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5월 18일 오후, 천치메이(陳其美·진기미)가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천치메이는 반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 운동의 핵심이었다. 실패로 끝났지만, 여러 차례 위안스카이 토벌군을 동원하다 보니 위안스카이에겐 눈엣가시였다. 측근을 상하이로 파견했다. “중국을 떠나라며 70만원을 건네라. 싫다고 하면 모가지를 들고 와라.” 천치메이는 한차례 웃더니 정중하게 거절했다.
위안스카이는 화가 치밀었다. 상하이에 주둔중인 옛 부하 장쫑창(張宗昌·장종창)에게 밀명을 내렸다. “책임지고 천치메이를 없애라.” 천치메이는 어딜 가건 경호가 삼엄했다. 암살기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위안스카이는 맘먹은 일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리하이치우(李海秋·이해추)라는 일류 자객을 고용했다. 상하이에 온 리하이치우는 “鴻豊煤鑛公司(홍풍매광공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천치메이에게 접근했다. “일본에서 광산자재를 수입하려 한다. 일본은행에서 100만원을 대출받고 싶다. 소개비로 30만원을 책정해 놨다.”
당시 천치메이가 이끌던 중화혁명당은 자금이 딸렸다. 돈 걱정에 밤 잠을 설칠 정도였다. 천치메이는 리하이치우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사업문제를 의논 하기 위해 만나고 싶다는 일행을 집으로 초청했다. 온갖 서류 내밀며 이 얘기 저 얘기 하던 자객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오밤중에 달려가 천치메이의 시신을 수습한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한동안 방황했다. 답답하기는 천커푸(陳果夫·진과부)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적 지주였던 삼촌이 사망하자 처갓집 골방에 틀어 박혔다. 온종일 한숨 내 뱉으며 기침만 해댔다. 보다 못한 장인이 일자리를 수소문했다. 장인은 상하이의 금융가에 아는 사람이 많았다. “은행이건 전장(錢庄·서구의 현대화 된 은행들이 자리 잡으면서 쇠락한, 중국의 전통적인 금융기관. 은행과 전당포의 중간 정도로 보면 된다.)이건 상관없다. 선택해라.”
천커푸는 은행이 뭔지를 잘 몰랐다. 고향에서 아버지 일 거들며 드나들던 전장 업무는 낯설지 않았다. 장제스와 의논했다. 장제스는 “네 성격에 은행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전장을 권했다. 천커푸는 매달 12원을 받았다. 생활비와 동생 천리푸(陳立夫·진립부)의 학비 부담에 등골이 휠 정도였지만 비관하지 않았다. 자신을 단련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폐결핵에 걸린줄 알면서도 약방만 보면 피해갔다.
어느 시대건 시간과 노력은 보람이 있는 법, 천커푸는 남보다 빨리 전장의 운영방식과 돈의 회전을 파악해 주인에게 인정을 받았다. 업무상 상인들을 접하며 시장과 금융계 돌아가는 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돈 만들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좋은 투자처를 발견하자 장제스를 찾아가 1000원을 요구했다. 일정한 수입이 없던 장제스는 여기저기 다니며 돈을 구해줬다. “날려도 좋으니 해봐라.” 몇일 후 천커푸는 1600원을 들고 나타났다.
1920년 2월 상하이 증권교역소가 문을 열었다. 돈도 떨어지고, 되는 일도 없던 혁명가들은 증권시장에 얼굴을 내밀었다. 장제스도 빠질 리 없었다. 장징장(張靜江·장정강), 다이지타오(戴季陶·대계도) 등과 함께 요즘의 증권회사 비슷한 걸 차렸다. 미래의 총통은 물론이고, 혁명 성인(聖人)이나 당대의 이론가도 증권에 관해서는 어린애였다. 천커푸를 부르는 것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천커푸는 눈만 뜨면 증권교역소에 가서 살다시피 했다. 주식시장을 파악하자 세 사람을 앉혀놓고 투자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아무리 설명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했다. 천커푸가 화를 내자 장제스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들어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이럴 땐 아는 사람에게 무조건 맡기는 게 상책이다. 투자할 사람 모아오는 일은 우리에게 맡겨라. 일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장제스의 말에 다들 동의했다. 공동 출자자 17명도 순식간에 모아왔다.
증권교역소는 천커푸의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천국이었다. 반년 만에 자본금 3만5000원을 50만원으로 늘려놨다. 셈이 핀 천커푸는 동생 천리푸를 텐진(天津)의 베이양(北洋)대학에 입학시키고, 쑨원(孫文·손문)의 뒷돈도 넉넉하게 댔다. 장제스도 천커푸 덕에 여유가 생겼다. 화류계에서 사귄 두 번째 부인을 고향에 보내고, 지금도 중국인들의 뇌리에 “장제스의 북벌부인(北伐婦人)”으로 박혀있는 천제루(陳㓗如·진결여)와 살림을 차렸다. 장제스는 상하이에 와있던 아들 장징궈(蔣經國·장경국)도 천커푸에게 부탁했다. 장제스가 장징궈의 열번째 생일날 보낸 편지를 소개한다. “매달 한번씩 커푸형에게 가라. 돈을 타서 책값 외에는 다른 곳에 쓰지 마라. 갑자기 돈이 필요할 때도 커푸형을 찾아가면 된다.”
하지만 교역소의 호황은 2년만에 막을 내렸다. 다시 빈털터리가 된 장제스는 쑨원이 있는 광저우(廣州)로 갔다. 상하이에 남은 천커푸는 장제스가 나 몰라라 팽개치고 간 일들을 깔끔하게 처리했다. 몇 년 뒤 자신들의 천하가 오리라곤 상상도 못할 때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