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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오디세이] 김훈 ‘강(江)의 노래’
입력 2015.07.06. 01:46 | 수정 2015.07.08. 12:14
'강(江)의 노래' ① 단둥에서중앙일보
나는 지난 6월 22일부터 27일까지 우리나라의 여러 선후배 동료들과 함께 중앙일보가 주최하는 ‘평화 오디세이 2015’ 행사에 참가했다.
우리 일행은 단둥(丹東)에서 압록강 하구를 돌아보고, 퉁화(通化)·지안(集安)에서 고구려 초기의 유적지들을 답사했다. 자동차 편으로 백두산에 올라가서 북한 쪽 산하와 만주 벌판을 바라보았다. 만주는 넓어서 지평선이 하늘에 잠겨 있었고, 백두산 천지의 검은 바위에는 화산이 폭발할 때 끓어오르던 불의 힘이 그대로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두만강 하구로 이동해서 한반도와 중국, 러시아 국경이 마주치는 훈춘(琿春)·팡촨(防川) 지역을 돌아보았다.
한반도 분단 7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우리는 조국의 강을 건널 수 없다. 소설가 김훈이 통일 한국의 국경이 될 압록강을 배로 지나며 망원경으로 북한 신의주 지역을 살피고 있다. ‘평화 오디세이’ 글씨는 음악인 장사익이 썼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여러 선후배들이 아침 8시부터 세미나를 열어 광복과 분단 70 년의 역사적 의미를 성찰했고, 평화와 통일의 방안을 모색했다. 이동 중인 버스 안에서도 토론은 뜨겁게 전개되었다. 말들은 무성했으나, 70년 이 흐른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조국의 강을 건너갈 수 없었고, 달리는 버스 안에서 목을 길게 빼서 건널 수 없는 저편을 바라보았다. 사람과 소와 개와 마을들이 너무나 가까워서 슬프고 답답했다. 나는 육군에서 제대한 지 40년이 넘었는데, 내 아들보다 훨씬 어린 북한군 병사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분단 70년 동안 판문점에는 얼마나 많은 헛된 언어와 불신과 증오가 쌓여 갔던 것이며, 첨단 무기로 서로를 겨누어 가며 또 평화와 통일을 말해야 하는 이 모순을 언제까지 감당해야 할 것인지는 난감했으나 조국의 강은 그 깊은 협곡과 넓은 들을 자유롭게 굽이치고 있었다. 이 무서운 적대 관계의 뿌리가 대체 무엇이었길래 70년의 세월이 지나도 남북은 동족과 조국 산천의 이름으로도 화해할 수가 없는 것인가. 적대 관계의 70년은 너무나 길어서 이제 분단은 일상의 질서와 정서로 고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감을 안고 돌아왔다.
철조망이 끝없이 강을 따라왔으나 강물은 합치고 휘돌면서 기어코 제 갈 길로 흘러가고 있었다. 큰 강은 스스로 자유로웠고, 역사는 산천 앞에 부끄러웠다. 이 부끄러움 안에서 희망의 어린 싹이 돋아날 수 있기를 나는 강에게 빌었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내 어수선한 잡감(雜感)을 글로 쓰려 하니, 북쪽의 커다란 산하가 그만두라고 한다. 부끄러운 글을 넘긴다.
글=김훈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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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강(江))의 노래’
② 고구려 초기 400년 도읍지, 지안
6.39m 비석은 대지를 압도
1775자 비문은 산하를 휩쓸었다
벽화 속 남자가 굴리는 고구려 바퀴
가장 사실적이며 첨단 신문물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 바꾸려 해
고구려 바퀴는 지금도 굴러 간다
지안(集安)으로 가는 G201 도로 연변에서, 여름의 산맥은 푸르고 힘찼다. 빛나는 산맥들이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지르는 듯 했는데,산맥을 돌아 나가면 한없는 벌판이 전개되었고, 벌판의 먼 가장자리에서 산맥은 다시 일어서서 끝이 없었다. 지안은 압록강변의 산악분지였다. 험준한 지형에 의지해서 요새형 도읍을 여는 고대국가 산새가 그대로 남아서 여름의 힘으로 버티었다.
