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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畊山人 박희용의 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10월 7일 월요일]
『대동야승』 제13권
[기묘록 보유 상권(己卯錄補遺 卷上) 이자 전(李耔 傳)
「이자는 경자생이고 자(字)는 차야(次野)이다. 신유년에 진사로 합격하였고 갑자년 문과에 장원하였으며, 벼슬은 우참찬에 이르렀다.
자신이 지은 《음애일록(陰崖日錄)》에, “소릉(昭陵 현덕왕후(顯德王后))이 현릉(顯陵 문종(文宗))의 배위(配位)로 동궁에 있을 때에 덕의가 아울러 지극하였으므로 영릉(英陵 세종(世宗))께서 크게 자애하였다. 나이 24세였던 정통(正統) 신유년에 노산군(魯山君)을 낳고 난산(難産)으로 말미암아 병이 되어 7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광묘(光廟)가 즉위하자, 노산은 왕위를 양보하고 영월(寧越)로 옮겨갔다. 병자년에 현릉의 신하였던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愷) 등이 비(妃)의 아우 권자신(權自愼)과 함께 노산군을 복위하기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비의 아우는 죽임을 당했고 비는 폐함을 당했다.
정축년에는 정부(政府)에서 계청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었다. 소릉을 파헤쳐 재궁(梓宮)을 끄집어 내어서 3, 4일을 한 데에 두었다가 옮겨 묻었다. 태묘에 부(祔)하였던 신주를 내쳐서 현릉만 태묘에서 제사를 흠향하도록 하여, 신(神)과 백성을 분하게 한 것이 50여 년이었다.
정덕(正德) 임신년에 조정에서 소릉을 복위하기를 청하였고, 대간ㆍ시종과 유생까지도 말하였으나 해가 넘도록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진신(縉紳)들은 혹 화(禍)를 두려워해서 형세만 관망하는 자가 있었는데, 내가 유종룡(柳從龍)(종룡은 유운(柳雲)의 자이다. 그때에 대간으로 있었다)에게 보낸 편지에, “지난번에는 멀리 강상(江上)에까지 수고하셨는데, 정지(情地)가 창황하여서 회사(回謝)할 겨를을 얻지 못 하였네. 이번에는 가속(家屬)을 이끌고 서울에 와서 그대가 큰일을 담당하여 조석으로 복합(伏閤)한다는 말을 들었네. 이 일은 우리들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쌓였던 울분이었으니, 오늘날 그대에게 기대하는 것이 한량이 없네. 대저 개혁하는 것을 꺼리고 망설이기를 좋아하는 것은 세속을 따르는 소견일세. 또 선왕에 대하여 중난(重難)한 일이라는 것을 느끼고 고칠 수 없는 예(禮)라고 하여, 고루하게 잘못을 따르면서 그 사이에서 의(義)를 주창하게 되니, 정당한 논의가 오랫동안 시행되지 않고 간사한 말로써 감히 속이는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
지금은 전하께서 옛 치도(治道)로 회복하려는 기풍이 있고 그대들이 과감하게 말하는 반열에 있으며, 재상으로서 정당한 논의를 하는 자는 모두 명망이 있는 자일세. 만약에 또 용렬한 논의에 저지되어서 큰 예를 바루지 못하고 잘못된 전고(典故)를 버리지 못하여 하늘에 계신 현릉의 영령이 배우 없음을 깊이 근심하고 소릉의 혼이 한없는 원통함을 품으면, 충신과 의사(義士)의 눈은 지하에서 장차 어느 때에나 감게 되겠는가.
설날과 삼복(三伏)과 납일(臘日)에 우의(牛醫)나 마의(馬醫) 같은 천한 무리의 귀신도 모두 배필의 즐거움을 갖추고 자손이 봉제(奉祭)하는 것을 누리는 것을 볼 수 있거늘, 종묘에 제향하고 자손을 보전하며 아름다운 청묘(淸墓)에 예의가 숙옹(肅雍 엄숙하고 화한 모양)하고 현관(顯官 직위가 높은 관원)이 제향을 돕는데, 현릉 홀로 배필 없는 제사를 어찌 흠향하시겠는가. 하물며 종묘에 고하는 일은 큰 효도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본디 어렵게 여길 것이 아니건마는, 논의하는 자가 어렵게 여기는 것은 이 무슨 마음인가.
