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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11월 23일
성 골룸바노 아빠스
ST. COLUMBANUS
Saint Columban
San Colombano Abate
543 at West Leinster, Ireland-
21 November 615 in a cave at Bobbio, Italy of natural causes
Canonized:Pre-Congregation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주보성인
골룸바노는 유럽 대륙에서 활동한 아일랜드 선교사들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청년 시기에 육적 유혹으로 큰 시련을 겪은 후 수년 동안 은둔 생활을 하고 있던 수녀에게 충고를 청했다.
그는 그녀의 충고에서 세상을 떠나라는 부르심을 느꼈다.
그는 먼저 러프언의 어느 섬에 사는 한 수도자에게 갔다가
다음에는 밴고르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대수도원으로 갔다.
여러 해 동안 은거와 기도 생활을 한 다음
그는 12명의 동료 선교사들과 더불어 골-오늘의 프랑스-지방으로 갔다.
그들은 그들의 엄격한 규율과 설교로,
그리고 성직자들의 게으름과 시민들의 불화로 특징지을 수 있던 그 당시에
애덕과 수도 생활에 완전히 헌신함으로써 많은 존경을 받게 되었다.
콜룸바노는 유럽에 여러 개의 수도원을 세웠으며 그곳은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모든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그도 프랑스 주교들의 불평에 대해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아일랜드 관습을 인정받기 위해서 교황에게 호소해야 했다.
그는 왕의 결혼을 지적하면서 그의 방탕한 생활을 꾸짖었다.
이것은 황태후의 권력을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콜룸바노는 아일랜드로 되돌아 가라는 추방령을 받았다.
그의 배는 폭풍에 떠돌다가 유럽에 정착했으므로 다시 그의 일을 계속했으며
후에는 이탈리아로 가서 그곳에서 롬바르디아 왕의 호의를 얻었다.
이 마지막 해에 그는 유명한 보비오 수도원을 설립했으며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저술에는 참회와 아리아니즘에 관한 논문들이 있으며 설교와 시 그리고 자기 수도원의 규칙서 등이 있다.
대중의 성적 방종이 그 절정에 이르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콜룸바노만큼 순결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젊은이들에 대한
교회의 감동적인 기억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안일에 빠진 서구 세계가 수백만의 굶주린 사람들과는 비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는 현대에서,
우리는 아일랜드 수도자들의 엄격한 생활과 규율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들이 너무 엄격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너무 멀리 나아 갔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나아 갈 수 있을 것인가?
콜룸바노는 룸바르디아에 있는 이단적 교리에 대하여 교황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이 세상의 가장 먼 곳에 사는 우리 아일랜드 사람들은 성베드로와 성바오로,
그리고 성령의 인도 아래 거룩한 법전을 기록한 제자들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과 사도들의 가르침이외에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이 나라에서 성베드로의 어좌에 대한 나쁜 평판으로 매우 고통스럽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로마는 위대하고 멀리까지 알려졌지만
그것은 오직 이 베드로의 교좌 때문에 우리에게 영광스럽고 위대한 것입니다.
당신의 양떼와 이리 사이에 서서 교회의 평화를 지켜 주십시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6세기 전반기에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신학과 일반 학문을 공부한 후 수도 생활을 택하여 프랑스에 갔다.
그 곳에서 많은 수도원을 세우고 엄격한 규율로 다스렸다.
유배형을 받아 이탈리아로 가 보비오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스도교 생활과 수도 생활을 증진시키고 615년 세상을 떠났다.
성 골룸바노 아빠스의 [지침서]에서
(Instr. 11,1-2: Opera, Dublin 1956,106-107)
하느님의 유사성에 따라 창조된 사람의 위엄은 참으로 엄청납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상과 유사성으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형제들이여, 이 표현의 위엄에 주목하기를 간청합니다.
전능하시고, 보이지 않으시고 파악할 수 없으며 표현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당신 모상의 위엄으로 그를 높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사람, 영과 흙 사이에 공통되는 것이 무었이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영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당신 영원성의 모상을 주시고
당신 행위의 유사성을 주시는 것은 참으로 관대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그 위엄을 간직할 줄 안다면 하느님의 유사성에 따라 창조된 사람의 위엄은 참으로 엄청납니다.
사람이 하느님께서 그 영혼에게 부여하신 기능들을 올바로 사용할 줄 안다면 하느님과 유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실 때 우리 안에 심어 주신 그 모든 능력들을
우리가 다시 되돌려 드려야 한다고 계명들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첫 계명은,
태초부터 그리고 우리가 존재하기 전부터 주님이 우리를 이미 사랑해주셨기에
우리도 주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우리 안에 그분과의 유사성을 새로이 나타나게 합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켜라." 주님의 계명은 서로간에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복음서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말"로써가 아니라 "행위와 진리"로써 실천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형상을 잃지 않고 올바로 간직된 우리의 유사성을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이 유사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이 거룩하신 만큼,우리 생활의 거룩함으로써 간직할 것입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자 되어라."
