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무간업은 어떠한 행동을 함으로써 해로운 무거운 업을 짓고, 그 업의 과보로 지옥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적 허무주의, 결정사견, niyata-micchādiṭṭhi는 어떻게 견해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지옥에 떨어지는 원인이 될까?
1.
niyata-micchādiṭṭhi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 '확정된', '결정된' 사견이다.
내용적으로는 '도덕적 허무주의'에 해당한다.
아비담마 길라잡이에서 배웠듯이 도덕적 허무주의는 주로 원인을 부정하는 견해(ahetuka-diṭṭhi), 과보를 부정하는 견해(akiriya-diṭṭhi), 허무주의적 견해(natthika-diṭṭhi)의 셋을 지칭한다.
원인을 부정하면 과보를 부정하고, 과보를 부정하면 원인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즉, 세 가지는 표현은 다르지만 똑같이 원인과 결과, 업과 과보를 부정하는 견해이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를 부정하기 때문에 선과 불선의 구분도 부정한다.
어떤 도덕적인 기준도 부정해 버리기 때문에 허무주의적인 견해를 지닌다.
허무주의적인 견해로 스스로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이런 견해를 전하고 가르친다.
따라서 몸과, 말과, 마노로 짓는 업에 단속이 없고 유익함을 짓기 어렵다.
모든 사견이 도덕적 허무주의, 결정사견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신견, 상견, 단견을 지닌 자도 '윤회에 대한 믿음'이나 '인간다움' 등의 이유로 선업을 행한다면 아름다운 과보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업과 업의 과보를 어떤 식으로든지 부정하는 단견이나 상견 등 사견이 '견고하고 강하면' 이 업만으로도 지옥에 태어날 수 있다.
이렇게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견해'를 지니고 '죽는 순간까지 그 견해를 강하게 붙잡을 때' 이 허무주의적 결정사견은 존재를 지옥으로 안내한다.
죽음의 마음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러한 견해를 지니고 있는 경우 해로운 무거운 업의 과보를 받는 것이다.
2.
이와 관련하여 선배 도반을 통해 알게 된 아래 법문들을 공유한다.
해로운 무거운 업에는 6가지가 있다.
1) 어머니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2) 아버지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3) 아라한의 생명을 빼앗은 경우
4) 나쁜 의도를 가지고 여래의 피를 흘리게 한 경우
5) 승가를 분열시키는 경우
6) 견고한 사견을 지니고 있는 경우 : 즉 죽음의 순간에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사견을 지니고 있는 경우
만약 살아가면서 위와 같은 6가지 업 가운데 하나를 지었다면, 그것은 언제나 내생에 과보를 받는 업이 된다. 확실하게 지옥에 태어난다. 그래서 이러한 업들을 조정될 수 없는 업(anantariya-kamma)이라 한다. 앞에 있는 5가지 무거운 업은 해로운 의도를 가진 행위를 하자마자 과보를 받는다. 그러나 6번째 견고한 사견의 경우 죽음의 시간(marana-kale)까지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있을 때만이 무거운 업의 과보를 받는다. 즉 죽음의 마음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러한 견해를 지니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그렇지만 모든 잘못된 견해들은 지옥으로 안내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자아가 영원하다는 견해를 가진다. 그 사람은 자기의 행위에 따라 선처나 악처에 태어난다. 자아가 영원하다는 견해는 상견(常見)이다.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하지만 해로운 업의 목적지는 불행한 곳이고, 유익한 업의 목적지는 행복한 곳이라는 견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kiriya-vadi)이다. 이것은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견해를 지닌 자가 유익한 업을 지으면 인간, 천신 혹은 범천의 세계에 태어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업과 업의 과보를 어떤 식으로든지 부정하는 단멸론이나 상견이 견고하고 강하면 이 업만으로도 지옥에 태어날 수 있다.
- 『업과 윤회의 법칙』 中, 파욱 사야도
“청정범행을 닦지 않으면서 청정범행을 닦는다고 자처하는 자, 깨끗한 청정범행을 닦는 자에 대해 근거 없이 청정범행을 닦는 자가 아니라고 힐난하는 자, 감각욕망에 빠져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주장과 견해를 가지고 실제로 감각욕망에 빠져있는 자, 비구들이여, 실로 이것이 이를 버리지 못해 악처에 떨어지고 지옥에 떨어지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다.”
