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안
글쓴이 수리양
성인이 된 엘프들이 비로소 느낄 수 있는 마나의 흐름. 마나란 것은 본디 공기처럼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자연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위대한 드래곤에서부터 한낱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마나의 영향을 받지 않은 물체는 있을 수가 없다. 비록 절대량의 차이는 있더라도 형체를 가진 모든 것은 마나를 흐르도록 유통시키는 매개체의 역할을 수행한다. 마법이라는 것은 스스로의 육신을 통해 유통시킬 수 있는 마나의 일부를 압축시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용하는 일을 두루 칭하는 말이다. 때문에 마나를 많이 유통시킬 수 있는 드래곤은 쉽게 마법을 익힐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유통량이 적은 인간들은 마법을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엘프들은 일반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을 때 성년식을 올린다. 그런데 지금, 내 주변을 휘감는 시원한 마나의 느낌이 내가 비로소 성년이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 또다시 덜컹거리는 것을 타고 어디론가 팔려가면서 나는 12살 꼬마에서 어느새 100살 성년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몇 번도 더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나를 사용한 주인들을 만났고 내게 가혹한 노동을 시키는 주인들도 만났다. 그런 지옥 같은 생활을 견뎌내며 끈질지게 살아온 것이다.
성년식을 이렇게 비좁고 음침한 곳에서 맞이해야 하다니, 나란 존재는 정말 어쩔 수가 없구나.
서글픔과 비관은 일상이 되어 별다른 자극이 되지 못했다. 어차피 나는 이용해 먹기 편하 노예일 뿐 성년이 되었다고 해서 축하해줄 인간 따위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정령술 따위, 아무런 힘도 없이 무너지는 허접한 마법술식 따위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가치가 없다. 지금 이 빌어먹을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엘프들이 내게 가르쳐준 기초 마법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엘프들을 사는 인간들은 하나 같이 엄청난 재력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이번에 도착한 집은 유난히 웅장했는데, 몇 채의 집을 쌓아놓은 듯한 거대한 축조물이 보였다. 최소한 3층은 되어 보이는 고층 건물인데다가 내 시야를 가득 채울만큼 넓은 건물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햇빛을 반사하는 창틀과 문은 하나 같이 금빛을 머금고 고풍스런 분위기를 자아냈다.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2개의 조각품은 마치 당장이라도 내게 덤벼들어 칼을 꽂을 것 같이 생동감이 넘쳤다. 그 집 앞에 펼쳐진 드넓은 정원은 차라리 숲이란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감독관은 내게 정원이라는 이름의 숲을 가꾸라는 비교적 쉬운 명령을 내렸다. 아마도 엘프는 모두 자연 친화적이라는 안일한 생각에 그런 일을 시킨 모양이다. 하지만 이곳 역시 마찬가지로 자연의 생동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서, 그다지 감흥은 없었다. 일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작업복이 주어지고 매일 적당한 식사도 주어졌다. 나름대로 편리하게 노동할 수 있어서 나는 그다지 불만을 갖지 않았다. 명령을 받고 그것을 수행하는데 너무나 익숙해졌고, 시도 때도 없이 내게 와서 주먹질을 해대는 감독관의 태도 역시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아무런 감정없이, 무서울 만큼 무감각한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마치 내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감각세포가 까맣게 매몰되버린 듯이,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그저 먹을 것을 받고, 맞지 않기 위해 명령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여느 날처럼 드넓은 정원을 돌아다니며 꽃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필요없는 줄기를 잘라내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사뿐사뿐, 누군가가 가깝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만약 지금 뒤를 돌아보면 감독관이 농땡이 친다고 구타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일에 집중하는 척 했다. 그 존재가 내 바로 뒤까지 왔고, 나는 입을 꼭 다물며 아프지 않기를 기도했다.
“저기, 일하고 있니?”
뻔한 대답이 튀어나올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다는 느낌의 질문이 날아왔다. 놀랍게도 평소의 칼칼한 감독관의 목소리가 아닌 보송보송하고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게다가 오랜만에 듣는 엘프어라니. 나는 흠칫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만 말을 잃었다.
