 성령이 충만하시어 생명의 말씀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그로 인해 유대인들의 예수께 대한 찬반양론이 분분한 가운데 예수를 체포해야한다는 의견이 대세로 기울자, 교권을 장악한 바리새파 사람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성전 경비병들을 보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조금만 더 너희와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가겠노라. 너희는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며 내가 있는 곳에도 오지 못하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 지도자들이 서로 말합니다.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자기를 찾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가? 헬라(그리이스)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헬라 사람들을 가르치겠다는 건가? 우리가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또 그가 있는 곳에는 우리가 갈 수도 없다니 도대체 그 말이 무슨 뜻일까?”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가 조금만 더 너희와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가겠노라. 너희는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며 내가 있는 곳에도 오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조금 있으면, 다시 말해 유월절이 되면 내가 온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희생되어 십자가에 죽겠지만, 다시 살아나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될 것인데, 나를 핍박하고 죽이게 되는 너희들은 그곳에 올 수가 없고 결국 멸망당하게 될 것이니라’는 뜻입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며 도대체 예수님의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란 말은, 헬라와 기타 외국에 분산하여 사는 유대인들을 의미하는데, 유대인들은 외국에 흩어져 이방인들과 함께 사는 동포들을 천하게 보고 멸시했습니다. 그러므로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란 말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업신여긴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즉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당하리라고 하신 무서운 말씀 앞에서도 두려워 회개할 줄 모르고, 오만한 태도로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멸시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외치십니다.
(37)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38)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마음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올 것이니라
이 말씀은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두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어떤 사람은 “이분이야말로 오실 바로 그 예언자이다!” 하고 말하기도 하고, 또 “이분은 그리스도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가 어떻게 갈릴리에서 나올 수 있겠느냐? 성경에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다윗이 살던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 말하기도 했습니다.(38-42절)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듯 한 사람들도 있고, 천민촌에 지나지 않은 갈릴리에서 그런 메시야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겠느냐며 멸시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어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계속해서 예수께서 “(37)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고 하신 말씀은 예수께서 인생들이 마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일찍이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므로 주께서 주시는 물이 예수 믿는 누구든지 받을 성령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요7:37-39)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 앞에 나와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은 이렇습니다.
“(사58:11)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은” 성령의 강수가 인간의 몸과 마음, 영혼에 흐르게 될 때 마른땅이 소성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약동하며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인생의 참된 만족과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에게 오라, 그리고 나를 영접하고 나를 믿으라, 그러면 나는 너희 속에다 나의 영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주리라. 그 새로운 생명은 너희에게 청결함과 만족함을 주고, 모든 좌절감과 만족할 줄 모르는 주림을 없이 하며, 너희가 항상 구하여도 얻어 보지 못한 그 새로운 생명을 주리라.’는 말씀입니다. 물이란 것은 그것 없이는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 없이는 사람이 살수도 없고 감히 죽음을 무릅쓸 수도 없습니다.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정결케 하고 강하게 하는 성령의 은사가 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생수의 강, 성령의 능력이 충만히 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 세계에서 원자력이란 언제나 존재해 있었습니다. 인간은 원자력을 발명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항상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와서야 인간은 이미 존재해 있던 원자력을 개발하고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엄청난 에너지를 생산하여 산업과 일상생활에 지대한 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언제나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코 그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참으로 알지 못하다가 오순절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홍수가 강같이 쏟아진 것은 오순절 이후였습니다. 그래서 “갈보리 없이는 오순절이 있을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알았을 때 비로소 참다운 성령을 알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었을 때 비로소 성령의 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참된 기쁨과 넘치는 만족, 그리고 폭발적인 삶의 능력을 베푸시는 ‘생수의 강’이 예수 믿는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한다. 나의 인생!
이준행 목사
통일교 문선명 교주가 가자마자 통일교외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이단 ‘신천지’가 오늘 신천지 전국체전인 ‘천국혼인잔치 대축제’를 서울에서 갖는다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교회 뱁티스트 신문 밑에 신천지를 안내하는 쪽지를 슬며시 놓고 가신 분이 있었습니다. 읽어보라고 놓고 갔기 때문에 제가 아주 자세히 읽었습니다. 몇 줄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제목이 ‘신약 계시록 성취 소식’입니다. ‘약속한 예언 계시록이 한국에서 이루어졌다. 기독교 세계가 끝나고 신천지 세계가 창조되었다’ 계시록은 철장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세상권세를 가진 어둠의 세력을 쳐부수고 생명을 가진 교회로 더불어 승리한다는 책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끝내고 신천지를 새롭게 한다고 해석하여 교회의 이름을 더럽힙니다.
좀 더 읽어보겠습니다. ‘이(이만희) 총회장을 인터뷰했던 한 신문은 “한국의 이만희 강사가 거짓 목자들(교회 목사들)에게 본때를 보였고, 넉다운 시켰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계시 설교모습을 본 사람들은 강사 이 총회장을 25세의 젊은 나이로 보았다. 그리고 당나귀를 타고 입성하자고 끌고 오기도 했다.’ 신천지 교주 이만희는 올해 82세입니다. 그런데 25세로 보였다니 젊음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처럼 종려나무 흔들며 환영하는 것을 흉내 냅니다. 그런데 어디를 봐도 십자가 보혈의 이야기, 성령충만함으로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고자 하는 삶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발자취의 핵심은 십자가 보혈과 그 보혈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당나귀 타고 종려나무 흔들며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십자가 보혈의 약속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좀 더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계시록을 가감하면 천국에 못 가기 때문에 추수되어 인 맞고 천민(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함이다’ ‘누구든지 믿지 못하면 선천(교회)과 함께 끝나고, 믿으면 후천의 나라(신천지)와 제사장이 되어 천국에 들어간다.’ 교주 이만희가 강해하는 계시록을 믿지 아니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교회와 함께 망하고, 교주 이만희의 계시록 강의를 들어야 신천지와 함께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신천지는 더럽고 추악한 사이비 집단이요,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를 왜곡하고 더럽히는 어두움의 집단입니다. 온갖 술수로 사람을 현혹시키고, 성경을 왜곡하고, 자신을 신격화하는 세력은 마귀의 집단입니다. 신천지에서 보내준 소식지를 읽으면서 제 속에 거룩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런 더럽고 추악한 사이비 집단이 활개치며 교회를 공격하는 이유는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 위에 바로 서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누구인가?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가?”를 알고 신앙해야 합니다. 복음에 바로 서서 이런 더럽고 추악한 사이비 집단이 옆에도 오지 못하도록 물리치시길 바랍니다.
복음을 훼손하고, 교회를 더럽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사단의 공격은 오늘 이 시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부활을 왜곡했고, 성령의 임재로 시작된 교회를 공격했습니다. 이 땅에서 진행되는 영적 전쟁이란 하나님의 교회와 더럽고 추악하고 교만한 어둠의 세력과의 싸움입니다.
