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장징(張競)이 쓴 '공자의 식탁'이라는 책에서 유심히 봐두었던 점을 바탕으로 나름데로의 의견을 덧붙여 보았습니다. 비판받을 점이 있다면 날카로운 지적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1. 종묘에 개고기를 올리다.
기원전 4500년전의 앙사오(仰韶)문화(황하 중류의 신석기 문명)의 유적지에서는 돼지,산양등과 더불어 개의 뼈가 발견된 적이 있었으니 중국의 개 식용은 기원전 4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하지만 문자와 기록이 생겨나면서 이러한 개고기 식용의 습속은 기록되었을뿐더러, 천자의 제례에까지 규정되었으니, '예기(禮記)' 월령(月令)편에 이르기를,
' 천자는...(중략).....백옥을 착용하고, 개고기에 삼의 씨앗과 함께 시식한다(食麻輿犬). 그 그릇은 지극히 깨끗하고 깊은 것을 이용하여야한다...(이하 하략)'
허나, 천자만이 제사음식으로 개고기를 먹었던 것은 아니다. '국어(國語)'의 초어(楚語 上)에서는 '선비는 제사를 지낼때 개고기와 소를 바치고..'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월어(越語)에서는 '월왕 구천은 사내아이를 출산하는 여자에게 쌀과 소금, 그리고 개를 선물로 주어 장정의 증가를 꾀했다.'라고 언급하고 있을 정도이다.
사실 우리가 보통 높으신 분들에게 무엇인가를 올릴때는 '헌(獻)'이라는 한자어가 들어간 단어를 주로 이용한다. 그런데 이 '헌'이라는 글자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개(犬)를 바치는 것이다.'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이러한 제반사항에서 볼때 고대중국에서의 개고기 식용은 일반적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상당히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2. 개고기의 비참한 몰락.
한(漢) 왕조가 멸망하고, 남북조시대에 들어서면, 여러 기록에서 '개고기를 먹으면 염라대왕이 부른다.', '약에 쓰려고 먹은 개가 오히려 병의 악화를 가져왔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나아가서 당(唐) 중기에 나오는 유양잡조라는 책에서는 '그는 성격이 잔인하였다. 그것은 그는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으며 다녔으며..(하략)...'등의 이야기를 언급함으로서 '개를 먹는것'을 '잔인한 성품'의 근거처럼 이야기하기까지한다.
한편 음식문화의 르네상스 시기라 불리는 송(宋)시기에 들어와 수많은 요리책들이 출판되지만, '본심제소식보', '중궤록','산가청공'등의 요리책 어디에도 개고기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수가 없다. 단지 '선부록'이라는 요리책 한권만이 팔진(八珍)이라는 개의 간으로 만든 요리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도 '고대의 관습을 재현해 본 것(팔진이라는 요리는 역시 '예기'에서 나오는 것이다.)'이라고 규정지어 이야기하고 있다.
원(元)대에 들어서면 요리책들에서는 낙타,오소리,당나귀,토끼등의 다양한 재료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역시 개에 대한 언급은 없다.역시 명(明)대에서 출판되는 요리책들 어디에도 개고기 요리에 대해서는 언급을 할애하고 있지 않다. 단지 광동을 방문했던 선교사인 가스팔 다 쿨스는 개고기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광둥의 먹을거리 골목에서는 개고기를 팔고 있다...(중략)...그러나 개는 비천한 자들이 먹는 음식이다.'
즉 비중국인인 그의 언급에서나 개고기 식용에 대해 언급되었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개를 먹는 것을 언급하지 않으려 했거나, 적어도 비천한 음식으로 여겼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후일 청대의 고증학자 하증전(何曾專)은 이러한 풍습을 증명해주기라도 하듯 이야기하기를
'전국을 통틀어 개고기를 지양(地羊)이라 부르며 먹는 곳은 광둥뿐이다...(중략)....그외의 다른 곳에서는 어느곳에서도 개를 먹지 않는다. 옛 경전에서도 개고기를 먹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데, 왜 지금의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으며 기피하는가?'