지안의 민가들은 비슷한 크기에 동일한 모델로 지어졌고 담장의 높이도 똑 같아서 사회주의식으로 설계된 취락의 동질성을 보였고마을에는 상업광고가 전혀 없었다. 집집마다 당장에 삼족오(三足烏)•봉황새•연꽃•구름 같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문양을 그려 놓았다. 무덤 속에서 나온 문양들이 사람 사는 마음의 담장을 꾸미고 있으니, 여기는 고구려 초기 400여 년의 강성한 도읍지다.
고구려왕들의 존호는 유교적 세계관의 관념에 물들지 않아서, 삶과 마주 대하는 언어의 건강함을 보여 준다. 산상왕(山上王, 10대), 동천왕(東川王, 11대), 중천왕(中川王, 12대), 서천왕(西川王, 13대), 봉상왕(烽上王, 14대)들은 죽어서 그 왕이 묻힌 자리의 이름을 존호로 삼아 후세에 전했다. “11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소수림(小獸林) 장사 지내고 존호를 소수림이라고 하였다”는 대목은 내가 읽은 『삼국사기』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에 속한다. 소수림은 어디인가. ‘작은 짐승들이 모여 사는 숲’이라는 뜻으로 봐서 아마도 국내성왕궁에 딸린 동물원이 아닐까.
고구려의 왕들은 죽어서 강가에 묻히거나‘작은 짐승들이 사는 숲’에 묻혀서 한 줌의 흙을 국토에 보탰고 그 묻힌 자리에 불멸의 지위를 부여했다. 고구려인들의 강토 사랑은 그처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왕들은 죽어서 자신의 존호를 국토에 포개었다.
광개토(廣開土, 20대)의 존호는 왕의 무덤 자리가 아니라 그 생에의 자랑과 고난을 압축하고 있는데, ‘광개토’는 한반도 모든 임금의 존호들 중에서 가장 사실적이고, 서사적이고, 압도적이고, 다이나믹하다. 광개토왕은 39세에 죽었다. 그의 아들 장수왕은 97세까지 살았고, 그중 78년을 왕위에 있었다. 장수왕은 장수하기도 했지만 그의 존호에서는 부왕의 요절에 대한 한이 묻어난다. 광개토대왕의 치세에는 ‘나라 부강하고 백성은 편안하고 오곡이 풍성했다’고 비문에 적혀 있으니, 이 젊고 용맹한 금이 요절했을 고구려 신민의 슬픔은 하늘에 닿았을 것이다.
지금 광개토대왕비는 유리로 지은 비각 에 갇혀 있다. 이 유리 껍데기를 상상 속에서 없애버려야만 6,39m비석의 온전한 모습이 보인다. 비석은 돌의 테두리를 대충만 다듬었고, 이수가 없는 자연석이다. 그 돌은 가없는 거친 자연석이다. 그 돌은 가없는 들판에서 우람찬 존재감으로 광야를 압도하고 있다. 문자가 산하를 직접 마주 대하고 있고 그 긴장감이 비석 전체를 휩싸고 있다. 그 자체는 획이 굵고 기교를 드러내지 않는 안정된 예서였고 역사의 들판을 향하여 직접 외치는 강력한 생명력을 품어내고 있었다. 문자는 시대의 들판에서 벌어진 정복과 살육을 로망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나는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비석의 1775자 문자들은 산하를 휩쓸고 간 말 먼지와 눈보라가 돌에 각인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장군총은 ‘동양의 피라미드’라는 별명처럼 크고 웅장했다. 장군총이 장수왕의 무덤이라는 설은 물증이나 기록으로 뒷받침되지는 지만, 장군총은 광개토대왕비와 가까운 들판에서고대적인 힘의 단순성을 거대한 규모로 분출하고 있었다. 광개토대왕은 북진했고 수왕은 남진했다. 장수왕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으므로 평양에서 죽었을 인데 죽어서 부왕이 묻힌 고토(故土)에 묻히려고 지안에 미리 무덤공사를 시작했을 수도 있다. 나는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 사이에 부자 관계가 성립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역사의 로망이며 임금부자의 홍복일 것이다. 장수왕의 장사를 치를 때 평양에서 지안으로 향하던 운구 대열의 위용을 나는 상상할 수가 없지만 광개토왕비와 장군총의 표정은 고대적 열정의 분출로서 서로 통해 있었다. 크고 거침없는 힘이었다.
