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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세계문학이란 과연 보편적인 문학인가?>의
속편격인 글입니다 *
흔히 근대문학(근대소설)은 시장, 즉 자본주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당연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막연히 소설은 자본주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나면,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우리로서는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필연적인 것), 그러므로 도리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게 됩니다. 소설이 자본주의의 부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에 대한 비판적인 기능 또한 갖고 있기 때문에 옹호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 자체를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거기에는 분명 일정 정도의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입장에 서게 되면, 근대문학의 부정성은 알게 모르게 지워지기 마련이고 결국 그것은 절대적으로 옹호되어야 보편성을 띠게 됩니다. 이를테면, 그것의 태생이 망각되고 마치 처음부터 자본주의(근대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행하는 예술형식으로서 존재해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근대문학의 본질을 문제삼는다면, 설사 거기에 존재하는 비판성은 인정하더라도 도리어 그것이 가진 부정성(특수성)에서 논의를 진행시켜야 합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은 정확히 그런 작업을 수행한 저작입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여전히 문제가 존재합니다. 예컨대, 가라타니는 이 책에서 근대문학에 나타나는 풍경, 내면, 고백, 병, 아동 등을 고찰하면서 거기에 숨어있는 전도를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왜 그와 같은 전도가 일어난 것일까요? 이에 대해 그는 그 원흉으로 기독교를 지목합니다. 이 책의 외적 순서는 구니기타 돗포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되고 있지만, 이를 내적 서사순으로 재배열한다면 우치무라 간조가 맨 앞에 와야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실 일본의 근대문학은 바로 이와 같은 기독교적 신앙에 대한 배반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는 비단 많은 초기 일본근대문학의 대가들이 한때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였다는 것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근대문학에는 이미 그런 기독교적 의식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설사 겉으로는 그것을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근대문학에 강하게 사로잡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런 과정을 소행적으로 수행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즉 기독교와 근대문학은 원인과 결과라기보다는 그들 자체가 원인이자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기독교를 믿고 문학에 뜻을 두었을까요? 즉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느니 근대문학이 서구로부터 수입되었느니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향이란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준비(토대)가 존재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야마지 아이잔은 “정신적 혁명은 시대의 그늘에서 나온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새 신앙을 고백하고 천하와 싸우고자 결심한 청년이 열이면 열, 모두 시대의 순조로운 흐름에 몸을 맡기는 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은 당시 역사를 논하는 이들이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들은 속세의 영화에는 희망을 갖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속세에서 좋은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적었다. (山路愛山, <現代日本教会史論>(1905), <<日本の名著>>(第40卷), 1971,351頁).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당시 기독교에 심취했던 이들이 대부분 메이지유신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 (끝까지 막부를 지지한 나머지)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가문의 청년들(패배자)이었다는 점입니다. 즉 그들이 세상에 나가 출세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적었고, 주군이 잃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사무라이라고 할 만한 어떤 근거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육제도를 경유해 관리가 되지 않는 한, 그들과 평민을 구별해줄 수 있는 지표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정신적으로 우위에 섬으로써(내세를 기약함으로써) 현실에서의 굴욕을 초월하려고 했습니다(가라타니는 여기서 ‘전도’를 발견하지요). 정리하면, 근대일본의 기독교는 바로 이런 ‘시대의 그늘’에서 자라났습니다.
둘째는 첫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근대일본의 기독교는 대중으로부터도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도래한 기독교(신교)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더 이상 무사일 수 없는 무사, 그러면서도 무사라는 사실 외에는 자존심의 근거를 찾아내지 못한 계층이다. 기독교가 파고들어 간 것은 무력감과 원한으로 가득 찬 마음이었다.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를 포함한 여러 작품에서 무사도가 기독교에 직결되는 것으로 간주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독교도라는 사실에 의해 <무사>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라타니 고진, (정본판)<<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박유하 옮김, 도서출판b, 2010, 120쪽).
그런데 이와 같은 지적은 정확히 문학을 지원했던 사람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일반인으로서는 잘 이해가 안 가는 묘한 자부심 같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자부심은 세속적인 출세에 대한 경멸과 궤를 같이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도 예전에는 그랬습니다만, 어떤 좌절감(즉 출세) 때문에 문학으로 전향한 경우가 많습니다. 60대 전후의 남성작가들 상당수가 고등고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더욱이 식민치하의 조선에서 당시 엘리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극히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도와 문학가의 차이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설사 비슷한 정신구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기독교도였던 우치무라 간조와 문학가였던 제자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합니다. 이 차이를 명확하게 만든 것은 당연 러일전쟁이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우치무라 간조는 당시 러일전쟁을 반대한 극소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물론, 그 역시 한때 나름대로의 이유를 붙여 전쟁을 옹호한 적이 있었지만(청일전쟁 때), 그것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었다는 것을 알고 괴로워합니다. 이에 반해 문학가 제자들은 전쟁을 토픽으로 삼아 급속히 성장하던 언론사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반전은커녕 종군기자로서 전장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이와나미문고판 <<소세키문예론집>>를 편집한 이소다 고이치는 해설에서 우리가 앞서 다룬 글(「전후 문학계의 추세」)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근대사에 신기원을 연 러일전쟁은 소세키가 영국에서 귀국하고 다음해에 일어났다. 승리로서 전쟁종결을 맞았을 때, 전후 문학에 대한 예상을 말한 것이 「전후 문학계의 추세」이다. 소세키는 국가 위신의 향상에도 불구하고 ‘우리 일본은 불행히도 문학방면에서는 옛날부터 외국에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하며, 머지않아 경제적 향상에 의해 문학도 향상할 것이라는 매우 낙관적인 관측을 하고 있다. 이런 관점을 서술했다고 해서 소세키를 비난하더라도 소용이 없는 일이며, 동시대의 국민의식을 소세키가 어떻게 공유하고 있었는가라는 측면도 지나치게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磯田光一, 「解説」, <<漱石文芸論集>>, 岩波文庫, 385-386頁.
