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바타’의 재개봉을 선언한 제임스 캐머런 감독. 그는 3D 영화의 설익은 열풍을 경고하면서, 국내에서도 개봉 예정인 ‘피라냐3’를 한 예로 들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피라냐’ 시리즈가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점입니다. 식인 물고기가 나오는 재난영화로, 조 단테의 1978년작 ‘피라냐1’에 이어 81년 ‘피라냐2’로 장편 데뷔를 한 거죠. 캐머런 감독은 ‘피라냐2’를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빼버리고 싶다고 종종 말했다는데, 명감독의 데뷔작이 항상 싹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명감독 9명의 데뷔작들을 살펴봅니다.
양성희 기자
“거짓말투성이의, 생계를 위한, 주문에 의한 내 초기작”
임권택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최근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 제작을 마친 임권택 감독. 그의 데뷔작은 48년 전, 1962년 만주 배경의 애국 항일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다. 김석훈·문정숙·황해·엄앵란 주연이다. 애국 학생들이 만주 벌판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모습을 그린, 만주 액션물. 임 감독은 정창화 감독 밑에서 영화에 입문했고 제작부 소품담당, 연출부 등 7년여의 도제 생활 끝에 데뷔했다. 그러나 임 감독은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비롯해 초기 50편의 작품에 대해 “거짓말투성이의, 오직 생계를 위해, 제작자의 주문에 의해 탄생한 영화들”로 “당시 개봉 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임 감독이 스스로 ‘제2의 데뷔작’으로 꼽는 영화는, 임권택 작품 세계의 새 출발을 알린 73년 작 ‘잡초’다. 그러나 임 감독은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전작전을 가지며 “기계로 찍어내듯 다작했지만 그때 다작이 훗날 내 영화의 밑거름이 된 것은 분명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첫 작품 실패로 5년간 방황, 두 번째 작품도 부진
박찬욱 감독의 ‘달은, 해가 꾸는 꿈’. [중앙포토]
박찬욱 ‘달은, 해가 꾸는 꿈’(1992)=‘올드보이’와 ‘박쥐’로 칸을 두 차례나 석권한,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 감독 박찬욱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다. 스스로 “내 전작 DVD는 결코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할 수 있다면 없애고 싶은 초기 두 작품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과 ‘삼인조’(1997)다. ‘달은, 해가 꾸는 꿈’은 당시 최고 아이돌 가수 이승철의 영화 데뷔작. 암흑가의 건달이 조직 보스의 정부를 사랑하다가 살해당한다는, 홍콩 누아르풍의 영화다. 오우삼·왕가위에 대한 오마주에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를 삽입하고, 음악과 화면의 의도된 불일치 등 영화광 감독다운 낙인을 찍었지만, 제작자의 상업적 요구에 굴복하며 흥행과 비평 모두 참담한 결과를 맞았다. 이승철의 팬이 대부분이었던 1회 이후부터는 거의 관객이 없어 최종 관객은 6649명(서울)에 그쳤다. “넌 고치를 벗어던지고 날아갈 버릴 거야. 내 고치는 널 두고 도망갔던 그 기억이야”같은 낯간지러운 대사도 나온다. 당시에는 후시 녹음을 했는데 이승철·나현희는 극심한 연기력 부족으로 다른 성우가 더빙을 했다. 박찬욱은 데뷔작의 참패로 5년간 영화를 못했고 이어 김민종·정선경 주연의 ‘3인조’에서도 부진했다. 영화칼럼니스트로 명맥을 유지하면서 완전히 실패한 감독일 뻔했던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은 2000년 ‘JSA 공동경비구역’이다.
해외서 작품성 인정, 국내 영화제 신인감독상 이끌어
홍상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동년배 홍상수의 데뷔기는 박찬욱에 비해 훨씬 수월했다. 미국 유학파 출신이자 프랑스에서 막 돌아온 그의 첫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그 생경한 제목만큼이나 낯선 영화였다. 극적 과장이라고는 없는 무의미하고 비루한 일상의 나열, 이기적이고 성에 집착하는 소시민·지식인의 허위의식에 대한 냉소적인 묘사, 기승전결과는 거리가 먼 스토리 등이 한국영화계에 일대 충격을 던졌다. 영화는 로테르담영화제 타이거상, 밴쿠버영화제 용호상을 받았고, 이 같은 해외 수상은 그의 충무로 입성을 도왔다. 홍상수는 이 영화로 청룡영화제 신인감독상을 받은 데 이어 98년 두 번째 영화 ‘강원도의 힘’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돼 특별 언급을 받는 등 칸과 유럽 예술영화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인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유부녀(이응경)와 불륜 관계이자 순진한 극장 매표소원에게도 성적으로 지분대는 3류 소설가 효섭(김의석)은, 이후 홍상수 영화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속물 지식인 남성 캐릭터의 원형이다.