이러한 세 종류의 사람은 각각의 저열한 법을 버리지 않는 한 확실히 악도에 떨어지고 지옥에 떨어진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아비담마 강설 제1권』 中, 우 소다나 사야도
邪見(사견)
... 나아가 강력한 邪見(사견)도 중대한 죄가 된다. 마음을 닫아걸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의견 외에는 듣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나은 의견이 있는 경우에도 자신의 원래 의견을 바꿀 수 없게 된다. 요컨대 자신의 지금 의견이 올바르다고 단정적으로 몰아붙이는 행위는 자신의 성장에 못을 박는 것이 된다. 지혜의 문을 닫게 된다.
누구나 많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생각하고, 이것이 올바른 의견이라고 자신의 의견을 만든다. 그러나 알고 있는 범위를 넓히게 되면 새로운 자료가 들어올 가능성이 있다. 그 경우에는 자신의 원래 의견을 바꿀 수밖에 없다. 그 어떤 의견에 애써 이르러도 새로운 자료나 증거가 들어오자마자 의견을 바꾸게 되면 사견이 있는 자(邪見者)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올바르다.’라고 단정하면 邪見에 떨어진다.
진리란 무엇인가를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도달한 의견은 자료가 들어오는 즉시 바꾼다는 마음으로 ‘보류의견(保留意見)’으로서 미루어두게 되면 안전하다. 지혜의 문이 닫혀 있지 않다.
의견은 무수히 있다. 그러나 正見(정견)은 아니다. 正見은 하나밖에 없지만 그것은 잘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자신의 의견을 보류의견으로 한다. 그러면 邪見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사견이란 ‘이것이야말로 올바르다. 다른 의견은 잘못되어 있다.’라고 단언하고 그 의견에 매달리는 것(고집)이다.
어떤 의견에만 고집한 것으로 중죄가 되어 사후에 불행하게 태어나게 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대로이다. ‘지구는 평평하다.’라고 단정적으로 결정하고 고집했다고 해서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이다. 그와 같은 단언으로 고집하면 그 사람은 지구의 참된 모습을 알 수 없게 될 뿐이다. 그 외에 손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 죽어가는 사람을 불행으로 빠뜨리는 斷言(단언 : 단정하는 말 = 邪見)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도덕과 관계가 있는 邪見이다. 唯物論(유물론)은 위험한 邪見이다. ‘일체는 물질뿐이다. 물질 이외에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단정하면 도덕은 성립하지 않는다. ‘무엇을 하더라도 죽을 때까지다.’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유물론자에게도 감정이 있다. 욕망(欲), 성냄(怒), 질투 등이 있다. 두려워하기도 하고, 번뇌에 싸이기도 하며, 낙담도 한다. 죽는 순간에 감정이 폭발한다. 그러나 도덕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도움의 손길은 불가능하다.
중죄가 되는 邪見이란 도덕을 부정하고 행위에 결과가 없다고 결정하는 행위이다. 그 사람들은 수행에도 결과가 있다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마음을 청정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도 믿지 않는다. 이것이 중죄가 되는 邪見이다.
사람에게 영원한 魂(혼)이 있다고 믿는 것도 邪見이다. 그러나 그 魂이 오염되기 때문에 정화해야 한다고 신앙하는 경우는 그 나름의 도덕이 들어 있다. 인과법칙은 모르지만 행위에 결과가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邪見은 중죄가 되지 않는다. ‘魂은 영원불멸이다. 잘라도 잘리지 않는다. 죽여도 죽지 않는다. 사람을 찔러도 육체에 구멍이 뚫릴 뿐으로 魂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 등등을 믿는다면 도덕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중죄가 되는 邪見이다.
그러므로 개선의 여지가 있는 邪見과 개선이 되지 않는 중죄가 되는 邪見, 두 가지로 나누어서 이해해 두자. 불전에서는 10종류의 중죄가 되는 邪見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 10종 모두가 인과법칙과 도덕을 부정하는 邪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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