부모가 허물이 있으면 기(氣)를 화하게 하고 안색을 즐겁게 하여 간하여, 비록 회초리로 때려서 피가 흐르더라도 공경과 효도로써 그 어버이의 허물을 반드시 없앤 뒤에라야 그만두는 것이 마땅한 것일세. 까닭에 조(祖)와 부(父)가 허물이 있으면 그 한 일을 뒤엎는 것이 허물을 덮는 것이네. 그런데 지금은 허물 덮은 것을 가리켜서 들춰내는 것이라 하면서 이르기를, 선조의 한 바가 이미 이와 같으면 자손 된 자는 오히려 덮어 숨겨서 그것을 도와 이루는 데 겨를이 없어야 한다고 하니, 아, 생각하지 못함이 심하기도 하외다.
일에 나타난 것과 숨은 것이 있고, 이치에도 가벼운 것과 중한 것이 있는데, 지금에 들춰낸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일이며 돕고 숨기는 것은 과연 무슨 이치인가. 선조를 더럽히고 효도를 해치면서 스스로 예에 맞다 하니, 공손하지 못함이 심하외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처자와 뜻이 화합한 것은 금슬(琴瑟) 소리가 서로 어우러지는 듯하고, 형제간이 이미 화합하니 즐겁기도 하다.’ 하였고, 공자께서는, ‘부모의 교령(敎令)을 행하게 하여 실가(實家)를 순하게 한다.’ 하였으며, 속담에는, ‘한 지아비라도 모퉁이를 향해 돌아앉으면 당(堂)에 가득한 사람들이 즐기지 못한다.’ 하였소. 이러하니 태묘 제향날에만 특히 현릉이 배필 없음을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영릉(英陵) 이상은 안순한 즐김을 잃을 것이며, 광릉(光陵) 이하는 당에 가득한 슬픔을 품을 것이오. 명분과 예의를 모두 잃게 되고 사전(祀典)에도 상고할 데가 없어 온 나라의 제사에 정성과 효도를 다하지 못하게 되니, 가령 광묘(光廟 세조(世祖))께서 앎이 있으면 반드시 지난 일을 후회하여 오늘날 소릉의 복위를 바란 지 오래였을 것이며 고유(告由)하는 말도 진실로 즐겁게 들을 터인데 무엇이 중난하다고 하여 반드시 변명을 하는 것인가.
들으니 진신들도 쥐가 구멍에서 나갈까 말까하는 것처럼 의심하고 요리조리 살피며, 화를 겁내어 진언하기를 꺼리는 자가 있다 하는데, 족하(足下)는 또한 어떻게 생각하는가. 복(僕 나)은 근래에 큰 화를 만나 죽을 뻔한 것이 여러차례였는데 의가 아닌 데에 죽을까 두려워하였소. 그러나 만약 큰일을 당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비록 나같이 불초한 사람이라도 또한 원하는 바 아니외다. 일이 되고 안 되는 것은 하늘에 있고, 사람의 화와 복은 운수에 있는 것이오. 족하는 마음과 힘을 다해서 운수를 기다리고 하늘을 섬기시오. 나는 처참한 가운데 있는 몸이고 또 일을 도모하지 않는 무리에 처해 있으니 도의상 세상일을 말하는 것이 부당하오마는, 다만 족하와는 평소의 친분이 있으므로 스스로 그만두지 못함이니, 족하는 재량하기 바라오.” 하였다.
임신년 섣달 열흘날, 공이 부친상을 당하여 담제(禫祭)를 지낸 뒤였다. 계유년 2월 18일에 종묘 동산 소나무에 벼락이 떨어졌다. 임금이 놀라서 종묘에 친제(親祭)하고 소릉을 복위하도록 명하였다. 4월 17일에 소릉 옛 무덤을 헤치고 재궁을 새것으로 고쳐 쓰고, 현릉 왼편 언덕에 새 터를 잡았다. 홍문관 교리 신(臣) 이자(李耔)가 만사(挽詞)하기를,
해를 부여잡고 황도에 오르고 / 扶日升黃道
구름을 타니 일이 다르다 / 乘雲事異宜
이치는 마땅히 지극한 데에 돌아가고 / 理當歸有極
하늘은 마땅히 사심 없이 비치리라 / 天合照無私
종묘에 새로운 경사를 벌였고 / 宗廟開新慶
건곤이 옛 의전을 정했다 / 乾坤定舊儀
미천한 신하는 소장을 모시고 / 微臣陪素仗
눈물 섞어 애사를 씁니다 / 和淚寫哀詞
하였다.
5월 6일에 다시 현릉왕후를 태묘에 부(祔)하면서 처음 예제(禮制)와 꼭 같이 하니, 제향에 참석한 자가 모두 감탄하였다.