충격적 이미지, 염세적 세계관 돋보였지만 흥행 실패
김기덕 ‘악어’(1996)=홍상수가 새로운 한국영화의 경지를 개척하고, 박찬욱이 아직은 실패한 상업감독으로 울분을 달래고 있을 무렵, 전수학교 출신에 프랑스를 떠돌며 혼자 미술을 공부했다는 기이한 신인이 등장했다. 바로 김기덕이다. 데뷔작은 ‘악어’. 92년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잇따라 수상하며 각본가로 활동하다 처음 감독한 영화다. 한강에서 자살한 사람의 시체를 숨겼다가 돈을 뜯어내는 청년(조재현)과 주변 인물들의 비극적 삶을 그렸다. 충격적인 이미지와 염세적 세계관으로 ‘김기덕 영화’의 출발을 알렸다. 엔딩 부분 한강 물밑에서 숭고하게 죽어가는 남자의 모습은 김기덕 영화의 한 축을 구성하는 종교적 색채도 드러냈다. 그러나 영화는 서울에서 3284명을 동원하는 등 흥행에 실패했고, 영화적 백그라운드가 전무한 그의 영화를 눈여겨보거나 지지하는 이 또한 없었다. 김기덕은 이어 ‘야생동물보호구역’ ‘섬’ ‘나쁜 남자’ 등에서 잔혹하거나 반여성적인 이미지를 선보였고, 2004년 ‘사마리아’와 ‘빈 집’으로 베를린과 베니스를 동시에 제패하기까지 오랫동안 가장 평가절하되고 오해받는 감독이었다. 페르소나 조재현과 호흡을 맞춘 작품.
장르적 관습 비튼 코미디, 배두나 스타덤 올려
봉준호 ‘플란더스의 개’(2000)=박찬욱이 ‘JSA 공동경비구역’으로 비평과 흥행을 사로잡으며 화려하게 재기하던 그해, 한국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신인이 탄생했다. 훗날 ‘살인의 추억’ ‘괴물’ 등으로 한국 상업영화의 외연을 넓힌 봉준호다. 데뷔작 ‘플란더스의 개’는 장르적 관습을 비튼 루저 정서의 코미디. 대학 시간강사인 남자와 아파트 관리소 여직원이 개 실종 사건을 둘러싸고 생기는 해프닝을 담았다.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출발하지만 점점 기괴하고 만화적인 게 뒤섞이면서 그들이 충돌하는 긴장감을 좋아한다”는 감독의 말대로, 일상적인 데서 출발하지만 판타지와 암시적 사회비평이 가세하는 독특한 코미디였다.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웃다가 정신차려 보니 갑자기 낯선 곳에 와 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드는 색다른 코미디”라고 평했다.
‘플란더스의 개’로 배두나는 특유의 무심하고도 마이너한 이미지를 얻었다. 당시 신세대 스타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던 배두나는 기획사의 권유로 오디션에 갔지만 너무나 의욕이 없어 심드렁하게 있었고, 봉 감독은 오히려 그런 모습에 끌려 캐스팅했다는 일화가 있다.
한석규·문성근 주연, 충무로 리얼리즘의 돌파구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 [중앙포토]
이창동 ‘초록물고기’(1997)=80년대 주요한 문인이었고 90년대 40대의 나이로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으며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한 이창동. 그가 영화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93년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다. 시나리오를 썼고 조감독도 맡았다. 95년 역시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시나리오를 썼고, 96년 문성근·명계남과 함께 이스트 필름을 차린 후 97년 내놓은 데뷔작이 ‘초록물고기’다. 한석규의 대표작이기도 한 ‘초록물고기’는 신도시 개발이 한창인 일산을 무대로, 두목의 정부를 사랑한 남자의 몰락을 그린 누아르 멜로. 도시 재개발에 밀려 소외된 소시민의 삶과 가족의 의미를 그려 ‘충무로 리얼리즘의 90년대식 돌파구’로 불린다. 그의 영화적·정치적 동료인 문성근이 조폭 보스 역으로 나왔다.
