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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부흥
“우리는 외부 사람들의 입장을 다루기 전에 우리 자신을 먼저 살펴보고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참된 부흥은 교회 안에서 일어난 부흥으로 시작되고, 부흥은 자기들의 곤경과 무력함을 깨닫고 하나님에게 돌아서서 용서와 새 힘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에 임하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요한복음 10장 10절을 본문으로 전한 설교(1928년 7월 22일)
“이적의 시대가 끝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성령은 여전히 사방에서 역사하고,
따라서 언제 이곳 에버라본의 우리에게 임하실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준비합시다!”
“현재 종교는 양심을 일깨우기보다는 양심을 무마시키는 데 훨씬 더 빈번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가치한 존재로 영원한 파멸을 마땅하다는 사실을 의식하도록 하기보다는 자기만족과 영원한 안전에 대한 의식을 조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예레미야 17장 9, 10, 14절을 본문으로 전한 설교(1930년)
부흥의 정의
로이드 존스에게 부흥이란 복음전도를 통한 회심이상이며, 개 교회의 활기나 열정, 안정된 재정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가 추구한 것은 창조주의 위대하심과 그가 우리 가까이 계심을 아는 데서 비롯되는 영적인 생활의 새로운 특질로 성경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마음으로 깊이 인식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또한 부흥이란 영광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고, 그분께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분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흥은 한평생 가장 사모해야할 주제요, 하나님의 축복이요, 부흥은 모든 교인들에게 성령세례가 임하는 것이다.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유행을 따를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믿음의 선진들이 영적 기갈에 달게 마셨던 말씀의 우물을 다시 파야하는 것이다.
부흥이란 신자들의 생명이 회복되는 것이요, 죽어가는 무력한 교회가 깨어나며 활기를 되찾고 생명의 기운이 소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의 죽어가던 성도들에게 어는 날 갑자기 성령의 능력이 임한다. 그리하여 머리로만 알던 진리를 새롭게, 더 깊이 깨달은 사람들이 겸손해지고 죄를 통회한다. 자신들의 상태를 보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 결과 새로운 생명의 힘을 얻어 성도들은 기도하기 시작하고 목사들은 능력 있는 설교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에 속한 신자들이 새로워지는 것과 이제까지 신앙생활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던 교회 밖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흥은 로이드 존스가 관심을 기울인 여러 주제들 중 한 가지가 아니었다. 부흥은 그의 필생의 화두였다. 그가 사역 초기부터 인근에 있는 목회자들과 기도서약서를 만들고 부흥을 위한 기도모임을 시작했다.
이토록 부흥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라면 부흥이 어떻게 임하는가?
부흥은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지거나 회득할 수 없다
부흥은 로이드 존스의 사고와 설교 속에 사람들을 구원과 확신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그의 전반적인 이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주제였다. 그는 부흥을 모든 개인이 회심할 때 나타나는 동일한 신적 권능이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확대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로이드 존스는 부흥을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 내거나 “획득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를 아주 중대한 오류로 보았다. 이 오류를 회심 자체의 의미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서 찾았다. 아무리 큰 노력을 하고 힘을 쏟는다고 해도 사람은 단 한 건도 참된 회심을 이끌어 낼 수 없다. 이 강조점은 로이드 존스 사역 초기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사도 바울은 한 사람도 회심시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에 불과했습니다. 존 웨슬리, 대니얼 롤런드, 부스 장군, 세스 조슈아 그리고 모든 훌륭한 사람들도 단 한 명의 영혼도 구원시키지 못했고, 단 한 명의 원수도 패배시키지 못했습니다.” 1927년 5월 3일에 사무엘상 17장을 본문으로 전한 설교.