또 이르기를, “이자는 불행히 과거에 일찍 합격하여 폐조(廢朝)를 섬기면서 억지로 벼슬을 지냈다. 부모를 편하게 봉양하기 위해서 외방에 나가 문소(聞韶 의성)의 원이 되었는데, 하늘과 해가 다시 밝아 서정(庶政)을 개혁하는 첫머리에 시종으로 부르셨다. 어색한 행동으로 문득 미친 말을 늘어놓았으나, 여러 차례 장려해 주었다. 10년 동안 드나들면서 감격스럽게도 성은을 받들어 높은 벼슬에 발탁하시었으므로, 당시 동년배가 이미 옆눈으로 보았고 자신이 보기에도 겸연쩍었다.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보국(報國)하기를 생각하였으나 배운 것이 경력과 근거가 없었고, 성품이 더욱 완둔(頑鈍)하였는데, 겸하여 갑자기 일어나니 사람들이 믿어 주지 않았다. 인재를 추천하고 선비들을 좋아하여 처하는 데에 일정함이 없었으므로, 점차 뜻하지 않은 화가 되었는데 특별히 성상의 은혜를 입어 시골집에서 죄를 기다리게 하시었다.
그때 사류(士流)들이 모두 좌천되었거나 귀향갔고, 조효직(孝直 조광조(趙光祖)의 자) 공은 임금의 명으로 죽음을 받았다. 아, 이 사람이 죽은 뒤에 어찌 할 말이 없으랴마는, 정암집(靜庵集)을 보라. 아, 옳고 그름이 비록 한때는 혼돈했더라도, 정상(情狀)은 후일에 다 드러나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운운하랴. 이자 같은 자는 신하로서 무상(無狀)하여서 허물이 쌓이고 헐뜯음이 만단(萬端)이었으나, 오히려 입을 벌려서 먹이는 것을 기다리고 사람을 향해 웃고 말하니, 어찌 완악한 하나의 추물(醜物)이 아니리오.
내가 조공(趙公)과 가장 친근했고, 또 생사를 같이 하려는 자라고 남들이 알았다. 이제 거의 죽게 되었는데, 나의 자손은 내가 조공과 사귄 정이 유명(幽明)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알지 못할까 두렵다. 까닭에 경인년 섣달 그믐날 밤, 취한 김에 붓가는 대로 적는다.” 하였다.」
「보유 : 공은 겨우 14세 적에 송(宋) 나라 역사를 읽다가 개연히 분노하여 만언서(萬言書)를 짓고 스스로 바치고자 하였는데, 부친 대간공(大諫公)이 경계하며 말렸다. 대간공이 연산군(燕山君)에게 미움을 받고 외방으로 나가서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었는데, 공도 이조 좌랑으로서 편양(便養)하기를 청해서 문소(의성이다)의 원이 되었다. 백성을 다스리고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그 방법을 다 알맞게 하여 갈려간 뒤에도 그의 공덕을 생각하게 되었다.
중묘(中廟)가 즉위하자, 뽑혀서 옥당(玉堂)에 들어와 시종이 되었으며, 정축년에 부제학으로 승진되었다가 승지로 옮겼다. 무인년에 조정에서 변무(辨誣)하기 위해서 주청하는 일이 있게 되었는데, 공에게 특별히 품질(品秩)을 올리고 부사(副使)로 임명되어서 경사(京師)에 갔다.
상사(上使)였던 남곤(南袞)이 북경에서 병을 얻어 거의 위태하였는데, 공이 애써 약으로 구료(救療)하였다. 서장관(書狀官) 한충(韓忠)이 공에게 귀엣말로, “저놈이 반드시 사류(士流)를 적지(赤地)로 만들 것이오.” 하였다. 공은 정색하고 말리면서 오히려 보호하기를 더하였다.
돌아온 뒤에 계자(階資)를 뛰어 한성 판윤(漢城判尹) 겸 지경연(知經筵)에 임명되니, 곧 기묘년 봄이었다. 형조 판서로 옮겼다가, 잇달아 참찬으로 이배(移拜)되었다. 그때 나라에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기고 또 어지러운 정사를 겪었으므로, 여러 현신이 함께 다스리면서 정교(政敎)를 경장(更張)하고 시위(尸位 하는 일 없이 관직에 있는 것)를 탄핵하니 인심이 크게 엇갈렸다. 공이 문절공(文節公) 신상(申鏛)ㆍ조 문정공ㆍ충정공(忠貞公) 권벌(權橃)이 둘 사이를 조화시켜서 파국에 이르지 않게 하고자 하였으나, 한두 공이 불가함을 고집하여서 이미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북문(北門 신무문(神武門)의 화(禍)가 일어나서, 조정암(趙靜庵)ㆍ김충암(金冲菴) 제공(諸公)과 같이 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대신이 구원하여 최후에 석방되었는데, 남곤이 연경(燕京)에서 병구완 받은 것을 잊지 않은 데에 힘입은 것이었다.