지안에는 20여 기의 고구려 벽화고분이 산재해 있다. 그중에서 일반이 관람할 수 있는 곳은 오회분(五會墳) 5호묘 뿐이다. 오회분은 다섯 기가 한곳에 모여 있는 무덤 떼를 말한다. 5호묘의 현실벽면에서 천장에 이르는 공간에는 환상의 나라를 날아다니는 상서로운 짐승들과 악기를 연주하며 하늘로 날아가는 선계의 인간들이 그려져 있다. 거기에는 현실을 넘어서는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을 흐르는 음악과 율동과 시간이 이었다.
벽화 속에서는 바퀴를 굴리는 남자가 현실과 초현실, 그 양쪽의 시간을 넘어 건너가고 있었다. 그 바퀴는 소달구지나 마차 바퀴처럼 날렵하고 경쾌한 바퀴였다. 바퀴살은 가늘고 선명했다. 단단한 강철이 아니면 그처럼 가는 살로 하중을 받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바퀴는 수레에 연결되지 않은 바퀴였고, 아직 현실에 적용되지 않은 바퀴의 순수한 원형이었다. 고구려의 바퀴는 세속적인 번영의 절정을 이루는 위세품이며 실용품이었던 모양이다. 무덤 속의 수많은 그림 중에서 그 바퀴는 가장 사실적이며 첨단적인 신문물이었다. 그 고구려의 바퀴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는데, 바퀴를 쥔 사람의 동작은 경쾌했다. 도교적 초월의 열락 속에서도 고구려 사람들은 세속적인 욕망의 건강함을 단념하지 않았다. 오회분의 5호묘뿐 아니라 다른 고구려의 무덤 속에서도 세속의 생활은 건강하고 활기찬데, 바퀴는 그 첨단을 이룬다.
베이징과 선양을 다녀온 박제가(朴齊家,1750~1805)는 바퀴에 열광했다. 그의 저서 『북학의』는 첫 페이지부터 바퀴예찬을 시작한다. 그는 바퀴의 문화적•경제적 사명의 발견자였다. 그는 바퀴의 이용이 단절된 조선의 현실을 개탄했고, 연결된 도로를 바퀴로 소통하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진언은 배척되었다. 박제가의 시대에까지 고구려의 바퀴는 버려져 있었다.
바퀴는 원이다. 이것에 동력을 연결시켜서 도로 위에서 굴리면 인간은 한없이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인간의 갈 길은 멀고멀다. 그림 속의 고구려 바퀴는 아직도 굴러 가고 있었다.
김훈‘강(江))의 노래’③ 두만강에서
[중앙일보] 입력 2015.07.09 01:10 / 수정 2015.07.09 02:04
음식 나눠먹는 사소한 일상의 평화북한 병사의 생명을 긍정하는 평화이 단순한 평화는 왜 불가능한가두만강 강가 중국 공안들이 지금탈북자 잡으러 풀섶을 뒤지고 있다
김훈
25일 오전부터 6인승 승합차로 백두산을 올라갈 때 비가 내렸다. 자작나무 숲이 젖어서 향기가 대기에 낮게 깔렸다. 정상에 올랐을 때 구름이 갈라지고 개벽하듯이 햇살이 내려왔다. 천지는 창세기의 호수처럼 시원(始原)의 힘을 품어냈고 젖은 봉우리들이 번쩍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안개가 몰려와서 천지를 뒤덮었다. 고은 시인이 손나팔을 입에 대고 “안개다! 안개다! 안개가 온다”고 소리소리 질렀다. 그는 목청을 다해서 고함쳤다. 백두산 정상이 안개에 덮이는 기상현상이 그 시인에게는 지체 없이 알려야 할 파천황의 긴급 중대사태인 것이었다. 그의 고함소리에는 주술적 신명이 담겨 있어서, 안개의 접근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먼 지평선 쪽의 안개를 불러들이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안개다! 안개로구나!” 그 안개 속에서 사람들은 흐린 사진을 찍었다. 호텔의 만찬 자리에서는 북한의 젊은 여성들이 봉사했고 식사 후에는 간단한 공연이 있었다. 호텔 정문 앞에는 인민공화국 깃발과 오성홍기가 교차로 세워져 있었다. 호텔봉사원들은 미녀로 소문난 압록강 건너 강계 여성이라고 했다. 체구가 크지는 않았으나 목이 길고, 눈동자가 새카맣고 시선은 찌르는 듯했고, 눈썹은 짙었고, 긴 말총머리에 윤기가 흘렀다. 