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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악산(737m)은 충남 금산군 금산읍에서 남서쪽으로 우뚝 솟아 보이는 산이다.
높은 산이 흔하지 않은 충남에서 최고봉인 서대산(903m)과 계룡산(845m)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진락산은 충남과 전북 등산인들에게 당일산행 코스로 인기가 높다.
그도 그럴 것이 정상과 주능선을 에워싼 아기자기한 빈대바위, 도구통바위 등 기암지대도 볼 만하지만, 천년고찰인 보석사를 비롯해서 영천암, 선공암, 원효암 등이 사방으로 자리하고 있어 등산의 묘미를 더해주기 때문이다. 주릉에 펼쳐지는 기암괴봉의 경관이 아름다우며 금산 쪽으로 깍아지른 높은 낭떠러지는 장엄하기까지 하다. 진악산을 감싸고 있는 숲도 무성하며 영천암과 원효암 골짜기의 개울도 매우 맑고 좋다. 특히 진악산 북편 관음산 일대의 암애와 암봉들, 원효암 일대의 기암괴봉과 폭포는 일품이다.
진악산에는 보석사라는 절이 있다.
보석사는 신라 헌강왕 때에 조구대사에 의해서 창건된 절로 예전엔 호남의 많은 절들을 통괄했던 31본산 중의 하나였으며, 보석사 입구의 1,000년이 넘었다는 높이 48m 둘레 10.4m 인 천연기념물 보석사 은행나무도 유명하다. 보석사 외에도 영천암과 원효암, 영천약수, 도구통바위, 봉화대, 관음암과 관음굴, 원효폭포, 물골의 바위굴은 명소로서 손색이 없다.
또한 진악산에는 봉화대 자리(지금도 석축터가 남아 있다.)가 있으며, 임진년 8월(1592년) 금산벌 싸움에서 순국한 기허당 영규대사가 보석사에서 수도를 했다 하며 그 인연으로 보석사 내의 의선각에 영규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보석사 들머리에 기허당 영규대사의 충혼을 기리는 위병승장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개삼터가 있는 비실(성곡리) 위 물골에 있는 굴은 한때 조국의 광복을 꾀했던 젊은 의혈청년들의 은신처이기도 했다 한다.
진악산 등산은 금산터미널에서 약 5km 거리인 게진리 족실 마을에 이른 다음,
선공암 - 빈대바위를 경유하여 정상에 오르는 코스만 잘 알려져 있다. 선공암 - 빈대바위 코스는 진악산에서 가장 가파른 북사면이기 때문에 건각들이 아니면 다소 힘든 코스다. 그러나 1977년부터 이 지역 등산인들이 해발 370m인 수리넘어재에서 북서릉을 타고 크게 힘들이지 않고 정상으로 향하는 코스를 이용하면서 지금은 계진리 코스를 능가하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산길은 물이 나오는 파이프 왼쪽 급경사 바위로 오르면서 시작된다. 바위지대를 올라선 다음, 오른쪽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돌밭지대를 지나면서 왼쪽으로 굽돌아 계곡을 왼쪽 아래로 끼고 이어진다. 이 산길을 따라 20분 가량 오르면 동쪽 이래로 음지리와 금산읍이 내려다보이는 북서릉 사거리 안부에 닿는다. 사거리 안부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북서릉을 타고 8~9분 오르면 정면으로 수석처럼 암골미를 드러내는 진락산 북사면이 펼쳐진다. 전망장소를 뒤로하고 5~6분 더 오르면 10여 평 공터를 이룬 무명봉을 밟는다. 여기서부터 북서쪽 멀리로 대둔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공터를 내려서서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경치가 그만인 암릉길을 타고 30분 거리에 이르면 게진리 선공암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에 닿는다. 삼거리를 뒤로하고 4~5분 더 오르면 '빈대굴 130m, 원효암 650m, 정상 60m' 라고 쓰인 안내판이 있는 삼거리다. 이 안내판에서 서쪽으로 갈라지는 암릉길 아래로는 약 50m 길이 밧줄이 설치되어 있다. 안내판 앞에서 주능선을 타고 7~8분 더 오르면 30여 평 넓이 헬기장인 진락산이다. 헬기장 오른쪽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왼쪽에는 삼각점(군산 28)과 함께 어른 키 높이의 정상비석(금산산악회 설치)이 있다.
조망은 막힘이 없다. 북으로는 금산면 추부면과 군북면 들판지대 너머로 육중한 서대산이 보이고, 그 오른쪽 아래로는 금산읍내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금산읍 뒤 멀리로는 영동군 천태산도 시야에 와닿는다. 남으로는 전북 운장산과 구봉산이 함께 시야에 와닿고, 서쪽 남이면 너머로는 대둔산 정상이 뚜렷하다.