우리로서는 ‘소세키의 그와 같은 ‘낙관적 관측’을 비난하는 것은 무용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차지하고) 소세키의 그런 입장이 당시 일본국민의 보편적 감정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막연한 예측에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되었다는 것은 일본문학사가 증명하고 있고 있는 사실입니다. 가라타니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은 메이지문학, 그것도 20년대와 30년대 초반을 주된 논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때 일본근대문학의 대략적인 모양이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게 그런 주장에는 분명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30년대 후반(정확히는 러일전쟁 후)에 완성되었다는 보는 쪽이 여러모로 훨씬 설득력이 있습니다. 실제로 러일전쟁 이전까지의 일본문단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배우고 읽고 기억하는 작가들은 매우 미비한 영향력밖에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즉 적어도 러일전쟁 이전까지의 일본문단은 오자키 고요로 대표되는 겐유샤(硯友社) 그룹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사태는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이를 보고 쉽게 알기 위해 러일전쟁이 시작된 해인 1904년에서 한일병합이 이루어지는 1910년 전까지의 문학사를 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습니다(참고로 이 표는 (정본판)<<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 부록으로 실린 것입니다).
표를 보면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일본문학은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일신하게 됩니다. 즉 초기 일본근대문학의 대표작들이 줄줄이 간행되고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최초의 근대장편소설로 불리는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와 이후 일본문단의 주류가 되는 사소설의 원조격인 <이불>은 1년 시차를 두고 나란히 나왔고, 전쟁발발 1년 전에 귀국한 소세키는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대표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이 ‘풍경의 발견’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취급한 구니키다 돗포는 그 이전(메이지 20년대)부터 주요작품을 쓰고 있었지만(「잊을 수 없는 사람들」, 「무사시노」), 그가 인정을 받은 것은 러일전쟁 이후라는 점에서 모두 한 부류로 묶을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히가시 가즈시게라는 젊은 연구가는 러일전쟁 전후를 기점으로 문학에 대한 관념이 크게 바뀌었고,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기존 문학가들의 몰락과 새로운 문학가들의 등장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것의 확인일 수 있겠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러일전쟁이 끝나자 일본은 국민적으로 고양된 분위기(자신감)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이는 문단에도 불어 국가는 이렇게 대국 러시아를 무찔렀는데, 문학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다그치는 소리와 소세키처럼 지금까지는 별 볼이 없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밝은 전망들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기비하와 맑은 자기전망 사이에 소위 대표적 국민문학(그리고 외국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는 의미에서 세계문학)이 속속 씌어지게 됩니다. 이는 만약 러일전쟁(또는 그와 비슷한 대량살상 전쟁)이 없었다면, 일본근대문학은 전혀 다른 형태로 전개되어 갔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당연 어떤 방식이 되어갔을지 추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무의미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일본문학은 오늘날 노벨문학상을 두 명이나 배출할 만큼의 지위를 얻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전쟁은 어떻게 일본문학에 영향을 준 것인가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외적으로는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1) 기개(자신감) 2) 경제적 발전 3) 언론매체의 발달. 그러나 시야를 문단에 제한한다면(즉 내부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문학담론의 변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문학에 대한 가치판단에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쉽게 말해, 전쟁 이전의 독자들은 오자키 고요의 소설이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반해 구니키다 돗포의 소설들은 일반독자들은 물론 평론가들에게도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전쟁 후 사태가 일변한 것입니다. 어느 날 깨어나 보니 돗포는 일본근대문학의 대표주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런 변화에 놀란 것은 돗포 자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겐유샤로 대표되는 구문학과 돗포, 소세키, 도손, 가타이로 대표되는 신문학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어서 그렇게 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히가시는 이를 당시에 나온 평 여러 가지를 간접인용함으로써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신작가들을 칭찬할 때 공통된 기준이 된 것은 먼저 도손에 대해 이야기된 것처럼 ‘작가가 진지한 마음으로 자연인생을 보고, 또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예술제작에 종사했다’는 창작태도의 진지함이다. 또 ‘종래의 작품이 작가의 개성을 많이 발휘할 정도로 내부적 생명의 발동을 보는 데 이르지 않았던’ 데 반해, 소세키의 작품에서는 ‘작가가 작품에 자기의 인격을 가장 명확히 나타내고 있다’, ‘주관적 경향의 현저함만큼 작가의 개성이 가장 강하게 명확하게 그 작품에 나타났다’고 간주된다. 또 돗포의 <<운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작품을 통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특질은 모든 작품에서 주관적 경향이 명확히 보인다는 것이다’고 간주된다. 이처럼 신작가에게는 작가의 ‘인격’, ‘개성’, ‘주관’이 작품에 보다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구작가의 ‘사실소설’은 작가가 구상하는 줄거리에 따라 형편에 맞게 배치 ‧ 조작될 뿐으로, 작가의 독자적인 관찰에 의해 가능한 주관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지 않았다. (…) 여기서 신구작가의 경계선은 단순히 문단등장의 시기가 아니라, 작가가 작품과 연결되는 관계의 질(質)에서 도출되고 저마다 속성이 부수된다. 구작가의 작품은 각색구성이나 문장기교에서는 뛰어나지만, ‘신경향의 작가’는 작가의 인격이나 주관, 개성의 originality에 의해 가치를 갖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신작가의 작품은 ‘작가 개개의 개성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작가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간주된다. 여기서는 작품이 기술(技術)적 평가에서 작품에 작가 개성의 originality가 표현되어 있는지 어떤지에 대한 판단으로, 문학평가의 좌표축 그 자체가 다시 씌어지고 있다. (大東和重, <<文学の誕生>>, 講談社, 2006, 21-22頁).
