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방법 또는 경로 인간이 무한하게 광대한 자연의 일부임을 인식한다면 그는 매우 미약하다는 사실 앞에서 겸허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자만(?)하는 것은 앞에 단초를 달아 놓았다. 그것은 "내게 능력을 주시는 분으로 인해"라는 조건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떤 방법으로 능력을 주시는가? 라는 문제이다. 단지 능력을 준다고 생각으로만 가정하라는 뜻인가? 아니면 실제로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는 경로 또는 방법을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초능력을 부여해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하거나, 투시안을 만들어 복권을 긁지 않아도 번호를 알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자연의 질서적인 방법으로 능력을 부여하실 것이라는 합리적 결론에 이른다. 자연의 질서에는 적어도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그것은 변화라는 것이고, 변화는 원인과 결과의 순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며, 모든 사물은 상호 간에 작용을 통하여 변화를 받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작용들도 또한 별개의 초능력으로 작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로 작용되는 것이다. 여기에 초능력을 개입시키면 역시 자연의 질서가 무너진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능력은 자연의 질서 자체인 것이며 하느님은 자연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능력은 내 안에서 작용하는 방식과 외부 사물이 내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작용하게 되므로 그러한 작용을 내가 주체적으로 잘 인식하여 나의 반응이 가장 적절하게 나타나도록 함으로써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을 흔히 우리가 '노력'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는 인식 아래서 우리가 노력하여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인간의 노력으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해온 것이 전통적 기독교의 교리다. 이 교리는 두 가지 점을 전제하고 있다. 하나는 인간의 노력은 하느님의 능력과 별개라는 생각이고, 둘은 노력의 결실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즉 노력의 결실을 성급하게 기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 미미하기 때문에 어느 세월에 인간이 노력해서 웅대한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겠느냐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준다면 가능하다고 하였으므로,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모든 것, 하느님의 나라까지도 완성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서 디테일한 계획과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의 당면한 목표는 분명해진다. 단일 세계 정부이다. 이 정부는 종교, 특히 사이비 종교나 컬트에서 주장하는 하늘 정부나 영적 정부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초능력을 주장하는 것임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면밀한 계획과 비교적 긴 시간을 통하여 꾸준히 한 걸음씩 진보시킴으로써 세계 단일 정부의 구성원을 양성할 수 있다. 그 구성원은 자질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버금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능력 면에서 세계의 모든 군사력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구성원을 길러야 할지 목표가 선명해진다.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에서 훌륭한 인성과 출중한 학문을 갖춘 인재를 양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질 때, 어느 시점에서 분명히 최고의 정상에 오르리라는 확신이 서게 된다. 문제는 지치지 않는 꾸준함이 필요한 것이다. 단지 현존하는 세계의 흐름에 맡겨 두는 것은 노력이라고 볼 수 없다. 오늘 본문의 성구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노력은 성공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공은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초능력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여하시는 초월력 때문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