결국 육조시대를 전후로해서 중국에서의 개고기의 위치는 '천자의 제례상'에서 '거지들의 음식'으로 전락해버린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3. 개고기는 왜 기피되었을까? 그리고 평가.
개고기 식용이 왜 남북조시대에 와서야 기피되었냐는 의문에 몇몇 학자들은 개가 애완용으로 길러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식용으로서의 개고기를 기피하게 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으며 확실히 남북조시대를 전후해서 개를 애완으로 아끼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는 기록이 등장하기는 한다.
'삼국지(三國志) 손호전(孫皓傳)'에서는 손호가 개를 매우 아껴서 부하들이 훌륭한 개를 찾으러 전국을 돌아다녔고, 개를 하도 아껴서 개를 묶는 줄이 1만전(錢)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보이며
'북사(北史)'에서 북제(北齊)의 남양왕 고작(高綽)은 자신의 애완견을 위해 갓난아기를 어미로부터 빼앗아, 개에게 먹이로 던져주기까지 하였으며, 동시대의 황제이던 고위(高緯)역시 자신의 개를 군군(郡君)의 예로 대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니 얼핏 보기에는 개가 애완용으로 끔찍히 아낌을 받은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이러한 사서에서의 기록은 대부분 부정적인 견지에서 쓰여진 것이며, 이러한 개를 아끼는 모습은 그 주인(손호,북제의 고씨일족)을 폄하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인간은 필요하다면 애완용으로 기르던 동물 역시 잡아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의 설득력은 다소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그러한 점에서 다른 부분에서 개고기 기피의 원인을 찾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남북조시대라는 시대의 특성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우선 유목민족인 선비족의 무덤을 보면 식량으로 부장한 양,소,말의 뼈 심지어는 돼지의 것까지 발견되어도, 개의 뼈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또한 '수서(隨書)' 돌궐전에서는 돌궐인들은 늑대를 토템으로 삼아 개 역시 존중했다 하니, 개를 먹지않는 습관은 유목민족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개는 유목민족에게 있어 소중한 존재로, 사냥을 나갔을때 소형의 동물을 인간 대신 사냥해주거나, 종적을 찾을수 없는 사냥감을 추적하는데에도 유용한 존재이다. 이에 나아가서 인간이 가축을 관리하는데에 도움을 주기도 하며,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가축을 지키는데에도 일조한다. 이러한 점에서 유목민족에게 있어 개는 '삶의 동반자'였던 것이고 이들에게 개를 잡아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남북조시대라는 시기는, 이러한 유목민족들이 중국내로 대규모로 침투하던 시기였으며, 동시에 이후의 정복왕조들(금,원,청)과는 달리 진정으로 중국적 정체성을 같이 형성해가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러한 유목민족들이 지배층을 형성하고, 실제로도 많은 수가 중국사회속으로 흡수되면서 개고기를 기피하는 습관 역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들은 광둥을 중심으로 한 영남(嶺南)지방에서는 왜 개고기를 지속적으로 먹었는가?에 대한 의문에 대한 해답 역시 제공해준다. 광둥지방은 이러한 이민족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을뿐더러, 해상교역을 통하여 남방문화와 지속적으로 연결이 유지되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개고기를 먹지 않는 유목민들이, 진정으로 중국인들에게 이질적인 존재였다면, 후일 원(元)시대 몽골인의 우유(牛乳)음용의 습관처럼 중국인들에게 동의를 얻지 못햇을 것이다. 그러나 전후의 상황은 그렇지가 않았다.