회심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면 당연히 부흥이 교회 활동을 통해 일어날 수 있다는 관념은 부정하게 된다. 한 개인의 구원에 본질적인 주권적이고 초자연적인 능력은 다수의 구원을 위해서도 똑같이 필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을 회심 속에 “몰아넣는” 사람들과 부흥을 “성급하게 일으키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 역시 똑같은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부흥과 일상
부흥은 교회 역사에 있어서 “특별한 시기”인데, 사람들의 계획과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특별한 사건”이다. 그는 “큰 날”과 “보통 날”을 갖고 있다고 설교했다. “큰 경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보통의 일상적 경험도 있습니다. ‘항상’ 지속적인 부흥을 달라고 기도하는 교회는 사명을 바로 파악하지 못한 교회입니다. 교회는 항상 부흥 상태 속에 있도록 되어 있지 않고, 보통은 일상적 임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 일상적 업무만 잘 기억하고 있어서 교회가 부흥하는 특별한 때가 있다는 것은 잊어버립니다!”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의 활동의 필요성을 먼저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의 수동적인 태도는 장려하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활동을 참된 소망의 원천으로 역설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면 목회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거나 다수거나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성령은 회심을 일으키기 위해 진리를 사용하되, 가장 현저하게는 설교 행위를 통해 회심을 일으키신다.
현대설교는 왜 사람을 회심시킬 수 없나?
그는 현대설교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믿었다. 이 사실에 대한 핵심 증거를 설교자가 성령의 일차 역사가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에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찾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마시키고 안심시키고 즐겁게 하는 설교는 하나님의 영에 의존하는 설교가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
전도설교의 원리1 ; 회심하기 전에 사람들의 죄를 자각시켜라.
그래서 로이드 존스는 강력한 전도 설교의 규칙으로 간주한 원리, 곧 사람들을 회심하기 전에 먼저 죄를 자각해야 한다는 사실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1883년에 C. H. 스펄전은 이렇게 선언했다. “처음에 설교자의 임무는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상처 입지 않은 사람을 고치려고 시도하거나 벗고 있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려고 시도하거나 자신의 가난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부자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세상이 존속하는 동안 우리는 성령을 보혜사로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책망자로서도 필요할 것입니다.”
1892년 스펄전이 죽기 전부터 이미 크게 망각된 원리가 1920년대 후반에 에버라본, 샌드필즈에서 다시 등장했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의 다양한 특징 가운데 가장 두르러진 특징은 그가 복음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사람들이 죄의 근본 성격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하는데서 확인할 수 있다. “어느 때든 자신에 대해 절망을 느끼지 않는 한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 신약 성경 곳곳에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의 대다수 설교는 영적 관심을 일깨우기 위한 특별한 의도를 갖고 전해진 것이다. “구원을 얻는 길은 구원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어떤 사람이 구원을 구하도록 만드는 것은 그로 하여금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데 있습니다. 사실상 그것이 신약 성경의 핵심 주제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 서론에서 로이드 존스는 “오늘날의 설교는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하고, 교회들도 회심한 자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을 토로했다.
“제가 볼 때 상황보다 훨씬 더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의 설교는 사람들을 조금도 귀찮게 하지 못하고, 엄밀히 말해 아무 동요도 없고 아무 혼란도 없이 있던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교회는 마취약과 완화제를 나눠 주어 누구든 안심을 얻고 위안을 받게 하는 일종의 약국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유일한 주제는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 규칙을 깨트리거나 자기 회중에게 불온한 결과를 제공하는 사람은 누구든 나쁜 사람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존스는 그리스도 자신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다면, 곧 누군가 ‘하나님의 사랑’을 액면 그대로 이해했다면,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말을 듣는 무리에게 어떤 결과를 일으키셨습니까? 말씀을 듣고 집에 돌아가 웃음을 띠고 행복해 하고, 스스로 만족하며 아늑함을 느꼈습니까? 예수님의 전체 사역은 어느 누구도 비판하지 않고 아무도 불쾌함을 느끼지 않는 사역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섬김은 오늘날 인기 있는 그런 유형의 섬김이었습니까? 즉 감미로운 찬송가가 울려 펴지고, 훌륭한 기도가 드려지며, 세련되고 교양 있는 ‘짧은 설교’가 전해지고 있는 ‘희미한 종교의 빛’이 비취는 건물을 섬기는 그런 섬김이었습니까? 신약 성경의 기록들을 보고 거기서 답변을 확인해 보십시오.”
요한복음 본문을 취한 다른 설교에서 로이드 존스는 회중에게 먼저 죄를 다루는 설교 방식은 또한 사도 바울이 취한 방식이기도 했다고 상기시켜 주었다.