25절,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6절,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는 예수님을 목격하고, 예수님을 공격하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 저 사람은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찾던 자인데 왜 죽이지 않지? 당국자들이 이 사람을 정말 그리스도로 여기는가? 저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저 사람을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다” 이렇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7절,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저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가?” 자기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아는 지식(외형적인)으로 보면 예수님은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갈릴리 나사렛에서 오셨습니다. 좋은 학교도 없고, 좋은 배경도 없는 시골입니다. 여전히 외모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28절,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을 알거니와” 첫 유월절에 한 청년이 성전에 나타나서 외쳤습니다. “성전을 헐어라. 내가 성전이다.” 깜짝 놀라서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구원의 복음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동안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복음의 소식을 외치는 이 청년이 누구인지 뒷조사를 해보니 갈릴리에서 온 예수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년이 지난 유월절에 이 사람이 또 나타나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쳤습니다. 더 나아가서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은 사람을 살리는 날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나타나면 죽이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황제의 도시라고 불립니다.
거기에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로마의 황제가 특별히 공들여 만든 황제의 도시에서 “로마의 황제가 왕이 아니라 주님이 왕이십니다.” 이렇게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성령의 사람은 이제 나를 그리스도, 살아계신 왕이라고 한다. 이러한 고백 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다.” 이런 훈련을 마치신 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 가자. 예루살렘으로...” 이렇게 해서 지금 초막절 중간에 예수님이 오셔서 성전에서 가르치길 시작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가르쳤을까요? “내가 그리스도다. 내가 왕이다.” 이 내용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29절,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갈릴리로부터 온 촌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무슨 뜻입니까? “나는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나를 보냈다. 내가 그리스도다. 내가 왕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유대인들이 눈이 뒤집어졌습니다. 입에 거품을 물었습니다.
30절,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그들이 당장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야 하는 십자가의 때는 예수님이 결정하십니다. 예수님은 아직 하셔야 할 일이 남아있었습니다. 다가올 유월절까지 기다리면서 세상을 바꾸어나갈 제자들을 좀 더 준비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이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기적을 이 땅에 나타낼 준비를 좀 더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에 어린양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므로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열심히 목회하시다가 어느 날 몸이 많이 불편해서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았더니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목사님, 암입니다. 상당히 진행이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목양실에서 엎드려 기도하다가 올린 글입니다.
걸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설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들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말할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볼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살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놀랍게도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을 나는 다 이루고 살았습니다. 놀랍게도 누군가가 간절히 기다리는 기적이 내게는 날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자 되지 못해도, 빼어난 외모 아니어도, 지혜롭지 못해도 내 삶에 날마다 감사하겠습니다.
날마다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고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나의 하루를 나의 삶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내 삶! 사랑합니다. 내 인생! 사랑합니다. 나!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지 고민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날마다 깨닫겠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나의 하루는 기적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습니다. 위대하고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배고프고 목말라야 합니다. 영적인 갈급함이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경험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가난하니까 거지처럼 갈급합니다. 목마릅니다. 예수님이 계셔야 살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 되신 것이 기적입니다. 부자 되지 못해도, 빼어난 외모 아니어도, 지혜롭지 못해도, 암이라는 질병에 걸려 있어도 지금 예수님이 살아계신 나의 그리스도요, 왕이시면 내 삶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나의 삶이지만,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는 나의 인생이기에 내 인생을 귀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의 가치는 예수님의 생명의 가치입니다. 내 인생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김영규 목사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오늘도 초막절 교훈의 계속입니다. 중심 주제는 여전히 예수님의 신분, 예수님의 출신, 예수님의 소재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절기에 모여든 사람은 두 종류입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주민입니다. 둘째는 멀리서 온 순례자들입니다. 본문 25절의 예루살렘 사람들은 바로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주로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래 예루살렘 사람들은 배타적입니다. 이때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25-26) 그들은 당국자들이 예수를 죽이려 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국자들이란 바로 예루살렘 공회원들입니다. 공회는 산헤드린이라고 불렀으며, 70-72명의 전직 현직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 율법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공회는 종교적 사안은 물론 사형에 이르는 사법권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회가 지금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나서 가르치고 있는 것을 그냥 놔두는 것에 대해서 불평했습니다. 큰 명절에 군중들 앞에서 당당히 가르치도록 놔두다니? 그들은 당국자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려는 꿍꿍이속이 있는 걸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27) ‘그러나’(αλλα)라는 말은 앞선 것과 강한 반대의 뜻을 나타냅니다. 당국자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지라도 자기들은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출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거주자요, 목수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참 메시야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이 홀연히 등장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27절 말씀에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말을 현재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οταν ερχηται(when comes), 그리스도가 지금 당장 나타나셔도 어디서 오시는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에 헤롯 임금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다가 물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오느냐? 그 때에 답하기를 그리스도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베들레헴 땅에서 메시야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두 살 미만의 어린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던 것입니다. 메시야는 신비하게 불현듯 나타난다(?) 아마도 이런 생각은 구약과(단9:25, 말3:1), 유대의 묵시 문학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유대 랍비 R.Zera는 가르치기를, “세 가지가 부지중 온다. 메시야, 하나님의 보내신 자, 그리고 전갈(scorpion)이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책에도 메시야가 오시는 것이 절대 비밀이라고 주장한 곳은 없습니다.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선입견이 예수를 배척한 이유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설프게 알고 있는 선입견, 기독교에 대해서 소문으로 알고 있는 지식 때문에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선입견으로 결정하지 마세요. 바로 알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참되신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다
나는 참되신 분이 보내셔서 왔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28) “너희들이 어떤 뜻에서 나를 안다고 하는지 나는 안다. 내가 나사렛 출신이요 요셉의 아들이라는 것을 안다는 뜻이아니냐?”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를 외면적으로 안다는 말에 동의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영적인 무식과 무지함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28-29) 주님은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습니다.
주님의 출신은 성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참이신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참이란 말은 진리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거짓이 없는 유일의 존재십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그 자신도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진리요...”(요14:6) 예수님은 출처가 불분명한 분이 아니라, 성부와 함께 계시고 진리이신 성부의 신성을 지니신 분입니다.
그 아버지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누구에게서 배우지도 않고(14절), 보낸 사람도 없이 제멋대로 와서 자기의 사상을 퍼뜨리는 종교인이 아닙니다. 유일무이한 참이신 하나님이 보내셔서 오신 분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청중들에게 양단간의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그 말씀을 믿는다면 전적으로 믿고 따라야 할 것이요, 믿지 않는다면 예수를 신성 모독죄로 처단해야만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의 출신을 성부 하나님으로 밝혔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하고 체포하는 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양단간의 결단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허위라면 전적으로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보내신 분이 참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예수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야만합니다. 어물어물 중간지대에 서서 따라가는 신앙은 없습니다. 24절에서 주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외모로 一見하면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영으로는 완전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육신적으로 볼 때에도 요셉의 혈통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마리아의 몸을 빌려 나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가 인간적으로 출생했다고 하지 않으시고 ‘그가 나를 보내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예루살렘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겉으로 조금 아는 것 때문에, 예수에 대한 모든 것을 알지 못하게 됐습니다.
지금도 예수에 대해서 아는 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인간 예수를 연구합니다. 성경을 종종 읽고 그 귀절을 곧잘 인용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의 신성만은 믿지 않으려합니다. 인간적인 얕은 지식이 영의 눈을 가리워버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세상의 초등학문과 철학을 버리고 변론을 버리라고 합니다.(골로새서2:8) 개똥철학을 버리고, 똥고집을 버리고, 지식의 교만을 버리고, 종교 지식주의를 버리세요! 그래야 비로소 영의 눈이 열립니다. 인간 예수만 보는 자는 아직도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요,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아멘 !
