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장에 앞서 일반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하여 많은 분들이 모여들어 오늘 개장관안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 만큼 미래인재를 잘 키우고 싶고 본인의 자녀만큼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으로 키우고 싶은 마음때문일것이다.
글을 쓰는 저자도 잠시 둘러보고 나왔지만 과학의 영역은 넓고 개척해야 될 것이 많다. 그곳에서 느낀것 중 하나는 부모의 욕심이 과다하여 자녀를 무조건 하나라도 체험을 더 시켜주고 싶어서 안달한 부모님들도 볼 수 있다.
어느것이 옳은 방법인지는 모르나? 세상의 명문가를 키운 부모님들은 부도 아닌 자식에게 혼자 스스로 자랄 수 있도록 원칙을 정해주고 창조적으로 키우지는 않았을까?
조선시대 사림이 자리를 잡고 향교가 교육의 기능을 하던 시절 전국적 십프로 정도만 양반인 시절 영남 남인은 퇴계 이황의 학문과 사상의 중심이 서애류성룡 학봉김성일 경당 장흥효 갈암이현일 밀암이재를 지나 소퇴계 대산이상정에 도달하고 나서야 거대한 거유의 문호가 열리고 대산학당은 영조정조시대 인재의 산실이었다.
그 중심에 대산이상정이 있었고 학문으로 그시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영남의 대유방가의 선봉이었다.
그곳 대산학당에 모여던 전국의 유생들 중 대산선생실기(제자 고산급문록) 273분+1분 제자중 안동김씨가 가장많은 첫번째요 두번째로 대산이상정의 족친 한산이문 일명 소호문중이 있었다.
물론 이제는 대산이상정 소산이광정 약와이현정 간암이완등 한산이문이면 익숙한 이야기이다. 사실 소호문중은 수은공 휘 홍조를 중심으로 한집안 일가이며 1988년 세보작업시 해산공파세보가 휘 창조와 휘 홍조로 만들어 질 수 있었던 것은 지하에 계신 휘 문영 선조님의 은덕이 아닐까 나름추측해 본다.
그 퇴계학의 적통을 이은 소퇴계 대산이상정의 273분의 위인제자 중 특히 위에서 언급한 소호문중 위인 이외에 꼭 현세를 살면서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한산이씨 명가를 이끄신분이 있다.
어쩌면 오늘 무료개방중인 부산국립과학관의 인파들이 300년전 대산학당 대산이상정 문인제자로 입학시키기 위해 몰려들때 손수 자녀들을 한분도 빠짐없이 데리고 오신 위대한 미래를 내다본 오늘날의 위대한 부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