“이 위대한 사도는 은혜로운 구원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을 필수적으로 지적하지만, 그 전에 있던 사람들이 죄를 자각하도록 하려고 그들의 길과 그들의 관점이 잘못되고 어리석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반대하고, 그 안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들은 한 술 더 떠 ‘부정적’ 설교로 부르면서 이런 설교는 잘못된 설교로,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펼쳐진 사랑에 반한다고 말합니다....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필요성을 깊이 그리고 철저히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런 가치가 없고 우리의 삶과 아무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설교할 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증언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벗어나 있다는 중대한 진리 역시 똑같이 강조되어야 마땅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탕자의 비유에 대해 설교하면서, 탕자가 “자신이 죄인이고, 자신의 실제 본성이 부정하고 더럽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다음과 말했다.
“여러분의 문제점이 이런저런 나쁜 짓을 저지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나쁜 존재이고, 여러분의 본성이 악하다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구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구원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본성을 변화시켜 주시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도움이나 권고나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여러분이 누구냐 또는 어떤 사람이냐의 여부와 상관이 없습니다. 또 여러분이 얼마나 착하게 보이느냐 또한 얼마나 선한 일을 행했느냐의 여부도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한평생 교회 안에서 생활하고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일 수 있지만, 그래도 저는 말하겠는데(성경에서 거듭 말씀하는 것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여러분 자신의 본성이 악하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면, 곧 사도 바울의 말자신이 ‘죄로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알지 못한 것이고, 또 그리스도를 구주로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그분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막9:12; 막2:17).”
로이드 존스는 참된 기도와 영적 사역은 타인에 대한 깊은 느낌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모든 기독교 사역의 출발점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자신의 죄를 깨닫도록 죄인을 이끄는데 할애되어야 합니다. 죄인은 자신의 죄를 느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들의 죄의 짐을 느끼도록 부르심을 받고, 따라서 그것을 느끼기 위해 무릎을 끊고 울며 기도해야 합니다.” 죄와 복음에 올바로 이해해야 확실히 성령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게 된다고 로이드 존스는 선언했다.
회심: 에버라본 교회의 규칙적 특징
1929년경에는 회심이 에버라본 교회의 삶의 규칙적 특징이 되었다. 교인은 꾸준히 늘어나 146명(1926년의 공식 집계)에서 1927년 말에는 165명으로, 1928년 말에는 196명으로 증가했다. 물론 이 집계에는 그 지역으로 이사해서 샌드필즈 교회에 등록한 그리스도인들도 모두 포함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수가 아니었고, 그들 중에는 이미 교인이었으나 그때까지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롭슨 패밀리
그중에 롭슨 가족이 있었는데, 가장 크게 변화된 가정의 하나였다. 로이드 존스가 에버라본에서 첫 날 밤을 보낼 때 가스 중독으로 죽을 뻔했던 바로 그 집인데, 이 집의 바이올렛 롭슨 부인은 교회에서 가장 주도적인 인물로 교회 위원회의 위원이었다. 로이드 존스는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개최된 초기 위원회에서 교회에서 더 이상 연극 공연은 안 된다고 선언했다! 이때 롭슨 부인은 표정이 일그러지며 혼자말로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젊은 양반, 곧 알게 될 거야!”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몇 년이 지난 후에 그녀는 “알게 된 사람은 바로 저 였어요!”라고 고백했다. 1927년에도 이미 그리스도인이었지만 그녀의 영적 생활은 그 이후로 비로소 크게 변화되었다.
특별한 영적 각성이 시작되다
1930년 그 당시 교회 밖에 있다가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지식을 얻은 사람들의 수가 두드러지게 증가했는데, 88명중 70명이 “세상에서” 들어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 해리 우드라는 사람이 들어 있었는데, 우드는 젊었을 때 축구선수로 활동했으나 1920년대 후반 대량 실직 사태 당시 실업자가 되어 잘나가던 운동선수로서의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를 갖고 어느 주일 저녁에 교회로 들어와 존스의 설교를 들었을 때 회심을 경험했다. 존스는 해리 우드와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더 즐거운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해리 우두가 나이는 상당히 먹었지만 이제 갓 회심한 그리스도인의 영적 지각에 종종 놀라곤 했기 때문이다. 특히, 1931년 월요 기도회의 우드의 기도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와 같은 기도를 전에는 들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놀라운 기도였다. 그 사람은 땅이 아닌 하늘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도를 마치고 존스가 눈을 떠 보니 사랑하는 해리 우드가 자리에 앉자마자 바닥에 쓰러지더니 죽었다. 그런데 해리 우드의 소천은 특별한 영적 각성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1930-1931년 겨울에 온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의식으로 크게 감동을 받았고, 로이드 존스도 이 기간에 자신의 영이 소생하는 역사를 체험했다.