믿는 자와 죽이려는 자
예수님 말씀에 대하여 양극단의 반응이 나왔습니다. 첫 번째는 반대자들입니다. 공회를 중심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잡고자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초조하게 생각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더 이상 예수에게로 가기 전에 예수를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을 지키는 경비원들을 보내서 예수를 잡아 오라고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 감히 손을 대지 못합니다. 예수를 지지하는 군중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더 깊은 원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섭리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요한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연고’(30)라고 합니다. 제아무리 원수들이 음모를 꾸미고 수단을 부려도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한 때에 나시고, 하나님이 정한 일을 하시고, 하나님이 정한만큼 사시고, 하나님이 정한 시간에 십자가에서 죽게 되어있었습니다. 바리새인 때문에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고 사셨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31) 반대자들이 살기등등할지라도 상당수의 군중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주로 순례자들 중에서 믿는 사람들이 많았을 겁니다. 그들은 아마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야의 이적을 기억했을 것입니다.(사61:1-2) 불신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나는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예수님은 자신의 출신과 소재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어디서 오셨는지? 예수님은 어디 계신지? 어디로 가시는지? 이것은 요한복음의 중요한 이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33)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오셨고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십니다. 돌아간다는 말(υπαγω)은 거리를 오가듯이 단순히 ‘간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가시겠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조금 더 있다가 가시겠다고 했는데, 이때로부터 약 6개월 후에 주님은 체포당하셔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서글픈 永訣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永眠이나 멸절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평소 오고 가듯이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오시거나, 혹은 가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습니다.(8:14,13:3,33,36,14:4,5,28, 16:5,10,17) 우리는 아침에 회사에 출근하고 오후에 돌아옵니다. 비행기를 타고 세계 여행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만은 전혀 왕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 현세와 내세 사이에서, 지상과 하나님의 세계 사이에서 오시고 가십니다.
예수님의 소재지에 대한 말씀은 또 다른 오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34) 예수를 찾아도 찾을 수 없는 날이 오고,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려고 해도 갈 수도 없는 날이 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며, 어디에 계시기에 오지도 못할까요? 그래서 군중들이 수군거립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35-36) 저가 어디로 가기에 찾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리라 하는가? 혹시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에게로 가려고 하는가? 헬라인이란 비유대인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당시에 로마 세계는 정치적으로는 로마 제국이지만 문화적으로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헬라 문화권이었습니다. 본문에 헬라인에게 간다는 것은 로마 제국에 간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 널리 퍼져 살고 있었습니다. B.C.586년 바빌로니아에 패망한 이후로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졌습니다. 본토 귀환이 허용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세계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오늘 말씀에 ‘흩어져 사는 자들’란 말이 나오지요? 이 말이 그 유명한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α)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께서 로마 제국내의 디아스포라들을 찾아다니면서 회당에서 가르치려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당시의 로마 제국은 서로는 영국 스페인에서 동으로는 소아시아 아라비아, 남으로는 아프리가 북부를 포함하는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지중해가 로마 제국의 내부에 존재했으니, 아마 지금 유럽인들이 모인 EU보다도 훨씬 컸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제국 끝까지 간다면 찾아도 못 찾고, 오지도 못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신 말씀은 그런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주님이 가시고자 하는 ‘나 있는 곳’이란 어디를 말할까요? 첫째로는, 우리가 장차 들어갈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고 가십니다. 그러나 인간들에게는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커녕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조차도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와 죄로 물든 인간 세계 사이는 영원히 오갈 수 없는 큰 간격이 벌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큰 간격을 넘어서 인간 세상에 오셨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14:1-4) 이 말씀을 듣고 의심 많은 도마가 질문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아마 이 때에 도마는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장소를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요14:6-7) 주님만이 하나님의 품을 아시고 우리를 하나님 품에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을 불신하고 배척한 사람들은 결코 주님이 오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둘째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품입니다. 이것은 유대인 청중들에게 난해한 말씀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분명히 유대인들이 손을 대면 닿을 수 있는 자리에 서 계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곳에 계십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 품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목숨을 걸고 지키면서 거기 살고자했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품에 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잡아서 죽이든지 말든지 주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품에 계실 것이며, 이 하나님의 품은 유대인들이 별 수단을 쓰더라도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지금 우리 성도들 역시 두 세계에 동시에 살고 있습니다. 첫째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 세계요, 또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와 겉모양으로는 한 곳에 살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과 끊어져 사는 사람들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사랑하는 부부사이라도, 피를 나눈 부모 자식 사이라도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곳에 살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살을 섞고 서로 만지면서 대화하고 살아도 영적으로는 다른 세계에 격리되어 있습니다. 남편은 물질적 세상에만 살고, 아내는 하나님 품에 삽니다. 아들딸은 하나님 품에 있고 부모는 세상에만 삽니다. 서로 결코 오갈 수 없습니다. 매우 서운하게 들려질지 모르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주님이 오신 곳으로 우리도 가야 합니다. 하늘 천국입니다. 주님이 지금 계신 곳에 우리도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하나님의 품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을 연결하러 오신 분입니다. 주님을 통해 천국으로 가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천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 품으로 가는 길이 눈앞에 있는데, 유대인들은 그 길을 오히려 없애려고 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영원히 예수를 만날 수 없을 수밖에! 이것이 더 큰 비극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지척에 있는데 오고 가지 못하는 비극적인 사람들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떠나시기 전에 믿으라
예수님을 믿든지 말든지 자유입니다. 그러나 믿는 것도 때가 있고 기회가 있습니다. 때가 지나면 끝장입니다. 주님은 때에 대해서 경고 하십니다. 지금은 유대인들의 눈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만 곧 떠나십니다. 유대인들은 인류 중에서 특별히 축복 받았던 백성들입니다. 특별히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알고 찾아 와서 경배했던 동방 박사들이나 목자들은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80년 이상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메시야 보기를 기도하던 안나 여선지가 예수를 본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메시야의 앞길을 예비하러 와서 메시야를 기다리던 세례 요한 앞에, 성령이 임하시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오면서 나타나신 예수를 본 감격이 어떠했겠습니까? 오늘 우리 두 눈으로 예수님의 환상이라도 본다면 소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날마다 성전에서 회당에서 거리에서 예수님을 친히 보고, 그 가르침을 받았던 유대인들은 복 받은 백성임이 틀림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오늘 우리 눈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신다면 얼마나 열광하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나 바울은 평생 그 들 앞에 나타나신 감격을 기억하면서 사도직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 예수를 눈앞에 두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 가르침에 감탄하고 그 이적에 놀라면서도 예수를 메시야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고집과 종교적 전통만을 고수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너희 앞에 메시야가 보일 때에 믿어라. 때가 지나면 나는 떠나갈 것이요, 그 때에는 메시야를 찾을 기회도 없고, 찾기도 힘들리라” 그 말씀 그대로 유대인이 배척한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구주가 되셔서 지금도 이방인들 사이에서 역사하십니다만, 오직 유대인들에게는 멀리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세상 종말이 올 때가 되면 유대인들이 돌아오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서 멀어져 있습니다.
