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는 발 뒤꿈치를 들고 걸으세요.” 처음 광고 공부를 시작할 때 본 광고 중에 이런 카피가 있었다. 지면에 꽉 찬, 살짝 들고 있는 발 뒤꿈치 비주얼 위에 올려진 그 카피를 오래도록 좋아했지만 베트남으로 오고 나서는 광고도, 광고일도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런데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고도古都 후에에서 문득 그 광고가 떠올랐다. 옛날 궁으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며, 흐엉Huong 강을 달리다가 내려서 보는 왕들의 묘 앞에서, 오래된 절 앞에서 나는 발꿈치를 들고 싶었다. 소리 없이 조용조용 흐르듯 걷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경건해지는 오래 전 역사를 향한 예의. 이제와 생각하니 그 광고는 이런 기분을 느껴본 사람의 진짜 경험에서 나온 광고였나 보다. 낮은 나무들이 서 있는 후에 시내의 거리는 차분하고 빛난다. 달랏의 호수 이름에도 흐엉Huong이 들어 있는데, 후에의 길고 아름다운 강 이름도 향기란 뜻의 흐엉이다. 강은 왕의 묘에서 본 담에 낀 오래된 이끼의 색과 닮았고, 흐엉 강이 내려다 보이는 절에선 강바람에 무슨 향이 실려오는 듯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후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뜨득Tu Duc이라는 왕의 묘가 있는 곳이다. 103명의 아내를 두었지만 아기를 잉태시킬 수 없는 왕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양자를 둔 그가 공연을 보던 자리, 달밤을 즐겼을 조용한 호수의 정자, 그리고 묘. 죽어서도 옛날의 영화榮華를 기억하도록 신하들의 조각상을 양쪽으로 세워둔 뜰은 왠지 서글프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뒤뜰로 걸어간다. 이제는 사라진 오래된 영화처럼 이끼가 끼어 있는 담장 외진 곳에 궁 밖으로 통하는 작은 문이 있다. 철창이 쳐진 문을 보며 나는 짐작해본다. 그도 한번쯤 저곳으로 빠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었겠지. 아까 호수 구석에서 가는 나뭇가지를 드리우고 낚시를 하던 아이처럼 조용히 자유롭게 살고 싶을 때가 있었겠지. 해가 진다. 왕의 하루도, 나의 하루도 저물어간다.
* 후에의 유적지는 외국인과 내국인의 입장료가 다르다. 외국인은 5만5천 동, 내국인은 2만 동. 나는 맛있는 국수 다섯 그릇은 먹을 수 있는 금액을 아껴보자는 생각에 모험을 하기로 했다. 언젠가 한국인들의 모임에서 “어머,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라는 소리도 들은 적은 있는 베트남화된 내 얼굴을 믿고 내국인 쪽 창구에 돈을 내밀었다. 베트남 사람인 척 아슬아슬하게 표를 사고 입장하고 나서도 나는 누가 따라오면 어쩌나 조마조마 뒤를 돌아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마구 뛰던 가슴을 누르며 나는 다시는 그러지 말자 결심했다.
★ 후에의 음식
1. 음식 이름 뒤에 못 박힌 후에, 분보후에Bun Bo Hue
유독 음식 이름 뒤에 지명이 꼭 따라 다니는 음식이다. 그러니 분보후에Bun Bo Hue가 후에의 음식이라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 제기를 못한다. 호치민의 우리집 앞에서 먹은 분보는 굵은 분을 사용하는데 오리지널 이곳의 분은 가늘다. 집 앞 가게의 맛에 익숙해 처음에는 심심한 듯했지만 먹을수록 감칠 맛이 느껴졌다. 고기도 좀 다른데, 오리지널은 얇게 저민 고기가 아니라 뼈다귀 해장국용 고기에 가깝다. 보기에는 뜯기 힘들 것 같은데 막상 입에 넣으면 감자탕 뼈다귀처럼 부드럽게 잘 발려진다. 두 집이 나란히 있는데 건너편에서 봤을 때 왼쪽에 있는 집이 원조라고 한다.
**11B Ly Thuong Kiet
2. 바나나꽃과 바나나줄기와 먹는 재첩밥, 껌헨Com Hen
재첩을 넣어 먹는 껌헨Com Hen은 아침이면 후에 어디에서나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씨클로 할아버지한테 맛있는 곳을 소개해달라고 했더니 강 건너 작은 사구를 일컫는 꼰헨Con Hen에 가자고 하신다. 구시가지의 다리를 하나 건너 바로 있는 식당엔 스승의 날이라 학교에 가지 않은 아이들이 회식을 하고 있었다. 나도 밥을 시킨다. 호치민에서 먹은 껌헨에 들어간 밥은 따뜻했었는데 이곳의 밥은 차다. 물어보니 국물에 밥 알이 풀어지지 않도록 일부러 차게 식힌 밥이라 한다. 숙주와 채친 바나나꽃, 바나나줄기를 넣고 재첩 삶은 물을 붓는다. 차게 굳힌 밥 때문인지 국물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맑다. 이 작은 재첩들을 일일이 어떻게 까는지. 껌헨은 그 수고로움 때문에 더 특별한 밥이다.
**꼰 헨 Con Hen 다리 건너 첫번째 집
3. 후에에서의 매일 저녁식사 메뉴
‘Hiep Loi 合利’, 간판에 베트남어와 그 의미의 한자가 함께 써있는 걸 보니 아마도 중국계 베트남인이 하는 가게일 것이다. 볶음밥이나 다른 음식들은 식당 안 주방에서 만들어 나오는데 국수만은 식당 입구에 만들어놓은 작은 부스에서 만든다. 메뉴판에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던 야채 퍼가 있어 시켰다. 한눈에 평생 그렇게 맛있는 국수를 말아왔을 것 같은 할아버지가 내 준 국수는 담백하고 시원하고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후에에 머무는 동안 매일 저녁 그 특별한 퍼를 먹고 잠들었다.
**19 Hung Vuong
<가는 길> * 남북으로 긴 베트남의 정가운데에 있는 후에는 다낭에서 버스로 이동하면 2시간 정도 걸리고, 호치민에서 비행기를 타면 1시간 30분 후면 도착한다. 하노이에서 출발할 때는 밤 버스나 밤 기차를 타고 10시간 정도 달려 아침에 내리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