사실 한 말기부터 호(胡)·한(漢)간의 경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서로가 서로의 문화를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나라 영제(靈帝)는 이민족인 음식인 호병(胡甁)을 즐겨먹었으며, 진(晋)나라 시기의 연회에서는 '강자(羌煮 : 강족의 사슴국물요리)와 맥적(貊炙 : 부여인들의 고기구이)'를 최고로 치고 대접하였다. - 수신기'라는 기록등으로 미루어 이민족의 문화가 한족들 사이에서도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는 점을 엿볼 수 있으며,
진(晋)을 멸망시킨 흉노족의 유총(劉寵)은 '예서와 행서에 능했다.'라고 묘사되고 있으며, 저족이 세운 전진(前秦)의 왕이었던 부견(符堅)은 '만권독'을 했다는 점, 그리고 전연(前燕)의 왕이었던 모용황(慕容晃)은 한인유학자 유찬을 만나기 위해 다섯번이나 방문했다는 점(이는 제 환공이 동곽에 사는 야인을 5번이나 방문했다는 한족의 고사를 따른것이다.)등은 유목민족 역시 한족의 문화를 수용하는데에 적극적이었음을 시사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보통 남북조 시대에 대해서 상상하기를, '야만족'들이 한족의 왕조와 문화를 파괴하고, 중국으로 침투했지만 끝내 우수한 '중국문명'속에 일방적으로 '동화'되어버린 듯한 느낌을 상기할 것이다.
그러나, 실은 남북조시대는 서로가 서로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하나의 정체성을 형성해가던 시기였으며, 이는 곧 중세중국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중국인들이 왜 개고기를 먹지 않는가?'라는 의문은 대단하지 않은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미시적이고 사소한 사실 하나의 연원을 추적하다보면 '남북조시기의 중국과 호한간의 문화수용 '이라는 거시적 역사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것에 바탕하여 형성된 '중국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 중 하나가 '개고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아가 문화라는 것이 '우수한(?)' 한쪽의 문화에 일방적으로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양자간에 영향을 주며 조화를 이루어간다는 것 역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중국인들의 개고기를 왜 먹지 않는가?라는 미시적이고 사소한 이유에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의의라고 생각한다.
출처 : 본인의 노하우/상식입니다.
개고기 먹는풍속은 중국서 유래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부터 선물받은 풍산개 '우리', '두리'의 2세
개고기 먹는풍속은 중국서 유래
우리 전통민속은 `부정탄다' 여겨
더운 삼복철에는 떨어진 기운을 보충하기 위해 보신탕이나 삼계탕을
먹어야 한다는 습속이 있어서 견공(犬公)과 닭이 수없이 희생된다.
특히 개고기를 즐겨 찾으므로 서구인들로부터 '야만적'이라는 지탄을
받아온 지가 어제오늘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애완견과 먹는 개는 다르다” 또는
“남의 나라의 식(食)문화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문화적 폭력이다”는
식으로 항변하지만 설득력을 잃고 있다.
수없이 버려진 애완견이 보신탕으로 환원되는 경우를 보여주는
TV의 고발 프로가 등장하였고, 개고기가 보양음식으로 특별하지 않다는
평가가 내려진 지 오래이다.
게다가 지구촌의 일원으로서 함께 살아가야하는 시대에 혼자만
'전통'이라고 우기는 것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고기를 먹는 습속이 우리의 `전통'인가?
그건 `아니다'. 본래 개고기를 먹는 풍속은 중국에 있었다.
홍석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삼복(三伏)조에 보면,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진덕공 2년에 비로소 삼복제사를 지내는데
성 안 4대문에서 개를 잡아 충재(蟲災)를 막았다”고 했다.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誌)'에도 이 기사를 인용하고
"이것이 복날의 고사(故事)인데 지금 풍속에 이것을 먹는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처음에 중국에서 제사의 희생물로써
개가 바쳐지고 그것을 먹은 풍속이 우리에게 전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의 전통민속에서는 개를 먹는 것을 `부정 탄다'고 해서
지극히 꺼린다.
개를 먹은 자는 물론이고 잡는 것을 본 자도 동제(洞祭)나 혼례 및
상례 등 중요한 행사에 참여할 수 없음은 기본적인 상식이다.