정상비석이 있는 진락산 높이는 1대 50,000 지형도에 732.3m로 되어 있고, 이 자리에 진락산이 인쇄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지형도상에 남동쪽 주능선으로 1.3km 거리에 있는 737m봉이 있다. 그래서 금산산악회는 안내판에 정상비석이 있는 곳을 '진락산 주봉' 으로 쓰고, 737m봉에는 별도로 '최고봉' 이라 표기하고 있다. 이와같이 실제의 정상표기가 잘못된 이유 중 하나는 금산읍에서 737m봉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진락산의 특이한 산세 때문에 737m봉은 남쪽 석동리나 동쪽 성곡리 등 어디에서 보아도 정상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산은 남동쪽 737m봉을 경유하여 석동리 보석사로 내려서는 코스가 정석이다. 남동릉으로 발길을 옮겨 약 40분 거리에 이르면 737m봉을 밟는다. 737m봉에서 계속 남동릉을 타고 10분 거리에 이르면 높이 6m에 폭 2m 가량 되는 도구통바위가 반긴다. 적갈색 자연석인 이 바위의 이름 '도구통' 은 충청도 말로 절구를 일컫는다. 도구통바위를 뒤로하고 남쪽 급사면을 내려서면 100여 평 공터에 무덤이 있는 곳을 만난다. 무덤을 지나 숲터널 아래 계곡길로 10분 거리에 이르면 산중암자인 영천암이 나타난다. 영천암은 신라 정강왕 원년(886년) 조구대사가 창건한 고찰로, 건물 구조가 거의 옛모습 그대로인 고풍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영천암을 뒤로하고 계류를 따라 20분쯤 내려서면 영천암과 같은 해에 창건된 고찰 보석사가 반긴다. 보석사 맞은편 은행나무도 볼거리다. 수령 1100년으로 높이 49m, 밑둥 둘레 16.5m나 되는 천연기념수다. 보석사를 내려서서 아름드리 전나무 숲길을 빠져나오면 석동초교 앞 주차장이다.
수리넘어재~북서릉을 경유하여 732.3m봉에 오른 다음, 737m봉 - 도구통바위 - 영천암 - 보석사를 경유하여 석동리 주차장에 이르는 산행거리는 약 7km로, 3시간30분~4시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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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백의총 임진왜란(1592)때 중봉 조헌(趙憲)선생과 승장 영규대사(靈圭大師)가 이끄는 칠백의사가 1592년 8.18 금산을 점거하고 있던 왜적을 무찌르다 전원이 순절한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있는 성스러운 곳으로서 우리민족의 빛나는 호국사상의 요람지이다. 조헌선생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의병은 1592년 8월 1일 청주성을 수복하고 동 18일 금산연곤평에서 고바야가와다가가게가 지휘하는 1만 5천여명의 막강한 왜적과 싸우게 되었으며 이때 의병군은 충청, 전라도의 관군과 같이 금산의 왜적을 협공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관군의 도움을 받지 못한채 외로운 군사로서, 오직 충절과 신의로 뭉쳐 필사무퇴의 정신으로 적과 혈전끝에 무수한 왜적을 무찔렀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원이 옥쇄하였다. 이 싸움이 끝난 나흘후 조헌선생의 제자 박정량, 전승업 등이 칠백시신을 수습하여 한 무덤에 모시고 칠백의사총(塚)이라 이름하였다. 이후 선조의 명으로 1603년 중봉조선선생일군순의비가 건립되었고 인조 12년(1634년)에 순의단(殉義壇)을 설치하여 제향을 모시기 시작하였으며 1647년 호서, 호남의 유림들이 힘을 모아 사당을 건립하여 칠백의사의 위패를 모시게 되었으며, 1663년 현종께서 종용사(從容祠)라 친히 사액(賜額)하고 제토(祭土)를 내리었으며 이후 이지역 유림들은 정성을 다하여 대대로 제향을 모시어 왔다. 그러나 일제치하때 항일유적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인 경찰서장에 의해서 의총이 헐리고, 비석마저 파괴했고, 이곳에 소속된 토지와 재산을 강제처분하여 폐허가 되고 말았다. 해방후 이곳 주민들은 1952년 기념사업회를 조직, 성금을 모아 의총을 보수하고 종용사와 일군 순의비를 재건하였고 1963. 1월 정부에서 사적 제105호로 지정 보호하였으며 1963년 10월 새로이 단장하고 종용사를 개축하였음.
보석사 금산읍에서 약 6km 떨어진 진악산(732m)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보석사는 신라 헌강왕12년(866년) 때 조구대사가 창건한 역사깊은 절이다. 교종의 대본산이며 한국불교 31본산의 하나로 지난날 전라북도불교의 이사중추기관이었고 현재는 충남 교구 산하로 되었다. 보석사라는 이름은 절앞산 중허리의 암석에서 금을 캐내어 불상을 주조 하였다는데서 이름지어 졌으며 주위의 울창한 숲과 암석은 맑은 시냇물과 어울려 대자연의 조화를 이루고 속세를 떠난 듯하다. 절 안에는 대웅전, 기허당, 의선각, 산신각 등의 건물과 부속암자가 있으며, 인근에는 절경의 12폭포가 있다. 특히 높이 40m, 둘레10.4m나 되는 1,100년 수령을 자랑하는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65호)가 있어 좋은 휴식처를 제공해주며, 200~300미터 정도의 전나무길이나 있어 호젓한 산책코스를 즐길 수 있다.
의선각 보석사 대웅전 앞에 있는 건물로 의병승장 영규대사가 머물러 수도하던 곳이다. 영규대사는 공주 계룡산의 갑사와 보석사를 내왕하며 도를 닦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집하여 중봉의 의병과 합세하여 금산이 왜적을 격퇴하려다가 700의사와 함께 전사한 분으로 그 용맹과 담력은 출중하여 싸움마다 크게 공을 세웠던 것이다. 의선각은 영규대사가 보석사에 계실때 우거하던 곳으로 창녕위 김병주의 글씨로 된 의선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2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영천암 창건연대는 보석사와 같고 절뒤의 조그만 동굴에서 샘물이 흘러 나오는데 사계절 끊이지 않고 나오는 영험한 동굴로 알려져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