오래 전에 아모스 선지자는 참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의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암8:11-13) 솔로몬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손을 펴서 우리를 부르실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잠1:24) 그 때를 놓치지 마세요. 이웃 사람이 전도하는 소리를 인간의 소리로 듣지 마시고, 남편이나 아내나 심지여는 어린 아이가 전하는 소리라도 인간의 소리로 듣지 마세요. 주님의 음성은 여러 가지로 들려옵니다. 그 때가 지나면 두 번 다시 기회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직 주님의 소리가 교회를 통해서 들려 올 때에 교회에 나오세요. 역사가 흐르다 보면 이래저래 복음의 기회는 멀어져갑니다. 오늘날 유럽 사회나 미국이나 행복한 나라요, 언론의 자유가 마음껏 보장된 나라들입니다만, 복음의 소리는 점점 감추어져갑니다. 먹어서 배불리고 학문이 발전하다보니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합니다. 요즘 세상의 이슈가 뭡니까? 정치, 경제, 범죄, 엔터테인먼트 들입니다. 세상일에는 관심이 많으나 복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가 늘어나도 복음의 소리는 점점 작아집니다. 제가 보기에는 구원의 기회가 점점 우리 민족에게서 멀어져가는 것 같습니다.
아직 나를 향하여 예수를 전하는 소리가 들려질 때에 주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결단을 내리세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 인생을 다 맡기시기를 축원합니다.
개입하시는 하나님
요 7:25-30 / 임덕순 목사
여러분이 요즘 하시는 일은 잘 되나요? 그 일이 직업이라면 그 일을 하게 된 것은 처음부터 꿈 꾸어온 것이었습니까? 다 말하자면 사연이 많지요? 우리가 살다 보면,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일이 풀려갈 때가 있습니다. 자기가 하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전혀 생각지 않은 일이 일어나서 엉뚱한 방향으로 온 것을 발견하지만 그렇게 된 이유를 알 수는 없습니다. 불가항력적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청년은 유학을 가려고 오랫동안 준비하고 있었는데 전혀 예상치 않은 일로 그 계획이 좌절되면서 현재의 직장에 취직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때 유학을 가지 않은 일이 도리어 잘 된 것 같다고 말합니다. 이런 일들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쩌다가 일어난 우연일까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을까요? 아니면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일까요? 우리 삶에는 자주는 아니지만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 중의 하나인 초막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와 계십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사람들은 뭘 하고 있었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번에 올라오면 잡아서 죽이자고 결의하고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마치 팀스피릿 훈련 같은 것을 할 때 미리 도상연습을 해 두는 것처럼, 그들은 완전히 준비를 마치고 예수님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중에는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요란하게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살짝 혼자서 올라가셨다고 성경에 써있습니다. 그리고 그 명절의 중간이 되기까지 조용히 계시다가 중간쯤이 지났을 때 성전에 가셔서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이고 가장 이목이 집중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거기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분을 잡아 죽이려고 계획을 세워놓은 사람들은 찾던 사람이 제발로 나타났으니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그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서 가르치시는데도 아무도 예수님을 체포하러 나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번 작전은 보류하라고 지시한 것도 아니고, 작전이 취소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예수님을 잡지 못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모두가 저 사람을 잡아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나타나면 잡아 죽이려고 계획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는데도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 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리스도인줄 알았는가?”(25-26)
예수님은 보란 듯이 성전에서 계속 말씀을 가르치시는데도 예수를 잡아 죽이려던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자다가 가위에 눌린 것과 같았습니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정지상태가 된 것입니다. 마치 비디오를 틀다가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서 화면이 멈춘 것처럼, 아무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정지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는 백성들에게 거리낌 없이 가르치실 수가 있었고, 때가 되기 전에 죽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정지가 없었더라면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은 인간들의 악한 의도 때문에 좌절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천지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세상의 만사가 인간의 악한 의도대로 되도록 놔두시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세상의 만사를 당신의 뜻대로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개입은 우리의 삶에도 나타나는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당신의 손길로 우리가 잘못 가는 길을 막기도 하시고 우리 앞에 막힌 담을 헐어내기도 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런 체험을 하신 적이 없으신가요?
예수님의 생애에는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며 개입하시는 손길의 흔적이 많이 나타납니다.
눅 4:29-30에 보면, 가버나움 회당에서 당신을 거절하는 유대인들을 책망하자, 그들이 예수님을 높은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고 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의 행동이 갑자기 중지되었고, 예수님은 그들과 싸우지 않고 유유히 그들 사이를 빠져나오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사람들의 행동이 갑자기 중지되었고 예수님은 아무 저항 없이 유유히 그들 사이를 지나서 나오셨다는 설명입니다.
또 간음을 하다가 잡힌 한 여자를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려고 예수님께로 끌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하시자 그렇게도 살기 등등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에 압도당하여 아무도 돌을 들어 치지 못하고 모두가 슬그머니 돌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고 말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또 요18:4절에 보면, 주님이 밤새워 기도하시던 생애 마지막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자, 검과 몽둥이를 가진 사람들이 체포하러 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나사렛 예수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다.’라고 하셨는데, 그 소리를 듣는 순간에 그들이 땅에 엎드러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몽둥이가 그들을 쳐서 쓰러뜨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스스로 체포되시기 까지 그들이 두려워서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연입니까?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사람들이 하는 일 가운데 개입하신 흔적들입니다. 사람들의 악한 의도가 어떤 선을 벗어나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놓으시고 있다가 그 선을 넘으려고 하면 즉시 개입하셔서 막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악한 계획을 세우는 것을 어느 선 까지는 보고만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번 초막절에 예수를 잡아 죽이자고 준비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을 때, 하나님은 즉시 개입하셔서 그들이 손을 대지 못하게 가로막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러 오신분인데 왜 죽지 못하게 막으셨을까요? 예수님에 관한 구약의 예언을 보면, 예수님은 유월절에 죽은 어린양과 같은 역할을 하러 오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던 밤에, 애굽의 장자를 다 죽이셨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정은 양을 대신 죽여서 그 피를 문에 바르고 고기를 구워먹었기 때문에, 양이 대신 죽은 가정은 죽음을 면하고 도리어 구원을 받게 하셨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죄로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받아서 망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의 죽으심을 믿는 사람은 구원하신다는 구원진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죄를 짊어지러 오신 예수님은 초막절에 죽으시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에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30절에 보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유월절 명절에, 유월절 양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유대인들이 초막절에 죽이려고 하니까 개입하여 가로막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방해 속에서도 당신의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지난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살아오면서 오늘까지 모든 것이 여러분이 계획하고 뜻한 대로 되어졌습니까? 그렇게만 되었더라면 오늘의 여러분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우연 같은 일로 인해서 여러분의 인생길이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사실을 보면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오늘의 형편과 나의 장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손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잠언 16:1절과 9절에서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뜻을 세우고 추진하던 일이 어떤 변수에 의해서 길이 틀어졌을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성취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분노하며 누군가를 원망하고 좌절해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더 나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잡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가로막고 계시구나.”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일을 허락하기도 하시고, 가로막고 방향을 돌리기도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두가 지도자들이 왜 저러고 있을까하고 궁금하게만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손이 없는 하나님일 뿐입니다.