1931년 교인 수가 135명이 증가했고, 그 중에 128명이 “세상에서” 돌아와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로이드 존스는 애프터 미팅에서 “교회에 등록하라”는 강요를 하지 않고 자주 그리스도에 대한 성급한 고백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비신자에게는 교회가 세상보다 훨씬 더 위험한 곳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교회는 사람들을 교인으로 만드는데 지나치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되고 명확한 믿음과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으면 교인은 극히 위험하고 심지어는 영혼을 파멸시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1933년 4월 23일 요한복음 6장 66절을 본문으로 전한 설교). 새로 회심한 자가 애프터 미팅에서 교회에 등록한 것을 알리고 싶은 마음을 가졌을 때, 온 교인이 “만복의 근원 하나님....”을 부르면서 따스하게 환영을 했는데, 종종 눈물을 흘리는 역사가 일어났다.
모건 베도우
모건 베도우는 1928년에 두 번 설교를 들었는데, “자신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목사의 설교를 다시는 듣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한평생 영적인 일로 갈등을 겪지 않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할 마음도 없었다. 그러나 거의 영문은 모르겠지만 베도우는 곧 샌드필즈 교회를 다시 찾았고, 그때 들은 설교에 압도당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으며, 다시는 옛날과 같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베도우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고 1930년에 교회에 등록을 하고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변화된 삶을 살았다.
전도설교원리2 사람들의 교만과 무지를 깨우치라
로이드 존스의 전도 설교의 지배 원리는 교만과 무지가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그리스도에게 돌아서지 않은 핵심 이유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그래서 확신을 갖고 “도덕적인 사랑의 우주 속에서 단지 그리스도인들만 구원받도록 되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기들이 찬성한다고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해 사실은 반감을 갖고 있는 것이 진실이다.
“요즘 심판에 대해서는 거의 설교하지 않는 사실이 설명해 주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믿음을 분석해 보면 자기들을 만족시키는 어떤 관념들을 투사하고 있는 것에 불과 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들의 신은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어떤 것, 곧 늘 그들에게 호의를 나타내고 너그럽게 대하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그 신을 경외와 존경의 관념을 갖고 숭배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전혀 경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대화 속에서 소위 그들의 신이 전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으레 ‘하나님이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영벌에 처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을 믿을 수 없고, 그러기에 하나님은 영벌에 처하지 않고, 또 처하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들이 하거나 하지 않는다고 믿는 대로 행하시는 분입니다. 얼마나 거짓되고 불경스런 신관입니까? 얼마나 진실과 다르고 가치가 없는 개념일까요! 이것이 오늘날의 새로운 이교 사상입니다.”
다양한 성경본문에서 복음을 선포하다
이 시기의 전도 설교는 무척 다양한 성경책에서 본문을 취해 전해졌다. 구약성경의 본보기와 가르침, 그리스도의 비유와 이적, 갈보리 사건과 부활에 대한 기사, 사도행전과 서신서의 기록 등을 통해 로이드 존스는 복음을 끊임없이 선포했다. 죄에 대한 강조는 “너무 부정적”이라는 일부 사람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의 곤경에 대한 세상의 해결책과 성경에 선포되어 있는 치유책 간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오히려 이들의 반론을 사용했다.
세상이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단축시키는 흥분제를 제공하는 것이 전부다. “우리가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세상은 무엇을 제공할까요? 여러분은 죽어 가는 운명의 자리에서 일어나 춤추러 가거나 경주하러 갈 수 없습니다. 세상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영원에 직면하도록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사람이 질병의 마지막 단계에서도 평안과 치료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를 고치고 치료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상처 표면에 진정제를 바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치료책은 근본적입니다. 하나님의 치료책은 상처 안에 있는 질병을 목표로 삼습니다. 우리 존재이 가장 깊은 곳에 미치고 우리를 해롭게 하는 문제의 근원을 도려냅니다. 복음은 여러분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며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고 말해 주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복음은 만사가 형통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만사형통’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만사를 형통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치료책은 세상의 치료책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1929년 6월 16일 이사야서 57장 21절을 본문으로 전한 설교.