다소 길게 인용했는데, 그것은 일본근대문학의 탄생 순간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야기적 재미와 구성적 완성도에서 작가적 개성의 표현이 보여주는 진실함으로’라는 평가기준의 변화를 단순히 근대문학의 절대조건으로서 오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정작 위대한 근대문학들(신문학)은 이야기적 재미와 구성적 완성도에서도 ‘근대문학 이전 문학’(구문학)을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작가의 개성이나 주관의 표현이 근대문학의 중요한 특징이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말고, 그러한 것들 ‘특별히 강하게 표현되고 또 높이 평가받는 시기’가 언제인지, 또 그것은 왜인지를 문제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가설을 제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작가적 개성의 표현’이 근대문학에 있어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라고 할 때, 그것이 가장 잘 발휘 될 때(즉 가장 근대문학적이 될 때)는 전후문학이라는 것입니다. 즉 근대문학사의 발전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이야기적 기교(전근대문학)를 거부하고 작가적 개성이 강조됨으로써 근대문학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그에 반발하여 이야기성을 강조하는 문학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계기’로 작가의 주관이 강조되는 문학이 주도권을 잡습니다. 즉 일종의 순환형태를 띠고 있지요.
주관적(개성중심) 문학 → 객관적(서사중심) 문학 → 주관적 문학 → 객관적 문학
저는 이런 순환 자체가 근대문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근대문학이란 본질적으로 ‘전후문학’이라는 의미입니다. 일본의 경우는 태평양전쟁 이후의 문학을, 우리의 경우 한국전쟁 이후의 문학을 보통 ‘전후문학’이라고 말합니다. 이 자체로는 크게 문제될 게 없지만, 만약 그것이 ‘전후문학’ 이전의 문학은 전후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일반적인 근대문학이란 전쟁과 무관한 문학으로서 오해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후문학’을 특수한 경험을 다루는 문학으로서 볼 것이 아니라, 근원(기원)이 망각된 채로 전개되는 근대문학의 역사 속에서 근대문학 본래의 모습을 폭로하는 문학으로서 봐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놓치면 되면, 우리는 공허만 논의들만 반복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최근 일부 평자들은 이야기성의 회복을 외치며 그것이야말로 근대문학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이들은 대체로 장편소설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어떤 이들은 지나친 서사성성의 강화는 본격문학(근대문학)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근대문학이 가지고 있는 예술성(개성중심)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이들은 대체로 단편소설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저는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줄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성도 서사도 모두 근대소설의 핵심요소이며, 이미 근대문학이 형성된 이상 그 어느 쪽의 강화가 다른 쪽보다 근대문학의 본질에 가깝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런 해당 국면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그럴듯한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이런 반복패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왜 어떤 시기에는 서사중심의 문학이 각광을 받고, 또 왜 어떤 시기에는 개성중심의 문학이 각광을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물음 자체는 거창한 것 같지만, 그것을 풀 열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근대문학의 탄생(개성중심의 문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보았기 때문입니다.
풀이하자면, 이렇습니다. 문학자들이 안으로 후퇴할 때(즉 주관에 집착할 때)란 외적 세계가 주관이 정면으로 감당하기 힘든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펴본 바로 ‘주관이 감당하기 힘든 국면’이란 전쟁, 근대문학 최대의 부정성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물론 전쟁은 인류가 존재한 이래 죽 있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전쟁은 그 이전과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었고, 이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근대문학을 형성시켰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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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이곳에 와서 처음 읽는 글입니다. (-가입인사목록-에 우선 읽는 것 부터 해야하는 점이 있기에 인사 올리기 전에 이곳에 왔습니다) .. 처음 읽은 글에서, 제가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언급이 있다니.. 기분이 더욱 좋네요..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