특히 산삼을 채취하기 위해 신성한 산에 드는 심메마니에게 있어서
개고기는 제일의 금기(禁忌)이다.
개가 이렇게 금기의 대상이 된 것은 우리의 선조들이
“개는 인간과 가장 가깝고 오로지 주인에게 충성하는
신성한 영혼을 지닌 영물(靈物)이기에 상해하는 것은 부정(不淨)하다”고
인식한 결과이다.
지금은 옛날처럼 먹을 것이 없는 세상도 아니고,
인간과 견공(犬公)의 끈끈한 정서로 보아서,
그리고 지금은 세계인이 함께 사는 시대이기에
전부터 주변에서 먹어온 개고기지만
이제는 남의 눈치를 좀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김의숙(강원대 대학원장, 민속학)
◐자료출처 ☞Ohmynews "동물의세계"◐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한국진도견혈통보존협회에서 퍼옴 ---------------------------------------------------------
우리의 개 문화는 우리 민족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청동기 문화인의 개에 대한 인식이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개는 집을 지키는 역할 외에도 잡귀와 액운 등을 물리쳐 집안의 행복을 지켜주는 벽사 수복을 위해 기르는 경향이 강했다. 우리 민족은 특히 백호나 백마 등 흰 동물을 신성시하고 좋아했는데, 개도 백구를 매우 좋아했다.
백구는 잡귀를 쫓고 터가 센 집터를 다스린다 했고, 네눈박이 흑황구는 잡귀를 쫓아내는 벽사의 기능이 강한 개로 손꼽았다. 누런 황구는 다산과 풍년을 의미하여 농가에서 많이 길렀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 선조들은 개를 고르는데도 등급을 매겼다. 조선시대의 <잡오행서>라는 책에 "최고로 좋은 개란 뒷다리만 희거나, 귀와 머리 쪽이 누렇거나, 꼬리만 흰 검둥이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호랑이 무늬가 있는 흰둥이는 쌀 만석이상의 가치가 있는데 이는 주인의 수명을 늘려주고 집안의 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라고 전하고 있을 정도다.
우리 선조들은 개를 의인화시켜 개의 형태를 오륜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 첫 번째가 불범기주, "개는 주인에게 덤비지 않는다."로 이는 군신유의에 해당된다. 둘째는 불범기장,"작은 개가 큰 개에게 덤비지 않는다".로 이는 장유유서에 해당된다. 셋째는 부색자색, "새끼가 아비의 털빛을 닮았다."로 이는 부자유친에 해당한다. 넷째는 유시유정, "때가 아니면 어울리지 않는다."로 이는 부부유별에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일폐군폐,"한 마리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함께 짖는다."로 이는 붕우유신과 같다는 의미이다. 오륜은 어디까지나 유교를 숭상하던 우리 민족의 윤리인데 개의 행동에 이러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재미있는 해학이다.
이는 못된 사람들에게 개에게라도 배우라는 교훈과 개를 다른 동물과 차별화 시킴으로써 일종의 기대감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서양에서의 개의 위치와 크게 대조된다. 서양 사람들이 개를 사랑하고 좋아한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종속물로써 사랑하고 동반자 정도로 대접 해줄 뿐이다. 그들은 개에게 "밥 먹어", "가", "이리 와' 등과 같은 항상 명령한다. 그리고 이렇게 명령을 잘 듣는 개를 영리한 개라든가 또 좋은 개라고 칭찬을 한다. 한마디로 서양인들은 개와 항상 종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개에 대한 인식은 서양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우리 민족은 개를 인간의 종속물로만 인식하지 않고 자연의 일부로 또는 자연의 피조물로 대등한 관계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 밥 먹을래?" "가자" 등 개에게 동의를 구하는 표현을 많이 한다. 때로는 인간과 대등하게 한 세상을 살다가는 영물로 대접하기도 한다. 우리 민간 설화에도 "조상이 자손이 보고 싶으면 그 집 개로 환생해서 살다 가니 집에서 기르는 개에게 잘 대해 주라"는 말이 전해 오니 이 얼마나 개를 귀하게 대하라는 표현인가? 종교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옛사람들이 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 한마디로도 짐작이 된다.