부흥의 장애물 : 감정주의
이 시점에서 말해 둘 것이 있는데, 그것은 로이드 존스는 진리는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지만 “감정주의”를 계발하는 것은 참된 기독교와는 철저히 거리가 먼 것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느끼기만 하는 것은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사실은 아주 위험하다고 보았다. “감정주의는 아주 교활하기 때문에 사실은 가장 심각한 복음 전도의 원수입니다.” 참된 느낌은 믿고 이해된 진리의 결과로 오는 것이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는 자주 음악과 합창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거나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감정을 유발시키려는 예배 형식에 대해 경고했다. 그것은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의탁하는 방법이 아니고, 감정을 목표로 삼는 것은 가짜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샌드필즈 예배의 두드러진 특징 : 침묵과 기대감으로 충만한 진지함
그래서 샌드필즈 예배의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깨닫고 침묵과 기대감으로 충만한 진지함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소음과 흥분속에서가 아니라 엄숙한 교요함 속에서 더 잘 알려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웨일스 복음주의 일부 분파에 전통처럼 확립되어 있던 소리를 내어 예배드리는 풍습이 샌드필즈 교회에 없었던 것은 주목을 끌었다.
참된 부흥의 특징이 나타나다
1931년에 은혜의 밀물이 밀려오던 와중에, 20세기가 시작될 때(1904년)에 일어났던 부흥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나이를 먹은 교인이 “이것이 진짜 부흥이다! 1904년보다 성령의 권능이 더 크다.”고 외쳤다. 샌드필즈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일은 확실히 참된 영적 각성이 있을 때마다 나타났던 현상의 반복이었다. 참된 부흥 속에는 죄에 대한 자각이 폭넓게 일어나고, 때로는 이 자각이 죄책에 대한 고뇌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결국 구원에 이르는 자들의 경우를 보면, 인간적 노력으로는 그들이 매여 있던 속박 의식을 절대로 풀어 줄 수 없었다.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깨닫게 된 상실과 정죄의 상태는 “양자의 영”으로 말미암아 제거될 수 있는데, 이 깨닫게 하는 일차 사역에 이어서 죄사함에 대한 확신이 주어진다. 진실로 자신의 죄를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의식적으로 가질 때까지 멈추지 아니할 것이다. 그가 이 확신을 가질 때 기쁨의 높이는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알았을 때 갖게 된 기쁨의 깊이와 대등할 것이다. 이것을 믿었기에 로이드 존스는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말하지만 죄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 애매한 현대 종교는 참된 확신의 기쁨에 대해 똑같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사실에 대해 놀라지 않았다.
부흥의 증폭 : 기도회와 하나님에 대한 갈망
새로 찾은 자유 속에서 이런 말씀에 온전히 동조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샌드필즈 교회 안에는 많이 있었다. 월요일 기도 모임에서는 간절한 도고(기도)가 열렬한 찬양과 함께 어울려 더 증가했다. 기도를 위해 모인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해방감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에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기도에 전념한 밤이 많이 있었다. 확실히 한때는 아주 적은 수가 참석했던 기도회가 이제는 감사하며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성도들 때문에 두 시간 안으로는 기도를 마칠 수가 없게 되었다.
당시에 대해 E. T. 리스의 가장 선명한 기억 가운데 하나는 회중이 모이는데 참으로 열심이었다는 것이다. 주일 저녁에 예배당은 시작되는 6시 30분보다 한 시간 전에 자리가 채워지기 시작해서 때때로 6시경에는 비어 있는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월요일과 수요일 모임은 참석하는 숫가자 많아서 본당으로 이동해서 모임을 가져야 했다. 상인들은 저녁 식사도 거르고 일이 끝나는 즉시 교회로 직행했다. 야근을 하는 노동자들은 오후 8시 30분에 작업 보고서를 써야 하기 때문에 작업복을 입은 채 교회로 와 모임의 일부라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했다.