12월에 최 이상(崔二相 최숙생(崔淑生)) 등과 함께 관작을 삭탈당하고, 음성(陰城) 고을의 음애(陰崖)에 우거하면서 스스로 음애라고 호(號)를 지었다. 좌우에는 오직 도서뿐이어서 정신을 집중하고 눈길을 모아서 집안 사람도 그의 안면을 볼 때가 드물었고, 비록 양식이 여러 번 떨어졌으나 태연하였다. 간혹 샘물을 못에 끌어들이고 떼풀을 베어서 정자를 지었다. 휘파람 불며 시를 읊조려서 흥을 풀고, 술이 생기면 양껏 마셔서 가슴속의 뇌락(磊落)한 심사를 돋구었으며, 흥이 나면 붓가는 대로 회포를 적어서 시름을 달랬다.
기축년에 충주의 토계(兎溪)로 이사하니, 곧 달천(㺚川) 상류이다. 구름 낀 산이 깊고 그윽하여 인가가 절로 드물었다. 정자를 지어 이름을 몽암(夢庵)이라 하고, 이를 따라 호도 몽옹(夢翁)이라 하고, 또 계옹(溪翁)이라고도 하였다. 이탄수(李灘叟)와는 배를 타고 서로 방문하였는데, 항상 서로 심방하였으므로 물고기와 새들도 놀라지 않았다. 이때에 송계(松溪)의 수령이었던 중숙(仲叔)이 이항(李沆)과 한마을에 살면서 잘 사귀었는데, 송계가 그의 형 시산정(詩山正) 정숙(正叔)의 사건으로 연좌되어서 선산(善山)에 정배되었다.
경인년에 석방되어서 돌아올 참인데 마침 이항이 찬성(贊成)이 되어 개령(開寧)의 선산(선조의 무덤)에 분황(焚黃)하였다. 송계와 공도 같은 배로 서울에 올라오니, 대개 송계가 거문고를 잘 타므로 배 위에서 서로 즐기고자 한 것이었다. 이항이 뱃길에서 음애를 맞이하니, 음애가 배를 저어와 먼저 송계가 석방되어 돌아옴을 위로하고 이어 이항에게, “그대도 신사년 사람을 반역했다고 여기는가?” 하니, 이항이, “그 사람들의 언사를 들으니 크게 원망하는 무리로다.” 하였다. 음애가 이르기를, “어허, 그대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했는가. 어찌 분해하는 말에 성내어서 억울하게 뜻밖의 죄를 더하는가. 안처겸(安處謙)은 의협(義俠)한 무리일 뿐이오.” 하니, 온 좌중이 두려워하였다. 그 뒤 며칠 안 되어서 몽암에서 죽었다. 죽은 뒤 6년 만에 중묘께서 기묘년 일을 크게 깨달아서 당시 사화에 관련되었던 사람을 모두 다시 서용하였다.
만력(萬曆) 정축년에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이 계하기를, “죽은 참찬 이자(李耔)는 기묘년의 명신(名臣)으로서 폐출되어서 명을 마쳤습니다. 그의 충직한 행실이 민몰되어서 알 수 없게 됨은 진실로 애석합니다. 명호(名號)를 바꾸도록 하여 장래 사류를 장려하기를 청합니다.” 하여, 임금이 윤허하였다. 〈행장(行狀)〉에는 대략, “천분(天分)이 매우 높았으며, 외모도 아름다웠고 마음이 넓고 컸다. 심주(心柱)가 넓고 두터웠으며 도량이 넓고 밝았다. 사람을 접할 때는 온화하면서 엄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간략하게 하고 근실하게 하였다. 제향하는 데에 정성스러웠고 벼슬에 임해서는 씩씩하였으며, 규문(閨門) 안에서는 질서가 엄하였다.” 하였다.
또, “평소에는 담연(淡然)히 세상일을 잊은 듯하였으나, 조정 정사가 잘못됨을 들으면 여러 날 탄식하였다. 사람을 가르치다가, 진동(陳東)을 죽인 대목에 이르면 두어 줄을 읽지 못하고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 하였다. 슬픈 빛이 얼굴에 가득하고 눈물이 눈썹에 잇닿으니, 배우던 자들이 가만히 보다가 놀라서 물러갔다.” 하였다.
