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말 점심 무렵, 나는 작심하고 창동사거리에 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짬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창동에 '연극관'을 만드느라 정신없는 와중이지만, 한 시대 마산 예인들의 쉼터였던 '성광집'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부림 지하상가 먹자골목 초입에 있던 '성광집'을 찾아가는 길은 대충 두 가지다. 하나는 내가 서 있는 창동사거리로부터 부림시장 안으로 해서 가는 코스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편 부림 지하상가 먹자골목으로 해서 들어가는 코스가 바로 그것이다. 내가 첫 번째 코스를 택한 이유는 '성광집'을 찾아가는 동안 부림시장의 옛 향수를 접해 보고 싶어서다. | | | ▲ 이영자 시인과 황선하 시인. /이상용 |
내가 서 있는 지점 왼쪽은 옛날 '태창라사'가 있던 곳이나 지금은 화장품 가게로 변해 있고, 오른쪽에는 휴대전화 가게가 있다. 이곳은 1970-80년대만 해도 경남 제일의 번화가였지만 지금은 한적한 거리로 변해 버렸다. 앞으로 몇 발짝 내딛고 보니 왼쪽으로 1970년대 초반에 유명했던 갈빗집 '삼오정' 생각이 문득 난다. '삼오정'은 옛날 나와 연극을 같이했던 최영화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걸어가니 '마산 부림시장'이란 간판이 높다랗게 걸려있다. 시장 안으로 들어간다. 전형적인 먹자골목이다. 갑자기 맵싸하고 구수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점심때가 되었기 때문이리라. 입안에선 금세 군침이 돌기 시작한다. 좌우를 둘러보니 온통 먹을거리 천지다. 떡볶이·어묵·김밥·순대·각종 튀김 등등. 그 모두가 '날 좀 먹어 보시오' 하며 나를 유혹하는 것 같다. 자칭 '빈대떡 신사'(?) 체면에 혼자서 사먹기도 뭣해서 걸음을 재촉하는 수밖에 없다. 먹음직스런 음식들로부터 도피하려면…. | | | ▲ 이영자 시인과 그 옆 이선관 시인. /이상용 |
드디어 그 이름도 찬란했던 '성광집'에 도착한다. 이영자 시인이 운영했던 식당 겸 선술집이다. 그곳은 아직도 새 주인을 찾지 못했는지 문이 굳게 닫혀 있다. 간판 위에는 '마시고 죽자'란 장난기 어린 문구가 선명하게 남아있어 그곳이 선술집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징그러운 것 중에 으뜸이 인간이다'와 같은 온갖 글귀들이 난해한 추상화처럼 꽁꽁 닫혀있는 문짝을 도배해 놓고 있어 이곳이 '예인들의 쉼터'였음도 입증해 주고 있다.
곶감이 많이 나는 함안 파수가 고향인 이영자 시인. 술을 전혀 못 마시는 그녀가 선술집을 운영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왜냐하면, 선술집에서는 주모(酒母)에게 술잔을 억지로 건네는 주당들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영자 시인은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으면서도 18년간이나 '성광집'을 운영했으니 누군들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 | | ▲ 왼쪽부터 황선하(시인), 여진(언론인), 신상철(수필가), 하길남(수필가), 고승하(음악인·가운데 선 사람), 이영자(시인), 한사람 건너 홍진기(시인), 김대환(화가) /이상용 |
스무 살 무렵에 마산으로 시집 온 후로는 쭉 마산에서 똬리를 틀었다는 이영자 시인. 그녀는 식당이나 선술집을 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단다. 하지만, 사업을 하던 남편과 사별한 후, 생계를 위해 험한 세파와 맞서야 했기에 궁여지책으로 부림지하상가 서쪽 입구 한 모퉁이에 일곱 평이 될까 말까 할 정도의 코딱지 만한 공간에 식당 겸 선술집인 '성광집'을 차렸고, 그 '성광집'이 그렇게 인기를 끌게 될 줄은 그녀도 지인들도 몰랐단다.
춘천의 박완서, 통영의 박경리, 목포의 박화성, 전주의 최명희처럼 우리 마산에도 유명 여류문인들이 많다. 오늘날까지도 활동하는 서인숙(시·수필), 추창영(시), 곽현숙(시), 김근숙(시), 하영(시), 강지연(시), 김계자(시), 이영자(시인) 등등이 그들 중 일부다. 여류시인이 운영했던 곳이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녀의 상술이 뛰어났음일까. '성광집'을 드나든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 | | ▲ 부림시장 지하 먹자골목 초입에 위치한 '성광집'의 현재 모습. /경남도민일보 김구연 기자 |
동서화랑 관장 송인식, 수필가 신상철, 시인 황선하·이광석·오하룡·이선관·홍진기·김미윤, 화가 김대환·남정현·현재호·변상봉·허청륭·안실영, 사진작가 나상호, 영화인 이승기, '고모령'의 문 여사, '만초집'의 조남륭 등등 기라성 같은 예인들과 명사(名士)들이 '성광집' 단골이었다. 연극인인 나도 그 말석에 끼었음은 물론이고….
'성광집' 벽에는 칠판이 두 개 걸려 있었는데, 하나는 메뉴판이었고 다른 하나에는 이영자 시인의 자작시가 늘 써져 있었다. 시인에 대한 경외심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의 미모 때문일까? 점심때 줄을 서서 기다리지 않으면 식탁에 앉아볼 기회조차 없을 만큼 손님이 많았단다. 점심때는 음식을 팔고 오후 늦게부터 초저녁까지만 술을 팔았다는 이영자 시인…. | | | ▲ '성광집' 간판에 마산 예인 중 한 사람이 적은 장난어린 글귀. /두두 |
그녀는 선술집을 하면서 1989년부터 시집 <초승달 연가>를 시작으로 <개망초꽃도 시가 될 줄은>, <식당일기>, <그 여자네 집> 등 네 권의 시집을 상재(上梓)했고, 지난해에는 시집 <땅심>까지 상재한 시인이다. '성광집'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 한 사람을 꼽으라고 하자 "한 사람은 좀 그렇고, 신상철 황선하 현재호 이선관 등등의 예인들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특히 수필가 신상철은 그녀의 세 번째 시집 <식당일기>의 출간기념회를 열어줄 정도로 그녀를 아꼈단다.
당시에는 '고모령'도 부림시장 부근 수성동 골목에 있었다. 그래서 많은 주당과 예인들은 "1차를 '성광집'에서 하면, 2차는 '고모령'에서!", 또는 "1차를 '고모령'에서 하면, 2차는 '성광집'에서!" 하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깃대를 높이 들고 두 집을 왔다 갔다 했으니 그 얼마나 낭만적인 풍경인가. 더구나 두 집은 '엎어지면 코 닿을'만큼 지척에 있었고. 그래서 '성광집'을 한 시대를 풍미한 '마산 예인 쉼터'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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