회심간증을 통한 전도
샌드필즈 교회에 나타난 이런 새로운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전단하기 위해 광고를 하거나 기구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온갖 방식을 통해 말이 퍼졌다. 여자들은 시장을 보면서 자기 남편이 이제는 극장보다 기도 모임을 더 좋아하게 된 것에 대해 말을 주고받았다. 학교에서는 어느 날 한 선생이 자기 반 남학생에게 “선생님, 오늘 우리는 저녁 식사에서 고기 국물과 감자와 고기와 양배추와 라이스 푸딩을 먹었어요.”라는 말을 들었다. 이전에 그들은 가정에서 거의 이런 음식을 먹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풍성한 음식을 먹은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저의 아버지가 회심했기 때문이에요!” 이 사람은 전에 금요일에 주급을 받으면 술로 탕진해 버린 돈을 이제는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집에 갖고 온 것이었다. 이 말은 들은 학교 선생은 E. T. 리스부인이었다. 로이드 존슨 부인의 말에 따르면, 이 도시에서 실제 빈곤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술이었다. 부두 노동자들은 종종 술을 임금과 함께 받기도 했다.
영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다
에버라본에서 꽤 유명한 영매인 그녀는 복음을 위해 자신의 유일한 생계 수단을 포기했다. 매주일 저녁 그녀는 심령술 집회를 인도하고 3기니(약 6천원) 당시는 꽤 큰 액수를 받았다. 그런데 어느 주일에 그녀는 아파서 집회에 나갈 수 없어 집에 있었는데, 샌드필즈 교회로 가기 위해 자신의 집 앞을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기대에 찬 모습으로 교회로 가는 이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예배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그녀는 변화되었고, 이후로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다. 그녀의 간증 가운데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채플에 들어와 회중석의 한 좌석에 앉는 순간 초자연적인 능력을 느꼈습니다. 이 능력은 제가 속해 있던 단체의 집회에서 익숙하게 경험했던 초자연적인 능력과 같은 것이었지만, 한 가지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채플에서 느낀 힘은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마크 맥켄
또한 교회에 결코 올 것 같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친구들에게 이끌려 샌드필즈 교회에 출석했다. 그중 하나가 마크 맥켄이었다. 스코틀랜드인과 아일랜드인 부모사이에서 태어난 맥켄은 60대 초반쯤 되어 보였고, 한때는 광부였지만 맥켄이 주로 즐겁게 하는 일은 시장에서 싸우는 일이었다. 악한 기질에 힘이 상당했던 그가 실제로는 사람을 한 명도 죽이지 않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 덕분이었다. 언젠가 기르는 개가 자신이 먹을 저녁 음식을 먹어 버렸다. 화가 난 그는 식빵용 칼로 개의 머리를 잘랐다! 그런데 맥켄은 함께 온 사람들 가운데 회심이 가장 빨랐다. 채플에 처음 온 날 바로 하나님의 영에게 사로잡혔다. 다음 주일 저녁에 다시 왔고, 예배가 끝나자 애프터 미팅에 참석하겠다고 말해 함께 온 친구마저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스태퍼드셔 빌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들어서가 아니라 샌드필즈 교회에서 전해지고 있는 설교에 대한 소문을 듣고 교회를 찾아온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통상적으로 “스태퍼드셔 빌”로 알려져 있던 윌리엄 토머스는 어느 주일 저녁에 에버라본의 노동자 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평소처럼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퍼마시고 있었어요. 그때 그는 우울하고 절망적이고 억압된 감정에 빠져 수시로 자신을 괴롭혔던 내면의 고통과 두려움을 잊으려고 술에 의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이 나누고 있는 대화를 듣게 되었는데, 그는 ‘전진’이라는 말이 귀에 들어왔고, 이어서 ‘설교자’라는 말이 귀에 들어왔으며, 결국에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변화시킨 말 전체를 듣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래, 지난주일 밤에 그곳에 갔었지. 설교자는 절망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어. 모든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는 거야.’ 그는 스스로에게 ‘모든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면 내게도 희망이 있겠군. 채플에 직접 가서 그 사람이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 보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윌리엄 토머스의 기대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첫 주일에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 몇 분 동안 서 있었다. 그러다 보니 뻔뻔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집으로 돌아왔다. 비록 한 주 내내 비참한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갈 생각을 하고 다음 주일 저녁을 기다렸다가 다시 갔으나 도착해서 찬송만 듣게 되었다. 이번엔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을 깨닫자 “가슴이 너무 울렁거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는 또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비참한 마음이 더 강해졌지만 그는 술로 그 두려움을 진정시켜려는 시도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이 이미 그의 마음속에 역사하셔서 구습에 빠지지 않도록 막고 계셨기 때문이다. 세 번째 주일 저녁 예배에 교회를 찾은 그는 그날 밤 “스태퍼드셔 빌”은 정죄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 로이드 존스 부인은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선포되고 있던 말씀을 자신이 이해할 수 있음을 알았다. 옛 것은 지나갔고, 이제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의 얼굴에 나타난 변화는 괄목할 만했는데, 그야말로 성도의 광채였습니다.”