창 11장에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자기들의 뜻대로 살아보려는 생각으로 시날 평지에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은 탑을 쌓자고 결의하고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느 정도까지 쌓는 것을 지켜보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어 버리심으로, 갑자기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은 바람에 더 이상 탑을 쌓지 못하고 흩어지게 만드셨습니다. 인간끼리 뭉쳐서 하나님께 대항해 보자는 악한 의도를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무너뜨려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세우는 악한 계획도 어느 정도 까지는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위험수위에 이르면, 반드시 개입하셔서 인간들의 계획을 뒤집어엎음으로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엡 1장에서 바울 사도가 하나님을 지칭하기를 “모든 것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 하시는 분”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원하는 대로 하시는 분입니다.
27절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려고 한 이유가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이것이 이유였습니다. 예수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신비한 분이 아니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메시야는 사람들이 알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고 신비하게 오신다고만 생각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 말라기에, 주께서 홀연히 성전에 임하실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자라셨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도 그들이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메시야일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메시야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들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는 홀연히 오신 분이었습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법인 처녀의 몸에 잉태하여 하늘의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나타나신 신비이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분을 낳은 여자인 마리아를 안다는 것 때문에, 그분이 자라신 동네인 나사렛을 안다는 이유 때문에, 그분은 홀연히 오시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의 출생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었나요? 처녀인 마리아에게 천사장 가브리엘이 나타난 것을 그들이 알기나 합니까? 그분이 한 아이로 태어나셨지만 그의 근본은 태초부터 계셨으며, 그가 육체를 입으셨지만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신 것을 알기나 했습니까? 그들이 아는 것은 지극히 피상적인 것뿐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성경을 조금만 더 깊이 보았더라면 그리스도가 홀연히 오신다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성전 마당에 내려온다는 말이 아니라, 지극히 높은 하나님이 추하고 더러운 인간 세상에 찾아오신다는 말이었습니다. 최후의 심판 날에 심판자리에서나 만날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 오셔서 함께 사시면서 우리의 문제에 개입해 주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임마누엘 즉 인간들의 삶의 현장에 함께 하려고 찾아오신 사건이야 말로 아무도 상상치 못했던 홀연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예상이 불가능한, 홀연한 사건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우리의 죄를 해결하고 우리의 힘든 문제, 긴급한 상황에 개입하시려고 와주신 임마누엘이 홀연 중에 홀연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오신 후에는 믿는 사람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더욱 빈번해졌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삶을 철저하게 도우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이 말씀이 오늘 주님의 개입을 보증하는 말씀입니다.
28-29절에서 우리의 지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어디서 온 것을 너희가 안다고 했느냐? 그래, 내가 베들레헴에서 났고, 나사렛에서 자란 것은 너희가 알 것이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는 그분을 모르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서 내가 왔느니라.” 이런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그들이 모르는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아는 하나님을 우리는 잘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길 가다가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교환한 사람도 나를 안다고 할 수 있겠지만, 평생을 함께 산 아들 만큼 잘 알 수는 없듯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알듯이 하나님을 알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아는 하나님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아십니까? 일본 교인들은 하나님을 가미사마 라고 부르는데, 가미사마라는 이름은 일본 사람들이 섬기는 여러 신들의 이름과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신자들이 하나님을 가미사마라고 부를 때 떠오르는 하나님 개념은, 여러 신들 중에서 가장 높은 신 정도로 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같은 하나님을 믿지만 천주교를 통해서 알려진 하나님과 유대교를 통해서 알려진 하나님과 성령이 말씀하는 하나님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를 계시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아들을 통해서 아는 방법입니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을 제대로 알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아야 하지 자기 지식이나 연구로는 알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출생의 비밀입니다.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는 2000년 전에 마리아가 낳은 사람이 아니라 마리아의 조상 아담이 만들어지기 전에, 영원한 하나님이 낳으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사람이 낳은 사람의 아들로 보였지만, 그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셨고, 천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므로 그분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그 놀라우신 하나님이 짜잔 하고 세상에 오신 이것이 세상에 가장 홀연한 사건이고 가장 고맙고 복된 사건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이 왜 인간 세상에 오셨습니까? 바로 우리들의 비뚤어지고 헝크러진 삶에 개입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지은 죄 때문에 영원히 망하게 된 인간들을 그 형벌과 지옥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이고, 죄악이 더 이상 인간을 망가뜨리지 못하게 막아서 의로운 길로 인도하고 더 나은 삶으로 방향을 틀어주기 위해서 우리 곁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사람들의 힘으로 되는 것 같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 뜻대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힘이 나타난 흔적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천지 만물 만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현상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악에게 맡겨 놓고 방치하시지 않고 간섭하시기 때문에 모든 일의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고 맙니다. 악은 강해보여도 결국 심판을 받게 되어 있고,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고 살면,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도 악한 일에 가담하다가 망하게 됩니다. 나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무너질 것이 뻔한 어리석은 길로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이 신비이지만, 신비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안에 성령이 들어오셔서 그의 일생을 도우시고 지도하시는 사실도 신비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욱 빈번한 하나님의 개입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고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멀리 계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그리고 그분이 보내신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이미 임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지켜보시며 순종할 때 기뻐하시며 우리의 길을 보호하고 인도하시지만, 거역하는 길로 갈 때는 악한 계획을 저지하고 가로막으십니다. 이 사실을 아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가로막힐 것이 뻔한 악한 길을 가지 말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도록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고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가려던 길이 가로막힐 때 원망할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더 나은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가로막으신 것을 도리어 감사하면서 주님의 인도를 기다리는 겸손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더 나은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는 것, 알아야 할 것, 모르는 것
안효관 목사
제가 좋아하는 기도문 가운데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 1892-1971)의 기도문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내가 변화 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주옵시고,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일에 대하여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그리고 이 두 가지 차이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로운 마음을 주옵소서.”
이 기도문에서 니이버는 세 가지를 간구합니다. 하나는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섭리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달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바꿀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회피하는 비겁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바꿀 수 있는 용기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세 번째 내용인데, ‘내 힘으로 바꿀 수 없기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은 무엇이고, 내 힘으로 바꿀 수 있기에 용기를 내어 바꿔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세 번째 내용이 참 마음에 와 닿습니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이 무엇이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만 알아도 우리는 인생을 참으로 멋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많이 아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고, 알지 않아도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많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사실 인간이 아는 것이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독일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Hermann Ebbinghaus, 1850-1909) 교수가 주장한 ‘망각곡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16년 동안 ‘사람이 보고 들은 것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는가’를 실험, 연구하여 발표했는데, 사람의 기억은 시간에 반비례한다는 망각곡선을 그려냈습니다. 그의 실험에 의하면, 보통 사람은 자기가 듣거나 경험한 것 가운데 절반 정도를 1시간 이내에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면 약 70%를 잊어버리고, 1달이 지나면 80% 정도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잠을 자고 나면 어제 배웠던 것이나 보았던 것 가운데 10개 중 7개는 잊어버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설교를 듣고 예배 끝나고 나가면서 이미 절반 이상은 잊어버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들어도 내일쯤 가면 70% 가량을 잊어버립니다. 내일쯤 가서 ‘어제 들었던 말씀이 무엇이었더라?’ 그런 생각하는 것이 절대로 이상한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듣고 항상 잊어버려야 하는가? 잊어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만 생각하고 다 잊어버려도 되는가? 에빙하우스 교수에 의하면,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반복학습을 해야 합니다. 듣거나 배운 것을 10분 후에 반복하면 하루 동안 기억되고, 하루 후에 반복하면 1주일 동안 기억되고, 1주일 후에 반복하면 한 달 동안 기억되고, 한 달 후에 반복하면 6개월 동안 기억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들었던 말씀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는 반복해서 자꾸 들어야 합니다. 설교 테이프나 CD를 구입해서 들으면 오늘 이 시간에 한번 듣고 끝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말씀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복하지 않아도 오랫동안 기억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어떤 일은 20년, 30년 전의 일들도 잘 기억됩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어렸을 때 겪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오래 전 일인데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일들이 있으시지요? 그런데 문제는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오랫동안 기억되는 일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사건들입니다. 가슴 아팠던 일들, 굉장히 후회스러웠던 사건들, 내 마음에 큰 상처를 안겨주었던 일들은 잊어버리고 싶은데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지워지지 않는 부정적인 기억들을 지우고, 기억해야 할 것들을 기억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지혜롭게 사는 비결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자연스럽게 기억되는 부정적인 일들보다 좋은 일들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하루 빨리 잊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맞는 말입니다.