우리의 역사에서 개가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부여 시대이다.;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 위지 부여전>에 부여의 관직 명칭으로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이 있다. 여기서 구는 개를 가리키는데 말, 소 돼지 등의 가축과 함께 개를 이미 가축화 시켜 기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어지는 고구려 시대에 이미 개가 사냥용으로 자리잡았음을 유명한 무용총(5세기 후반~6세기 초)벽화에 실물 크기로 그려진 사냥하는 개 그림으로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은 또, 개를 벽사 수복의 수호 영물로 혹은 뛰어난 사냥개로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역사 기록도 많다. 이상오씨의 '수렵비화'라는 책에서 서기 530년대, 일본의 안무왕 시절에 백제에서 많은 사냥개를수입해 갔으며 이때 수입해 간 개들의 성능은 매우 뛰어나 일인들은 이 개들을 고마이누, 가라이누라 부르며 칭송해 마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서기>에도 서기 680년에 통일신라의 아찬 김정나가 일왕 천무에게 개를 선물했으며 686년에는 신라의 왕이 개 세 마리를 선물했다고 각각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같은 일본 역사서인 <속 일본기>에도 732년에 신라사신 김장손 등이 일왕 성무에게 개 한 마리를 선물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책응원구>에는 중국 당나라 현종 때 두 차례(723년,730년0에 걸쳐 한 마리씩, 신라에서 개를 선물했다고 적혀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2년(1420년)에 대마도 사람이 개를 구하러 왔으나 마침 명나라에 진공할 물건이라 거절했고, 10년 뒤인 1430년에는 일본 교토의 좌무위에 큰 개 한 마리를 하사하였다고 각각 기록하고 있다. 그 후대인 문종때도 비후의 국지위방의 요청에 따라 개 두 마리를 하사한 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뿐만 아니라 명나라에도 세종 11년과 12년 두 번에 걸쳐 개를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세조 14년에는 전국에 진헌에 쓸 개를 많이 보내라는 명령을 내린 사실도 기록에 남아 있다.
이런 기록들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국, 일본과의 통상 예물에 개가 주요 품목이었음을 대변하고 잇다. 여기에서 눈 여겨 볼 것은 개를 선물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들 나라에 개를 잡아먹으라고 선물했을 리가 없다. 미루어 짐작 컨데 우리 선조들은 우리 개의 성능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이런 자부심이 국제적으로도 인정을 받았음을 그 같은 기록이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개를 기른 까닭을 생활면에서 짚어보자. 우리 조상들은 가정의 벽사 수복을 위해 개를 기르고, 사냥을 하는데 개를 많이 썼으며, 경비견의 용도로는 비중을 크게 두지 않았던 것 같다. 그 흔적이 우리 옛 풍속화나 민화에 들어나 있다. 경비용도의 비중이 크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는 고유의 농경문화를 일궜던 우리 조상이 한 곳에서 오랫동안 정착해 살아 마을 단위의 공동체 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이웃간에 경계의 개념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마을에 사는 사람이면 이웃집의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 정도로 스스럼 없이 지냈기 때문에 집이 항상 개방되어 있었고 가옥 구조도 개방적이었다. 주변이 이러하니 경비 용도의 개는마을에 한 마리만 있어도 충분했다. 혹 낯선 사람이 마을에 들어오면 그 한 마리가 졸졸 따라 다니며 짖어대어 온 동네사람이 이를 다 알아차렸을 터이니 한 가정의 경비견으로 개를 키운다는 것은 우리의 흔치 않은 일 일 것이다.