배창호·안성기·황신혜 내보냈지만 관객은 외면
이명세 ‘개그맨’(1989)=한국에서 가장 독창적인 스타일리스트 이명세 감독. 그의 데뷔작은 89년 ‘개그맨’이다. 원래 88년 여름 개봉 예정이었으나 ‘다이하드’에 밀려 개봉이 1년이나 늦춰졌고 전국 4만 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강한섭 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정도 외에는 이 작품에 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저주받은 걸작’ ‘시대를 앞서간 진정한 컬트’로 추앙받는다. 자신이 천재라는 환상 속에 영화감독의 포부를 안고 사는 3류 카바레 개그맨과 영화배우가 꿈인 변두리 이발소 주인, 그리고 무위도식하는 처녀 3인조가 위대한 영화의 탄생을 장담하며 꿈을 좇는 이야기. 배창호·안성기·황신혜 주연이다. 특히 배창호는 직전까지 이명세 감독이 조감독을 지냈던 인연으로 캐스팅돼 필사의 열연을 펼쳤다. 이명세 감독은 “2주 만에 시나리오를 썼고, 이 영화를 컬트라고 해서 사전에서 단어를 찾아봤다”고 말한 적 있다. 주인공의 콧수염 분장은 채플린의 영향일 것이라는 세간의 추측과 달리 당시 인기 개그맨 남철·남성남에서 따온 것. 이종세와 문도석이라는 주인공 이름은 당시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구로공단 갱사건에서 따왔다. 이장호 감독은 그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영화 ‘태양을 쏘았다’를, 작가 최인호는 소설 ‘지구인’을 완성했다.
기발한 상상력, 송강호에 날개 달아준 작품
김지운 ‘조용한 가족’(1998)=최근 ‘악마를 보았다’로 잔혹 시비를 낳고 있는 김지운 감독. 그의 데뷔작은 98년 ‘조용한 가족’이다. 한국판 ‘아담스 패밀리’로 불리는 공포 코미디(코믹 잔혹극). 산장을 운영하는 기이한 가족과 무심코 벌어지는 연쇄 살인 행각을 코믹 터치로 다뤄 한국영화의 새로운 상상력으로 평가받았다. 깊이 있는 조명과 건축적인 디자인, 풍부한 색감 등 미술적인 면에서도 진일보한 영화다. ‘조용한 가족’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해 97년 ‘넘버3’로 주목받은 송강호를 또다시 주목하게 한 영화. 송강호는 2년 뒤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 박찬욱 감독의 ‘JSA 공동경비구역’에 함께 출연하면서 명실상부 연기파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다.
‘조용한 가족’은 97년 제1회 씨네21 시나리오 공모전 당선작으로, 명필름이 영화화를 결정했으나 마땅한 감독을 찾지 못해, 연극 연출을 주로 해오던 김 감독이 직접 메가폰을 잡고 데뷔하게 됐다.
새로운 여성상 선보여…신인 설경구 강한 인상
임상수 감독의 ‘처녀들의 저녁식사’. [중앙포토]
임상수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연세대 사회학과와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으로 봉준호 감독의 직속 선배다. ‘플란더스의 개’에도 단역 출연했다. ‘처녀들의 저녁식사’는 당시로서는 도발적으로 젊은 여성들의 주체적 섹슈얼리티를 내세운 영화. 2000년대 들어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가 새롭게 조명받게 된 것을 상징하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강수연·진희경·김여진 등 세 여주인공이 맨 다리를 높이 쳐든 도발적 포즈의 포스터로 유명했다. 스스로 첫 경험의 상대를 고르는 여성 등 새로운 여성상을 선보여 페미니즘 진영에서 호평을 받았다. 페미니즘 감독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사회적 파장이 큰 논쟁적인 소재를 즐겨 다루는 이슈 메이커 임상수의 작품. 남자 감독이 만든 가장 이색적인 여성 영화로도 꼽힌다. 설경구가 짧은 출연 분량에도 불구하고 강한 인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