어떤 일을 하다보면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도 있고, 내가 하는 일에 방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그런 사람을 빨리 잊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만 없었다면 내가 이렇게 힘들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저 사람 때문에... 저 사람만 아니었다면...’ 이런 생각을 가지면 힘든 문제 앞에서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고 맙니다. 그런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성공하는 길에서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높은 산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일에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고 나에게 손해를 끼쳤던 사람을 빨리 잊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이기는 힘, 평상심』<장쯔안(張世安) 저>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싫어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데 1분 1초도 쓰지 말라.”
여러분,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 가운데 정말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제목의 책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로버트 풀검) 책 제목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필요한 것은 유치원에서 배운 정도로 다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유치원에서 배운 대로만 산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참 멋진 세상이 될 것입니다. “정직하라, 거짓말하지 마라. 질서를 지켜라. 남을 배려하고 해를 끼치지 마라. 인사 잘 해라. 밥 먹을 때 감사해라.” 다 유치원에서 배운 것입니다. 우리가 이대로만 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아는 것이 있는가 하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정말 알아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알 필요가 없는 것을 아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알 필요가 없는 것을 아는 것으로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절인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행각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는 추수감사절과 같은 축제의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죽음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예수님의 목덜미를 움켜쥐려고 점점 압박해 오는 분위기였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서로 말합니다.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 정치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런암암리에 진행된 음모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상황을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그런 사실을 아셨습니다. 7: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실 것처럼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19절 말씀에서는 사람들 앞에서 그런 음모를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어찌하여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느냐?”
이런 상황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의 마음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왜 종교 정치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할까? 정말 메시야이기 때문에 죽이려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26절) 그러나 한 가지가 ‘예수님이 메시아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잠재우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어디 출신이라는 것을 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7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예수님)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이상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마치 백마 탄 왕자처럼 신비롭게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그들이 배웠던 랍비의 문서들이나 묵시 문학 속에는 ‘메시야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날 것’이라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신비로운 존재로 갑작스럽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요셉이라는 목수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마리아와 그의 동생들이 누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알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메시아일 수 없다’고 판단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안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되고만 것입니다.
잘못된 지식이 바른 지식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입니다. 조금 알고 있다는 것이 정말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혹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바른 신앙을 갖고 바른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고 있지 않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흔히 우리가 ‘오해’라고 말하는 잘못된 지식과 기억의 단편들이 우리의 신앙을 방해할 때가 많습니다.
요즘 인터넷에서 기독교에 대해 비난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런 잘못된 지식, 잘못 알고 있는 것들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어떤 한 단편만 보고서 교회를 재단해버립니다. 어떤 한 두 사람의 잘못된 행동 하나를 보고서 모든 목사님들이 다 거짓말을 하고 위선적이라고 판단해버립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치부해버립니다. 잘못된 지식 하나가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조차 모릅니다.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작은 지식 하나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은 지식 하나로 전체를 판단하려고 하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리모컨 시대가 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지긋하게 관찰하고 깊이 알아보고 판단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배 딱 한번 참석하고, 설교 딱 한번 듣고 나서 ‘아 이 교회는 이런 교회구나. 아 이 목사님은 이런 목사님이구나.’ 하고 판단해 버립니다. 처음 와서 설교 들었는데 때마침 그 때 목사님께서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한다면 ‘이 교회 목사님은 헌금을 강요하는 목사님이구나. 매주일 헌금설교만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해버립니다. 1년에 딱 한 번 헌금에 대해서 설교했는데도 말입니다.
전에 그런 이야기를 한 번 들었습니다. 어떤 신학생이 우리 교회 주일 낮예배에 한 번 참석했다고 합니다. 예배 딱 한 번 드리고 나서 돌아가서는 ‘남성교회는 배부른 교회’ 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 듣지 않고 다른 분을 통해서 들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런 사람이 신학교 졸업해서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목사가 되려면 더 많이 배워야 하고 더 많이 겸손해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새로운 교회에 와서 첫인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받은 첫인상으로 교회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판단할 수 있다고 해도, 좀 더 알아보려는 노력도 있어야 하고,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단정 짓고 다른 사람에게 떠벌리고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가벼운 짓이라는 것쯤은 생각할 수 있어야지요.
우리 교회가 다 좋은 점만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도 여느 교회들처럼 부족한 것이 있고 잘못한 것도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도 나름대로 실수가 있고 단점이 있는데, 훌륭하지 못한 저에게야 얼마나 단점이 많겠습니까? 그러나 잘못된 부분 하나를 보았다고 그것으로 그 교회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아는 것보다 알아야 할 것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 가운데는 부정적인 것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는 지식들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왜요? 그런 지식은 우리가 알려고 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고, 그런 것은 알려주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부정적인 이야기 - 남을 헐뜯는 이야기, 남의 허물을 알려주는 이야기, 다른 사람이 실수한 이야기가 자꾸만 내 귀에 들려옵니다. 교회에 대해서, 목사님에 대해서, 또 성도들에 대해서 비난하고 흉보는 이야기가 참 많이 들려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런 이야기는 내 생각 속에 잘 각인됩니다. 기억이 잘 됩니다.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이야기가 내 신앙을 망가뜨리는 암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부정적인 이야기를 자꾸만 듣다 보면 교회가 교회답게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고 가식적인 이야기로만 들려집니다. 성도들을 만나도 기쁘고 반가운 것이 아니라 위선적으로 보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머리 속에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기쁜 마음으로 교회에 올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인생을 은혜 가운데 믿음의 승리자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잘못된 지식, 잘못된 생각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자꾸만 지워버려야 합니다. 부정적인 이야기들과 부정적인 지식들이 내 머리 속에 남아 있지 않도록 자꾸만 벗겨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잘못된 지식이나 생각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좋은 생각들로 우리의 가슴과 머리에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는 용량이 제한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한정된 용량에 좋은 생각, 좋은 지식, 좋은 이야기들로 채우면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생각들과 우리의 신앙과 삶을 좀 먹는 좋지 않는 지식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행복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매일매일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내 주변에 있는 분들 잘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정적인 생각이나 좋지 않는 것을 많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행복하게 신앙생활 하는 분들이 있는가 말입니다. 행복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기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말합니다.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들의 생각과 기억 속에 좋은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좋은 경험들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1절에 보면,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메시아)가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그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좋은 일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신 분이라면 분명 메시아일거야. 하나님께서 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렇게 많은 일들을 행하셨는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안 좋은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능을 행하신 일들을 직접 목격하고서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폄하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무리를 미혹하는 사람이라고 소문을 내기도 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귀신이 들려 앞을 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메시아)라고 생각한 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이 사람을 고쳐주었다’고 말합니다.