더불어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개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상태 그대로의 개 그 자체를 존중하였을 것이다. 생활 주변에서 태어나고 크는 개의 생김새를 따지지도 않았고 오로지 자연스런 그것에만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런 경향은 우리 민족의 문화가 자연 상태 그대로를 놓고 즐길 뿐 이를 쉽게 변형시키거나 인위적으로 조작하지를 않는 민족 성향에서 기인한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정원 꾸미기를 비교해 보면 쉽게 드러나는 성향이다.
우리의 정원은 조선 왕실의 정원이었던 '비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자연을 그대로 옮겨 놓는다. 일본의 잘 다듬어진 인위적인 정원과는 대조적이다. 더구나 생명이 있는 자연물의 경우 특정한 형태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고 이런 인위적인 작업에 가치를 두지도 않았다. 이는 앞에서 보기를 든 바 있는 <잡오행서>의 좋은 개에 대한 언급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당시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개를 번식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물론 그때 누군가가 그런 개를 번식하여 많이 생산해 냈다면 가치를 부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생겨난 그 생김새의 '신비로움이라는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진도개에도 이런 자연미가 매우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개에 관한 문화를 말하면서 보신탕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근래에 들어 우리나라는 유난히 이와 관련하여 구설수에 많이 올랐다. 지난 1988년 서울올림픽때 '개고기 먹는 나라'라고 말을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한 이후 특히 유럽이나 미주 쪽의 동물보호단체와 동물 애호가들로부터 비난의 화살을 숱하게 받아왔다.
해외 공관들이 업무를 보는데 지장이 있을 정도로 항의 전화, 편지가 쇄도하고 심지어 서구에서는 대외 무역의 방해요인으로 등장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개고기먹는 습관은 비난의 대상이었다. 물론 여기에도 이해할 수 있는 문화가 있다. 우리 민족은 개에 관한 서로 상반되는 이중적 문화를 가지고 있다. 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문화와 또 아이러니컬 하게도 개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는 문화가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개를 잡아먹는 것은 농경문화 민족의 특징이다. 그래서 농경문화를 가진 지역에서 개가 번성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목축을 하거나 유목민인 경우에개는 가축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동물이다. 이들에게 개는 소나 양을 몰아줄 뿐만 아니라 재산은 물론 주인의 목숨까지도 지켜주는 무척 고마운 동물이다. 자연 이런 개를 잡아먹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농경문화를 가진 사람들에게 개는 그야말로 놀고 먹기만 하는 가장 비생산적인 동물이다. 농경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한 곳에서 오랫동안 정착해서 살기 때문에, 도둑같은 것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담이나 대문이 허술하기 짝이 없어도 동네에 개 한 마리만 있으면 오만 간섭을 다하고 돌아다니니 경비에 크게 신경 쓸 일이 없다. 그렇다면 가난했던 옛날 우리 농촌에서 이런 개를 유용하게 쓸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식용이었다. 농경을 위주로 하는 사람들에게 소는 농사일을 돕는 가장 중요한 가축이고, 돼지는 고기를 한꺼번에 많이 제공할 뿐만 아니라 새끼도 많이 낳아 채산성이 매우 높고, 닭도 알을 낳아주니 유용한 가축이다.
그러나 개는 매일 먹고 놀기만 하니 가축으로써의 효용성은 바닥이다. 그러므로 한 삼년 키우다 잡아서 그 고기를 부엌 천장에 매달아 건조해 놓았다가 부모가 몸이 아프거나 부인이 해산이라도 하면 소나 돼지고기 대용으로 끓여 내놓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같은 농경문화 민족의 식문화를 살펴보고 나면 개고기를 먹는 전통을 비난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의 궁흉했던 시절과 달리,오늘 우리 주변에는 먹거리가 널려있다시피 하다. 온갖 고기류들이 조리법을 달리 해서 뭇 사람들을 손짓하고 있는 이때에도 개를 꼭 잡아먹고 괜한 국제적인 망신을 당해야 하는지, 더구나 사람들과 정을 주고받던 개를 잡아먹고 그 개를 사랑하던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굳이 박을 필요가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이 아닐까.