부서져내리는 햇빛을 피하려는 듯 긴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두 눈망울을 맑게 빛내고 있는 그녀는 엘프였다. 모자와 닿지 않게 축 쳐져 있는 그녀의 길다란 귀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의 붉은 생머리 끝자락은 햇빛 때문에 더욱 찬란하게 보였다. 백색의 드레스는 그녀의 하얀 피부와 절묘하게 동화되며 강렬하게 빛을 반사해 감히 바라봐서는 안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름다웠다. 오히려 또다른 수식어는 그녀에 대한 모욕이 되버릴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운 엘프였다. 나는 100년만에 처음으로 보는 엘프의 모습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 넋 넣고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운 모습, 길다란 저 귀...
“그렇게 보면 부끄러워...”
나보다 키가 조금 더 큰 그녀였지만 수줍어하는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귀여웠다.
“여기서 일하고 있는거야?”
나도 모르게 엘프어로 말이 나온다. 나는 긴 시간동안 엘프어를 구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조리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언어가 떠올랐다. 왠지 기분이 묘했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이미 몇 십년전에 잃어버렸던 것이었다. 새록새록 피어오는 느낌은 나란 존재마저 낯설게 만들었다.
“아... 응, 나도 일하고 있어. 음... 그래 집안 일.”
배시시 웃는 그녀는 내 혼을 빼놓는다. 긴장이 된 탓에, 뜨거운 햇빛 아래서도 마르지 않았던 내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녀는 석상처럼 굳어버린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
“난 아이크라고 하는데 너는 이름이 뭐야?”
내 이름... 이름이라는 말을 듣자 여러 가지 단어가 스쳐지나 갔다. 감독관들은 나를 벌레나 짐승, 쓰레기로 불렀다. 또다른 인간들은 나를 노예라고 불렀다. 가끔씩 내게 인간의 이름을 붙여준 주인들도 있었지만 인간의 이름 따위는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이름을 기억하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일그러지고 짓이겨진 내 기억의 파편들을 헤집고 다니다가 비로소 따뜻한 이름을 발견해냈다. 내 그리운 추억 속에서, 그리고 아직 온기를 간직하고 있는 기억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나를 이끌어내었다.
“시드.”
“시드?”
“응 시드. 시드. 시드 듀프로이.”
시드라는 말이 너무나 그리워 나도 모르게 자꾸만 되풀이했다. 그래, 이것이 진짜 내 이름. 내가 부모님께 받았던 이름, 다른 엘프들에게 불렸던 진짜 이름... 왈칵 눈물이 솟아올라 자꾸만 방울졌다. 닦아도 닦아도 눈물은 지워지지 않고 흐느낌 역시 멈추지 않았다. 얼어붙어서 조각조각 났던 마음들이, 생명에 대해 잊고 있던 감각들이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낀 시간의 온기, 너무도 아릿하고 그리워서 나는 그만 주저 앉아 울어버렸다.
머리를 스쳐가는 힘든 나날들, 저주와 고통으로 눈물진 기억들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기쁨으로 젖어든 눈물은 이내 자조적인 색으로 변질되었다. 슬펐다. 내 이름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내 자신이 너무도 가련했고, 이제는 애틋한 그 시절의 사랑이 떠올라 기뻤다. 복잡한 감정은 도저히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다.
그 때, 나는 가슴으로 전해지는 생명의 감촉에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시간이 흘러도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고 앞으로도,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 감촉을 잊지 못할 것이다. 흐느끼는 나를 아이크가 몸을 굽혀 꼬옥 안아주었던 것이다. 아이크는 따뜻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 조금씩 흐트러지는 내 호흡을 기억한다. 좌절로 응어리진 내 가슴의 한들이 스르르 흐려져간다. 빠른 속도로 침착해지고 이글거리던 분노가 잠식되었다.
“네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나도 알고 있어... 그러니까 울지 마...”
마치 나에 대해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어투의 말, 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입을 악물었다. 나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안아주며 진심이 담긴 말을 들어본지 얼마나 오랜만인가. 그냥 고마웠다. 아이크가 내게 해주는 행동들 전부가 고마웠다. 아마,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아이크를 사랑하게 된 것은.
후와아 시드한테 이런 핑크빛 과거가 있엇....
-_- 여러부운~ 한번 맞춰보세요
아이크는 어떻게 될까요오?
맞추시면 안아드립니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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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행이다. 고생 끝이구나....
누나...
웬 누나? 우리, 친한가요? 난 수리님하고 말 트고 지내자는 말은 한 적 없는데. 뭐, 좋아! 까짓것 동생 삼지 뭐~ ^^*
아이크는 죽는거야 !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비뚤어진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