종교지도자들과 힘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와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그 종교지도자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에 대해서 안 좋은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31절에서 예수님을 믿었던 많은 사람들은 잘못된 소문이나 이야기에 마음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좋은 일들을 더 많이 기억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는 소문이 들리자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 등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너희들이 나를 잡으러 왔지만, 조금 후에 나는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그 때에는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날 수 없을 것이고,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오지도 못할 것이다.’(33-34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후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셔야 할 때가 곧 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많은 유대인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헬라로 도망가려고 하시는가? 아니면 어디로 피해 숨어버리고 하시는가?’(35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당시 이런 예수님을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그게 무슨 말씀인지 몰랐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어디론가 피신 가시려나 보다.’ 라고 생각한 것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지만, 우리가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알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다 알 수 없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가 다 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또 모르는 것이 많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께 직접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직접 보았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떠나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 많다고 예수님을 포기하고 가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를 먹어야 영생한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한다. 내 살을 먹지 않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영생이 없다.’ 그렇게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야 지금 복음의 눈으로 그 말씀들을 해석해서 들으니까 그 말씀의 뜻을 알지만, 예수님께 직접 그 말씀을 들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식인종도 아닌데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말씀이 너무 어렵다고 예수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왔던 사람들조차도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요 6:66)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너희도 내 곁을 떠나가려느냐?’ 그렇게 물으시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6:68) ‘말씀은 다 이해되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영생의 말씀이라는 것만은 압니다. 우리는 주님 곁을 떠나가지 않겠습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도, 모르는 것이 많아도 베드로를 비롯한 12제자는 예수님 곁을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나중에 예수님의 귀한 사도로 쓰임 받게 됩니다. 지금은 모르는 게 많습니다. 부족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떠나지 않고 주님 곁에 붙어 있으니까 나중에는 그 말씀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께 귀하게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지금 좀 모르는 게 있다고 실망할 것 없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것 가운데서 잊어버려야 할 것은 잊고 새로운 은혜로 채우면 우리는 더욱 성숙한 신앙으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리 이젤이라는 여자 목사님이 쓴 『잃어버린 삶의 조각들』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녀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빈민가에서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와 가난한 어머니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어렵게 자란 그녀는 17살 때 뼈아픈 상처를 받게 됩니다. 성폭행을 당한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 임신을 하게 되었지만, 그녀는 차마 자신의 배속에 있는 그 생명을 죽일 수 없어 18살에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를 낳게 됩니다. 아이를 키울 수 없게 된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입양기관에 맡겨야 했습니다.
그녀는 평생 그 때의 그 아픈 기억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기억할 때마다 그녀는 가슴을 후벼 파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신실하게 신앙생활 해 온 나에게 왜 이런 아픔과 고통을 주셨느냐?’고 말입니다. 한 남자의 정욕으로 인해 생겨난 성폭행이 한 사람의 여자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런 악의 파괴력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는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편 42:11, 43:5) 하는 시편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던 중에 그녀는 자신이 당한 그 고통을 재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통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자신처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 위로하고 격려하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는 것이 힘들고 아픔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처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상처받고 고통 가운데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내가 겪은 엄청난 고통의 사건, 결코 잊을 수 없는 아픔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믿음으로 재해석하면 오히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기만 하면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약점, 고통과 아픔까지도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게 고통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내게 있는 고통까지도 아름답게 쓰시는 주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내게 있는 약점까지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귀한 것으로 바꾸어 쓰시는 주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을 새로워집니다.
세상적인 지식을 더 많이 알기 위해서 힘쓰기 전에 주님을 바로 알아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면 더 큰 세상이 보입니다.
짐을 가볍게 하려면
요 7:28-33 / 이재철 목사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누구에게나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유혹과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치 않게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나를 보내신 뜻을 찾고 의미를 발견하면 자살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짐이 무겁다고 하더라도 가볍게 할 수 있는 진리를 알면 됩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은 어려운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32절 말씀에 보면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야했지만 짐이 가벼웠습니다.
◈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짐을 가볍게 할 수 있을까요?
① “나는 하나님의 보냄 받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28-29절)
많은 분들이 힘들어하는 이유는 인생을 관광 나온 듯 책임은지지 않고 즐기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생은 출장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고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출장을 갈 때는 짐을 가볍게 하듯이, 이 땅에 출장 나온 우리도 짐을 가볍게 하고 살아갑시다.
▶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깨닫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 출장 나온 몸이라 생각하고 조금 불편하게 살겠다고 결단하십시오.
나만 편하게 살겠다고 하면 모두가 불편합니다.
아무리 좋은 곳도 내 집 만큼 편하지 않듯이, 출장 나온 이 세상의 불편함을 감수하십시오.
본향 아버지 집에 가면 편안함이 있습니다.
㉡ 하고 싶은 것 보다 해야 할 일을 먼저 하십시오.
출장 가서 임무를 마치고 온 사람들은 얼굴이 밝습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돌아오면 압박감이 듭니다. 이들은 돈과 시간을 엉뚱한 곳에 써버렸습니다.
인생을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해야 할 일을 먼저 하십시오.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하면 중독에 빠집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무거운 짐을 지고, 또 자녀들에게 짐을 떠맡기는 사람이 됩니다.
② 늘 돌아갈 것을 의식하며 살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면 다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33절)
주님 앞에 설 때를 생각하십시오. 그래야 많은 시험을 이길 수 있고 헛된 행동을 하지 않게 됩니다.
▶ 어떻게 하면 구체적으로 일상생활 가운데 돌아갈 것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 천국의 상을 받기 위해 섬기십시오.
잘 섬기면 이 땅 위에서 보람이 있고, 하나님 앞에 서면 받을 면류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41-4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영혼 구원은 하나님 아버지의 가장 큰 소원입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만왕의 왕 앞에서 상 받는 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사람에게 보이려 하지 말고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하십시오.
㉡ 적어도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은 의식주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고 살아가십시오.
예수님의 가르치심
요 7:28-33 / 이규왕 목사
예수님이 태어나신 이스라엘 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세계에서 가장 교육열이 뛰어난 민족으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들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어느 성이 침략을 받아 위태하게 되었을 때 감춰둔 보물이나 다른 것들은 가지고 나가지 못할지라도, 사랑하는 자녀들과 더불어 반드시 데리고 가야 할 사람이 랍비 즉 선생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부모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식이지만 그 자식에게는 교육이 필요하며 교사가 없이는 교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랍비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교육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가장 역점을 두신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일이었고, 또한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힘쓰신 것도 역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요 6: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그러나 실상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사람들은 불학무식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 시대의 최고 엘리트라고 지칭하는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배우고, 알고 있는 지식이 결국 예수님을 증오하고 죽게 한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옛날에 비해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학력 수준이 얼마나 높아졌고 교회마다 제자훈련과 성경공부 프로그램이 얼마나 잘 만들어져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은 배우고 하는 것이 많아져 갈수록 점차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 당시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기에만 급급하던 종교 지도자들을 닮아가고 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돌이켜 보아야겠습니다.
