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의왕을 지나서 오다보면 수원의 경계인 고개를 넘게 된다. 지금은 넓은 도로에 자동차가 빠르게 지나지만 예전에는 이곳이 넓은 도로가 아니었고 지금보다도 더 높은곳에 굽이 굽이 이어지는 길이 있었을 것이다. 고개의 제일 높은 마루턱 이곳이 지지대이다.
정조대왕의 효심이 느껴지는 지지대(遲遲臺) 고개는 수원과 의왕 경계를 이룬 곳이다. 예전에는 이 고개를 미륵댕이 또는 미륵당 고개로 불렸으나 지금은 지지대 고개로 불린다. 느리고 더딜 '지(遲)자를 쓴 지지대는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지났던 언덕에 위치한다.
화산의 현륭원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때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이 고개에서 행차를 늦추고 이 고개에서 한참을 머물렀다고 한다. 이 고개를 넘어서면 아버지 장조가 묻힌 현륭원이 있는 화산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발걸음이 더디어 행차가 지체되었기 때문에 한자 더딜지(遲) 두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라고 부르게 되었다.
노론이 지배하는 시대의 희생양이 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당시 나이가 어렸던 정조대왕은 아버지(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 보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께서 묻힌 수원 화산에 자주 행차하셨던 것이다.
장조(莊祖, 1735년 - 1762년)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조선의 추존왕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나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가 일찍 죽어 세자가 되었다. 이복형인 맏아들 진종(효장세자)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 출생한 탓으로 영조 12년(1736년)에 두 살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 되었으며 10세 때 홍봉한의 딸 혜빈 홍씨와 가례를 올렸다. 그는 매우 영특하였으며 글씨를 좋아하고 시를 잘 썼다고 전한다. 3세 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웠고, '소학'의 예를 실천했으며 7세 때 동몽선습을 독파했다. 또한 서예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서 대신들에게 나눠줬으며, 또한 일찍이 높은 정치적 안목을 가지고 있어서 1743년(영조19) 관례(冠禮)를 행하고 나서 부왕이 당론(黨論)을 없앨 방법을 묻자 "여러 당인을 한결로 보아 함께 기용하면 된다" 고 대답하여 칭찬을 받았으며, 궁관과 더불어 신임사화를 논하여 의리의 근원을 분명히 가려내기도 했다.
세자 시절에는 소론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10세 때는 경종 때 발생한 신임옥사 사건을 노론들이 잘못 처결하였다고 비판하여 일찍부터 노론의 미움을 받을 빌미를 제공하였다. 1749년(영조25) 15세가 되던 해 건강상의 이유로 영조의 명을 받고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여러 지방의 환곡에 대하여 덜어내고 더 받는 '부다익과'(芬多益寡)의 정사를 베풀고, 영세민을 괴롭히는 대동·군포의 대전·방납을 금지시켰다. 또한 영조 즉위의 의리와 명분에 관련된 신임사화와 같은 중요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 부왕과는 다른 의견을 내놓아 대립이 심화되었다.
영조는 조선조 후기 학문과 정치 사회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업적을 남긴다. 그러나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일념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
장조는 1749년 15세 때 부왕을 대신하여 서정을 대리하였는데, 이때 그를 싫어하던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그를 무고하였다. 성격이 과격하고 급하던 영조는 수시로 그를 불러 꾸짖었고, 이로 인해 그는 정신 질환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거나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관서 지역을 유람하기도 했다.(한중록에도 이때 세자는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평양을 내왕하는 등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고 나온다).
장인 홍봉한은 그의 병증에 대해 무엇이라고 꼭 꼬집어서 말할 수 없고,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한다고 하였다. .
그의 돌발적인 행동이 계속되자 1762년 후궁 문숙의의 질투심 어린 참소와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의 일파인 홍계희, 윤급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윤급의 종)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에 영조는 장헌세자의 호탕한 성격을 못마땅하게 여겨오던차에 분개하여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으로 불러 자결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그가 부왕의 명을 거부하자 세자를 서민으로 폐하고 쌀 뒤주속에 가두어 창경궁 선인문앞에 내놓고 큰 돌을 올려놓는 공개처형의 형벌을 내렸다.
왕세손이었던 정조 나이 11세 때, 할아버지 영조는 신하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어서 뒤주속에 놓지 않고 무얼 주저하느냐?"
이때 어린 왕세손(정조)은 울며 할아버지께 아버지의 용서를 빌었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뒤주속에 갇혀있던 세자는8일째 되던 날 목마름과 더위, 허기에 지쳐 질식사하는 끔찍한 궁중 참극이 벌어진다. 이때 그의 나이 28세의 젊은 나이였다. (지금으로부터 246년전의 일이다)
'1762년 윤 5월 13일 영조는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이 준비한 뒤주에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다.'
'여드레 후인 윤 5월 21일 세자가 사망한다.’( 세자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 하고 뒤주에 갇혀있던 8일간엔 복날이 끼여 있었다.)
국가 기강확립차원에서 형벌을 내렸지만 부모로서 애통함을 금할수 없었던 영조는 곧 뉘우쳐 사도(思: 생각할 사, 悼: 서러워할 도)의 시호를 내려 혼을 위로하고 서울 배봉산 아래에서 장례를 지냈다.
이후 영조가 83세로 승하한 후 뒤를 이은 22대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을 직접 보았기에 더욱 극진한 효심을 보인다.
정조대왕께서는 1776년 3월 즉위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면서 12년 넘게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한마디를 꺼냈다.
"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라고 선포한 뒤 사도세자 추숭작업에 나섰다.
