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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인도네시아 발리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우리를 인도한 현지 가이드의 말을 들으니, 자기네 도시에도 멋진 건물이 있는데 그 이름이 ‘강남 빌딩’이라고 하였다. 나는 발음이 똑같은 것이 신기해서 우리나라에도 ‘강남’이라는 동네이름이 있다고 하니깐, 그녀가 웃으며 하는 말이, 이 멋진 ‘강남빌딩’을 한국 사람들이 만들어 주었기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는 것이다.
불과 60여 년 전만해도, 우리나라는 한강다리를 놓는 기술도 갖고 있지 않아 외국의 힘을 빌려 고치고 만들었다. 그러나 현재는 한강을 잇는 철교를 합하여 30여개가 넘는 화려한 다리가 놓였고, 더 나아가 두바이를 최고의 도시로 만들어가며 세계가 놀라는 건축 기술을 가진 대한민국이 되었음은 실로 큰 자랑이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러나 우리가 아직도 일제에 나라를 잃고 오늘까지 자율권도 없이 노예처럼 살았다고 가정해보자. 한글은 물론 사라졌을 것이며 우리의 문화와 예술도 모른 채, 젊은이들은 다 군대와 노동직으로 끌려가고, 예쁘게 생긴 처자는 오늘도 정신대의 희생물로 사라졌을 것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그러나 이제는 경제력이 선진국 대열로 올라서고, IT산업은 세계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집집마다 외제 자동차가 줄지어 있음이 감사하기만 하다. 심지어 북한을 찬양하는 소리를 하든지 말든지 이렇게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고 않는 대한민국이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러나 아직 한세대가 지나기도 전인 70여 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내 재산과 내 몸조차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비참한 날을 우리가 보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언제 어디서 자신의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환경에서도, 또한 감옥에 끌려가 그 무섭고 힘든 모진 고통을 당하면서도, 이 나라의 미래와 앞으로 태어난 후손들을 위해, 자신이 태어난 이 땅의 자유를 위해, 숭고한 삶을 버리신 애국지사들의 영정 앞에 눈물지으며 날마다 가슴깊이 감사를 드려야 한다.
나라와 민족을 괴롭힌 일본에 대항하며 그 험한 고통의 세월을 이겨내, 마침내 후손들에게 오늘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물려주신, 애국지사들의 빛나는 사랑과 은혜와 위대한 삶과 정신을 역사 대대로 후손에 알려야만 하는 사명감을 안고,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성구 선생을 소개드린다.
독립운동가 이성구(李成九, 일명 수봉(秀峰) 호는 우문(又文)는 1896년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애국심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것에 대한 아픈 가슴을 안고 자라났다.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된 그는, 나라 사랑의 끓는 마음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23살의 청년 이성구는 향리 선천(宣川)에서 시위운동에 참가하면서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다. 다음해인 1920년, 친일에 앞장선 선천군 태산면장(台山面長)과 김병탁(金炳鐸)을 총살하였고, 그 의거로 인해 일제에 붙잡혀 징역 10년형을 받는다.
감옥 안에서 당한 모질고 악한 고문으로 인하여 젊은 그는 깊은 병이 들었으며, 4년 만에 신병으로 가출옥하였다. 살을 찢는 불같은 무서운 고문을 당하면서 그가 결심한 것은, 결코 만세운동과 같은 소심하고 민주적으로 독립운동으로는 나라를 되찾을 수 없고, 힘을 키워 무장투쟁 하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가출옥과 동시에 그는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고, 무기를 구입해 일제와 대항하는 투쟁방법으로 삼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해인, 1925년에 2번에 걸쳐 상해소재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던져 폭파를 기도한다. 비록 그의 뜻과는 어긋나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여 실망하게 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몸을 추스린 후 다음해인 1926년 1월, 이성구는 목숨과 마음과 뜻을 같이할 결사동지 박창세(朴昌世), 문일민(文一民), 강창제(姜昌濟), 이운환(李雲煥)등과 같이 무장 항쟁을 위하여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한다. 단장에는 박창세를 추대한 후, 자신도 대원이 되어 목숨을 건 강력한 항쟁을 시작한다.
그들이 세운 병인의용대는 임시정부의 경호를 맡아 외곽단체로 큰 기여를 하였는데, 이는 또한 한국독립당의 특무공작 업무도 겸하였다. 먼저는 일제의 앞잡이 밀정공산도배와 변절자를 숙청 처단하는데 힘을 쏟았는데, 그는 석현구(石鉉九), 유인발(柳寅發) 등을 암살하는 계획에도 참여하였다.
1929년 1월, 이성구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제26회 이사회에서 신회원으로 입회허가를 받고 특별회원에 가입하였으며, 1930년 5월에는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의경대원(義警隊員)으로도 활약하였다.
1929년 1월에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제26회 이사회에서 신회원으로 입회허가를 받고, 특별회원에 가입하였으며, 1930년 5월에는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의경대원(義警隊員)으로도 활약하게 된다.
1931년 7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의에서는 교민(橋民)의 안전을 기하기 위하여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上海韓人各團體聯合會)를 조직하고, 국민정부와 기타 중국 측 중요 단체에 대해서 성명서를 발표하여 항일투쟁을 위한 한·중 양국민의 공동대처방안을 도모하였다. 이때 이성구는 흥사단장 안창호, 애국부인회장 오의순(吳義橓), 소년척후대장(少年斥候隊長) 박창세(朴昌世), 야소교회 목사 송병조(宋秉祚)등과 함께 병인의용대장(丙寅義勇隊長)의 자격으로 이에 서명하고 함께 일하게 된다.
이듬해인 1932년에는 송병조(宋秉祚), 박창세(朴昌世) 등의 지시로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동년 11월에는 중국 측 항일제단체 대표자와 회합하여 중한민중토일동맹(中韓民衆討日同盟)을 조직하게 된다. 이후 이성구는 특무부부부장(特務部副部長) 이춘산(李春山)과 함께 더욱 격렬한 항일투쟁에 임한다.
또한 그는 동년 가을에 한국독립당 송병조, 박창세의 지도로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는데, 이 한족회는 1934년 12월에 김두봉(金枓奉)·신광제(辛光濟)에 의하여 남경한족회(南京韓族會)로 발전하였다.
1933년 1월에는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성구는 이유필(李裕弼), 강창제(姜昌濟), 김동우(金東宇), 안경근(安敬根), 문일민(文逸民), 차이석(車利錫), 송병조(宋秉祚) 등과 함께 당 간부로 이 대회에 참석하여 이사로 선출되었다.
이렇게 해외에서 독립운동 활동을 하던 중, 이성구는 더욱 활발한 운동을 위해 프랑스 조계(租界) 하비로(霞飛路)의 백제약방(百濟藥房)에서 옥서빈(玉成彬)과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그가 약속 장소에 도착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경찰이 잠복하고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하여,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그만 체포되고 만다.
신의주로 압송된 이성구는, 1933년 3월 16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받은 후, 경성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기 시작한다. 그 무섭고 캄캄한 감옥 속에서도, 오직 조국의 독립만을 간절히 원하여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같은 해 10월 12일 눈을 감게 되는데, 그의 나이는 오직 37살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잃어버린 나라의 자유를 위해, 젊음과 재산과 목숨까지 바치며 그분들이 그렇게도 갈망했던 오늘날의 자유를, 우리는 값없이 거저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감사하며, 고귀한 그분들의 잃어버린 몫까지 다해야겠기에 오늘도 최선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분들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는 길이며, 그 뜻을 받들어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거룩한 나라를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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