1. 예수님의 학벌
예수님 당시에도 제사장이나 서기관이나 랍비를 사람들이 존경한 것도 바로 그들이 남을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남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과정을 배운 사람만이 남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많이 배운 사람만이 남을 잘 가르칠 수 있다는 등식이 만들어지고 자연히 사람들은 학벌을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초막절에 그 형제들을 먼저 예루살렘으로 보내신 후 예수님은 나중에 홀로 올라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으나 잠잠히 계시던 예수님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초막절 중간이 되었을 때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교훈을 비로소 가르치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요 7: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사람들은 그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들으면서 놀라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종전의 서기관이나 랍비들이 가르치는 것과 비교하였을 때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훨씬 더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 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막 1: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냉냉한 바리새인들과 달리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이 있었고, 변화가 있었고, 병든자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그같이 차별화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보고, 놀라면서도 왜 예수님을 받아드리지 않고 도리어 모함하고 정죄하고 핍박하는 일을 하였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오늘 성경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 7:15)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그것은 헛된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제사장이나 서기관이나 랍비들보다 훨씬 더 잘 가르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님은 자신들에 비해 학벌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시기하는 마음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선입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대하고 있습니까? 나보다 더 많이 배운 사람을 대할 때, 나보다 배운 것이 적은 사람이 나보다 더 잘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됩니까?
그동안 우리 시대도 역시 학벌 위주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하기 싫다는 공부를 소에 물을 먹이는 것처럼 억지로 공부를 시키고, 본인의 적성과 상관이 없는 전공을 강요하고, 돈으로 가짜 학위나 졸업장을 사고 파는 시대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대학 졸업장이 없는 분이 대통령이 된 시대입니다. 여성이 장관이 되고 새까만 후배가 수장이 되어 선배를 거느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공부가 필요 없다는 말이거나 무식해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제는 학벌이 간판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력이 있어야하고, 경쟁사회에서 남보다 다른 차별화 된 능력이 있어야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며, 그 가능성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서 갈릴리 어부들을 제자로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셔서 오늘의 교회를 이루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교회의 연조나 직분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그에 걸 맞는 실력과 능력과 인격이 동반되어져야 만이 교회에서도 쓰임을 받고 존경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2. 예수님의 가르치심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종래의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다른 가장 큰 이유는 학벌이 없으셨기 때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세상 지식처럼 다른 사람에게서 배워서 가르치는 전수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 자신이 모든 가르침의 근본인 진리요, 사랑이요, 선 자체이시기 때문에 랍비의 가르침은 하나님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선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하나님이시오, 진리 자체요, 사랑의 본체요, 선 그 자체이었습니다.
(요 7: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요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바로 이것이 기독교와 타종교와 성경과 세상 지식과의 본질적인 차이인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분이었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올림픽의 신기록이 언젠가는 돌파되는 것처럼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위인 중에 한 사람으로 그 가르치심이 뛰어났기 때문이라면 앞으로 언젠가 예수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태어나게 되면 기독교도 성경도 소멸되고 말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학문과 과학이 갈수록 업그레이드 되어도 성경이 개정되거나 없어질 수 없는 이유는 영원한 진리요, 사랑이요, 선이신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친히 가르치신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요 7: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요 7: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
그럼으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 가르치심을 직접 귀로 듣지 못하고 오직 성경을 가지고 읽고 듣고 배운다고 할지라도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음을 바로 이 성경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 직접 가르치신 말씀을 한자도 틀림이 없이 기록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듣고 배울 때 마치 예수님 앞에서 듣고 배우는 심정으로 성경을 대할 때 예수님 당시와 동일한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고 변화를 체험하는 복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물론 구약시대부터 예수님 당시까지 사람들을 가르친 제사장이나 서기관이나 랍비들도 성경 말씀을 가르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다른 점이 무엇이었을까요?
만일 동일했다면 구태여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과 충돌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자기들과 다르다는 것은 알았으나 예수님에게서 배워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예수님을 무조건 미워하기 시작한 것이 스스로 패망의 무덤을 파는 결과를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 한 예가 바로 오늘 성경에 나오는 안식일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들보다 예수님이 더 인기가 있고 유능한 것이 시기가 나서 예수님을 고소할 죄목을 찾는 중에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것은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을 범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율법을 법한 것이며, 자기들이 고치지 못하는 병자를 고친 것은 귀신을 힘입어서 한 것이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하면서 무조건 예수님은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보아도 얼마나 억지입니까?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신 것은 살리기 위함입니까? 죽이기 위함입니까? 그러면서도 그들은 안식일에 사람들에게 할례를 주어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교훈은 하나님의 뜻과 달리 스스로 만든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목적으로 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요 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3. 가르치심을 받은 사람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지적한 것처럼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 비해 학벌이 없으신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르치심이 권세 있고, 능력이 있었던 까닭은 종교지도자들은 배운 것을 가르치는 자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 진리를 깨닫고 기뻐하고 받아드리고 변화를 경험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첨단 과학의 발달로 자동화와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공장에서 출하되는 물건은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제품이 쏟아져 나옵니다.
사람들은 인간도 그렇게 만들기를 원해서 복제 인간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만은 유일하게 지으셨고, 심지어 일란성 쌍둥이도 그 성격이나 삶이 똑같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한 분이시며,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진리를 공급하셨지만 그 결과는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1) 긍정적인 반응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낸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오시기로 약속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요 7:31)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2) 부정적인 반응
예수님이 자기들보다 더 인기가 높으신 것을 시기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 7:32)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동일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서 왜 이렇게 상반된 반응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잘 나타내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마치 좋은 씨와 같지만 그 말씀을 받는 사람의 마음이 오늘 성경에 나오는 종교 지도자들처럼 오만과 죄로 닫혀 있으면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듣는다고 할지라도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마 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마 13:22)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들을 때 마음을 열고 겸손히 그 말씀을 받는 심령은 마치 좋은 땅에 씨를 뿌린 것처럼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가 되어 혹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를 결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주님이 피흘려 값주고 세우신 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예배에 제일 큰 비중을 두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인 성경 말씀을 열심히 듣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산 교육을 당부하신 말씀처럼 기독교에 있어서 교육은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 결과 교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의 학력 수준이 점점 높아가고, 교회마다 제자훈련과 각종 성경공부 프로그램이 없는 교회가 없고, 교인들이 바쁜 가운데서도 시간을 쪼개어 성경 교육 과정을 이수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옛날에 비해 사랑과 용서는 왜 식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나와 다른 사람, 내 편을 들지 않는 사람은 원수시하고, 나보다 유능한 사람을 칭찬하는 대신 시기하고 모함하는 일은 없는지요?
누구보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알고, 말은 잘하지만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본을 보이신 사랑과 용서가 메말라가고, 예수님이 명하신 기도와 전도에 열심히 없고, 세인들과 다름이 없이 명예와 물질과 권세만을 탐한다면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듣고, 배우고, 읽는 성경 말씀이 곧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들을 때마다 마음 속에 어떤 반응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정말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생명의 구주 되심이 믿어지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겠다는 결심과 더불어 평소에 그 가르치심을 기억하고 삶에 적용시켜 나가는 긍정적인 반응과 겸손하고 온유한 믿음의 성도들로 지속적으로 변화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