"백성들에게는 효를 강조하는 왕으로서 내 아버님께는 효도 한 번 못하다니..."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늘 가슴 아파했다.
어릴 때 목격한 당시의 모습이 뇌리에 떠오를 때마다 정조는 부친의 영혼이 구천을 맴돌 것만 같았다.
정조가 즉위하자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열고 다시 염을 한다음 궁중으로 모시고 국장처럼 성대하게 장을 치룬 후 지금의 능자리인 경기도 화성군 화산(花山)으로 옮겼다.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영구를 파내니 광중(壙中)에 물이 한자 남짓이나 고여 있었다. 부친이 물속에서 신음하는 것을 본 정조가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사도세자의 영구는 새로운 안식처인 화성으로 향했는데 임금을 상징하는 황룡기를 비롯하여 사방을 표시하는 청룡,백호,주작,현무, 등의 수많은 깃발을 펄럭이며 영원한 안식처인 화산(現 융건릉)에 도착했다.
정조는 보여(步與)를 타고 산 능성이를 한 바퀴 빙 돈 다음 하교하여 "이산의 이름이 화산(花山)이니 꽃나무를 많이 심는 것이 좋겠다."
고 하여 이후 화산은 지극한 정성으로 나무가 울창하고 사시사철 꽃이 수를 놓은 꽃산이 되었다.
정조는 이곳을 현릉원이라 이름짓고(장조로 추존된 뒤에 융륭으로 변경) 틈만나면 이곳을 찾았다. 재위 24년간 능관리를 위해 부근 화산일대 13개 마을에 영을 내려 집집마다 재 한 삼태기씩을 모아 뿌리게 하고 솔밭에 송충이 극성이면 손수 나가 송충이를 잡고 송충이구제를 독려하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자신도 부친 곁에 묻힌다.
그렇게 정성을 쏟은 탓인지 융·건릉은 조선조 왕릉 중 어느 능보다 규모와 조성미, 특히 소나무가 울창하며 주변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지지대비(遲遲臺碑)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 24호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산 47-2
지지대비는 조선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의 능인 화성 현륭원의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능이 있는 화산을 볼 수 없었기에 으레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고 능이 있는 방향을 뒤돌아 보며 떠나기를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곳에 이르면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하였다고 하여 한자의 느릴지(遲) 두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라고 부르게 되었다.
비의 비문은 홍문관 제학 서영보가 짓고 윤사국이 글씨를 썼으며, 화성 유수 홍명호가 전액을 썼다.
비문을 통하여 정조(正祖)의 부왕에 대한 사모의 정을 엿볼 수 있다.
비문의 내용 중 "우리 전하께서 능원을 살피시고 해마다 이 대를 지나며 슬퍼하시고 느낌이 있어 마치 선왕을 뵙는 듯하시어 효심을 나타내시어 여기에 새기게 하시니, 선왕께서 조상의 근본에 보답하고 너그러운 교훈을 내리시는 정성과 우리 전하께서 선대의 뜻과 일을 이어 받으시는 아름다움을 여기에 그 만의 하나로 상고했도다."라는 사실에서 정조의 애틋한 심정이 드러난다.
비의 비문은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서영보(徐榮輔)가 짓고, 전판돈녕부사겸판의금부사(前判敦寧府使兼判義禁府使) 윤사국(尹師國)이 글씨를 쓰고, 수원부유수겸총리사(水原府留守兼總理使) 홍명호(洪明浩)가 비의 상단 전자(篆字)를 썼다.
숭정기원후일백팔십년정묘십이월일입(崇禎紀元後一百八十年丁卯十二月日立)이라는 사실로 1807년(순조 7) 12월에 건립됨을 알 수 있다.
1762년 김한구와 그의 일파인 홍계희, 윤급 , 세자의 장인 영의정 홍봉한이 세자를 폐위시키고자 윤급의 종 나경언을 시켜 세자의 비행 10여 가지를 들어 상소케 하게 하였다.
나경언의 상변 (羅景彦 上變)1762년(영조 38) 나경언이 장헌세자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변한 사건.
나경언은 액정국별감(掖庭局別監) 나상언의 형으로,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였다. 그는 장헌세자가 그의 빈 혜경궁 홍씨를 죽이려 했고, 비구니를 궁중에 끌어들여 풍기를 어지럽혔으며, 부왕의 허락도 없이 평양으로 몰래 놀러다녔고, 북성에 마음대로 나가 돌아다닌 일 등 10여 가지 비행을 들어 형조에 고변하였다. 이 고변으로 영조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세자의 비행을 알게 되자, 세자에게는 물론 세자의 비행을 알면서도 왕에게 고하지 않은 신하들에 대해서까지 격노하고 문책하였다.
이에 대해 세자는 석고대죄하고 나경언과의 면질을 요구했으나 부왕의 꾸지람만 받았을 뿐이다. 나중에 세자가 포도청을 통해 나경언의 가족을 심문해 본 결과, 나경언은 우의정 윤동도의 아들 광유의 사주를 받아서 고변한 것임이 드러났다. 당시 영조의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파, 벽파의 싸움이 있었고, 그 중에 벽파는 세자를 배척하는 파였다. 그러므로 나경언의 고변의 배후에는 벽파의 작용이 있었던 것이다. 영조는 자신이 모르는 세자의 비행을 알려준 나경언을 충직한 사람으로 보아 그를 살려주려 했으나, 남태제, 홍낙순 등이 나경언을 세자를 모함한 대역죄인으로 극론했기 때문에 결국 처형하고 말았다. 그러나 세자의 비행 문제는 그것으로 종결되지 않았고 다시 확대되어 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게 되는 사건으로 진전되었다.