또, “공의 학문은 쇄소 응대(洒掃應對)를 계제(階梯)로 삼고, 신(神)을 궁구하고 조화를 아는 것을 귀취(歸就)로 삼았다. 수양하는 데에 도가 있고, 체(體)와 용(用)을 구비하였다. 다만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또 경솔하게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빈말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오직 실천하는 데 착실하기를 힘썼다. 만년에는 진실이 쌓이고 학력(學力)이 오래되매 인의(仁義)가 정숙(精熟)하여서 동정 어묵(動靜語黙) 어느 것이나 예에 맞았다.” 하였다.
또, “당시 만사(挽詞)로 심언광(沈彦光)의 글에,
영묘(소년)한 시절의 높은 심회가 노성과 견주었는데 / 英妙高懷擬老成
한 세상을 경장할 때에 일찍이 놀랍기도 하였다 / 更張一世曾□驚
애오라지 시례로써 초복을 이루었으나 / 聊將詩禮成初服
경륜한 것이 반생을 그르칠 줄 어찌 뜻했으리 / 豈意經綸誤半生
쓰임과 버려짐은 천운이니 기뻐하거나 성낼 것이 없고 / 用舍任天無喜慍
슬픔과 편함은 처지에 따라 쇠고와 영화가 있었다 / 慘舒隨地有枯榮
궁ㆍ통ㆍ달ㆍ절이 심상한 일인 듯 / 窮通達節尋常事
10년 동안 임천에 아직도 그 이름이 남아 있다 / 十載林泉尙領名
하였다.
이 만사가 비록 도가 있는 자의 기상을 형용할 줄은 몰랐다 하겠으나, 또한 사람에게 널리 알려져서 전해진다. 외아들 이추(李秋)는 아들이 없었고, 일찍 죽었다. 문인(門人)인 소재(蘇齋)가 지었다.
태상(太常)에서 시법(諡法)을 상고하였는데, “학문이 넓고 도덕이 있음을 문(文)이라 하고, 일찍 일어나며 경계하는 것을 경(敬)이라고 한다.” 하여,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주-D001] 분황(焚黃) : 죽은 사람에게 벼슬을 내릴 때에 관고(官誥 일종의 사령장)를 적은 부본(副本)인 누런 종이를 그 무덤 앞에서 태우는 것이다. [한국고전종합DB]
* 이자 (李耔 1480 ~ 1533)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 · 몽옹(夢翁) · 계옹(溪翁).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대사간 이예견(李禮堅)의 아들이다.
1501년(연산군 7) 진사가 되었고, 150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해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온 뒤 이조좌랑에 승진했지만, 연산군 난정 아래에서의 관직 생활에 환멸을 느껴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자청해 의성현령으로 나갔다.
1506년 중종반정 후에 발탁되어 홍문관수찬 · 교리 등을 지내다가 1510년(중종 5) 아버지의 상으로 관직을 떠났다. 1513년 복직하여 부교리 · 부응교 · 사간원사간을 역임하고, 이듬 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했다가 1517년부터 홍문관전한 · 직제학을 거쳐 부제학에 승진하였다.
그 후에 좌승지로 옮겼다가 다음 해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 무렵 조광조(趙光祖) · 김정(金淨) 등의 신진 사류들과 일파를 이루어 도학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으나, 그들의 급진적 개혁 정책을 완화하고자 노력하였다.
1518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다. 이 때 정사로 갔던 남곤(南袞)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된 것을 지성으로 간호해 회복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이자는 기묘사화 후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519년 귀국해 한성판윤 · 형조판서 · 우참찬 등에 임명되었다.
이자는 사림파의 한 사람이었으나 성품이 온유하고 교제가 넓어 남곤 · 김안로(金安老) 등의 훈구 세력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양파의 중간에서 반목과 대립을 해소하고 온건한 정책으로 유도하고자 했으나 급진 사림파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림파가 참화를 입게 되자 이자도 여기에 연좌되어 파직 · 숙청되었다. 그 뒤 음성 · 충주 등지에 은거하여 세상을 등지고 독서와 시문으로 소일하고, 이연경(李延慶) · 김세필(金世弼) · 이약빙(李若氷)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여생을 마쳤다.
효도와 우애가 돈독했고 학문과 수양에 정력을 기울였다. 많은 사평(史評)을 썼으나 일찍 죽어 정리되지 못하였다. 『주자가례』를 독신했으며 자손들에게 그 실천을 유언하였다. 저서로는 『음애일기』와 시문집인 『음애집』이 있다. [daum백과]
[팔경논주]
陰崖 李耔는 『음애일기』 한 권만으로도 한국사에 영원히 남는다. 고관대작 부귀공명 후손 번성 등 인간생물이 사전과 사후에 누릴 수 있는 복이 많지만 좋은 책 한 권을 남김도 그에 못잖은 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