김동환(1901~미상)의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의 여성 주인공 ‘순이’는 여진족의 후예 재가승(在家僧)의 딸인데, ‘머루알같이 까만 눈과 노루 눈썹 같은 빛나는 눈초리/게다가 웃을 때마다 방싯 열리는 입술’로 묘사되어 있었다. 나는 ‘순이’를 떠올리며 젊은 여성봉사원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었다. 조국 산천의 마을마다 집집마다 별 같은 딸들이 자꾸자꾸 태어나기를 나는 바랐다. 여성봉사원들은 일하기 편하게 개량한 한복 차림에 인공기 배지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 왼쪽 가슴에 단 여성도 있었고 오른쪽 가슴에 단 여성도 있었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사슴고기의 향기는 품격이 높아서 잘생긴 짐승의 이미지와 같았다. 개고기는 메뉴에 없었지만 손님이 부탁하면 무침으로 가져다주었다. 양념이 진하지 않아 개의 육질이 직접 전해져 왔다. 산이 깊어서 그럴 테지만 나물이나 야채요리는 단연코 뛰어났다. 무와 배추는 섬유질이 억세고 물이 많아서 씹으면 와삭거리면서 상서로운 액즙이 입안에 가득 찬다. 김치는 소금이나 젓갈에 과도하게 절여지지 않아서 고랭지의 서늘한 기운이 살아 있었고 그 국물은 고지의 겨울바람처럼 청량했다. 이 날카로운 국물을 한 모금 마시면 목구멍에서 창자 쪽으로 찌릿한 전류가 흐른다. 나는 김칫국물에 흰쌀밥을 비벼 먹었다. 나물은 생전 처음 먹어보는 것도 많았는데 모두 다 들이나 산의 흙 냄새·물 냄새, 햇볕의 강도, 계절의 촉감을 지니고 있었고 나물마다 그 서식지의 질감을 사람의 몸 안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해물은 말린 멸치나 대구포 정도였지만 생선요리의 핵심부는 강에서 잡아온 민물고기였다. 재료에 토막을 치지 않고 통째로 찜으로 내놓았다. 압록강·두만강과 그 샛강들의 격류를 오르내리며 살아온 민물고기들은 살이 단단했고 부위마다 맛이 달랐는데, 살아서 고생을 많이 했을 배지느러미나 꼬리지느러미 언저리에 붙은 살이 향기로웠고 씹기에 알맞은 저항감이 있었다. 국토의 관능은 모든 아름다운 얼굴들 위에, 모든 산과 강과 바다에, 그리고 모든 나물과 무·배추·물고기 속에 살아 있었는데, 이 관능을 공감함으로써 화해를 이루자는 주장은 통일의 전략이 될 수 없는 것인지, 나는 답답했다. 나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 같은 사소한 일상에 자리 잡는 평화를 생각했다. 토론으로 뜨거운 버스 안에서 나는 숙박지의 저녁밥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두산에서 두만강 하구까지는 험준한 산악도로를 따라서 달렸다. 도로는 두만강 변으로 바싹 접근했다가 다시 멀어지기를 거듭했다. 강 건너 쪽에서 농부가 강가에 소를 몰고 와서 물을 끼얹어 주고 있었다. 소는 쟁기와 멍에가 풀어져 있었다. 일을 시키다가 소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더위를 식혀 주는 모양이었다. 무엇을 줍는지 아이들이 강가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사내들이 시멘트 반죽을 흙손으로 발라서 단층집을 짓고 있었는데, 그 뒤로 비탈밭은 가팔라서 소달구지가 올라갈 수 없을 듯싶었다. 어느 마을에나 상업간판이 하나도 없어서 생업이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날이 어두워도 집들은 불을 켜지 않았다. 북·중 사이의 두만강 국경은 한반도의 DMZ처럼 삼엄하지는 않지만 월경이탈자를 막기 위해 철조망이 처져 있고 북한군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버스가 강에 바싹 접근할 때 건너편 초병이 한 명 보였다. 키가 작고 마른 체구에 소총이 힘겨워 보였다. 