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베를렌(1844-1896)은 스테판 말라르메와 함께 프랑스 상징주의의 시조라고 불리는 시인이다. 전통적인 프랑스 시의 기법과 주제는 고답파 시의 정확하고 세밀한 묘사에 뚜렷이 드러나 있듯이 완고한 관습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상징주의는 이런 관습에 대항하여 일부 프랑스 시인들이 일으킨 반란에서 시작되었다. 상징파 시인들은 인간의 내면생활과 경험의 덧없고 순간적인 감각을 묘사하기 위해 시를 설명적인 기능과 형식적인 미사여구에서 해방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인간의 내면생활에 대한 감각적 인상과 형언할 수 없는 직관을 환기하고자 했으며, 정확한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시인의 정신 상태를 전하고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난해하고 혼란된 통일체`를 암시할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은유와 상징을 사용하여 존재의 근본적인 신비를 전달하려 했다.
베를렌이나 랭보 같은 상징주의의 선구자들은 샤를 보들레르의 시와 사상, 특히 〈악의 꽃 Les Fleurs du mal〉(1857)에 수록된 시들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감각들간의 `조응`(照應 correspondances)이라는 보들레르의 개념을 받아들였고, 이것을 바그너가 이상으로 삼은 여러 예술의 종합이라는 개념과 결합하여 시의 음악성이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만들었다.
베를렌의 시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1866년에 나온 제1차 <현대 고답파 시집>에 의해서였다. 여기에 그가 기고한 시는 7편이며, 그 중에는 고답파 시의 딱딱함에서 벗어난 부드럽고 막연한 환상의 경쾌함이 나타나 있다. 그는 보들레르도 아직 벗어나지 못한 이성적인 것에서 시를 해방시키고 17세기 고전주의 이후의 알렉상드랭을 완전히 시에서 제거하여, 인간의 내면성을 음악적인 상징을 통하여 이야기하며 그 감수성을 부드러운 표현으로 노래했다.
우리가 살면서 원해서 또 원치 않아도 하게 되는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사유이다. 나는 누구인가? 내 안에 여러 가지 성격이 다른 욕망들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각 사람들은 여러 가지 기준들로 자신에 대해서 고민하고 결론을 내린다.
베를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도 끝없이 충돌하는 내면의 이중성이자, 곧 정체성의 분열이었다. 어렸을 때 소중한 사람들의 연이은 죽음에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된 그는 그 후 자신의 잃어버린 순진에 대해서 깊이 집착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순결을 추구하면서도 자신은 쾌락의 한가운데서 허우적거리는 이중적인 모습을 취하게 된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그의 이중성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그의 시들은 그가 그런 자기의 모습을 슬퍼하기도 하고, 너무나 괴로워하고, 외려 즐기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베를렌의 일생은 술과 여자와 남색의 파계적 생애이며 가난과 질병과 영어의 기구한 운명이었다. 그러나 악덕과 비행은 곧 회한과 반성으로 되고, 극단적, 이교도적인 행위는 경건한 카톨리시즘과 이웃하고 있었다. 데카당이란 말은 바로 베를렌을 두고 한 말과 같다.
그는 플랑드르 지방의 오랜 가문에 속하는 공병 대위의 아들로 메스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그는 북방적인 기질을 농후히 이어받고 있었다. 일찍 부친을 잃고 모친과 함께 파리로 올라와 중등 교육을 마친 후 시청에 근무하면서 시작에 전념하고 고답파 시인들과 사귀었다.
그리하여 1869년 <풍자시>를 통해 시단에 데뷔했는데, 이 시집에서 가장 유명한 '가을의 노래'는 '내 마음에 눈물 내린다'와 함께 우리나라에도 웬만한 시 애호가들은 원어로 암송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가을날
바이올린의
긴 흐느낌
단조로운 우수로
내 마음
쓰라려.
종소리 울리면
숨 막히고
창백히
옛날을
추억하며
눈물짓는다.
그리하여 나는 간다.
모진 바람이
날 휘몰아치는 대로
이리 저리
마치
낙엽처럼.
이어 <멋있는 향연>을 1869년에 발표하고 이듬해 한 친구의 누이동생 마틸드 모테를 만나 사랑하게 되어 그 사랑의 속삭임을 노래한 <좋은 노래>를 약혼 기념으로 내놓고 그 여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곧 보불 전쟁이 일어나 그는 국민군으로 소집되고 이어 파리 코뮌의 반란에 가담하여 주벽이 생겨 벌써 가정적인 풍파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개다가 그가 시재를 인정하여 불러들인 17세 천재 소년 아르튀르 랭보의 출현에 의해 그의 소시민적 생활은 여지없이 파괴되고 말았다. 랭보와의 동거, 아내에 대한 횡포, 그리고 벨기에 및 영국으로 흘러 다니는 방랑 생활, <내 마음에 눈물 내린다>로 너무나도 유명한 시가 수록된 <말없는 연가>의 여러 시편은 거의 이 시기에 씌어진 것이다.
브뤼셀에서 1873년 감정적 폭발로 인하여 랭보에게 권총을 발사하고 1년 반 투옥된 그는 깊은 회한에 사로잡혀 가톨릭에 귀의하였다. 그 때 경건한 마음으로 노래한 것이 <예지>이다. 그 후 베를렌의 명성은 점점 높아갔으나 반대로 그의 생활은 극도로 문란하여 만년을 비참하게 보냈다.
베를렌은 음악을 중시했다. 고답파 시인들과는 별도로, 그는 색채를 물리치고 뉘앙스 즉 음영을 구하여, 말라르메와 발레리가 말하듯이 '음악에 의해 그 부를 되찾는다'는 일에 노력하고 '맞추지 않은 리듬'과 '여성 각운'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이 세상의 무거운 고뇌 속에 빠져 있는 얼을 고요하고 순박한 곳에다 갖다놓는 데 성공했다.
자신의 괴리를 참지 못하고 울부짖는 모호한 우울함은 그 느낌 그대로 음악이 되어서 시로서 표현되었다. 그의 시학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기수각을 사용함으로서 더욱 풍부하게 살려진 운율과 발음만으로도 곡조에 붙인 노랫말처럼 아름다운 느낌을 살려주었다. 이것은 독자로 하여금 더욱더 시를 감상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그의 그조차도 알 수 없었던 모호한 우울함과 깊은 슬픔과 괴로움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의 작품들에는 많은 특징이 있지만, 특별히 베를렌의 이중성에 초점을 맞춰보기로 했다. 술과 불신으로 오염된 영혼을 가지고 아름답고 순결한 영혼을 추구하면서 그 괴리를 우울해하는 그의 이중적인 모습을 시를 통해서 알아볼 것이다. 또한 그는 랭보와의 동성애적 관계로 유명하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사회적의 통념 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힘들어 했으며 대중의 눈을 두려워했다. 거침없고 추진성 있는 랭보와 달리 그는 자신의 진심 즉 랭보를 사랑하는 마음을 부정하면서까지 안정된 삶을 추구한다. 그는 마음속에서 늘 랭보를 원하면서도 눈을 뜨면 현실 속에서 마틸드를 그리워하는 줏대 없는 모습을 스스로도 괴로워한다. 이런 베를렌느의 모습 역시 시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그의 솔직한 고백과 자조는 유치한 자기변명으로 들리지 않고 그의 시학에 따라 너무나 아름다운 고백과 성찰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