J. C. 그리피스 존스 기자의 당시 기고문
에버라본에 일어나고 있던 역사의 특별한 성격에 대해서는 1930년대 초엽에 남 웨일스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에 대한 정보가 언론에 소개된 경우는 별로 없었다. “영혼의 의사”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실은 [뉴스 크러니컬]의 남 웨일스 주재 기자인 J. C. 그리피스 존스의 말은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에버라본의 샌드필즈는 빈민 지역이었다. 심지어 해가 비칠 때에도 모래 황무지와 지루하게 밀집된 집들은 황폐한 느낌, 아니 거의 절망적인 느낌을 주었다. 어떤 사람이 일자리를 거부당하고 사회적 냉담함에 환멸을 느끼며 이곳에서 하루를 산다면 타락하고 표류하다 죽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이처럼 황혜한 작은 세계 속으로 한 젊은 의사가 들어와 오래 된 새로운 소망의 복음을 설교하며 살고 있다. 그는 이 지역을 절망에서 벗어나도록 자극을 주었다. 현재의 세계는 그들을 저버렸고, 대신 다른 세계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 놀랐다. 자신이 설교한 복음을 큰 확신을 갖고 실천한 사람이 여기 있었다. 그는 가난한 자와 절망에 빠진 자들 속에서 살고 사역하기 위해 보장된 성공 곧 명성, 돈, 여유를 포기했다. 기독교는 우화가 아니라 오히려 생생한 현대의 사실이었다!”
“작은 교회는 사람으로 가득 찼다. 전임 목사가 사역할 때 이 교회는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죽은 문자와 같았으나 이제는 펄떡거리는 새 생명으로 깨어났다. 설교로서 그의 선포의 호소력은 최면술 같았고, 기독교 외에 모든 것을 시험해 본 세상에 대한 소망의 메시지로서 그의 선포는 전기와 같았다.”
로이드 존스는 교인들이 자기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부흥”으로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영광의 한 섬광을 경험했고, 로이드 존스는 이 일로 인해 교회의 최고의 필요는 “인간적인 것을 멈추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로이드 존스는 너무 거룩해서 말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느낀 일드을 목격했다. 로이드 존스는 사람에게 영광이 돌아갈 수 있는 위험한 일을 행하기보다는 차라리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따라서 샌드 필즈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사람도 종이에 옮겨 놓치 않았고, 교인이 괄목할 만하게 늘어난 사실을 기록한 통계도 공개되지 않았다. E. T. 리스 자신만 해도 우리가 다루고 있는 기간에 일어난 일들을 책에 기록할 수 있었으나 박사에 대한 존경 때문에 기록을 자제했다.
리스씨가 1929-1931년에 회심한 자들에 대해 나눈 대화는 우리로 하여금 존스를 왜 주목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게 된다. “제가 이 일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로이드 존스에게서 받은 인격적 감화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항상, 아니 심지어는 마지막 날 밤, 곧 고별 설교를 하던 밤에도 우리에게 ‘저에 대해서는 말하지 마십시오. 구주에 대해서만 말하십시오.’ 라고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끈 것은 그분의 인격적 감화력이나 인간적 매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이 잃어버린 영혼이었다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