나이가 몇인지, 군대 생활은 견딜 만한지, 구타나 따돌림은 없는지, 고위 간부들이 군수품을 빼먹지는 않는지, 방산비리는 없는지, 겨울에 보초 설 때 발은 시리지 않은지, 고향이 어딘지, 제대는 얼마 남았는지, 형제는 몇인지, 장래희망은 무언지, 여자친구는 있는지, 남쪽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고 싶었으나 될 말이 아니었다. 아마 그 젊은이는 스물네댓 살쯤 되었을 것이다. 그가 그 나이 또래의 남쪽 젊은이들의 적(敵)이며 젊은이·늙은이 할 것 없이 서로가 서로를 적이라는 것은 난해했다. 이 젊은이들이 또다시 어느 고지 어느 참호에서 마주치면 서로 쏘고 질러야 하는 현실을 우리는 지금 미래의 세대에게 전승시키고 있다. 나는 ‘통일’보다도 우선 강 건너편에서 보초 서고 있는 그 북한군 병사의 생애 속에서 인간다운 가치와 소망들이 온전히 구현되기를 바랐다. 생명을 서로 긍정하는,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의 평화는 불가능할 것인지를 나는 강가에서 생각했다. 두만강은 해란강과 훈춘강을 합치면서부터는 북북동에서 남남동으로 진로를 바꾼다. 협곡구간을 빠져나온 강물은 드넓은 초원과 습지를 굽이치면서 강의 커다란 자유를 보인다. 두만강은 바닷물이 드나들지 않아서 그 하구까지도 신생(新生)의 표정으로 빛난다. 동해에서 아침 해가 뜰 때, 두만강 물줄기에 햇빛이 닿으며 강물을 따라서 먼 산골까지 아침의 노을이 퍼진다고 하는데, 이번에 보지는 못했다. 이 하구에서 한반도와 러시아, 중국의 국경이 마주친다. 사람들이 그어놓은 금 위로 풀들이 우거지고 강물이 흘렀다. 여기가 조선 후기 이래로 두만강 너머로 쫓겨가고 숨어들고 벌어먹으러 가던,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들판이다. 강물에는 인간의 고난과 설움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고 강은 저 혼자 자유롭고 아름다워서, 시인 이용악(李庸岳·1914~71)은 두만강을 ‘천치(天癡)의 강’이라고 불렀다. 이 강가에서 지금 중국 공안들이 월경한 북한 사람들을 잡으려고 풀섶을 뒤지고 있다. 두만강 하구에서 디아스포라는 진행 중이다. 두만강 초소에서 보았던 북한군 병사의 이름을 모르는 채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김훈
일리어드 오디세이
서구의 정신
작가
호머
출판
글벗사
발매
1989.12.01
밑에부분은 두 책의 줄거리 입니다. 일리아드(아킬레스의 분노): 트로이 전쟁 10 년째, 아폴론신의 노여움을 달래는 과정에서 아가멤논의 심기를 건드린 아킬레스는 자신의 전리품인 여자를 총사령관 아가멤논에게 뺏기고 이에 자존심상한 그는 어머니 테티스에게 억울함을 호소한다. 아킬레스의 불참과 신들의 전폭적인 지원에 트로이군이 맹공을 퍼붓고 이에 그리스군은 계속 밀리고 부상, 사상자가 속출한다. 이에 파트로클로스(아킬레스의 충복)가 아킬레스 군사를 이끌고 아킬레스 분장을 하여 참전하지만 정체를 들키고 전사한다. 이에 분노한 아킬레스는 결국 출전을 하고 트로이 총사령관인 헥토르와 일전을 벌여 그를 죽이고 그 시체를 마차에 매달고 트로이 성을 몇 바퀴 돈다. 헥토르의 아버지인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는 신들의 도움으로 아킬레스 진영에 와서 자식의 시체를 찾아간다. 오디세이: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모두 고향으로 향하는데 포세이돈신의 노여움을 산 오딧세이는 파도에 휩쓸려 엉뚱한 곳으로 이끌려간다. 포세이돈 신의 아들을 죽이고 키르케라는 마녀를 만나고 칼립소라는 마녀를 만나고 사이렌의 유혹을 이겨내고 결국 아테네신의 도움으로 고향에 닿는다. 아버지를 찾아 헤메다 돌아온 텔레마쿠스, 전쟁나간 남편을 20년 동안 기다리며 늙은 시아버지를 봉양하고 끈질기고 무례한 이른바 구혼자들의 추태를 참아가며 살아온 아내 페넬로페. 오딧세이는 구혼자들을 물리치고 드디어 평화를 찾는다.