개고기를 먹는 것도 문제지만 우리가 반드시 반성해야 할 일은 개를 잡는 과정이다. 고기를 맛있게 한답시고 인격 파괴적인 행태로 잔인하게 개를 죽이는 짓은 정말 짚어 보아야 할 일이다. 우리나라는 누가 뭐라고 해도 아직까지 불교 신자가 제일 많은 나라이고 유교문화가 지배하는 나라이다. 불교에서는 개고기 먹는 것을 철저히 금하고 있다. 불교의 윤회사상 중에 가장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고 그 다음이 개로 태어난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개를 사람 다음으로 중히 여긴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개와 관련된 불교설화 중에 목련존자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옛날, 효자로 유명했던 목련존자의 어머니가 아귀도에 떨어져 고통을 받고 방황하자, 존자는 그 혼을 구하기 위해 부처님께 부탁하여 어머니를 개로 환생하게 했다. 그리고 우란분에서 나온 범어. 어귀도의 망령을 위로하는 불교 행사를 정성스레 지내자 극락정토로 환생했다는 설화가 있다. 이 목련존자의 어머니가 개로 환생한 날이 우리 민족에 있는 '백중날'이다.
이런 기념일을 정해 놓은 우리 선조들이 개고기 먹기를 즐겼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개를 중히 여기는 것도 우리 선조들의 또다른 문화 유산이다.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쩔 수 없는 분위기에 이끌려 보신탕집에 가서 곤욕을 치르는 일을 흔히 겪는다. 그리고 개고기를 먹어야 한다. 먹지 말아야 한다 논란도 많다. 비단 종교 문화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본래 우리 민족은 정이 많은 민족이기 때문에 집에서 정들여 기르던 개를 사람들이 잡아먹는 것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옛날부터 많았던 것 같다.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귀양간 형님을 걱정하면서 써 보낸 편지 중에 "요즘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 시비가 있지만 형님께서 몸이 많이 약하시니 개라도 잡아드십시오" 하고 개고기를 약으로 먹을 것을 권하는 글이 있다. 이 시기에도 세간에 개고기 먹는 것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개가 의와 충을 상징하는 동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의미부여이다. 이것은 의와 충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동양의 유교철학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과 전설이 우리나라처럼 많은 나라도 없다. <증보문헌비고>라는 책에는 백제가 망할 때 사비성의 모든 개가 왕궁을 향해 슬피 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진도의 온 개들이 일본 쪽을 바라보고 일제히 짖어 국가의 위기를 미리 알렸다는 기록도 있다.
이외에도 의견과 충견에 대한 수많은 얘기는 아마도 국난이 닥치거나 흉년이 드는 등 사람이 살기 어려울 때마다 하나씩 생겨난 것 같은데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이런 미담을 전함으로써 개를 잡아먹지 않았으면 하는 당시 사람들의 바램의 한 표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북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의 진화구주의 설화는 그 대표적인 보기이다. 주인을 살리기 위해 시냇물에 털을 적셔 불을 끄다가 죽은 개를 애도하기 위해 비석 대신 개의 충성을 새긴 나무를 심었는데 이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오수라 불렀고 마을 이름도 오수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 설화에서만 보아도 그러하다. 유사한 이야기는 전국 도처에서 전해올 만큼 개의 충직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 민족인데, 하물며 개를 맛있게 먹기 위해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가?
그러나 농경문화의 영향으로 개고기를 먹는 사람은 있으나 이는 소수라고 치부하고, 대다수의 우리 민족은 예나 지금이나 서구의 어느 민족 못지 않게 개를 좋아하고 아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많은 민화를 비롯한 풍속화에 진도개나삽살개처럼 생긴 개 혹은 다양한 형태의 혼혈 개들이 그 시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있는것을 볼 수 있다. 이런 풍속화에 개 잡아먹는 그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의 의미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