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문화원과 성주군에서 10개년 계획으로 추진 중인 성주 역사인물 현창사업 제4차년도 학술발표회가 오는 11월 6일 오후 2시부터 성주군청 대강당에서 개최된다.
올해 학술대회는 경산이씨(京山李氏)의 현조(顯祖) 삼익재(三益齋) 이천배(李天培)·백천(白川) 이천봉(李天封) 양(兩)선생과, 전주이씨(全州李氏) 심원당(心遠堂) 이육(李堉) 선생을 대상으로 열린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먼저 ‘동강·한강선생의 학맥 형성 배경’이라는 주제로 경북대학교 이세동 교수가 기조연설을 하며, 주제발표는, ‘삼익재(三益齋)·백천(白川) 양(兩)선생의 생애와 학문’에 대해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김학수 교수가, ‘심원당(心遠堂) 선생의 생애와 학문’에 대해서는 한국국학진흥원 남재주 교수가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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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星州)의 옛 지명을 관향으로 삼고 있는 경산이씨(京山李氏)의 유래와 유적, 인물 등을 삼익재(三益齋)·백천(白川) 양선생(兩先生)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성주라는 지명은 신라때 벽진군·성산군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 태조때 경산부로 칭명하였다. 이후 광평군으로도 불리웠다가 고려 현종때 다시 경산부라 칭하였다. 이후 흥안도호부·성주목 등으로 여러번 개칭되었다가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산이씨 시조는 신라 53대 신덕왕의 외손으로 고려때 악거부정(예술 관할 부처 차관급으로 추정) 벼슬을 역임한 이덕부(李德富)이다. 대대로 계림(경주)에서 거주하다가 고려 무신정권 전기(前期)인 1173년경 경산부 본아리(경산리 일원)로 이거하여 세계를 시작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정확한 이거 연월에 대한 기록은 없다.
경산이씨는 처음 관향을 성주 또는 성산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성주의 다섯 이씨(경산, 농서, 벽진, 성산, 광평)가 같은 관향을 쓰면서 상호 혼동이 생겨 조선 말기인 경인년(甲寅年) 무렵부터 ‘경산’으로 고쳐 지금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경산이씨 유물·유적, 묘비, 관부 등 옛 자료에는 본관이 성주 또는 성산으로 표기된 경우가 허다하다.
고려시대 경산이씨를 빛낸 인물로는, 2世 이당유가 소보(少保) 벼슬을, 3世 이교년이 위위(衛尉), 5世 이조는 비서성시랑, 이호는 청송부원군, 7世 이미는 송안군, 이협은 판도판서를 역임하는 등 일찍부터 많은 고위 관직을 배출해 명문거족으서 기틀을 다졌다. 특히 소부윤(小府尹)을 지낸 7世 이함은 고려훈국공신 광평군 이능의 사위가 되어 광평의 땅(현재 월항면 일대)을 전수하여 당시 세거지였던 경산리로부터 암포(덤개) 등으로 이거함으로써 성주 덤개마을은 7백년 이상 경산이씨의 집성촌이자 본거지가 되었다.
경산이씨는 시조공의 맏집으로 이어지는 경산이씨(성주파)와 청송부원군에 봉해진 5世 이호의 후손인 청송이씨(금성파)로 갈리게 된다. 청송이씨는 주로 북한 지역 일대에 많이 산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인물로는 양양도호부사를 지낸 이번의 아들인 9世 이흥문은 문장이 뛰어났으며 제주안무사와 대사헌을 역임했다. 이흥문의 맏이 10世 이엽은 건공장군 중부장을 지냈으며, 차자인 이안은 단천군수 및 군자감첨정 등을 역임했다.
경산이씨의 대표적 거학도유인 삼익재 이천배, 백천 이천봉, 학가재 이주 삼선생은 높은 학덕으로 가문을 더욱 빛냈다. 14世 삼익재 이천배는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여헌 장현광·낙재 서사원·감호 여대로 선생 등과 도의로 교류하였으며, 학덕과 명성이 드러나 벼슬길에 천거되었음에도 겸양의 자세로 위기지학에만 전념하였고, 우리나라 첫번째 사액서원인 천곡서원을 중수하고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성주 덕암서원과 검양서당에서 추모하고 있다. 특히 백천선생 증손인 성균생원 삼민당(三悶堂) 이달신(李達新)이 편집·간행한 ‘삼익재선생문집’은 청아한 문장으로 유명하며 한국문화역사대백과사전에 소개되어 있다. 삼익재선생의 문도로는 졸재 정수, 월봉 이정현 등이 있다.