작가가 소설을 쓰고자 할 때 작가가 견지하는 시점이 있다.
1인칭 화자의 시점과 3인칭 관찰자의 시점 그리고 전지적 작가시점이라는 것이다.
호머는 일리어드와 오디세이를 서술할 때 전지적 작가시점을 넘어서서
신적인 시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아주 작은 사건의 미세한 결말이 다가올 폭풍의 전조가 되고 한 사람의 사소한 결단이 왕국의 몰락을 초래하는 등 미시와 거시를 오가며 신들의 의지와 영웅의 고뇌 그리고 신과 영웅의 아래에서 그들을 좇으며 살 수밖에 없는 인간 군상들을 운명의 여신이 개인과 일국의 흥망성쇠를 무늬로 하는 운명의 직물을 짜듯이 전개해 나간다.
일리어드는 주인공이 아킬레우스이다.
일리어드의 또다른 부제인 트로이 전쟁의 서막은 아킬레우스의 부모가 결혼을 하는 식장에서부터 시작된다. 바다의 신 테티스와 인간 펠리우스와의 결혼식이므로 사람과 제 신들 모두를 초대하는 것이 바쁘고 힘들어서였던지 딱 한사람 초대받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아니 ‘신’이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 !
가는 곳마다 불화를 일으키니 웨딩 플래너(그 당시에도 웨딩플래너가 있었다면 ^^)로서는 껄끄러운 대상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부르지 않음으로서 문제는 더 커지고 마는 것을 일개 웨딩플래너가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불화의 여신답게 불화를 일으키는 것도 품위를 잃지 않고 교양있게 처리한다.
웨딩마치?가 울려퍼지고 있을 식장에다가 황금사과를 던진 것이다.
황금으로 된 사과라니 얼마나 귀한 것이었을까?
원래 황금 사과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주신 제우스가 아내 헤라와 결혼할 때,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축하의 선물로 그들에게 준 것이었다. 이 황금 사과는 꿀과 같은 단맛이 나고 이것을 먹는 자의 병을 치유해주며, 그 찬란함은 사랑이나 미의 상징이기도 한 과일인 셈이다. 그런데 이 사과는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중에 하나로 거대한 뱀 라돈이 지키고 있는 헤스페리데스라는 땅끝까지 가서 얻어야 하는 사과였다. 헤라클레스는 다행히 아틀라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황금사과를 얻게 되지만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던진 황금사과와 그 사과들이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보다도 사과에 새겨진 글로 해서 하객들은 모두 달아오르고 말았다.
황금사과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바친다.”라는 글귀가 새겨져있었고
그 글을 본 내노라 하는 여자들이 모두 나서는 바람에 결혼식장은 아수라장이 된 것이다.
불화의 여신은 얼마나 깨고소해 했을까 쩝
하지만 곧 그 소동은 정리될 수 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는 올림푸스에서도 아름다움이면 빠지지 않는 세 여신이 와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자각했기 때문이다.
12주신의 으뜸인 제우스의 정실부인 헤라, 지혜의 여신 아테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이 세 여신은 누가 봐도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기에 황금사과의 주인을 가려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이 세 여신 모두 결정에 따를만한 힘을 가진 이는 제우스밖에 없었다.
제우스는 머리가 아팠다.
잘못 말했다간 평생 아니 신들은 불멸이므로 영원히 찍히게 된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서리가 내리지만 여신이 한을 품으면 빙하기가 올수도 있는 문제인 것이다.
제우스는 쉬운 길을 택했다. 산골에서 여자하나 변변하게 본적이 없는 양치기 소년 파리스를 지정해서 그 소년이 판단하는 것으로 끝내자는 것이다.