그 다음 또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요한의 말씀에 따라
주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의 실천으로 그 유사성을 간직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선하시고 진실하시기 때문에 선과 진리로써 그것을 간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이것이 아닌 다른 그림을 그려서는 안되겠습니다.
난폭하고 성을 잘 내고 교만한 사람은 폭군의 유사성을 자기 안에 그려 넣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폭군의 유사성을 그리지 않도록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모상을 우리 안에 새겨 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란 좋은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보존하지 못한다면 이득되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일반적으로 가장 좋은 것은 또 가장 연약합니다.
귀한 것들은 그것을 간직하는 데 그만큼의 주의와 노력을 요합니다.
말 한마디로 부서지고 사소한 모욕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은 너무도 연약한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에겐 다른 이들에 대해 말하고 다른 이들의 일에 대해 참견하며 잡담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을 비판하는 일 이상으로 좋아하는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사야처럼
"주 하느님께서 나에게 말솜씨를 익혀 주시며 고달픈 자를 격려할 줄 알게 다정한 말을 가르쳐 주셨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침묵을 지킬 줄 알아야 하고, 만일 무엇을 말하고 싶다면 화평의 말을 해야 합니다.
(가톨릭홈에서)
6세기 전반기에 아일랜드의 웨스트 렌스트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모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과 일반 학문을 공부한 후
수도 생활을 하기로 결정하고 얼마동안 시넬이란 수도자와 함께 루그 에른섬의 클렌 이니스에서 살다가,
뱅골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12명의 다른 수도자와 함께 590년경 골 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고,
이 선교 활동이 성공적이었으므로 뤽세이유와 폰텐느 지방도 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추종자들이 유럽 전역을 선교하면서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에 수도원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반대를 받았는데, 특히 프랑크계의 주교들로부터 극심한 반대를 받았다.
그는 성좌에 서한을 보내어 실정을 보고하는 한편,
603년에 샬롱에서 개최된 갈리아 시노드에 불참하면서 항의했다.
또한 610년에는 부르군디의 국왕 테오돌기 2세의 결혼을 반대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모든 아일랜드 수도자가 추방당하는 곤경을 겪기도 햇다.
그후 그는 롬바르디의 아리안 왕 아질울프의 영접을 받고 이탈리아 선교에 착수했다.
그 당시에 학문과 문화 그리고 영성의 중심지로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이처럼 많은 수도원을 세우고 엄격한 규율로 다스렸으며
그리스도교 생활과 수도 생활을 증진시키고 615년 11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골룸바노는 자신의 수도회 규칙, 강론집, 시 그리고 아리우스 이단 반박문 등 수많은 글을 남겼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 골롬반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창립자는 아니지만, 외방선교회(會)의 주보성인입니다.
그는 543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으며,
560년경 하느님께 자신의 온 생애를 바치기 위해서 집을 영원히 떠나 수도원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엎드려 애원하는 어머니의 심한 반대 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곁을 떠나 집을 나섰습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수도생활을 하면서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성서말씀에 따라 부모와 집 뿐만아니라 고향까지도 떠나기로 결정하고
12명의 동료와 함께 배를 타고 목적지도 없이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배는 프랑스의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프랑스에 도착한 골롬반은 외딴 시골 지역에서 수도원을 건립하여 발전시켰으며,
획일적인 교회의 문화에서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해 교황에게 직접 호소하여
각자의 방식에 따라 부활절을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그 지역 정치가들의 불의한 일을 반대하여 추방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그가 20년동안 지도했던 수도자 중에서 20명의 성인이 나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의 발전에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한 나그네’가 되기 위하여
새로운 지역으로 옮겨가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유럽의 여러지역을 다니며 선교를 하였고, 615년 11월 23일 자신이 마지막으로 설립한
북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수도회는 아니지만 성 골롬반이 보여주신 모습처럼 자기의 나라를 떠나,
다른 문화 속에서 살며,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 연대하고,
정의를 위해 일하는 선교활동을 하고자 합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홈에서 www.columban.or.kr,
성 골롬반 외방선교수녀회 www.columban.to
변방선교.성이시돌 피정의집.임피제파트리치오신부.
2003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한국 선교70주년 기념 특집호 표지.
* 이오나의 성 골룸바 아빠스 San Columba di Iona Abate (521-597년)
축일:6월9일.게시판1806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사랑과 평화의샘 http://cafe.daum.net/lcg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