14世 백천 이천봉은 한강 정구선생을 늘 곁에서 배종한 고제로서, 선조때 성균관에서 유학하였고 정묘호란때 성주의병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백천정과 보동정사를 지어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1620년 한강 정구선생이 타계하자 삼년의 복을 입었고, 회연서원 창건과 한강 신도비 건립, 한강문집 발간 등에 극진한 예를 다했다. 특히 영의정 홍서봉과 도의로 사귀면서 주고 받은 ‘보동십영시’는 자연의 오묘한 섭리가 선연히 표현되어 아취를 풍긴다. 석학의덕으로 사림에 추중되어 덕암서원과 검양서당에서 추모하고 있다.
15世 학가재 이주는 여헌 장현광 문하 십철에 드는 대유현으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간송 조임도·백포 채무·청천당 장응일·운계 정홍석 등 제현과 도의로 사귀었고, 여헌 장현광선생의 연보와 행장을 모두 지었으며, 남전향약을 따라 동규를 만들고 계도하여 향촌사회 발전을 주도하였다.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사월정(沙月亭) 이륜(李倫)과 함께 숭조목족 정신을 드높이기 위해 백인당을 건립하고 팔덕목을 제시하였다. 학가정과 공암서당을 지어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이조판서를 지낸 이원정·이조정랑을 지낸 도처형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학가재선생문집’이 있으며 덕암서원에서 제향하고 있다.
월항면 안포1리에 소재한 대종재실 ‘백인당’(경북문화재자료 제287호) 경내에는 9世 대사헌 이흥문이 제주안무사직을 마치고 고향에 가져와 심은 백인당 향나무(일명 탐라향)가 수령 568년의 위용을 자랑하며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탐라향목은 2015년 7월 6일자로 경북기념물 제171호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생태적 가치가 높은 나무이다.
월항면 유월리에 위치한 ‘덕암서원’(경북문화재자료 제286호)은 영남 사림들이 1672년(조선 현종10) 창건하였으며, 삼익재 이천배, 백천 이천봉, 학가재 이주 삼선생을 봉향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전국서원연합회에 등록된 670여개 서원 중 덕암서원처럼 형제·숙질이 동시대에 한 문중에서 3선생이 나란히 봉안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덕암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9월 상정에 유림들이 모여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덕암서원 입구에는 월항면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관항루가 우뚝 서 있으며, 서원 주변에는 경산이씨 유래비, 경산이씨 시조~6대 제단비, 대사헌 이흥문 묘도비가 있으며, 덕암서원에 봉향된 3선생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파리장서에 서명하여 독립청원을 한 경산이씨 종인 이현창, 이계준, 이계원, 이만성 네분의 사적비가 있다. 파리장서 독립청원서는 전국 137인, 성주지역은 군단위 전국 최다 인사인 15인이 참여하였고 이중 경산이씨 문중에서만 4인이 동참하는 등 우국지사의 문중이기도 하다.
한편 월항면 안포1리에 위치한 ‘검양서당’은 삼익재와 백천선생의 강학지소이다. 여기에는 한강 정구선생의 훈작홍의 글과 우복 정경세 선생의 연주, 여헌 장현광 선생의 신필, 영의정 홍서봉의 보동십영원차운, 판서 김세렴의 재호필서가 계벽되어 있다.
이외 성주지역에는 월항면 보암리에 소재한 건공장군 이엽을 추모하는 재사인 ‘원모재’와, 안포리에 학가재 선생의 강학지소인 ‘학가정’ 등 20곳의 재사·누정이 산재해 있다. 경산이씨의 주요 파로는 부장공파(학가재파)·군수공파(백천파)·사직공파(동산파)·생원공파·홍복재파·통덕랑공파 등으로 크게 분류된다.
경산이씨의 현대 인물로는 고 이정식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수석부의장, 고 이의근 경상북도지사, 고 이창훈 동경아시안게임 마라톤 우승자 등이 있다.
또한 대법관·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낸 이상경씨, 청와대 사회정책수석 등을 지낸 이원덕씨 등 고위관료들을 배출함과 동시에, 이하영 재경성주문화사업후원회장, 백천선생 13대 주손인 이대열 성균관부관장, 이갑도 경산이씨 대종회장 겸 성주유도회장, 이재복 성주군노인회장 겸 성주군사회단체협의회장, 이기원 제스코 회장 등이 선비의 고을 성주에 머무르면서 인의예지 정신 함양과 전통문화 창달에 앞장서고 있다.
- 성주자치신문, 2015-10-12일자
첫댓글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