세 여신은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콜!
파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이쁜 여자를 보상으로 제시한 아프로디테에게 황금사과를 바치고
선택받지 못한 아테네와 헤라는 열받아서 바로 트로이를 불바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좀 필요하구나 ㅎㅎ;;
세월이 흘러서
파리스는 결국 왕자인 것이 드러나 왕궁으로 복귀하고 왕자의 신분으로 그리이스를 방문했는데 메넬라오스의 아내 그러니까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와 눈이 맞는다.
(아프로디테가 아들 큐피드에게 화살을 쏘라고 시켰겠지만....)
한편 그 야단 법석이었던 결혼식의 결과물인 아킬레우스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바다의 여신인 테티스는 아들이 유한한 생명을 가진 것이 안스러워서 자신과 같은 불사의 존재로 만들기 위해 스틱스강에 아들을 담갔다. 스틱스 강물에 닿은 몸은 어떤 무기로도 상처입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테티스가 아킬레우스의 발꿈치를 잡고 강물에 담갔기 때문에 신체 중에서 유일하게 발꿈치가 그의 약점이 되었다고 한다. '아킬레스 건(腱)'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다.
트로이전쟁을 위한 서막은 이렇게 막이 오른다.
메넬라오스와 아가멤논은 한나라의 왕이라 하지만 사실 도시국가의 왕이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역해적두목이다. 그들은 명분이 필요했고 그들이 원했던 것은 약탈이었을 것이다.
트로이의 성벽은 높았고 사람들은 강인했다.
비록 헬레네를 납치했다는 사실에 대해 부끄러워 할 줄도 알았지만 그렇다고 비굴하게 무릎꿇지도 않았다.
처음에 트로이 전쟁을 읽을 때는 아프로디테도 베어버린 디오게네스와 헥토르와 막상막하의 대결을 펼친 아이아스(대) 그리고 주인공 아킬레우스의 용맹과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가슴이 들먹들먹했지만 나이가 들어서 되돌아보니 트로이를 쳐들어간 그리이스 연합군은 단순히 헬레네가 트로이에 억류되었다고 쳐들어갈 만큼 단순하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았다.
어떤 사람은 트로이성이 동이족의 한 갈래였던 수메르(수밀이족)의 독로성이라는 말도 해서 십년이상을 버틴 트로이사람들이 왠지 우리 민족같고 정이 가서 그런지 그리이스의 영웅들이 자꾸 야만족 족장으로 오버랩된다.
일리어드 오디세이와 그리이스 신화를 통틀어서 팜므파탈은 두명이 있다.
하나는 판도라다
신이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해 빚은 인형 - 모든 여자의 원형이자 조상 격이다.
흠 그러고 보니 모든 여자는 팜므파탈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건지도 음
그리고 헬레네........신의 농간이었는지 그녀 스스로의 사랑을 위한 도피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수많은 사람이 죽고 나라가 멸망했지만 그녀는 다시 메넬라오스의 아내가 되고 왕비가 되는 것이 뭐라 그럴까 진정한 팜므파탈은 이런 것이다.?
그리이스 신화는 주인공이 신이었다.
하지만 일리어드 오디세이는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이가 주인공이다.
더 이상 신은 주연이 아니고 조연 쯤 된다.
그다음에 나오는 플루타아크 영웅전에는 신이 까메오로도 출연하지 않는다.
인간이 오롯이 주인공이 된 것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아니다.
보통사람이 이야기속에서 주인공이 되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사람들이 적어도 이야기로 전해줄려고 하면 신에 대한 이야기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과 적어도 왕이나 영웅을 다루어야 하고 그 왕이나 영웅은 출생부터가 남달랐다고 하는 시절을 거쳐서 이제 보통 사람을 다루고 보통사람보다도 못한 사람이 주인공을 맡기도 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렇게 시원에서부터 더듬어서 내려오다 보면 결국 ‘나’를 만나게 된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적어도 자신에게는 스스로가 주인공이어야 한다.
신의 아들이거나 스틱스강에 담겼다 나와 불사지체가 되거나 하지 않아도 나는 있는 그대로 내 삶의 주인공이다.
[출처] 일리어드 오디세이|작성자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